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계·남방계 문화 결합한 문화대간…한류의 근원
아름답고도 신묘(神妙)한 지리산을 묘사할 수 있는 단 한 줄의 문장은 없다. 수많은 문장가들이 지리산 앞에서는 자신의 필력을 부끄러워했다. 생각할수록 지리산은 사람들을 사무치게 하는 곳이며 역사 앞에서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문화·역사적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시대에 세월의 덮개를 벗겨내고 지리산의 혈류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인의 '문화지도'가 나타난다. 그 안에 수천 년 동안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가 있다.
▲ 지리산, 비빔밥·판소리 등 문화 DNA 보고
중국의 시성 두자미(杜子美)의 작품 중에 지리산을 소재로 한 시구가 있다. "방장은 삼한 그 먼 바깥에 있고, 곤륜은 세상의 서쪽 끝에 있구나. 방장이 있어 천지가 넓은 것을 알겠고, 곤륜의 빼어남에 세월도 무색하네."
여기서 말하는 방장산(方丈山)은 봉래(蓬萊)·영주(瀛州)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꿈에 그리는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다. 금강산이 바로 그 봉래산이며, 한라산이 영주산이고, 지리산이 방장산일 거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내력을 지닌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으로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 저 멀리에 있네"라 하였는데 두류산이 곧 삼신산 중에 하나일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2200 년 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권력보다도 더 소중한 귀물,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서복에게 명했다. 서복은 익히 방장산에 만물을 다스리는 성모신(聖母神)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백두산이 등허리를 펴고 지리산까지 내달려 생겨난 백두대간. 한라산(영주산)에서 불로장생약을 구하지 못해 낙담이 컸던 그가 발을 디딘 곳은 지리산. 서복은 지리산 일대에 큰 부족이 무리를 지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다스리는 이는 대모(大母)였다. 대모는 지금의 무당과 같은 존재였으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성모(聖母·여신)의 대리자 역할을 했다. 대모는 족장의 아내이자 제사장. 그들은 성모께 치성을 드릴 때 필요한 그릇을 만들었다. 신의 기운으로 빚어진 그릇에 철마다 달리 생산되는 산나물과 약초는 그들을 생명력 넘치게 했다. 커다란 항아리에다 산나물과 약초를 넣고 부패한 시점이 같은 것끼리 분류한 다음 그것들로 찬을 만들고 밥을 비벼먹었다. 비빔밥의 원류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아무 야채나 넣고 마구 비벼먹는 요즘 비빔밥과는 사뭇 다르다. 생명의 정점과 저점이 같은 생명체는 발산되는 기(氣) 또한 같아 폭발적인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주었으니 그 에너지가 수천 년 동안 지리산을 지켜온 것이리라. 서복 일행은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사지낼 때 부르는 그들의 소리는 날아가는 새를 멈추게 했고 나비의 날개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나무들은 부르르 전율했으며 호랑이와 늑대는 포효했다. 소리꾼(광대)들은 봇짐을 메고 성모에 대한 노래를 조선 팔도를 넘어 유라시아까지 퍼뜨렸다. 그것이 1700년도에 만들어진 판소리의 뿌리이고 보면, 한민족 문화공동체가 지리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추측이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지리산에서 몇 해를 보낸 서복은 신적인 존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희로애락의 주체가 인간이 아닐진대 불로장생을 꿈꾸는 따위가 가당치도 않다는 걸 알았을까, 서복은 지리산에서 이상향을 목격하고 새로운 제왕이 될 꿈을 안고 한반도를 조용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 지리산은 '문화대간'으로 불려야
지리산은 단순히 지리적 개념의 '백두대간' 보다는 문화인류학의 개념인 '문화대간'으로 불려야 함이 옳다. 왜냐하면 북방계 문화와 남방계 문화가 지리산 잠재문화와 결합되어 한반도의 문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대는 소리를 실어 나르고 옹기쟁이는 도자기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퍼뜨린 주인공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바로 한류의 원년 멤버다. 기록문화에 취약한 우리에게 그 증거를 보여 달라면 증거인멸의 책임은 있지만 사실을 훼손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따라서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의 문화가 중국에서 유입되었고, 그 끝자락에 지리산이 있다는 식민사관은 명칭의 진위여부와는 별도로 새로운 해석으로 거듭나야한다. 목기(木器)와 관련해서 내려오는 전설도 의미심장하다. 고려 우왕 36년, 왜구 퇴치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자생한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성모신께 제를 올렸다. 그 정성이 얼마나 갸륵했던지 성모신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초가집 서까래 세 개를 주면서 "5개월 쯤 후 서까래로 인해서 당신의 운명이 바꿔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으로 왜구를 섬멸하고 6개월 후 조선을 개국했으니 서까래 3개는 바로 王을 상징하고 그때 사용됐던 목기는 왕을 만들어 준 제기(祭器)였다는 것. 그 목기는 조선팔도 양반들의 애장품이 되었고 관혼상제를 중요하게 여겼던 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생활필수품이 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오래된 미래'란 말이 있던가, 지리산에는 과거와 현재가 병존하고 있다. 미래로 향한 풍향계도 지리산으로 향해 있다. 지리산자락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는 귀농인 심정현(52)씨는 "지리산에 오기 전, 사업에 성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명성도 얻었습니다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리산에서 생활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지리산에 '내가', '사람'이 보입니다."
심정현 씨는 이웃해 있는 사람들도 지리산에 들어와 비로소 자기정체성을 찾았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신라 말 즈음에 지리산은 도피나 반항, 불복의 산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사에 지리산을 반역의 산으로 선명하게 각인시킨 이들은 '지리산 빨치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많이 기술된 바와 같이 여순사건의 도주 병력이나 한국전쟁 와중에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까지 지리산에는 그 층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저항세력들이 운집했던 곳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전설적인 남부군 총수 이현상에 관한 이야기까지 보태면 지리산은 21세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프고 예민한 촉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리산은 새로운 이름을 달 때가 왔다. 현재를 있게 한 과거 속,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외면하지는 말되,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지리산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 투쟁과 죽음의 역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생명의 농축액, 문화의 발원지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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