올 설날이 지나갔다. 민족의 대이동이 막을 내리고 있다. 극심했던 교통체증도 길어진 연휴로 분산되어 예년보다 덜하다고 한다. 그래도 누가 오라고 강요하지도 않은 고향을 고생을 무릅쓰고 찾아온다.
여느 통행 시간보다 두 세배, 열 몇 시간씩 품을 들여가며 한사코 고향으로, 어버이의 품으로 찾아든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귀성객들의 귀향행렬과 그 과정에서 겪는 불편을 귀동냥해보면 수행승들의 고행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명절날 귀성 수행자들이 고향을 찾아와서 행하는 중요한 절차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차례와 성묘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다하기 위하여 그 먼 길 고통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가 하나로 귀일하는 때가 바로 설날과 추석 명절이다. 산 사람들에게 가장 즐거운 잔칫날이 곧 죽은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명절이 되는 셈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인간다운 징표는 자유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이 자유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다다익선을 가치로 여기는 재화의 획득이나, 높은 성취를 지선으로 치부하는 명예와 지위들이 궁극적으로는 현세적인 자유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자유를 위하여 그처럼 얻으려 애를 쓰는 현세적인 개념들과 가치들이 실현되면 될 수록 그것들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여 꺼져가는 생명의 촛불을 연명하는 환자들에게 산소통의 산소가 자유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죽음을 몸에 익히는 것은 자유를 실습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지 않는 방식을 배운 셈이다’라고 지적한 사람은 몽테뉴다.
그럼으로 참자유의 실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 자유로운 삶은 현세적인 성취나 성공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부자유스러운 욕망을 자유로 착각하는 망상을 떨쳐내는 데 있다.
“마음이라는 코끼리를/ 온갖 방면으로 주의해서 끌고 간다면/ 모든 공포는 사라지고/ 완전한 행복이 찾아오게 된다/…온갖 공포와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M.매틱스「깨달음의 길에 들어가다」)
차례와 성묘를 위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고행마저도 서슴지 않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자유를 실습하는 사람들이다. 산 사람들이 행하는 선인들을 위한 도리와 예절은 곧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익히는 학습이요, 그것은 곧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실습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가 곧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이 아닌가? 어찌 고행을 마다 할 것인가!
/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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