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원한 씻어준 '세원우'
조선건국 후에도 신덕왕후의 역할은 지대했다. 조선이 건국된 지 한 달만인 8월에 신덕왕후 소생 방석이 세자로 책봉됐다. 당시는 장자 진안대군 방우가 살아 있었다. 세자책봉에 정도전의 정치력도 작용했지만 신덕왕후의 의지가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가 권근을 불러 말하기를 ‘나라를 세울 때 내조가 실로 많았고, 이제 뜻밖에 세상을 뜨니 경계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을 잃은 것 같아 내가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조준은 신덕왕후가 위태로울 때 대책을 결정하는데 참여해 내조한 공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건국 후 현비에 봉해졌고, 사후 신덕왕후에 봉해졌다. 묘소는 정릉이다. 능을 도성 안에 두지 않는 것임에도 태조는 정릉을 도성 안에 두었다. 현 덕수궁 북단 영국대사관자리로 경복궁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그 지근거리인 덕수궁 남단 서울시의회 자리에는 흥천사를 건립했다. 태조는 매일 밤 흥천사의 종소리를 들어야 잠이 들었다. 도성 안에 정릉을 둔 것을 신덕왕후 사후 어린 세자 방석을 보호하려는 태조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고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태종이 문덕황후를 아꼈듯이 태조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같이했던 신덕왕후 강씨를 지극히 총애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한씨 소생 태종이 정권을 잡으면서 신덕왕후의 존재는 지워졌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계비로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정릉을 도성 밖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건하였다. 본래의 정릉 봉분은 자취를 없애서 알아볼 수 없게 했고, 석인은 땅을 파서 묻었다. 정자각은 헐어서 태평관을 짓는데 쓰고, 받침돌은 가져다가 흙다리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신덕왕후 강씨를 복위해 종묘에 배향하고 정릉을 개봉(改封)하자는 논의는 선조대에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처음 제기됐다. 당시 정릉은 망실돼 변계량의 제문을 근거로 도성 동북쪽 산 아래 마을에서 찾았다. 현재의 정릉이 바로 이때 찾아진 묘소이다. 율곡 이이도 신덕왕후 복위를 적극 주창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덕왕후가 복위된 것은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 선조대로부터로도 90여년이 지난 현종대의 일이다. 예송으로 낙향해 10년만에 정계에 복귀한 우암 송시열이 신덕왕후 복위를 강력하게 주창하고 사림들이 뜻을 같이하자 반대하던 현종도 대세에 끝내 승복해 1669년(현종 10), 종묘에 신덕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정릉을 개수했다.
세월호 희생 영령에게 애도를
조선 건국 후 골육상쟁으로 묘소조차 잊혀졌던 조선의 첫 번째 왕비 신덕왕후는 선조대 이후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복위돼 제자리를 찾았다. 정릉을 개수하고 제사지내는 날, 11월 겨울인데도 소낙비가 내려 정릉 골짜기를 흠뻑 적셨다. 사람들은 이 비를 신덕왕후 강씨의 원한을 씻어주는 ‘세원우(洗怨雨)’라고 하였다.
세월호 참사에 온 나라가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다. 피워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생명을 빼앗긴 그곳엔 언제나 세원우가 내릴 수 있을까? 세월호에 희생된 영령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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