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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이재홍 전주 드림솔병원 내과 진료원장

11월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상 고온 현상이 지속되어 겨울이 오지 않을 것만 같더니 주말부터 제법 쌀쌀해진 날씨와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10도 이상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져서인지 감기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아졌다. 원래 11월은 익어가는 홍시처럼 의사들 얼굴도 노래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환자가 줄어드는 달이다. 늦은 추수, 콩, 깨 등의 작물 수확으로 바쁘다 보니 특히 농사의 비중이 높은 우리 도에서는 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1월 말 즈음 돼서는 김장이라는 큰 행사가 병원으로의 발걸음을 막는 일등공신(?) 역할을 한다. 지난 주, 많은 환자들이 복용하던 약이 수 일 남아 있음에도 처방을 받으러 내원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김장 때문에 미리 왔다고 했다. 오늘도 약을 드셔도 속 쓰림 증상이 지속되는 할머니께 수 일 내로 내시경 검사를 해보자고 하였더니 아파 죽어도 김장을 해야 하니 약을 며칠 더 주고 다음 주에 검사를 하자고 하신다. 또 다른 아주머니는 영양제를 맞고 싶다고 하며 영양제를 맞고 힘을 내서 뿔뿔이 떨어져서 사는 자식들에게 김장을 맛있게 담가 김치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대체 김장이 뭐 길??

 

김장은 ‘겨울부터 봄까지 먹을 김치무리를 입동(立冬) 전후에 한 번에 많이 담가 두는 일’로 정의된다. 겨울 철 추운 날씨에 김치를 담글 채소를 구하는 것이 어려우니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의학적인 중요성도 강조된다. 겨울철 부족해지기 쉬운 비타민의 주공급원이니 말이다. 요즘에야 계절에 관계없이 대형마트 등에서 사철 과일을 쉽게 구할 수 있다지만 이삼 십년 전만 해도 겨울에 신선한 과일, 채소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김장 김치가 유일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김장은 한가위나 설 이상으로 큰 집안 행사, 아니 동네 잔치였다. 방과 후 집에 오면 동네의 모든 아주머니들로 북적였고 그 집 아이들까지 함께 하였으니 마치 시골 장터에서나 봄직한 풍경이었다. 어머니들이 김치를 담그는 동안 아이들은 모여서 숙제를 하고 깨진 기왓장 하나면 여러 명이 해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던 지금은 그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놀이들… 어둑어둑해질 즈음에는 갓 담은, 보기만 해도 그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김치를 손으로 찢어 밥 위에 얹어 주시던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담긴 저녁을 먹으며 얘기꽃을 피우던 명절 아닌 명절이 김장이었으니. 요즈음 핵가족화로 인해 김치를 담가 먹는 가정이 줄고, 음식 문화의 서구화로 인해 김치 소비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어머니들에게는 아픈 허리를 수십 번이나 펴고 매운 눈을 손으로 비벼가며 자식들에게 나눠 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이 병원 가는 것을 미룰 만큼 중요한 일인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식구가 적은 가정에서는 김치를 사서 먹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라고 한다. 작년에는 배추 값의 폭등으로, 올해는 고추 등 양념 값의 상승으로 김장 비용이 증가하여 김장을 포기하는 가정이 40%에 달한다고 한다. 마트에 가면 십 수 종류나 되는 먹음직스런 김치들이 즐비하고, 주거형태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어 김치를 담그기에 너무 번잡하고, 예전처럼 이웃과의 교류가 많지 않은 요즈음의 생활상을 고려하면 김장을 담그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장은 단순히 겨울철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이 아닌 이웃과의 훈훈한 정을 나누고 가족이 함께하는 사회공동체 문화의 하나로 그 존재가 유지되었으면 한다. 멀리 계신 부모님이 담가 보내 준 김치 통 안에는 김치와 함께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이 함께 담겨 있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안부 전화라도 드려보는 것이 어떨까?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큼지막한 김치 냉장고를 보며 김장 김칫독을 땅에 묻느라 제법 추운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시던 아버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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