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서(國書)를 지킨 비장의 심처, 조선 역사 300년 지켰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에 대한 '억지주장'이 극에 달한 가운데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조선왕조 500년, 그 흥망성쇠의 역사는 과거가 아닌 우리 삶 속에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역사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엔 조선의 27왕에 관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사와 조선 왕들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었거나 편협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문명으로 인해 우리역사가 폄하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1618년 '선조실록' 봉안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 등의 국서(國書)를 약 300년간 보관했던 무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는 한국전쟁 와중에 불타버리고 관찬자료들은 인민군에 반출, 현재는 김일성대학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새롭게 조성된 텅 빈 사고(史庫)를 돌아 나오는데 한 가닥의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왕조를 결코 찬양할 생각은 없지만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를 우리역사를 너무나 쉽게 놓아버렸다는 자괴감 때문이요, '삼국사기' 이전의 제대로 된 기록물이 없는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 국서를 온전히 지킨 수문장
바야흐로 우리는 역사 드라마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안방극장은 '광개토태왕'과 '계백'에서 삼국시대가, '공주의 남자'와 '무사 백동수'에선 질펀한 조선의 역사가 펼쳐진다. 특히 '공주의 남자'에선 문종의 짧은 치세기간 동안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왕위를 찬탈하려는 수양대군과의 알력이 대중의 역사에 대한 욕구와 흥미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수양대군 딸과 김종서 아들과의 사랑'이라는 허구다. 이처럼 사극은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조합한 팩션(faction)을 통해서 대중의 역사 감정을 자극한다. 대중은 드라마 속 인물에 감정이입하여 위축된 왕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생질을 살육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수양대군을 옹호하거나 '천박한 권력의지의 철면피'라고 분노한다. 엊그제 개봉한 '활'이라는 영화는 국치(國恥)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은 활 하나로 수많은 청군의 정예부대를 궤멸시킨다. 심지어 우리 백성들을 도륙하고 욕보인 청나라 왕자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처절한 패전의 고통을 통쾌한 복수로 상쇄한다. 현재의 사극 열풍은 현실의 위기와 사회 병리현상을 반영한다. 한 국가와 민족이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할수록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고조된다. 진실된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한다.
무주 적상산(赤裳山)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가 있다. 사실 무주는 멀고도 험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전북의 최북단이고 가장 먼 동쪽이라는 지리적 사실과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상징하는 국경의 역사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무주산천은 곧추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이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아 이름을 적상산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선조실록' 116권에 '당초 향산(묘향산)에 장서토록 정하였으나 금번에 적상산성에 장서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 신하 김설(金卨)이 1625년 4월 21일 116권의 실록을 포쇄하고 기록한 것을 적상산사고에 옮겨 보관한 것. 그 이전에 적상산성(赤裳山城)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려말 최영장군이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를 정벌한 후 서울로 돌아오다가 적상산의 산세에 감탄하여 산성을 쌓도록 했다. 산성의 담장이 일부 남아있는 위로 안국사(安國寺)가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적상산 안국사기'에 보면 1277년(충렬왕 3) 월인 스님이 안국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적상산성의 수호사찰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64년(고종)에 지은 '안국사중수기(安國寺重修記)' 현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승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인 것과 이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고 붙인 것도 비록 작은 절이긴 하되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적상산성의 안국사는 적상산사고와 그 안에 있는 국서(國書)들을 완전하게 지켜온 수문장 역할을 다한 셈이다.
▲ 실록 고출하는 장소로 중요도 더해
적상산사고는 실록과 선원보 등 전적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사각(실록각)과 선원전을 건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충주· 성주· 춘추관의 실록이 병화로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 실록은 난 중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해주· 강화· 묘향산에 옮겨지면서 난을 피했다. 난이 끝나자 실록을 강화로 이송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03년 5월경에 다시 강화도로 안치하였다. 1603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3부를 인쇄하고 여기에 교정본과 원본을 합쳐 5부를 마련 인쇄본 1부는 춘추관인 내사고에, 2부 교정본 1부 원본 1부는 강화의 마니산사고를 비롯하여 봉화의 태백산, 영변의 묘향산, 평창의 오대산사고에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610년 실록을 남쪽의 안전지대로 옮기기로 하고 1612년 적상산성으로 장소를 정해 1613년 사각을 짓기 시작, 1614년 완성됨으로써 오대산· 태백산·정족산· 적상산의 4대사고가 되었다. 특히 적상산사고는 서책의 보관상태가 좋아 실록을 고출하는 장소로서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적상산사고에는 4대문이 있었으나 북문과 서문에 누각을 설치하고 주로 이곳으로 통행하였으며, 사고에는 사각· 선원각과 삼문이 있었고 사고의 수호와 포쇄시 이용했던 군기고, 참봉청, 별장청, 객사가 있었으며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호국사, 안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는 주로 사찰의 승병들이 지켰다. 건립당시에는 50여 명이었고 '선조실록' 봉안시에는 92명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조 영정이 적상산사고에 봉안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승병이 흩어지고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그 위험이 더해지자 승려 각성에게 도총섭(都摠攝)의 칭호를 제수하고 적상산성에 거주케 하였으니 적상산사고에 대한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 조선왕조가 발견한 비장의 심처
적상산 사고에 얽힌 이야기는 조선 후기부터 우리 근대사의 격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일전쟁의 와중에 분산 봉인되어 있던 왕조실록은 사고본만을 남기고 모두 분실, 훼손되고 말았다. 전주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만이 전주 유생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던 것이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왕조는 왕가의 족보라 할 선원록(璿源錄) 또한 이곳에 옮겨 비장케 하였다. 적상산 사고는 이처럼 조선 왕조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발견한 비장의 심처였다. 그만치 이곳이 깊고 먼 곳이었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원들이 튼튼한 궤짝 속에 든 왕조실록을 짊어지고 걸었을 이 산길엔 텅 빈 사고만이 남아있다. 그나마 양수발전소 준공과 함께 원래 있던 자리에서, 역시 함께 옮겨 온 안국사 발치에 자리 잡고 있다. 요동치는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서책의 운명을 적상산사고가 증명한다고나 할까, 역사는 끝없이 변하고 소멸한다는 것을 웅변하듯 적상산 사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저절로 쓸쓸함을 금할 수 없다.
/ 기명숙 문화전문시민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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