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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야는 '봉수(烽燧)왕국'이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백두대간이 가야의 서쪽 자연경계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금강 최상류인 장수군 일대에서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장수가야의 존재가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진안고원에서 유일하게 장수군에만 가야계 지배자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가야계 고총이 200여 기 정도 남아있다. 장수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장수가야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봉수왕국'이다.

 

봉수란 낮에는 횃불과 밤에는 연기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개인정보를 다루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가야계 왕릉 못지않게 가야계 왕국의 존재여부를 방증해 주는 가장 진솔한 고고학 자료이다.

 

진안고원 일대에서 삼국시대 봉수가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내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까지 80여 개소의 봉수가 장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봉수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륙교통로가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입지를 두었다. 그리고 산봉우리 정상부에는 대체로 장방형의 토단을 만들고 돌로 쌓은 석성을 한 바퀴 둘러놓았다.

 

그런데 봉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어딘가이다. 충남 금산군과 전북 무주군·진안군·임실군, 남원시 운봉읍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모두 장수군에서 만난다. 조선시대 때 전국의 5대 봉수로가 서울 남산에서 합쳐지는 것과 똑 같다. 전북 동부지역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들 봉수의 운영주체는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

 

우리나라에서 산성 및 봉수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진안고원이다.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줄곧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고원을 장악하려는 삼국의 정치·군사적인 목적과 관련이 깊다. 제일 먼저 백제가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웅진 천도 이후 한 동안 정치적 불안으로 영향력을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이를 틈타 장수가야가 백제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봉수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 무렵 신라도 백두대간의 덕산령을 넘어 무주군 무풍면 일대를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진안군과 금산군까지 신라의 영향권에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진안군과 무주군, 금산군 일대에서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진안고원을 차지하려고 백제와 가야,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쳤다. 그러다가 장수가야가 백제에 복속되었고, 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진안고원이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백제의 수도와 진안고원을 왕래하던 내륙교통로가 끊긴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가야계 왕국으로 장수가야의 발전과 삼국의 각축장으로 진안고원이 막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삼국시대의 봉수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단한 지표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오늘도 전북 동부지역 봉수를 찾고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도전과 열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운봉고원의 야철지와 함께 장수가야의 봉수도 전북과 전북인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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