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조선시대 지방 고을 관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선시대 김제군 관아>조선시대>
김제 시내에는 소박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아와 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다른 볼거리를 구경하기 전에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입니다.
현종 8년(1667)에 건립되었고, 그 후 32년 뒤인 숙종 25년(1699)과 숙종 38년(1712)에 중수되었습니다. 도시의 가장 중심에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보존되어 있어 매우 드문 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김제관아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있는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답니다.
동헌
관아의 입구를 지나 관청 안으로 들아가니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667년 김제 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했습니다. 숙종 25년에 동헌을 고쳐 지어 사칠헌(事七軒)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답니다. 동헌에 사용된 부재나 꾸밈 등이 민가의 건축보다 장중하고 장식적인 면모가 많이 보였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등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근민헌’이라는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으로 지정되었을 때(2007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랍니다. 고을의 수령들이 공적인 업무를 보던 건물인 동헌은 넓은 대청으로 많은 기둥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뒤로 돌아가 보니 아궁이도 있어서 집의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피금각
동헌 앞마당 왼편에는 피금각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작지만 화려한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인조 11년(1633)에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로 있을 때 지은 건물이랍니다. 일반적인 정자처럼 넓은 대청마루 대신 1칸짜리 방을 만들었습니다.
피금각의 뜻은 ‘옷깃을 풀어 젖힌다.’로 동헌인 근민헌에서 종일 민원 판결에 시달린 군수가 이곳에서 옷을 벗고 쉬었다고 합니다. 정홍명은 업무를 마치면 이곳에서 가야금과 바둑을 즐기고 시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목민관의 마음이 느껴지는 내아
동헌 뒤편으로는 김제내아라는 돌비석이 있습니다.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을 내아라고 합니다.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였답니다.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 자형 안채 건물만 남았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티가 났습니다. ㄷ>
안의 아기자기한 마당이 규모가 작게 보이게 했는데 한 바퀴 돌아보니 꽤 규모가 있었습니다. 가운데 마루가 다른 마루보다 한 칸 정도로 높이가 낮았습니다.
마루가 낮은 이유는 내아를 찾아온 사람들이 문턱이 낮아야 편하게 수시로 오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백성을 생각하는 목민관의 마음이 살림집에도 느껴져 마음이 숙여 해졌습니다. 동헌과 함께 남아있는 내아로서는 유일한 곳입니다. 내아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중. 상류 계층의 주택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뒤에 있는 공터는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넓은 공터에 많은 건물이 있었을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김제향교
김제관아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김제향교가 있습니다. 조선 태종 4년(1404)에 세워져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어진 것입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는 2층 누각으로 되어있으며 5간짜리 문루입니다. 유생들이 시회를 열거나 학생들이 자치활동을 하던 공간이었답니다. 외삼문에 해당하는 만화루 오른쪽에는 충효관이 있는데 향교 사무실과 청소년 인성 교육장, 서, 화 지도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명륜당으로 옛 강학당입니다. 향교는 요즘으로 보면 지방 거점 국립학교인 셈이니 이곳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명륜당 왼쪽에 동제, 오른쪽에 서제가 있는데 옛 학생 기숙사입니다. 동재에는 양반계급이, 서재에는 평민이나 서얼 등이 생활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된 만큼 지역의 인재를 키우는 데 힘 쏟았겠지만, 신분의 차이는 배움은 같이 해도 먹고 자는 것은 같이 할 수 없었나 봅니다.
대성전
명륜당을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문묘 출입문인 내삼문이 나옵니다.
오른쪽 계단으로만 올라가야 합니다. 정면에 대성전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위(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와 송조 4현(주돈이, 정이, 정호, 주희)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대성전 왼쪽이 동무, 오른쪽에 서무가 있습니다. 동무와 서무는 우리나라 유학자 8현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향교의 목적은 교육에도 있지만, 유교의 성인들에 대한 정기적인 제사를 하여 학생들이 성현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대성전 앞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아기자기해 보입니다. 현재 김제향교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전통문화와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니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현재도 하는 셈입니다. 향교에는 많은 학생이 드나들었던 만큼 상가도 번성하였을 거고 마을도 번화한 편이었을 것입니다. 지방 수령의 업무 중의 하나가 향교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이었다고 하니 향교와 김제관아가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김제관아와 향교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지방 고을 관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곳으로 한가로운 겨울 여행에 만난 소박한 재미였습니다.
<동헌과 내아>동헌과>
주소ㅣ김제시 동헌4길 46-1
문의ㅣ063) 543-3179
<김제향교>김제향교>
주소ㅣ김제시 향교길 89-3
문의ㅣ063) 547-6477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이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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