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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생명과학 시대의 추석 - 이세재

이세재(우석고 교사)

마을 앞 들녘이 황록색으로 그득하고 지붕의 빨간 고추에 명랑한 햇살이 쏟아지는 풍경 속에 우리의 추석은 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는 반드시 어머니가 있다. 추석에 대한 뉴스 배경 그림으로 마을 어귀에서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비단 명절이면 가족이 모이고 가족 사랑의 중심에 어머니가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추석과 모성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농경사회는 풍요와 다산이 지상의 목표였다. 당연히 풍요와 다산은 여신을 탄생시켰다. 세계적으로 고대 농경사회의 신화나 유적의 연구에는 ‘위대한 어머니’ 또는 ‘위대한 여신’에 관한 자료가 많다. 추석과 직접 관련하여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기록에 신라 유리왕이 여인들로 하여금 베를 짜게 했던 사실도 풍요에 대한 기원을 여성에 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곡식이건 인간이건 그 풍요는 자손의 번창함에 있으므로 자손 생산의 모태인 여성을 신성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햇곡식과 햇과일로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일이 피상적으로는 조상에게 하는 것 같지만 근원적으로는 모성의 생산성에 대한 의식인 것이어서 추석의 풍요는 현실로서의 풍요로움보다는 미래에 대한 정신적 믿음에서 오는 풍요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성적 풍요로움이 오늘날 추석에서 흐려지고 있다. 여성성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함께 추석의 본질이 퇴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에게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라는 칭호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들을 자손 번식의 도구로만 취급하지 말라고 할 것이며, 곡식도 인구도 관점에 따라서는 과잉 상태여서 남성도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풍요와 다산에는 흥미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억압되고 왜곡되었던 여성의 위치가 제자리를 찾는 일과 맞물려서 여성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특히 생명과학이 발달하면서 생명의 신비와 모성의 개념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지고 있다. 모성이 흔들리는 세태를 두고 종말론까지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변화가 여성성에 근원을 둔 추석의 풍속도를 바꾸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대지에 뿌리를 둔 생명체에 불과하다. 인간의 궁극적인 풍요는 과학적 문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영원한 풍요의 여신이며, 고향의 추석은 생명과 사랑을 본능적으로 전수해온 원형적 상징이다.

 

추석이 연휴가 되면서 고향이 아니라 심지어 외국 휴양지로까지 떠나는 인파가 늘고 있다. 물질의 풍요는 왜 정신적 빈곤을 잉태하는 것일까. 고향을 등지고, 풍요의 신화를 등지고, 언제까지나 부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고향 마을 어귀에서 눈물어린 어머니가 흐려진다.

 

/이세재(우석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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