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독서가요 장서가였던 마오저뚱은‘책을 많이 읽을수록 어리석게 된다.’고 독서의 의의를 폄하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표현한 강조어법으로 해석된다. 이는 인식에 대한 실천성을 중시한, 마오의 핵심사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실천성을 상실한 교조주의, 텍스트주의, 책벌레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말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공자도‘말로 할 수는 있어도 쓰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하여 실천이 따르지 않는 언어적 표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는‘말’은 휘발성이 강한 음성언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성이 강하여 증거가 남는 문자언어에 비하여 음성언어가 지니는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람에 스쳐 사라지는 말은 할 수 있으나, 바위에 새겨 남는 글은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문·사·철(文史哲)을 비롯한 인간의 정신적 소산들이 문자로 기록된다. 그런 언어의 부림이 구체성을 지니지 못할 때 그 언어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실천궁행한 삶의 족적을 기록한 역사와 구체적 형상화를 생명으로 하는 문학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에 값하는 구체성을 요구한다. 심지어 철학마저도 형이상학적인 사유가 인간과 세계에 구체성으로 적용되었을 때 비로소 관념적 언어는 제 무게를 지닌다.
근래 우리 사회는 언로에 있어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로 보인다. 일례로 민주제의 합의로 세운 국가 원수가 한 말씀(‘말씀’은 겸양어도 공대어도‘말씀’이다)이라도 할라치면 교수건 정치인이건 언론인이건 필설을 가진 자는 다 한마디씩 하려도 든다. 그것도 자기를 성찰한 겸손이 전제되거나, 전문성을 무기로 한 논거나,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제목부터 선동적이고, 내용에서는 안하무인격이며, 다분히 감정이 개입된 듯한 필봉을 두려움 없이 휘두른다. 독자-국민을 청맹과니로 알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건전한 비판이나 대안을 갖춘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국민의 삶에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이 미치는 구체적 정치행위인 대통령의 정책에 대하여 교조주의적이거나 택스트주의적인 책벌레의 실천성 없는 언사로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는 뜻이다. 교수의 이름으로, 혹은 작가의 이름으로, 또는 언론인의 이름으로…. 그것은 여론을 빙자한 자기도취이거나 혹세무민일 뿐이다.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詩人)이라고 한다. 시인이 쓴 문자로서의 시가, 시인이 지닌 사람됨의 품격과 일치하여 실천적 구체성을 지닐 때 시(詩)도 인(人)도 비로소 제 값을 지니게 된다. 시인되기를 열망할지라도, 참다운 시인되기는 두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미학적 고담준론의 시를 쓴 천박한 속물 시인이나, 훌륭한 인격자라도 미학적으로 설익은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모든 필자들이 시인된 마음가짐으로 글을 쓴다면, 우리 사회의 언로가 조금은 더 공동체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을 향한 필설만이 아니다. 글과 사람됨이 일치된 실천성을 지닌 글은 독자를 정신적-현실적으로 고양시킨다.
/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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