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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군산에 대한 애향심 - 백봉기

▲ 백봉기 나의 고향은 군산이다. 군산에서 태어나 초중고는 물론 대학과 대학원까지 다녔다. 선산도 군산에 있고 형제 친척들도 대부분 군산에서 살고 있다. 또한 30년 직장생활 중 절반을 군산에서 보냈다. 내가 다니던 군산 KBS가 폐쇄되지 않았다면 나는 군산에서 정년을 맞았을 것이다. KBS 시절 서울에 가면 군산사람 왔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나는 군산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군산 쪽에 방송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나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자칭 군산사람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나의 유별난 애향심 때문이다. 옛날의 군산은 흔히 말하는 물 맑고 공기 좋고, 먹을 것 많고, 인심 좋은 곳과는 거리가 있었다. 항구도시지만 바닷물은 탁하고, 아무렇게나 내버려 진 어구가 바닷가에 즐비하게 방치돼 있었다. 다른 항구도시처럼 바닷길 따라 낭만의 해변로 하나 없었다. 새만금사업이나 고군산 관광지 개발이라는 꿈이 요원했던 때였다. 그래도 나는 군산에 대한 애정이 컸으며 군산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앞장서고 싶었다. KBS 재직시절 6시 내 고향을 제작할 때도 군산의 명소를 먼저 찾아 소개했고, 다른 지역에서 해오던 임해 공개방송도 군산으로 유치해 결국 금강 하굿둑 광장에서 한여름 밤 금강 콘서트로 바꿔 시작했다. 행사는 대성공이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0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군산의 농구를 지원하기 위해 꿈나무 어린이 농구대회를 수년간 개최해 우수한 선수를 발굴했고, 당시 10년 넘도록 방영했던 KBS 열린 주부 마당도 내가 처음 군산에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밖에도 고군산 사진 촬영대회, 금강권 학생서화전 등 돌이켜보면 나의 애향심 하나로 시작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생각할수록 마음 아픈 일이 있다. 1998년쯤 군산시가 주최한 군산 발전 세미나에서 나는 지정발표자로 나가 평소에 생각했던 군산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 두 가지를 강력히 요구했었다. 불꽃 축제와 군산 뜬다리 축제였다. 당시 전국이 온통 축제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는데 군산은 이렇다 할 대표적 축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불꽃 축제를 제안했다. 이 축제가 군산에서 필요한 이유는 최무선 장군이 처음 화약을 만들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군을 무찌른 역사적 땅이었고 해망동 앞바다에 있는 62만 평의 인공섬이 불꽃 축제를 하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뜬다리 축제는 군산항에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뜬다리가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다양한 해양축제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그 뒤로 여러 차례 군산시에 추진 방향을 이야기했지만 환경오염, 해양부의 승인 그리고 이웃 충남 장항과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흐지부지 꼬리를 내리고 말았던 일이다. 요즈음 서울 한강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불꽃 축제를 보면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도 내 고향 군산에는 대표할 만한 축제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요즘 지방선거를 마치고 입지적인 인물들의 얼굴이 연일 신문에 오른다. 그런데 나의 눈은 군산지역 당선자들의 이름과 프로필에만 시선이 쏠린다. 몸은 전주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군산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 등장한 선량들에게 내 고장 군산에 전국 최고의 축제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한다. 나도 언제든지 나의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이것이 나의 꿈이고 마지막 애향심이다. △백봉기 수필가는 KBS 제작부장, 편성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예총 전북연합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온글문학회 회장으로 <팔짱녀> 등 3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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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9 21:44

내 고향 '꽃걸음 빛바람 축제' - 최기춘

▲ 최기춘지난 5월 초 내 고향 임실 옥정호반 요산공원에서는 올해로 두 번째 ‘꽃걸음 빛바람 축제’가 면민의 날과 더불어 사흘 동안 열렸다. 축제장에 가면 오랜만에 많은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간다. 축제장은 빨간 꽃 잔디가 화선지에 그려진 듯 선명하게 아름답고, 주변에는 이팝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반겨준다. 그리고 노란 갓 꽃과 유채꽃이 활짝 피어 축제장을 찾은 사람들을 웃으며 환영해 준다. 농촌을 떠나 도회지 도로변 공터의 화단을 방황하던 허수아비들도 멋진 패션으로 돌아와 막걸리에 취했는지 필봉농악의 장단에 맞춰 건들건들 춤을 추며 관람객들을 반긴다. 시인 정지용이 ‘얼굴 하나야 손가락 둘로 푹 가릴 수 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옥정호도 이날 따라 잔잔히 출렁대며 보고 싶은 마음들을 채워주고 있었다. 면민의 날 기념행사로 효자·효부를 선발하여 상을 주고, 지역 발전에 이바지한 분들에 대한 공로패도 주며 또한 고향을 떠난 익명의 독지가가 고향 후학들을 위해 장학금도 기탁해 축제장은 훈훈한 고향의 정을 느끼게 했다. 관광객들을 위해 임실필봉굿을 비롯해 청소년 댄스경연대회, 통기타 경연대회, 주민 장기자랑, 자전거 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알차고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고향 사람들은 모처럼 바쁜 농사일을 뒤로하고 축제장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향수에 취하고 술에 취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관광객들도 축제장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며 민물 매운탕과 붕어찜 등 주변의 다채로운 먹을거리에 눈도 입도 일품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옥정호는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데미샘에서 발원해 임실군 관촌, 신평, 운암, 강진의 산과 들을 끼고 굽이굽이 섬진강으로 흐르다가 1965년 강진면 수방리에 섬진강 다목적댐이 축조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호수의 물이 구슬처럼 맑고 깨끗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발전전용수와 상수도, 농업용수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홍수 조절에도 큰 역할을 한다. 호수 전체가 옥같이 아름답지만, 행사장인 요산공원 주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요산공원에는 임진왜란 때 3등 공신 성균관 진사였던 최응숙 선생이 낙향해 400여 년 전에 지은 양요정이란 고색창연의 정자가 있다. 양요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비롯되어 산과 물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리고 섬진댐 수몰민들의 슬픔을 달래려고 세운 망향탑도 있다. 전설과 신화를 간직한 국사봉에 올라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요산공원과 생긴 모양이 붕어 같다 하여 붙여진 붕어섬이 한눈에 보인다. 옥정호 수변도로는 전국의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돼 젊은 청춘남녀들과 가족들이 찾는 명소다. 마암리에서 용운리까지 13㎞ 마실길은 걷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나는 축제가 끝난 요즈음 축제 때만 찾는 것보다는 4계절 내내 내방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서 특색 있고 매력적인 관광 개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옥정호의 물이 맑고 깨끗하게 유지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대한문학작가회 전북지회장, 영호남수필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으로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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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2 19:59

지팡이 - 임두환

▲ 임두환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건강상 짚고 다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절모를 쓰고 팔자걸음 걸으며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여서인지 건강상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지팡이는 ‘단장(短杖)’과 ‘행장(行杖)’이 있다. 단장은 짧으며 손잡이가 있는 것이고, 행장은 길면서 손잡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 TV에서 어느 노인정에 명아주 지팡이를 만들어 기증하는 것을 보았다. 그 뒤 나도 명아주 지팡이를 손수 만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불진화대로 선발돼 전주수목원 근처에서 근무할 때였다. 업무 특성상 관내를 순찰하는 일이 일상이어서 하루에 1만 보 이상은 걸어야 했다. 그런데 2월 중순쯤이었을까? 순찰하다 보니 길가에 묵정밭이 보였다. 그곳에는 대부분 개망초가 자리를 잡는 게 보통인데 뜻밖에도 내가 찾던 명아주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명아주는 들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잡풀이다. 환경에 맞으면 키가 1~2m까지 자라는데 봄에는 어린 순을 데쳐서 나물로 먹기도 하고 생즙은 일사병과 독충에 물렸을 때 쓰인다. 또한 건위, 강장, 해열, 살균·해독의 효능이 있어 잎과 줄기를 말려 민간요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을철에는 곧고 크게 자라서 가공하면 명아주 지팡이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팡이 중에 제일이라는 청려장(靑藜杖)이다. 비록 나무가 아니라 일년생잡초지만 재질이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질겨서 지팡이로는 제격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바로 지팡이를 만들었다. 지팡이로 만들려면 가을에 줄기를 자르지 않고 뿌리째 뽑아야 한다. 지상으로 성장하는 경계점에 울퉁불퉁한 옹이가 있어 가공해 놓으면 이 부분이 마치 용의 형상을 나타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겨울이 지나 봄이다 보니 뿌리가 썩어 어쩔 수 없이 밑동을 잘라야 했다. 그래서 비록 손잡이 없는 행장이 되었지만 아쉬웠다. 다 된 지팡이를 짚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뇌리를 스쳤다. 흙수저로 태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홀로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산비탈을 걸어왔다. 묵정밭에서 자란 명아주 역시 험한 세상을 이겨오며 뼈아픈 고통을 겪은 흔적이 마디마디 굳어진 옹이로 나타나 마치 나의 생애를 보는 듯 애처로웠다. 그래서일까?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은 효자가 부모에게 바치는 선물이 되었다. 중국 명나라 때 의서 〈본초강목>에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을 예방하고 중풍이 걸렸던 사람도 쉽게 낫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부모 나이 50이 되면 자식들이 명아주 지팡이를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부모들이 이 지팡이로 땅을 치고 걸으면 불빛이 환하게 일어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청려장이다. 이 지팡이는 주인이 집에 있을 땐 말 없는 문지기요, 문밖에 나서면 그림자처럼 따르니 어느 자식이 이 충직만 하랴? 요즘 들어 세상 좋아지다 보니, 등산용 플라스틱 지팡이가 판을 치고 있다. 그렇지만, 누가 무어라 한다 해도 지팡이 중 제일을 꼽는다면,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이 존경받아 마땅하리라. 그보다는 100세 시대와 더불어 우리의 청려장 같은 효심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두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문학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행촌수필문학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수필집으로 <뚝심대장 임장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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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5 21:02

사과 두 개와 가방 소동 - 정석곤

▲ 정석곤나흘 동안 호주 관광을 마치고 데베레호텔로 갔다. 푹 잘까 싶었는데 이튿날 새벽 4시에 시드니국제공항으로 갔다. 항공기 안에서 한숨을 자고 나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뉴질랜드 입국신고서’를 쓰니까 착륙시각이 가까워졌다는 방송을 들렸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은 3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서 호주 국제공항까지 올 때는 10시간이 넘었다.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잠이 오지 않아 온몸은 몸살을 했다. 화장실로 갔더니 좌변기 앞에 걸린 ‘큰 것을 해결하면 작은 것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글귀가 실감이 났다. 여행 출발 전에 호주, 뉴질랜드, 피지에 입국할 때 주의 상황을 여러 번 읽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과일, 견과류 등이 반입금지품목이라 서운했다. 의약품은 처방전도 가져갔다. 그래서 입국신고서에 의약품과 음식물의 ‘예’ 난에 ×표를 했다. 그런데 가방을 찾고서 입국할 때 심사관에게 여권과 입국신고서를 보여주니까 복용한 약과 가이드 이름을 물어보았다. 감기약은 바로 대답했는데 가이드는 머뭇거리다 시드니 담당자를 말했다. 마지막으로 반입금지식품 이름을 한글로 쓴 안내판을 들고 일일이 입국신고서를 확인하며 통과시켰다. 여행사가 입국할 때 요약된 주의사항을 문자로 세 번이나 보내준 이유를 알고 감사했다. 일행 가운데 두 건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호주에서의 입국은 심사가 수월하리라는 생각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옥천에서 오신 분이 수하물로 부친 가방이 없어졌다. 비슷한 가방은 한 개 있다고 했다. 신고를 하고 기다렸다. 또 부산에서 오신 분은 아침에 도시락이랑 나누어 준 사과 두 개를 수하물로 부친 가방 안에 넣어 둔 것이다. 직원이 여권을 가지고 가이드를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 현지 여자 가이드니까 잘 해결될 거라 믿고, 마오리 원주민의 민속공연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참 기다렸다. 희비가 교차했다. 옥천 사람은 가방을 바꿔 간 사람이 가져왔다. 그런데 사과 두 개는 우리 일행의 소원을 등지고 한화 35만 원의 벌금을 냈다. 부산 사람은 패잔병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가방을 끌고 왔지만 우리 얼굴에도 금방 먹구름이 드리워져 위로의 말을 잊었다. 뉴질랜드는 벌금 제도가 철저하다는 것을 가이드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음식점에서도 술 취한 사람에게 술을 판매하면 벌금을 낸다. 경찰은 운행 중인 차를 세우고 들어가 검색하는 권한이 있으며, 안전띠를 안 매면 벌금을 부과한다. 그건 호주에서도 가이드가 제일 먼저 부탁한 말이 안전띠와 벌금이었다. ‘한국관’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 벽에 붙어 있는 한글로 된 경고문을 봤다. “새 음주 법에 식당에서 취할 때까지 술을 들면 $ 500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음주문화였다. 건전한 뉴질랜드 국민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거리마다 쓰레기와 휴지는 안 보였다. 과연 선진국다웠다. 집집이 우리나라와 같은 ‘음식물 찌꺼기 수거함’이 크기가 다른 게 서너 개씩 보였다. 아예 ‘쓰레기 분리수거함’은 찾질 못했다. 미세먼지도 매연도 전혀 없었다. 많은 나무가 내뿜는 산소가 그대로 살아서 청정공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자꾸 비교하며 감탄을 자아냈다. 공기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국민의 준법정신부터 투철하니까, 복지국가를 이룬 것 같았다. △정석곤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으며 행촌수필 이사, 안골수필 편집국장, 전북문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풋밤송이의 기지개>,<물끄러미 바라본 아내의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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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8 19:37

유리창에 붙여진 종이 한 장

▲ 김학철등산을 자주 다니던 50대 때의 일이다. 모악산을 가려고 중앙시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데 무심코 뒤돌아보니 뒤편 안경원 유리창에 A4용지 2배 크기의 종이에 매직펜으로 쓴 글자가 눈에 띄었다. “내 생에 최대의 자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섰다는 것이다.” - 골드 스미스 나는 일행인 친구에게도 읽어보라고 했더니 글을 읽고 난 그 역시 잠시 감회에 서린 표정이었다. 그 친구는 지난 20여 년간 증권에 손을 대 수억 원의 손해를 보고 의기소침하여 급기야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고, 나 역시 질병으로 졸지에 성치 못한 몸이 되어 실의에 빠져 있던 때니 어쩌면 이 글은 우리 이야기 같아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글은 수년이 지나도 그대로 부착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골드 스미스’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로 영국의 명문 예술대학의 이름이 ‘골드스미스 대학교’라고 명명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 글을 써 붙인 안경원 주인은 비록 속칭 안경판매업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딘가 속이 깊고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세월은 흘러 다시 20여 년이 지났다. 내가 사는 곳도 개발이 되어 각종 상가가 들어와 성업 중이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우연히 우리 집 옆의 안경원을 들르게 되었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지성인다운 점잖은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여기 말고도 시내에 안경원을 하나 더 갖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중앙시장 시내버스 승강장 옆의 안경원이라는 게 아닌가? 20여 년 전 창문에 ‘골드 스미스’의 글이 붙어 있던 그 안경원이 아닌가? 나는 깜짝 반가워 그 이야기를 했다. 원장도 맞다고 반색을 하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곳 안경원 벽에도 ‘헬렌 켈러’, ‘켄블랜차드’ 등 유명인들의 명언들이 자필로 써서 붙어 있었다. 그는 전북과학대 안경학과 교수로 재임하다 정년퇴직한 분인데, 중앙시장 안경원 창문에 붙어있는 ‘골드 스미스’의 명구에 얽힌 일화를 말해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떤 남학생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인사를 꾸벅하며 “저는 이번에 징집 영장이 나와 입대하게 되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면서 뜻밖에도 자기가 이 대학에 들어오게 된 동기를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몇 년간 자기가 원하는 대학입시에 번번이 실패하자 부모님 뵐 낯도 없고 실의에 빠져 구이저수지에 가서 빠져 죽으려고 결심하고 시내버스를 타려고 중앙시장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안경원 창문의 ‘골드 스미스’ 명언을 읽게 되어 자살을 포기했고, 그때 안경원에 들어가 사장님을 뵈려고 했더니 대학 강의 차 출타 중이라는 말을 듣고 이런 분한테 안경학에 대한 교육을 받아 장차 안경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여 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종이 한 장에 글을 써서 유리창에 붙여 놓은 것이 새파란 젊은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장래 진로까지 열어준 셈이다. 그는 이 곳 안골로 이사 와서도 자율봉사회장으로서 길거리 청소, 가로수 정비 등 봉사를 수년째 해오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밝은 사회로 나가기 위해 폭넓게 봉사활동을 하는 분이 우리 동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수년간 모르고 지내왔다는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봄에 만개한 벚꽃처럼 우리 동네가 더욱 환하게 밝아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학철 수필가는 2013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이사, 영호남수필문학회·한국미술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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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1 20:57

장롱 속의 정장 - 이희근

▲ 이희근대부분 장롱 안에는 낡은 정장이 몇 벌씩 있다. 철이 지나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사철 장롱을 지키는 것들을 말한다. 많이 입었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그냥 보관하거나, 고작 몇 번 입었을 뿐인데 유행이 지났거나 나이 때문에 몸에 맞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냥 걸치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다. 춘분이 지나고 연두색 애벌레 모양의 꽃으로 단장한 수양버들과 노란 입술연지를 바르고 입가에 방긋 미소 띤 개나리 산수유가 손짓하면 장롱 속의 정장을 걸치고 길에 나선다. 친구들과 함께 모악산에 오르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다른 때보다 등산객들이 많았다. 그런데 앞장서서 걷던 사람 중 하나가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다시피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가 아파서 더 걷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옆에 와 앉더니 “어떤 놈이 건강에는 등산이 제일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하며 다리를 뻗고 앉았다. 걷기운동이 최고라며 허리춤에 만보기를 찬 채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걷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걷는 사람들을 보면 걷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만보기를 위해서 걷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친구는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점핑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참여하여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헉헉거려 119 신세를 지고 병원에서 심장혈관 확장 시술을 받았다. 운동할 때 과욕은 금물이다. 나이가 들면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괜히 옛날만 믿고 강행을 하다가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수선되지 않은 장롱 속의 정장을 걸친 꼴이 된다. 건강에 좋다는 운동은 무엇이든지 즐기는 친구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골프도 치고, 거의 매일 헬스장에 다닌다. 등산도 즐기고 걷기운동도 하며 건강에 자신이 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친구다. 그런데 그에게 이상한 증후가 나타났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나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기고 개의치 않으려 했지만 개선되지 않자 큰 병원으로 갔더니 멜라토닌 부족으로 나타나는 불면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현재의 의술로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병은 자랑하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불면증 이야기를 호소하고 다녔다. 드디어 한 지인으로부터 발치기운동이 수면에 좋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 운동을 하면 발가락 끝부분의 모세혈관이 되살아나서 혈액순환의 개선은 물론, 시력 증진과 불면증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처음에는 그까짓 발치기가 무슨 운동이라고 도움이 되겠느냐고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알려준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허실 삼아 발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 후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모처럼 숙면에서 깨어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에 급체했을 때가 떠올라 무릎을 쳤다. 손끝과 발끝이 오장육부와 통하는 기관이라는 사실도 그때야 깨달았다. 그때부터 친구는 발치기운동의 마니아가 되었다. 발치기운동은 격렬한 신체적 활동이 필요 없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운동이다. 특히 실외활동을 버거워하는 노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몸에 맞게 잘 수선된 장롱 속의 정장이다. △이희근 수필가는 정읍 출신으로 계간 ‘문학사랑’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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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4 19:52

내 고향 진안 마이산 - 전종용

▲ 전종용나의 고향은 진안 마령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안군 마령면 원강정마을과 월운마을 사이에 있는 외딴 집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500m쯤 떨어진 월운마을에 놀러 가서 해가 질 때 돌아오곤 했다. 마을에서 놀 땐 어김없이 나무로 만든 칼을 들고 장군 흉내를 내면서 떼 지어 함미산성 성터에 올라 소리를 지르며 성터 주위를 한 바퀴 돌아왔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후백제 시대에 도적떼가 많아 함미성에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놓고 지키던 곳이었다고 한다. 성안에 기왓장 파편이 많은 걸로 보아 확실하다. 지금은 마이산 등산길이 되어 함미성터 옆을 통과하고 있는데 이 등산길을 따라 가노라면 광대봉을 지나 마이산에 이르게 된다. 특히 11월 중순 무렵 이 길을 오르면 왼쪽 월운계곡에 붉게 물든 숲과 오른쪽 마령 들이 보이는 절벽 모습이 절경 중의 절경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6년 동안 가을 소풍은 항상 금당사와 마이산으로 갔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적과 역사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소풍을 가서도 마이산 탑들의 절경 그리고 역사 이야기에 빠져 가장 늦게 머물러서 붙여진 별명이 느림보 고적 박사였다. 진안에서 오랫동안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던 이규형 외숙으로부터 마이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산묘와 금당사 탑사 은수사를 거쳐 천왕문을 찾았던 추억이 남아 있다. 외숙께서는 내가 마이산에 대해서 물으면 이름의 유래와 탑의 전설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마이산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서다산이라고 했으며 조선 태종이 남행했을 때 모양이 말 귀와 같다고 하여 마이산이라 칭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 마이산은 용출산, 용출봉이라고 불렀고 마령 사람들은 속금산이라고 했다. 외숙께서 전해주신 마이산 전설 이야기에 의하면 전에는 부부산신이었다고 한다. 삼천일을 수도한 뒤 마침내 승천할 날이 닥치자 남산신은 사람들이 승천 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니 한밤중에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여산신은 품 안에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을 보고 새벽에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새벽에 물 길러 나왔던 아낙네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라는 바람에 승천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남산신은 여산신의 품에서 아기를 빼앗고 발로 차 지금 애기봉이 아빠봉 곁에 있고 엄마봉은 죄스러워 다소곳이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진안 쪽에서 보면 숫마이봉 옆에 아기봉이 붙어 있고 암마이봉은 오른쪽으로 다소곳이 고개 숙인 모습이다. 마이산은 계절 따라 이름도 각각인데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이라고 한다. 외숙께서는 탑사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큰 탑은 예부터 있었으나 나머지는 탑사 주지였던 이갑용 처사가 쌓은 탑이라고 주장하지만 주탑인 천지탑과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등 큰 탑은 예부터 있었고 한 줄로 쌓은 외줄탑 정도는 쌓았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마이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탑사 주변에 산비둘기들이 많이 날고 있다. 진안의 명산 마이산은 우리 진안 사람들의 품이다. 나는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나면 마이산을 찾는다. 지금은 벚나무를 많이 심어 4월 하순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금당사, 담락당 시비를 지나 마이산과 신비한 돌탑을 찾으면 항상 마음이 포근하다. △전종용 씨는 진안 출생으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지금은 한학에 심취하며 취미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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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31 19:23

느림의 미학 되새기며 긍정의 힘으로 - 안홍엽

▲ 안홍엽새해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다.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 난다.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되다보니 시간이 더욱더 빨리 가는 것 같다.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상은 그날이 그날이다. 과거나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상상해 보지만 시간의 역사가 규명해 줄 수밖에 없는 가고 옴의 오묘한 조화다. 몇 년 전 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서강대학교 장영희 교수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글로 접했다. 저자 ‘헬렌 켈러’는 앞 못 보는 맹인으로 2차 대전 때 부상병구제운동을 주도해 ‘자유의 메달’을 받은 미국인이다. 그는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3일 동안 친절과 겸손과 우정, 밤낮이 바뀌는 웅장한 기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며 집에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1933년에 발표된 이 글은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도 없이 보고 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 80여 년이 흐른 오늘 우리에게 헬렌 켈러의 글이 새삼 간절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안목이 필요해서다. 그동안 우리 민족의 숙원이었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라는 옥동자가 탄생한 요즈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이고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며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또한 살고 죽음이 삶의 한 과정이듯 고통과 시련도 삶의 한 과정이라면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거기에서 찾도록 해야 한다. 뒤돌아 보기에도 너무나 아쉽고 민망한 지난날들이었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상이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극복의 꿈만 있다면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행운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짐을 한다. 한 점의 착오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 삶에 쉼표를 찍으면서 살아야겠다고... 여행 작가 정연희 씨는 “쉼표가 없는 일상은 대팻밥이나 톱밥처럼 우리들 본래의 삶에서 시나브로 깎여 나가는 부스러기가 되고 말 것이다. 쉼표가 없는 문장을 읽으려면 숨도 차고 얼른 터득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긍정의 힘을 신앙처럼 굳게 믿겠노라고... 인생을 바꾸는 ‘긍정의 힘’, No가 Yes로 바뀔 때 모든 일은 해피엔딩으로 장식된다. 수 세기 동안 단 1%만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은 놀랍게도 긍정의 힘이었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으로 미국의 역사에 기록될 대사건도 긍정의 힘 때문에 일어났다. “Yes, We Can.” 이 한마디가 미국을 열광케 했다. 변화를 추구하고 희망을 일구어가는 국민임을 세계에 과시했다. 모든 유기체는 변화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기회가 왔다고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림의 미학을 되새기며 긍정의 힘으로 희망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다리자.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타고르의 말이다. △안홍엽 씨는 전주 MBC 편성국장을 역임했으며 퇴직 후에는 원광대, 우석대, 전북대, 백제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한국방송대상과 전북문화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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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4 20:06

나누는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 유명석우리는 태어나면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공부하고 직장에서 근무를 하다가 퇴직을 하면서 평생을 보낸다. 나도 남들이 하는 일상대로 따라서 살다가 퇴직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다음 날부터 내가 할 일들이 사라졌다. 따라서 아침에 시간을 맞춰 일어난다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매일같이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갈 곳이 없고 규칙적인 생활이 되지 않으니 몸에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몇 시까지 오라는 곳도, 나가 있을 자리도 없다. 나대로 살아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조언 받을 곳도, 따라 할 사람도 없었다. 그 흔한 검색 사이트에도 그런 걸 알려 주는 곳이 없다. 눈 뜨면 일어나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몇 날들을 허둥댔다. 무언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일을 재밌게 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한다. 그 일이 무얼까? 이 고민은 퇴직 몇 년 전부터 시작했지만 다 못한 숙제였다. 선배들은 퇴직 후엔 우선 건강부터 챙기고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50년 전에 일찍 작고하신 아버님도 나에게 “일왈강신(一曰强身)”이라고 하셨다. 건강 챙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건강생활의 전문가들이다. 그 걸 다 따라 하려면 몇 백 년을 살아도 못할 것 같았다. 아마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그렇게 살았으리라. 그래서 나도 남은 세월 건강하게 살려면 남의 말을 쫓을게 아니라 나름의 건강법을 정립하기로 했다. 건강이란 유전 반, 환경 반이란다. 부모님에게 받은 육신은 고혈압과 고콜레스테롤이니 땀 흘리며 살아야 하겠고 섭생에서는 저염식, 저지방식이여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유전적 생체리듬을 살리며 먹는 것만 잘 맞추며 살면 남들 사는 만큼은 살 것 같다. 부모님의 생활방식은 하루 종일 움직이고 땀 흘리며 농사짓고 사셨다. 이것이 나에게도 물려받은 생체리듬이 되었다. 따라서 땀 흘리고 푸성귀 먹고 부모님 같이 사는 게 딱 맞는 처방이다. 아파트 살며 헬스장이나 등산하며 땀 빼면서 살든지, 부모님처럼 시골서 일하면서 먹을 것 길러 먹고살든지 선택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후자가 익숙하다. 그래 시골에 살기로 했다. 일어나자마자 하루 종일 일하는 논밭 한 바퀴 돌아보고 꼬리치는 강아지 한번 쓰다듬어 주고 푸성귀 뜯어 밥상 앞에 앉으면 상큼하다. 땅 세 마지기만 가지면 쌀만 빼고 잡곡과 애들 다섯 가족 푸성귀는 건강식하고도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가끔 인심 쓸 수 있다. 먹어서 맛이 아니라 나눔이란 봉사에 버금가게 마음이 흐뭇하다. 각박하게만 살아온 내 인생 말년에 하찮은 것이나마 나눌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손자들도 내가 보내주는 택배를 받을 때는 할아비를 마음 가운데 놓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면서 혼자 히죽이 미소를 짓는다. 자식 식구들이 방학을 할 때는 먹을 것이 많은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빠듯한 봉급쟁이 살림살이를 하는 며느리 사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유기농 먹거리로 먹고 노는 걸 다 해결해 주니 그런 횡재의 시골행을 마다할 리가 없겠지. 우리 내외가 건강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일하며 땀 흘리며 나누며 살고 싶다. 움직이며 건강하고 나눔의 행복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유명석 씨는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김제중앙초에서 교직자로 정년을 했다. 현재는 영농을 하고 있으며 취미로 산행과 수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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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0 20:59

과유불급 - 김범재

▲ 김범재어떤 미인이 다이어트를 하다가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어느 특정 후보를 위해 지나치게 지지하다 독이 되어 낙선의 빌미를 제공한다. 이럴 때 흔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을 쓴다. 이는 “지나친 것보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으로 잘 못 알고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다가 너무 지나쳐 오히려 건강을 해쳤다거나, 음식을 적당히 섭취해야 영양에도 좋은데 너무 많이 먹어 영양 과잉으로 다른 병을 유발할 경우 등을 말한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너무 도에 넘치는 지나친 말을 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볼 때 흔히 쓰고 있다. 그런데 이는 과유불급의 본뜻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과유불급은 논어에서 나온 말이다. 논어 선진 편에 보면 <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말을 해석하면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 중에 자장과 자하가 있는데 어느 쪽이 더 어질고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전기 제자인 자공이 스승에게 후기 제자들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그러자 스승 공자가 대답을 했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그럼 자장이 낫단 말씀입니까?”하니까 공자는 “아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과유불급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자 유(猶)자의 훈(訓)을 보면 ‘오히려’, ‘차라리’, ‘같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즉 부사로 쓰일 때는 ‘오히려’, ‘차라리’가 되지만 서술어로 쓰일 때는 ‘같다’로 해석해야 된다. 그러므로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해석은 잘 못 된 것이며, “지나침과 모자람은 같다.”로 해석해야 맞다. 따라서 “지나친 것보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같다.”라는 뜻이다. 조선조 황희 정승이 길을 가던 중 소 두 마리를 몰고 밭을 가는 노인을 만났다. 그래서 황희가 그 노인에게 물었다. “두 마리의 소 가운데 어느 소가 더 밭을 잘 가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밭에서 나와서 귓속말로 오른쪽 소가 더 잘 간다고 했다. 그러자 황희가 밭에서 말해도 되는데 왜 밖으로 나와서 말을 하느냐고 하였다. 농부는 소도 귀가 있는데 잘한다고 해야 좋아하지 못한다고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황희는 정치를 하면서도 이 말을 되새겨 후세에 청렴결백한 재상이 되었다고 한다. 밭을 가는 노인도 이것을 아는데 공자께서 자공에게 두 제자 중 누 가 더 났다고 얘기를 했겠는가.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잘 못된 해석을 인용해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뜻으로 잘 못 사용하고 있으니 무척 안타깝다. 골프는 공을 홀 안에 넣어야 되는데 홀에 미치지 못한 것을 지나친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차이가 얼마가 되든 미치지 못한 것이 나 지나친 것은 똑같다. 공자 말씀대로 우리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던지 보양식을 먹던지 어떤 일을 하던지 과유불급하게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일생을 살자. △김범재 씨는 전북교육청 초등교육과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평생교육원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교육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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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3 21:03

자만동 찾아서 - 이대영

▲ 이대영조선왕조의 후예로 전주에 살면서도 자만동 마을이 생소해서 불현듯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서 겸 쉬엄쉬엄 먼저 한벽당에 올랐다. 좌우를 살펴보니 왼편으로 멀리 중바위가 보인다. 아래로는 슬치고개 박이뫼산에서 발원하여 상관 계곡을 지나 이곳 한벽당에서 몸을 틀어 전주 도심을 감싸고도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었다. 한벽루의 풍광을 즐기고 최담 유허비가 있는 조그마한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이정표가 있었다. 왼편 산자락을 따라가면 옥류동이 있고, 좀 더 가면 자만동 마을이 있다. 가는 길을 뒤로하고 고개 넘어 낙수정 마을로 향했다. 마을 가운데 오래된 우물이 있었는데 계곡의 물이 이곳에 낙수 되어 우물을 이룬 낙수정이 확실했다. 뒤돌아 고갯마루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만동은 승암산자락을 따라 한벽루 이목대 오목대를 잇는 능선 밑으로 형성된 향교 북쪽의 경사진 마을이었다. 옥류 2길을 따라 내려오니 입구가 나왔다. 오목대 쪽으로 평지 길을 가다 보니 드디어 자만동 마을이 보였다. 자만동2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자만동금표라는 표지석이 어느 집 담장 밖에 외로이 서 있었다.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자만동 일원을 조선왕실의 성지로 조성하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서 나무를 베거나 몰래 묘지를 쓰는 것 등을 금하는 표지석이었다. 원래는 4개가 있었으나 다행히 남의 집 담장 돌로 사용되었다가 발견되어 이곳에 세워졌단다. 아마도 오목대와 이목대를 성역화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의 정신을 읽어내는 중요한 자료인 만큼 보호각이라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재질은 전주에서 나오는 ‘전주석’으로 쑥돌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불현듯 이곳이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를 갖춘 명당자리임이 확실했다. 뒷산 발리산과 좌우를 감싸주는 날개며, 왼편에서 흘러들어와 마을을 감싸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전주천의 형국이 풍수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전주에서는 아마 이만한 형국을 갖춘 마을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씨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리산이라고도 하며 이목대의 이(梨)자를 이(李)자로 바꾸어 이목대(李木臺)라고 칭하기도 했나 보다. 자만동 그 이름은 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 옛 시가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자만(滋滿)은 자만(子滿)으로 자식이 많이 불어난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아래편에는 향교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자만동1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옥마을 외곽에 자리한 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이성계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나고 자란 곳인데 최근에 이곳을 벽화마을로 조성했다. 마을 아래편 기슭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쓴 유허비가 있다. 조경단을 조성한 그 이듬해인 1900년 목조대왕 구거지로 전해지고 있는 자리에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그런데 오목대 맞은편 육교 아래 있다가 철로가 철거되고 기린로가 뚫리면서 주택가 쪽으로 이전된 것이다. 경사진 계단을 따라 협소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미안한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자만동 마을을 돌아보며 잠시나마 조상들의 옛 자취를 생각해볼 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빨리 대우받지 못한 조상의 발자취를 본래의 위치로 돌려놓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대영 씨는 전주 서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했으며 현재 어진박물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가는 옛말 모음집 <그게 시방 무신 말이디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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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6 20:56

백구와의 이별 - 김금례

▲ 김금례너와 작별을 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구나. 네가 떠나는 날은 나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듯 아팠다. 시간이 가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너와 함께했던 시간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외출하고 집에 들어오면 두 발로 서서 반겨주고 대문이 열려 있어도 너는 나가지 않고 우리를 지켜준 일등공신 수문장이었지. 어느 가을인가는 뜰에 낙엽을 쓸다가 내가 잃어버린 묵주를 찾아 현관에 갖다 놓아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었지. 자녀들이 떠난 빈자리를 허허롭지 않게 채워주었던 너는 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귀염둥이였지. 마지막까지도 우리 가족에게 충성을 다하고 순종하며 떠난 너의 모습에 나는 오늘도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인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려고 했지만, 너와 살기는 이곳이 좋아 함께 살려고 리모델링까지 했는데 네가 없는 우리 집은 쓸쓸하기만 하구나. 백구는 막내아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구입해 가슴에 품고 들어왔다. 눈은 까맣고 귀가 늘어진 하얀 옷을 입은 귀여운 풍산개 족보였는데 털이 희어서 백구라 이름 지었다. 엄마와 떨어져 울만도 한데 아들과 함께 있으니 낮에는 방마다 다니며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아들이 취직되어 서울로 떠나면서 집에 남겨두고 갔다. 백구는 투정하지 않으며 밥만 주면 충성을 다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분가한 아들딸 가족들이 오면 꼬리를 치고 반긴다. 손자들은 그런 백구가 좋아서 개 껌과 소시지를 가져다준다. 백구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비둘기처럼 양순했다. 손자들이 목마를 타고 귀찮게 해도 다 받아주었다. 사람을 가려 짖으니 개답지 않다며 동네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세월 이길 장사 없다더니 백구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14년의 노구로 누워 있는 때가 많았다. 내가 밖에서 들어와도 앉아서 꼬리만 흔든다. 모임 갔다가 남은 음식물을 가져다주면서 ‘백구야, 올해는 황금 개띠 해란다. 힘을 내라!’라고 하면 남편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래도 평소 좋아했던 족발을 보면 일어나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맛있어?’ 나는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장수를 염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에서 비스듬히 누워 불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갈 때가 왔구나!’ 운명을 직감하고 고기와 우유를 주어도 먹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백구는 현관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아들이 흰 베에 싸서 가슴에 안고 화장터로 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친정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같았다. ‘백구야! 다음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고 사람으로 환생하렴.’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었던 남편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지 큰아들이 백구 집을 치우려고 하자 아무 때나 밥 먹고 놀다 가게 그대로 두라고 했다. 백구야, 추운 겨울을 보내고 지금은 따뜻한 봄이 왔다. 앞뜰 감나무는 새잎을 품고, 모과나무와 동백나무는 꽃이 피고 새싹들이 나왔다. 하얀 꽃은 너의 분신처럼 우리 가슴속에 오래도록 피어 시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도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100세 시대라지만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이제는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건강을 챙기며, 잃어버렸던 내 인생을 찾아 취미 생활을 하면서 검소하고 천박하지 않게 베풀며 사람답게 살다 가려고 한다. 백구보다 더 예쁜 개를 보내 줄 테니 슬퍼하지 말라고 막내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리 부부는 봄의 햇살을 받으며 쉬엄쉬엄 건지산에 올랐다. △김금례 씨는 수필시대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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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9 20:18

나는 행복 합니다 - 이석효

▲ 이석효행복은 사랑에서 온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나눌 줄 안다. 사랑은 배경이 아주 중요하다. 겸손한 자에게만 사랑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올곧은 사랑을 가진 정직한 사람 찾기는 귀하다. 나는 일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실천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진리다. 우리가 충실하고 성실히 살아도 욕심은 한이 없다. 그 욕심을 가득가득 채우면 말세가 온다. 그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보상을 받으면 만족과 기쁨을 맛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이타적인 또 다른 나를 위해 살아야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4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속에 살면서 증조부로부터 한문과 기도를 배웠다. 새벽마다 사랑채 할아버지의 사서삼경 읽는 소리와 아버지의 아름다운 필체 속에서 화목한 대가족의 삶이 좋았다. 증조부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잘 몰라서 ‘무엇하세요’하고 물으면 기도한다고 하지 않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셨다. 이 말이 훗날 나의 신앙생활에 씨앗이 되어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방안에서는 언제나 여인네 향수 같은 먹 냄새가 있었다. 새벽마다 곱돌 화로에 꺼지지 않은 불씨를 담아다가 쇠죽 솥에 불을 지피고 안채에는 밥을 지었다. 이런 나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증조부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구두를 신고 다녀서 별명이 뾰족 구두였다. 상급학교 시절 또한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특히 역사 선생님은 3년 동안 한 번도 빠짐 없이 나에게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물어보셨다. 그래서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고,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은 어느새 꿈 많던 나를 훌쩍 노년기까지 싣고 왔다. 그동안 세상을 살다 보니 착하고 정직한 사랑을 베푼 사람이 그리 흔치 않았다. 세상에서 빛없이 살 수 없듯이 우리 자신에 사랑의 빛이 가득 차면 건강한 힘이 솟는다. 세상 종교가 이것을 찾고 있으나 육신의 욕망에 가려져 있어 빛을 찾지 못한다. 사람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영의 세계다. 천국은 죽은 뒤 가는 곳이 아니다. 빛 안에 사는 삶은 외롭지 않으며 심심하지도 않다. 세상의 고난도 어려움도 위로가 넘치며 어떤 환경에서도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런 동기도 없이, 심지어 감사를 요구하는 것조차 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며, 자기가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 그냥 행복해하는 것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진 아름답지 못한 욕망이다. 천국은 죽은 뒤 가는 곳이 아니다. 빛 안에 사는 삶은 외롭지 않으며 심심하지도 않다. 세상의 고난도 어려움도 위로가 넘치며 어떤 환경에서도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한없는 사랑을 베푸신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며 사는 만족과 기쁨, 즐거움으로 나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랑 안에서 온 세상이 하나가 될 때를 바라는 소망이 있어 행복하다. △이석효 씨는 아시아 서석문학에서 시로 등단했으며, 현재는 징검다리수필문학회 회원과 전북문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신앙 시집 <하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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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2 19:31

세월을 타는 즐거움

동지 팥죽도 설날 떡국도 두 그릇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동지 팥죽과 설날 떡국을 먹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는 한 살의 나이라도 더 먹는 게 아쉬운 심정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필자도 10대 때는 나이를 빨리 먹어 어른들처럼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고희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세월이라는 열차를 타고 끊임없는 인생 여행 중이다. 흔한 말로 인생 열차는 나이대로 속력을 내서 10대 때는 10㎞로 달리고 50세는 50㎞로 달린다더니 어느새 나의 인생 열차는 70㎞의 속도까지 치닫고 있다. 이 세월의 인생 열차는 브레이크가 없어서 멈출 줄 모르고, 영어를 몰라 U턴할 줄도 모른다. 종착역을 알려주지도 않고 쉼 없이 달리면서 승객들의 애를 태우기만 한다. 과속 신호 위반이나 단속 카메라도 없어 무사통과다. 다만 멀미가 나서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스스로 중도하차를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인생 열차의 기관사는 누구일까? 바로 나 자신이다. 인생 여행을 즐겁게 해주거나 혹은 괴롭게 해주는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관사인 내가 어떤 마인드로 운행하느냐에 따라 세월을 타는 기차의 맛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요즈음 와서야 나는 우리 연령대의 속력이 세월을 타는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속도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60㎞는 좀 더디고, 80㎞ 이상은 과부하가 생겨 어지러워 70㎞대가 편안하고 경제적인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속도가 바로 지금 우리들 세대의 인생 속도인 것이다. 인생을 마음의 부담 없이 만족하게 즐길 수 있는 때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또래들은 정말 좋은 시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공자는 일찍이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즉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70대가 인생의 가장 황금기임을 말한다. 달력 한 장 한 장 뜯겨지는 것을 한탄할 게 아니라 뜯는 재미를 찾으면 이 또한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까? 도전지락(挑戰至樂)! 도전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젊은이만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도전해 보는 열정. 목표를 성취했을 때 느끼는 희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젊음으로 되돌리는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나날이 성숙해가는 손주들을 보는 재미도 나이 먹는 즐거움일지고. 늘어나는 주름살, 바닥나는 체력, 희망이 없는 삶 등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흘러가는 세월에 먹는 나이인데 남들이 뭐라 하던 내 취미를 살려 한 번쯤 도전정신으로 재미를 느끼고 또 주변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이 같은 노년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으랴! 가을 날 물들어 가는 감나무 잎처럼 뜨겁고 어두웠던 마음들을 널어 말리며 이제는 온 힘 다해 살지 않기로 하자. 싹이 돋고 잎이 자라 낙엽이 지는 사이 자박 자박 누군가 오고 또 누군가 가버린 인생 여행의 순례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을 하나로 포개보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천천히 햇살에 나를 꺼내 말리며 살아갈 일이다. 인생 열차가 멈출 때까지 세월을 타는 즐거움을 만끽해보자. △김재균 씨는 전주 양지초등학교 교장으로 42년 공직생활을 마쳤다. 교단 재직시 가족이 함께 하는 교육에 힘써 한국일보사가 제정한 한국교육자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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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5 21:11

작지만 소중한 봉사 - 문진순

▲ 문진순노인복지관에서 재능 나눔 봉사 활동이 있으니 참여해달라는 권유가 인연이 되어 월요일 오전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하게 되었다. 복지관 식당 주방에서 만들어준 음식을 공익요원과 같이 도시락을 싸서 직원이나 봉사자가 운전하는 봉고차에 오른다. 무릎에 올려놓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나와 현관문을 두드리며 ‘도시락 왔습니다.’ 하며 손잡이를 돌리면 미리 문을 열어 놓고 계시는 집이 많다. 어느 날, 원룸 3층 현관문을 노크해도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키로 문을 열고 손잡이에 걸려있는 막걸리 두 병과 도시락을 들고 들어서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가 양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나오셨다. 이제 일어나셨느냐고 물으니 기운이 없어 누워계셨단다. 가지고 온 도시락과 막걸리 봉지를 내려놓으며 지난번에 배달한 도시락통을 드니 열어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 식사는 안 하시고 막걸리만 드세요?”라고 묻자 막걸리는 목에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가서 가끔 이웃집 아주머니께 부탁하여 사다 마신다고 했다. 혼자 계시는 것이 불안해서 요양원으로 가시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먼 산만 바라보셨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마지막 배달지인 할머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을 들어서자 누워계신 할머니는 아랑곳없이 텔레비전만 혼자 떠들고 있었다. 목까지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고 계실 때는 가슴이 덜컥했다. 할머니도 역시 배달된 도시락은 열어보지도 않고 머리맡에 베지밀만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 식사를 안 드셔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밥은 넘어가지 않아 잘 먹지를 않은데 어느 날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을 때 몇 모금 마시려고 받는다며 미안해하셨다. “괜찮아요. 한 모금이라도 필요할 때 마실 수 있다면 배달은 해야지요.” 밥이 그대로 남아있는 도시락을 답답한 마음으로 들고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들고 간 도시락을 내려놓고 빈 도시락을 챙겨 나오면 고맙다고 손을 놓지 못한 분, 골목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한 분, 걸음이 불편하여 현관문 안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분,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며 배려해 주신다. 집에 매어있던 개들도 처음에는 목줄 끝까지 뛰어오르며 짖어대더니 이제는 발소리만 듣고도 기다리다가 들어서면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방학하자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서 2주 동안 배달을 쉬다가 갔더니 열쇠가 3개 중 하나가 줄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다리가 풀리면서 종일 마음이 쓰였다. 지난번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새끼발가락 골절로 2개월 고생하고 그 뒤 혼자 라면을 끓이다가 발등에 화상을 입어 2개월 고생하며 회복이 늦어 꼼짝 못 하고 집에 갇혀 있었던 분이다. 따뜻한 밥을 기다리는 노인들에게,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도시락을 들고 찾아가는 일을 이 나이에 내가 한다는 것은 이웃을 돕는다는 조그만 자부심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그 작은 일이 다리가 불편하여 쉬고 있으니 마음도 같이 불편해진다. 작은 일도 건강해야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쉬움이 크다.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 찾아갈 수 있는 그 작은 시간의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추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가을쯤엔 다시 도시락배달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문진순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영호남수필 사무국장, 대한문학 작가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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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9 20:04

지게꾼에서 택배회사로 - 윤재석

▲ 윤재석지게로 물건을 나르는 지게꾼은 옛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낯익은 모습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지게꾼들은 하나의 직업으로 출발하였는데 세상이 변하여 이제는 회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게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짐 운반 도구인데 허술해 보여도 균형을 잡는 기술이 필요하여 만약 균형을 잡지 못하면 넘어지고 만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지게질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처음 지게에 짐을 얹고 일어서면 지게는 내 등을 마다하고 제멋대로 놀며 자꾸 등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실랑이 끝에 겨우 일어서면 이제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려 나는 그때 비로소 지게꾼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지게꾼의 하루 고달픔을 잘 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등과 이마가 땀으로 젖어있는 모습으로 봄이면 논밭에 거름을 나르고, 가을에 추수할 때면 농작물을 거두어들인다. 이렇게 시골의 지게꾼들은 힘든 일만 하는 농사꾼들이다. 그런데 도시로 나와 중학교에 다니며 마침 사촌 형, 누님과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누님과 함께 시골에서 가지고 온 자취용 쌀을 기차에서 내렸다. 동이리 역에서 내려 개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지게꾼이 마구 달려들어 쌀자루를 가져갔다. 나는 그때 시골에서 보았던 지게꾼들이 도시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님은 쌀자루를 가져가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게꾼을 따라가며 누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주현동 구세군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발견은 도시 지게꾼과 시골 지게꾼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시골 지게꾼은 몇 번을 쉬는데 도시 지게꾼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자취방까지 도착했기 때문이다. 누님에게 품삯을 받고 가는 지게꾼을 보면서 시골은 하루 일이 끝나야 돈을 받는데 도시에서는 시간마다 돈을 받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게꾼의 수입은 땀과 비례했다. 즉 짐을 많이 나르고 땀을 많이 흘리면 돈도 많이 벌고, 짐도 적고 땀을 적게 흘리면 돈도 적게 벌었다. 시골을 자주 왕래하며 시골의 지게꾼은 대부분 농업이 직업이지만 도시의 지게꾼은 직업도 지게꾼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게꾼은 기차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게꾼이 짐을 운반해 주는 직업이다 보니 버스 정류소, 시장 등 짐이 있는 곳에는 지게꾼들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다 보니 지게꾼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지게꾼이 나르던 짐을 지게가 아닌 리어카(손수레)로 대신하며 직업도 리어카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리어카로는 한 번에 많은 짐을 운반하니 짐을 가진 사람들이 리어카을 선호하게 되자 자연히 지게꾼의 직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리어카도 작은 용달 자동차가 등장하자 오래가지 못했다. 이렇게 지게꾼에서 리어카도 리어카에서 용달차로 이동을 하더니 이제는 짐을 전문적으로 배달해 주는 택배 회사가 생겨나서 아주 호황을 누리고 있다. 택배 회사는 21세기에 뜨는 직종의 하나가 되었다. 전화 한 통화면 전국 방방곡곡 아니 전 세계로 짐을 가져다 배달해 준다. 이런 택배사업은 개인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인 우체국과 항공사들까지 한다. 이렇게 앞다퉈 경쟁을 하는 것을 보니 돈벌이가 꽤 쏠쏠한 모양이다. ‘지상에서 우주로’가 ‘지게꾼에서 택배 회사로’가 되었다. △윤재석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한 수필가이자 서예가다. 안골은빛수필, 영호남수필, 행촌수필 회원이며 한국문인화협회 전북지회장으로 활동했다. 수필집 <삶은 기다림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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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2 19:36

아! 전라감영 - 국중하

▲ 국중하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서울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각각 감영을 설치했다. 그리고 8도 관찰사 아래 목, 군, 현이라는 요즘의 시군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 사법, 군사권을 가졌으며, 2년 임기 동안 관할 지역을 순찰하던 제도인 순력체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감영에 머물면서 다스리던 유영체제로 바뀌었다. 전주성 내 중앙동 옛 도청사와 경찰청 자리에 한강 이남에서 최대의 전라감영을 설치하고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호남지역을 전라감사가 총괄하는 행정기관이었다. 전라감영은 감사가 집무하는 포정문,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선화당, 감사의 주거 공간인 연신당,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 내아, 감사가 친히 나가 농정을 관람하던 관풍각, 내삼문 등 40여 채의 웅장한 규모를 갖추었다. 또한 행정의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가 설치된 자리로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그 밖에도 부채를 제작하여 임금에게 진상했던 선자청과 나라에 공물로 바칠 종이를 만들던 지소, 책을 만들던 인출방이 있었다. 그리고 대사습놀이와 관련된 통인청도 있었다. 이렇듯 전주는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총체적인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전주 중앙동에 위치했던 전라감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라감영이 자취를 감추고 자료마저 대부분 소멸되어 보존하지 못한 애석함이 너무도 크다. 다행히도 조선 말의 전주 모습을 담은 고지도가 아직 남아있고,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의 사진이 구술기록과 함께 전해오고 있으니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국가기록원의 배치도면을 면밀하게 살펴서 이를 복원자료로 활용함은 전라감영을 한국 근대사에서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이미 감영 복원을 마친 경상, 충청, 강원 감영은 좋은 본보기다. 일찍이 풍수와 지상가들이 전주를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행주형으로 많은 사람과 재물을 한배 가득 싣고 계류하고 있는 형상이라 설파했다. 상제님께서도 군산이 세계 물류의 중심지가 될 것이며 “군창-군산)이 천하의 곳간이 될 것 이니라.”라고 예언했다. “지유군창지 사불천하허 地有群倉地 使不天下虛/왜만리청만리 양구만리 倭萬里淸萬里 洋九萬里/ 피천지허 차천지영 彼天地虛 此天地盈” 이 땅에 군창(군산)이 있으니 천하를 비우게 하지 아니 하리라. 왜국과 청국이 멀고 서양은 더욱 머나 저곳은 텅 비고 이곳은 가득 차리라. “군창이 천하의 큰 곳간이 될 것이니라.”라는 뜻이다. 전주는 예로부터 풍광도 수려하고 먹거리도 풍부하여 한양 평양 다음으로 번성해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러던 전주가 어떻게 해서 전국 30대 도시로 쇠락하여 매어둔 배가 밧줄이 끊어져 향방 모르고 표류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늦었지만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전라감영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하고 연구해서 당시의 문화와 가치관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란했던 역사를 똑바로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요즈음 인산인해를 이루는 한옥마을과 객사 그리고 연지공원, 건지산, 산성, 치명자산까지를 포함한 벨트를 조성하여 관광콘텐츠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구도심도 살아나고 관광산업도 육성시킬 수가 있다. ‘삼락농정’ 미래의 경제 동력 ‘새만금’을 풀가동하여 떠내려가는 뱃머리를 다시금 전주성 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단단히 붙들어 매서 환골탈태해야 한다. △국중하 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예총 완주지회장으로 있다. 우신산업(주) 대표이사로 있으며 <별빛 쏟아지는 여산재>를 비롯해 8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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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5 18:38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 서상옥

▲ 서상옥 까마득하게 잊혔던 옛날, 어느 천재 소년의 일기 한 구절이 생각난다.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될까?라는 어린 소년의 티 없이 맑은 글이다. 2014년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는 한국의 침몰이라는 뉴스로 해외 토픽에 오를 만큼 지구촌에 큰 충격을 주어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4월의 잔인한 봄바람이 아름답게 피어날 꽃송이들을 검은 파도 속에 묻어버렸다. 그야말로 온 민족에게 슬픔과 분노를 안겨준 대한민국의 침몰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해훼리호 사건에 이어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지하철 참사 등 사전 대책이 없었던 인재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진도 앞바다에서 안전 불감증 없이 대형 사고를 유발했다. 소위 조선 강국이 되었다고 떵떵거리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하필 일본에서 20년이 다 되어가는 폐선을 사들여 균형을 잡지 못할 정도로 5층까지 증축해서 평형수도 빼낸 채 과중한 선적으로 운행하다 참변을 당했다. 무책임한 선장과 비정규직인 선원들이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들을 고스란히 배 안에 묻어놓고 자기들만 빠져나온 장면을 보고 온 국민들과 유족들은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세월호 실소유주가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파 교주로 종교를 빙자한 사기범이었으며 그 아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인 재산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단다. 우리나라 사회문화와 정치, 경제, 교육, 국방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구멍 난 곳이 어찌 이런 종교 단체뿐이었던가? 그야말로 악의 원천인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모두 도둑놈 천국이라는 유행어가 또다시 회자되었다. 황금만능주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 우리 사회는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개인의 영리에만 눈이 어두운 욕망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국민 소득이 아무리 높아가도 OECD 국가 중에서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하위권이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그동안 큰손으로 경제를 흔들었던 사건이나 정계를 어지럽혔던 각종 게이트는 모두 우리나라 부정부패의 표본이었다. 민주투사를 총칼로 다스리던 정권이나 당리당략에 혈안이 된 정치가들이 오히려 사회를 불안하게 했었다. 또한 일류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그들의 시녀가 되어가는 현실들에 가슴이 너무 무겁다. 때로는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가 염려된다. 이제부터라도 진정 부실하게 살아가는 악의 뿌리는 하나도 없이 미분해야 하지 않을까? 항상 지난날을 망각하고 사는 우리 민족의식이 새로워졌으면 한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찾아 정의롭게 살아가는 지혜가 아쉽다. 진리는 부정할 수 없는 공리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인 것처럼 자명한 것이라고 본다. 국가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지혜,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회, 선을 쌓아가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그동안 좌절과 허탈감으로 가득했고 이러한 상처들을 치유하며 살았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좋은 나라는 국민을 향한 리더십, 성숙한 국민의식, 개인의 노력 3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준비된 국민들이 더 좋은 국가와 리더를 만들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성숙하는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서상옥 씨는 대한문학 수필, 월간 한국시 시로 등단한 수필가이자 시인이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옛날은 가고 없어도>, 시집 <아득한 별들의 고향> 등 다수가 있다. ■ 고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 보도문 본 인터넷 신문은 2018년 03월 08일 오피니언면에서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 서상옥」이라는 제목으로 세월호 실소유주가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파 교주로 종교를 빙자한 사기범이었으며 그 아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인 재산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단다.라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고 유병언 전 회장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관련 주식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최근 관련 재판에서 청해진해운 주식의 실소유자라고 특정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고 유병언 전 회장 측은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에서 교주로 추앙받은 사실이 없으며, 유 전 회장의 자녀 및 일가친척들이 신도들의 재산을 착취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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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8 21:20

눈 내리는 날의 시 한편

▲ 황정현누군가는 나름대로 이유를 내세워 겨울의 찬가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나는 계절 중 겨울이 가장 싫다. 무엇보다 추위의 칼날이 내 몸에 스치면 괴롭기 짝이 없다. 바람결에 차가운 냉기가 나에게 퍼부어질 때마다 나는 오싹 떨면서 가능한 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피한지를 찾거나 따뜻한 안방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은 겨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얀 눈이 내리고 온 세상이 하얗게 되면 내 마음도 함께 하얗게 채색되어 간다. 보고 싶은 마음도 그리움으로 까맣게 타버린 가슴도 하얗게 채색되어 또 다른 사랑이 꽃이 되어 아득한 그리움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함박눈을 보면 더욱 마음이 가라앉고 어떤 전설이 내 귀에 들릴 듯싶다. 동심에 빠져들고 저 깊고 넓은 눈의 춤사위에 나도 흔들며 둥둥 떠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현실의 삭막하고 힘든 삶의 생채기를 잠시 잊은 채 천지에 내리는 눈들이 만들어 낸 하얀 군무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눈 내리는 산촌을 하염없이 걷는 연인들을 보면 무대에 등장하는 연극의 주인공들처럼 느껴진다. 도란거리는 사랑의 밀어조차 흰 눈처럼 맑고 순수한 정으로 가득 찰 듯싶다. 날리고 흔들리며 하강하는 눈과 더불어 나도 가볍게 춤추듯 걷는다. 내 마음을 채우는 생기가 눈의 군무와 어우러져 천지간에 퍼지면 기쁨으로 시심(詩心)이 솟는다. 적막강산을 하얗게 뒤덮으며 내리는 눈의 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락사락 내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소르락소르락 내린다고 써야 할까. 아니 이런 의성어는 눈의 춤사위를 표현하는 시어가 아니라는 감정이 앞선다. 아득한 하늘, 저 위에서 한없이 부드럽게 내리는 눈의 소리가 시가 되어 학춤으로 날아오르는 아스라한 광경을 표현해 볼 일이다. <전략>천지는 순백의 그림책이다/무수한 눈의 혼들이 저마다/외로운 율동을 기억한 채/묵묵히 냉랭한 여행을 떠나며/하얗고 하얀 종교를 만났구나/처량하도록 가볍게 내려와서/새벽 기도를 어루만지고/천지신명을 유혹하더니/바람의 장단에 맞추어/춤을 추었던 소리를 찾는가/종적도 없이 사라지는/허망한 춤을 추었던 설아/거룩하다/안타깝다/슬프다 나는 시의 말미에 눈에 대한 떨림, 가벼움과 열광의 지순한 감상에 젖어 ‘거룩하다/ 안타깝다/ 슬프다’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새벽꿈에 홀연히 결미의 시어가 너무 눈답지 않고 눈의 춤으로 날고 있던 장쾌함을 흔들어 놓는 딱딱한 표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고 고민하며 고쳐 쓰느라 잠이 달아났다. 고요하고 처연한 밤 풍경이 선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 내리는 밤 어머니와 싱건지를 꺼내먹던 옛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의 세계를 시의 세계에 비벼 넣으려니 별별 생각과 상념이 뇌리에서 떠돌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비비적대다 뭔가를 썼는데 스르르 잠이 다시 찾아왔다. 내 감각으로 금방 깊은 잠이 든 듯싶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아내가 내 얼굴에 언어의 소나기를 퍼붓고 있었다. 시를 짓는 과업은 크든 작든 시련을 겪으며 쓸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거룩하다, 안타깝다, 슬프다, 라는 직설적이거나 작위적인 연민을 다소 부드럽고 은유가 스민 시어로 바꾸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불꽃처럼 떠올라 고심 끝에 나의 의중에 맞는 의미의 시구로 고쳐 썼다. 거룩한 군무(群舞)를 지어/어둠 속을 날았던 사랑의 설/바람에 실려간 꿈이 그립다. △황정현 씨는 계간 『시선』과 『에세이 문학』을 통해 시와 수필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계절의 연가>가 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북문예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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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1 20:47

주꾸미의 반란 - 김재희

▲ 김재희사람들은 가끔 숨 막히는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주꾸미 철이 한창인 작년에 의기가 투합한 사람끼리 모여 희희낙락 부안 나들이를 나섰다. 나이가 많건 적건 어딘가를 찾아 떠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몇 대의 차로 끼리끼리 나누어 탄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코에 스며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격포항이다.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발걸음들을 잡는 호객이 더욱 구미를 당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당부터 들렀다. 먼저 자리한 사람들이 마치 주인처럼 우리들을 반긴다. 이미 준비된 식탁 위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즐비하다. 냄비에서는 육수가 끓고 있었고 그 옆엔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주꾸미가 접시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나가 보았자 부처님 손바닥이지만 생존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몸부림하는 모습이 사람들에는 구경거리다. 거기다가 매정하게도 간신히 벗어나면 다시 제자리에 옮겨 놓는다. 어느 날 갑자기 덫에 걸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포로가 된 세상에서 갈 길을 잃고 허둥대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거부할 수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삶의 한순간이 되어 버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한없이 넓은 공간으로 떠다니던 자유를 갈망하고 먹이사슬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공생하며 살았던 팽팽한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들에게 잠시나마 남아 있는 시간은 참으로 짧고도 귀한 시간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저들은 삶의 끝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전처럼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을 뿐이다.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다가 무언가가 몸체에 닿은 듯싶으면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어떤 놈은 까만 먹물을 쏘아 댄다. 아주 당차고 야멸친 반란이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반란,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에게 주어진 본능이리라.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는 본능,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경제적 자립, 남보다 잘나가고 싶은 욕망 등의 울타리 안에 갇혀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 또한 어느 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삶이다. 우리가 주꾸미의 앞일을 알고 있듯 우리 또한 신이 알고 있는 주어진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이 어느 쪽인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를 맞이하는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생명이다. 이제 지나온 시간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마음 아픈 일도 많았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노래처럼 좋은 일에 묻혀 이만하면 잘 살아온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나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폭풍이 불어올지 모르는 일이다. 잘되어 간다고 믿었던 일이 어느 순간에 구멍이 날 수도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설령 그렇더라도 나름대로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한 나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을 땐 누구나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당하는 일 앞에선 이성을 잃기 쉽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인성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언제나 하찮은 감정 앞에서도 우왕좌왕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쩌면 지금 어느 막다른 골목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고 헛된 욕망과 절망과 질시와 미움으로 기운을 다 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주꾸미를 닮은 몸짓으로 어설픈 반란을 일으키며 갈 길을 찾아 더듬거린다. △김재희씨는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장승’으로 등단한 뒤 수필집 <그 장승을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를 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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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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