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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날의 산문

이발을 했다. 아니 머리를 잘랐다. 이발은 머리를 깎고 다듬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아파트 단지 내 헤어숍에서 머리만 잘랐다. 면도도 하지 않았으니 뭘 다듬어 준 게 있겠는가. 돌아오면서 한참 뒤 생각하니 오늘 같은 날이라도 이발소로 가서 머리도 자르고 면도도 하고 다듬어 줄 걸 그랬군 싶었다.아침에는 운동을 하고 평소대로 손자들 데리고 와서 달래가며 서둘러 밥을 먹게 한다. 이어서 등교 시간 늦지 않게 학교 보내는 게 군대 생활 점호같이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평소와 달리 1학년 4학년인 손자들이 꼬막 손으로 분홍색 봉투를 내민다. 1학년 손자는 작은 지폐 두 장을 동봉하고서 초보 글씨로 ‘할아버지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썼다. 글씨 아래엔 어른과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크게 그려두었다. 그리고 어른 그림 아래에는 ‘할아버지’, 꼬마 그림 아래엔 ‘나’라고 썼다.아침 없는 날 없고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는 날도 드물다.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시간, 나는 허리 아픔에서 탈출해 일어날 수 있음을 하나님에게 먼저 감사드린다. 이어서 책상으로 가서 아침 시간 깨어나는 정신으로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든 일 없이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도한다. 다음 온수 한 잔을 몸속으로 공급한다. 이어서 산길에 나선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내 인생을 끌고 간다. 그동안 나는 고향에서 객지에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생명으로서 몸살을 많이 앓았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 부모님과 한아파트에서 지내다 부모님 먼저 허무의 본질 속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아오셨던 그분들에게 존경을 표함에 인색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꽃인 경제 쪽으로 둔하고 무능한 사람들 속에 가족도 있었고 나도 갇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열심히 사는 양 아는 체를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싸가지 없는 소행이었다.산길을 거닐다 보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해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자유롭게 걷지 못해 불편해하는 분을 볼 때는 아니 볼 상황을 훔쳐보는 것 같이 미안해진다. 내 의지대로 내 육신을 운행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점점 커 보인다. 그러한 가운데 자동차 주행가능 거리를 보면서 내 삶의 주행거리와 남은 에너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오늘은 내게 있어 의미 있는 날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자랑할 만큼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구 같이 아들딸이 박사 학위 받는 날도, 검사 판사에 임명되는 날도 아니다. 주식이 튀거나 복권 당첨은 더욱더 아니다. 그저 혼자서 작은 의미를 안고 ‘내가 이 땅에 온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강물에 내 얼굴 비춰보듯 해야 할 날이다. 이어서 이 땅에 올 때의 예의가 있었다면 갈 때의 도리도 소중하겠다는 점을 곱씹어 볼 날인 것이다.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는 동안 커트 보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흰 머리털이 꽤 섞였다. 그래, 때 되면 모두 잘려나가고 떠나는 거겠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머리털도 내 부실한 치아로 더디 씹어 삼킨 음식의 영양분으로 자랐을 텐데…하는 생각으로 마음속 한 곳이 묵직해졌다. 그 순간 “다 되었습니다.” 하는 주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출입문을 밀고 오후의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젊음은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이라는 들어봄 직한 문장의 언어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김경희 수필가는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국제펜클럽전북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문학관아카데미’에서 수필을 지도하고 있다. 수필집 〈사람과 수필 이야기〉 외 몇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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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1 23:02

나침반

노련한 등산가는 늘 나침반을 지니고 다닌다.나침반은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사용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금방 꺼내 길을 쉽게 찾기 위한 것이다. 보통사람들도 나침반을 지니고 산다. 자기만의 어떤 특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가는 것을 정상으로, 나쁜 상태에 직면했을 때는 올바른 상태로, 낮은 단계일 때는 높은 단계로 가려는 의지 등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일을 행하게 된다. 어떨 때는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기약 없는 인내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생이라는 굴레는 누구나 거쳐야 하는 단계는 아니더라도 주관적인 판단 속에는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나침반이 있다.어느 해 가을, 용머리 고개 튀김집에서 갓 구워 올린 꽈배기 냄새가 코앞을 가로막았다. 반세기 전 아버지가 사주시던 꽈배기가 그 집 창가에는 진열되어 있다. 그 앞에는 낯모르는 어린 학생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호주머니를 뒤지며 돈을 찾는 것 같았다. 아마 돈이 없거나 잃어버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손에 꽈배기를 쥐여주었다.꽈배기를 보니 문득 시골 오일장 생각이 났다. 그때 아버지는 비를 맞으며 봉투 하나를 들고 오셨다. 젖은 봉투에는 쫄깃하고 달콤한 꽈배기가 있었다. 그 냄새는 방안에 가득했다. 어머니는 꽈배기의 숫자를 세어보고 분명 열 식구인데 한 개가 부족한 아홉 개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바라보시니 아버지는 시장에서 먹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꽈배기 반절을 뚝 잘라 아버지 입에 넣어 주셨다. 그러더니 그의 반절을 막내 입에 넣어 주고 나머지는 어머니의 입에 넣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었다. 가난이라는 것은 조금 불편하지만, 형제들의 숫자만큼 정이 숨어 있었다. 비록 꽈배기처럼 꼬이는 일이 많았던 내 삶 속에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 행복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한평생 살면서 모든 것들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던 삶이 사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남이 준 것들이다. 아파트는 건축업자가 지은 것을 산 것이다. 책도 옷도 승용차도 모두가 내가 잠깐 빌려 쓰고 죽을 때 놓고 갈 물건이다. 아니 내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놓고 가야 한다. 그렇게 할 바에야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횔덜린의 「반평생」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 후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아아, 나는 어디에서 이 겨울에 / 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나 /또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는 /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나 / 깃발들이 덜컹거리는 / 바람 속에서 벽들은 / 말없이 차갑게 서 있는 데.”나침반을 가지고 등산하듯 인간의 삶도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어가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매사가 긍정적이다. 거친 파도가 노련한 어부를 만들 듯 대가를 크게 치른 사람은 인생의 나이테도 굵고 깊다. 나이테 속에는 넉넉한 나침반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의 추억을 거울삼아 세상을 밝게 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를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나와 함께 지내왔던 물건들을 후손들에게 후회 없이 주고 가겠다는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 차라리 평범한 삶 속 행복한 사람을 꿈꾸어야 하겠다.△ 정곤 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작촌예술문학상을 수상했다. 덕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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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8 23:02

학생과 교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

시대가 변하는 요즈음, 직업에 대한 인식도 급변하고 있다는 걸 교직 사회에서도 느낀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하던 ‘군사부일체’라는 고어적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존경심이 담긴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늘 교사들에게 자랑스러운 표현이었다. 우리 부모는 적어도 자녀들 앞에서는 ‘아무개 선생’이라 호칭하지 않았고 반드시 ‘선생님’이라 했고 우리 세대도 그랬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님들은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어떤 말로 호칭하는지 궁금하다. 아마 아직도 대부분의 학부모는 ‘선생님’이라고 존경의 뜻을 담아 지칭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매스컴을 통해 소식을 접하면서 우울해질 때가 많다.요즘 학부모 중에는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나서라도 적어도 자녀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를 자기 집안의 하인을 다루듯이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학교에 찾아와서 교사에게 삿대질하면서 훈계조로 말하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거나 신체적 가해를 하는 학부모도 있다는 교단의 현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필자는 이제 머지않아 정년을 앞둔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본다. 그 시절 함께 했던 대부분의 동료들은 아이들을 정말 자식처럼 여겼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자기 반 아이들의 학력을 높여보겠다고 퇴근 시간 가까이 데리고 앉아 부족한 공부를 시켰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겐 사비를 털어 옷을 사주고 신발도 사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자기 반 아이들의 집까지 일일이 방문하여 가정 형편을 살피고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의 손이 미처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손발을 씻겨 주고 머리를 감겨주면서 부모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학부모들 또한 교사는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참으로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항상 대해 주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같지 않다.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나치다 싶을 만큼 학생 인권은 강조하고 있는데 교사의 인권은 추락하고 있어 일부 학부모들이 이를 악용하고 존중하지 않은 풍토가 그중 하나라 생각된다.또 사회적 분위기도 교사 입장에서 소극적인 지도를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예전처럼 학생들의 손발을 씻겨 주고 머리를 감겨주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원은 성추행으로 고발될 수 있다.예전에는 일기장을 통해 반 아이들의 분위기를 짐작하고 아이들의 고충을 파악하여 해결해 주던 일도 많았었는데 이것이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단정 지어지면서 일기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이젠 아이와 단둘이 앉아서 상담조차 하는 것조차 꺼리는 상황이 되었다. 한마디로 학부모와 교사가 서로 믿으면서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교사들은 선생님으로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가다듬고 먼저 선생님과 상의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보면서 배운다. 부모들이 선생님을 무시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분명 언젠가는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부모들이 선생님께 했던 방식으로 부모를 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진정으로 존중받는 교직 사회는 교사와 학부모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학생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생과 교사의 소중한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기대해 본다.△ 전순자 씨는 동시를 쓰는 아동문학가로 익산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익산 망성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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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1 23:02

두 사람 두 마음

항상 손을 붙들고 다녔는데, 두 손녀의 식성이 서로 달라 오늘 처음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작은 손녀가 그만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천 길 낭떠러지에 서 있는 심정으로 1층, 2층을 몇 바퀴 돌고 구내방송도 하고 자주 다니던 곳에서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얼굴이 사색이 된 할머니는 이미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버렸다. 그러나 곁에 있던 외손주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시식코너에서 제가 좋아하는 과일 조각을 찍어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그러니까 할머니, 생각 좀 해 보세요. 집에 갔을 것 같아요?”다급해서 딸에게 혹시 손녀가 집에 왔느냐고 확인 전화하는 걸 보고 하는 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손녀는 이쑤시개에 제가 좋아하는 생선구이를 꽂아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우리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녀를 보자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그러자 손녀도 할머니를 끌어안고 그만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봐요, 할머니. 내가 곧 올 것이라고 했잖아요?”조급해서 얼이 빠진 할머니와 태연한 손녀 사이에는 이미 생각의 큰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까지나 손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과잉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할머니와 손자들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가끔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올챙이는 올챙이 때 생활에 충실하고, 개구리는 개구리 때 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그렇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촛불 혁명에 이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깨끗한 인사로 채우겠다고 장담하고 시작했는데, 첫 단추부터 격이 맞지 않게 되었다. 핑계 삼아 쓰는 말은 ‘관례’였다는 것, 즉 그 시대는 그것이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니 결격 사유가 되어 임용을 막을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주장이다. 이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청문하는 사람에게는 ‘너는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라고, 후보자에겐 ‘그래도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느냐?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은 한 사람을 생각이 다른 두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나는 아직도 아내의 생각을 읽어 내지 못한다. 내가 집에 있고 싶을 때는 어디로 나들이 가자고 하고, 자식들에게 먹일 것을 사주고 싶을 때는 우리 둘이만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리고 TV 시청에 빠져 있을 때마다 사정없이 채널을 바꾸곤 한다. 사십 년을 함께 호흡하며 살아오면서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 일심동체’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요사이의 아내의 행동을 보면서 다른 사람 같이 나를 낯설게 한다.나는 가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다. 내 생각은 이런데 왜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행위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정당한데 그들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내가 맡았던 어린이들에게 내 생각만을 강요하며 그들 생각의 싹을 잘라냈던 것이다. 같이 지내던 동료들에게도 그들의 방식을 온통 무시하고 내 생각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후회스럽다.세월이 흐르니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세상은 두 사람이,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보완해주며, 서로를 위해 살아야 행복한 세상이라는 것을 말이다.△조내화 수필가는 2006년 에세이스트를 통해 등단했으며 현재 남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수필집 〈섬진강에 삶을 묻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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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4 23:02

소 잃은 외양간에서

35년 전쯤 장수 산서에서 전셋집에 살 때의 일이다. 가을이 되자 집안의 감들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열려 수확할 날만을 고대하다가 일요일에 나무를 잘 타는 날다람쥐 여동생을 오라고 했다. 식구들도 달려들어 집안 감나무에 열린 대봉시를 열 접쯤 땄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잠자는 꼬맹이는 여동생에게 맡기고 남편과 나는 남원 시내에 있는 공중목욕탕을 갔었다.그런데 다녀오니 여동생이 별꼴을 다 봤다며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나간 뒤 얼마 지나 날씨도 흐리고 바람이 불어 비가 오려나 싶어 빨래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 쪽에서 시커먼 신발이 살강 위로 훌렁 올라가더란다. 그래서 철렁한 가슴을 추스르고 누구냐며 당장 내려오라고 고함을 쳤단다. 그랬더니 까까머리 애송이 중학생이 겁에 질려 떨며 내려오더란다. 그래서 왜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저 윗마을에 사는데 동생이 감 따는 것을 보고 먹고 싶다고 해서 감 몇 개 가지러 들어왔단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며 나가려는 아이를 불러 비닐봉지에 감을 몇 개 담아서 보냈다고 했다. 그 뒤 행위가 미심쩍어서 인생 착의를 자세히 물으니 윗마을이 아니라 바로 옆집에 사는 남학생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한 것이 좀 괘씸하기는 했지만 대봉시를 그렇게 많이 따놓고 미리 옆집에 나눠주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싶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그런데 다음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심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한 달 전쯤인가 퇴근해서 벽장에 십만 원쯤 넣어 둔 월급봉투가 몇 만 원이 빈 것이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가져가려면 다 가져가지 반만 가져갔겠느냐며 나에게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고 믿어주질 않았다. 나는 그동안 혼자서 삭이며 혹시나 하는 맘이 들어 퇴근 후 그 집 어머니에게 가서 어제 있었던 감 도둑 사건을 말씀드리고 월급봉투 이야기도 하며 아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월급봉투를 그대로 두었으니 지문 검색을 하면 다 나 올 거니까 만약 아들에게 물어 그 돈을 가져갔다면 곱게 돌려주시고 아니면 지서에 가서 손도장 하나만 찍어주시라고 말하고 집에 왔다. 그리고 지서에 전화를 걸어 돈 봉투에서 돈을 꺼내 간 경우 지문감식을 하면 도둑을 잡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시골에서는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 이 전화 후에 누가 이런 문의를 해오면 봉투만 있다면 꼭 잡을 수 있다고 대답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기다리면서도 혹시 애먼 사람을 의심했나 싶어 불편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쯤 지났을까?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그 집 어머니가 봉투를 들고 와서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그 돈을 받고 다시 곰곰 정황을 살펴보니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년간 집안의 소소한 일들이 이상해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주말에 집을 비울 때마다 허름한 걸음쇠를 열고 제집 드나들 듯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중학교에 근무하는 남편을 통해 그 학생을 닦달해 보니 그 녀석의 소행이 드러났다.누가 시골인심이 후하다고 했는가? 도시나 시골이나 사람 사는 곳은 선악이 함께 공존한다. 옆집과 사이에 있던 돌담이 점점 무너지던 것 등이 이제야 이해가 되면서 이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방비를 했지만 어쩐지 씁쓸했다.지금은 쉰이 넘었을 딸 부잣집 외아들 그 아이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이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훈계를 하겠지? 몇 년 전 남원을 갔다 오는 길에 그 동네를 한 번 들려 보니 옆집은 양옥으로 재건축하였는데 우리 살던 집은 온데 간데없이 잡초만 무성했다.△수필가 박영숙 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문학관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늘푸른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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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7 23:02

캥거루키드와 셀프키드

부모에게 자녀교육이란 가장 우선이 되는 중요한 덕목이요,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방법에 대하여는 상반되는 두 가지 유형인 ‘캥거루키드’와 ‘셀프키드’를 비교해 본다. ‘캥거루키드’란 누군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를 말하고, ‘셀프키드’란 무슨 일이나 스스로 하도록 아이에게 맡겨두는 것을 말한다. ‘캥거루키드’의 부모는 옷 벗고 손 씻어라, 학원가라, 숙제해라, 텔레비전을 꺼라, 등등의 잔소리와 함께 모든 일에 일일이 다 참견한다. 그래서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숨넘어가게 몰아붙이며 간섭하는 과잉보호를 하거나 학원 증후군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셀프키드’의 부모는 무슨 일이나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맡겨둔다. 지금은 비록 아이가 더디고 미숙해서 흡족하지 않지만, 아이가 스스로 하는 것을 존중해 주고 박수쳐 주며 인내심을 가지고 스스로 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다. ‘캥거루키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학원 강사로부터 공부를 떠먹여 준다. 그러다 보니 타인 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생활을 하며 칭찬과 상 같은 외재적인 동기를 좋아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격이 의존적이고 우유부단하며 자율성이 부족하여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다른 사람의 뒤나 따라 다니며 리더가 되지 못 한다.그러나 ‘셀프키드’는 자기 스스로 공부 계획을 짜고,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생활한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습관과 실천하는 힘이 생겨 취사선택을 잘한다. 또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 자립심이 강하고, 개척 정신과 리더십이 매우 강한 아이가 된다.떠먹여 주는 공부를 해온 ‘캥거루키드’는 창의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력이 약해서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떨어진다. 그러나 ‘셀프키드’는 스스로 떠먹는 공부를 해 오면서 공부하는 방법이나 요령을 스스로 터득하며 자기주도적 학습력을 키워왔기에 초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성적이 좋아지고, 고등학교 때는 더 좋아지며, 대학 생활을 최상위로 성취하게 된다.또 다른 면에서 보더라도 자기주도 학습을 잘하는 ‘셀프키드’는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수업 준비를 하고 질문을 많이 한다. 반면 타인주도 학습을 하는 ‘캥거루키드’는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할 줄 모른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스트레스 푼다고 TV를 보거나 핸드폰을 가지고 노는 시간이 많다.부모의 자녀교육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조급하게 생각하며 떠먹여 주고, 간섭하고, 일일이 다 챙겨주는 ‘캥거루키드’로 양육하는 것은 피동적이며 소극적이고 장차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가 힘든 어른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하루의 계획, 일주일의 계획, 한 달의 계획, 일 년의 계획, 미래를 향한 목표나 꿈을 스스로 정하고, 거기에 합당한 공부를 스스로 터득하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생활하는 ‘셀프키드’로 양육하면 적극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고 책임지는 능력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교육은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다. ‘캥거루키디’와 ‘셀프키드’를 비교해 보면서 어떻게 우리의 아이를 양육할 것인가에 대하여 부모들은 고민하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국가와 사회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합한 교육정책과 사회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박종은씨는 고창교육장을 역임했고, 현재 고창예총 회장을 맡고 있다. 〈카이로스〉 등 7권의 시집과 산문집 2권을 발간했고, 영랑문학상과 전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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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30 23:02

항상 서툰 인사말

△김덕남씨는 전주 용소초등학교장으로 퇴임했다. ‘물사랑 공모전’ 은상, ‘글벗문학회 공모전’ 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아람 수필문학회’ 부회장, ‘대한 문학 작가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어디 가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집 아줌마가 방긋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저-기요” 나는 우물쭈물하다 건성으로 대답했다.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간다는 사적인 일까지 그녀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아, 네-” 하며 나의 무성의하고 애매한 대답에도 충분히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제 갈 길을 갔다. 그녀도 나에게서 명확한 대답을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라 그저 습관적이고 의례적인 인사치레에 불과했다.우리가 흔히 하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은 전쟁이 잦았던 우리의 역사 속에 밤새 아무 변고 없이 잘 자고 일어났느냐는 뜻의 애환이 섞인 의식적 안부 인사다. 어린 시절 어른들을 보면 ‘진지 잡수셨어요?’라는 인사말도 애환의 의미가 담겼지만, 꼭 식사를 했느냐는 물음보다는 친근감에서 통용되어오던 인사말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인사말 중에는 이같이 통념적인 인사를 주고받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데 ‘어디 가느냐?’는 인사말은 친근감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게 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 인사를 받고 ‘굳이 개인적인 행보까지 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대충 성의 없이 얼버무림을 할 때가 있다. ‘어디 가세요?’ 보다는 ‘옷이 잘 어울려요.’ ‘인상이 참 좋으세요.’ 등 가볍고 현실적인 인사를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굳이 타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거나 참견하고 싶어 하는 인사말이 우리 세대의 인사다. 계산이 빤한 도시 깍쟁이보다 정이 넘치는 순수한 시골 아낙들일수록 더 그렇다. 재치 있고 경위 바른 젊은 세대들은 그런 일이 적은 편이다. 정말 궁금하여 가는 곳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타인의 목적지까지를 묻는 사생활 침해적인 그런 인사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서구 문화가 많이 접목된 요즈음은 ‘좋은 아침입니다.’ ‘반가워요.’ 등 밝고 경쾌한 인사가 자연스럽게 오간다. 그런데 간혹 소비자 서비스 차원에서 아리따운 여인이나 멋스러운 남자가 느닷없이 ‘사랑합니다.’라는 닭살 돋는 인사말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어느 공공 기관과 통화를 했을 때 “사랑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받고 무척 쑥스러웠는데 이제 그 인사말이 상점까지 심지어 우리 교회 신부님과 신자 상호 간의 인사로까지 발전되어 많이 익숙해졌다. 우리 일상에서 이렇게 습관화되지 못해 어색했던 인사말도 생활화되면 의식이 바뀌고 그 의미가 더욱 정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며칠 전 은행에 갔을 때였다. 촌로가 들어와 번호표를 뽑고 소파로 다가오더니 앉아 있던 또래의 노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이, 자네 여긴 어쩐 일인가?” 은행에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싶어 묻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안 그 노인도 “응, 그냥 왔네.”라는 허망한 답변을 건넸다. 진정으로 궁금해 알고 싶었다면, 그런 대답으로 충분했을까?“언제 밥이나 한번 먹세.” 인사를 건넸던 노인은 또 부질없는 기약의 인사를 던진 뒤, 무관심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가 버린다. 그날 은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랫집 처녀와 마주쳤다. “유정 씨, 어디가?” “네. 안녕하세요?” 내가 묻는 인사말과는 아랑곳없는 인사를 던지고 해맑게 뛰어간다. 돌아서서 생각하니 나 또한 무엇 때문에 남의 목적지를 궁금한 것처럼 물어봤을까? “안녕!” 또는 “잘 지냈어?”라는 적절한 인사말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인사말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만들고,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영위하는데 필요하다. 따라서 인사말의 기본은 길이와 관계없이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 인사말들은 무엇일까? 항상 서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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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3 23:02

대통령, 유리천장을 깨다

긴긴밤 국민들의 손에 들린 촛불의 열매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논공행상이 이뤄질 무렵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분이 정권교체를 이루어 주신 것으로 제 꿈은 달성되었습니다. 정권교체는 갈구했지만, 권력은 탐하지 않습니다.”라는 감동적인 몇 마디 말들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신 분들…. 대통령의 패권이라는 분들이 새 정부가 원활하게 출범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그분들을 닮은 사례가 우리 고장에도 있었다. 90년대 전주시에 치매 병원과 보건소를 지어 시민들의 건강을 보살피려고, 치매 가족들의 짐이 버거워서 부양의무를 포기하려는 의도에서 전주에 국고를 지원받아 치매 병원을 신축하려고 보건소장이 복지부에서 받아온 국비의 덫에 걸렸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국고를 환수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이라도 나서서 그 일을 해내도록 하려면 내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상의가 다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4급 보건소장직을 버리고 어느 보건소 관리의사로 갔던 그분은 자신의 사생활보다는 먼저 시민들의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기반 구축에 노력하는 지도자였다. 치매 병원이 시민들에게 줄 혜택을 생각하고 자기희생을 감수했다. 문 대통령의 패권이라 지칭되던 삼철도 “친문 프레임, 삼철 낡은 언어 거둬 달라.”며 스스로 사라지듯,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떠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뇌리에 스친다. 대통령의 정치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떠난 멋있는 분들, 왠지 그분들의 뒷모습을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의로운 나라, 위대한 국민들의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 국민이 이기는 통합의 나라,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를 염원했고, 그 품은 뜻을 이뤄냈으니 여한이야 없겠지만 떠난다는 것이 홀가분하기만 했을까. 생각하면 그때처럼 짠하다. 그 후 대통령 행보에서 ‘이런 대통령도 있구나.’ 감탄하며 보름이 지났다. 국민들의 빈 마음을 채워주기라도 하듯 새 정부의 인사 발표에 감동했다. 파격적인 탕평인사다. 사람마다 이번 대통령은 멋지게 잘해 낼 거라며 신뢰를 보낸다. 특히 인사가 만사라는데, 이번에 대통령의 10대 공약 중 눈에 띄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성 평등한 대한민국”이다. 전에 여성 공무원들 근무하던 곳이 주로 여성가족부나 보건복지부, 식품의약부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장관인사가 파격이다. 유엔 내에서는 입지전적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비외무고시 출신인 여성이 외교부장관에 발탁되고,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며 육군 최초 여성 헬리콥터 조종사를 국가보훈처장으로 발탈하다니…. 뭔가 달라도 다른 통념을 뛰어넘은 통합, 탕평, 파격 인사다. 여성들의 그 단단했던 유리천장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여성도 사회적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곳,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여성을 승진시키고 싶어도 경력 단절이 문제가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진정으로 탕평이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여성 공무원들에게도 확대되어야 한다.7~80년 당시 여성 공무원들은 승진이란 걸 몰랐다. 이유는 근평을 남자직원에게 양보해야 했고, 양보를 거절하는 여직원은 조직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남자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이유가 양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고착되었다. 그래서 선배들은 대개 7급 정년을 하였고 후에 6급 정년이 몇 명 있을 정도였다. 새로운 대통령의 인사 기조에 맞춰 시군에 근무하는 여성 공무원들에게도 4급, 5급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열리기를 바란다. 국민과 소통하고, 눈높이를 맞추는 새 시대의 인사답게 남녀 차별을 두지 않는 통합적인 탕평적인 파격적인 멋진 인사를 기대해 본다.△ 박귀덕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 등의 수필집을 출간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부회장과 전북수필 회장을 맡고 있으며 〈작촌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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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9 23:02

어머님!

△김두성씨는 수필가이자 교육학박사다. ‘한국문학예술’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해 수필집 ‘나의 작은 행복’ 등을 냈다. 한국문인협회 남원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남원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어머님! 어머님께서 자나 깨나 심혈을 기울여 키워주신 큰아들 두성이가 어머님 영전에 섰습니다. 그동안 쏟아주신 어머님의 정성과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서도 생활에 쫓겨 차일피일 미루며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영전에서 지금까지 불효가 실감이 납니다.어머니께서 떠나시던 날 아침,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 그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뵈었던 모습과 말씀들은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먼 곳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동안 버팀목이 되어주셨는데, 이제 어떻게 지탱해 나갈지 모르겠습니다.어머님의 부음을 받고 달려오신 이모들과 외삼촌들께서 하신 말씀들이 생각납니다. 다섯 시누이 틈 속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집살이를 하셨다던 말씀을 듣고 새삼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울컥 쏟아지는 울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같은 아파트 통로에 살 때, 내가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주차를 확인하신 후에 밤잠 이루셨다던 어머님…. 7년이 넘게 대상포진, 간경화, 간암 등의 질환으로 고생하시면서 정신력으로 버티어 오시다가, 끝내는 말씀도 제대로 못 하시던 어머님! 그런 와중에서도 손주 녀석, 등록금 걱정을 해주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새삼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꼈습니다.이런 정성과 사랑이 어디 한두 가지뿐이겠습니까?저희들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 깊숙이 묻어있는 어머님의 관심과 정성을 저희가 만 분지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 처음에 이 글을 쓰다가 한참 동안 쏟아지는 눈물이 뒤범벅되어 다시 썼습니다.한마디로 저는 어머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유난히도 못난 이 자식을 사랑해 주셨던 어머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잘못 하였을 때 “내가 어떻게 키워왔는데 이 모양이냐” 하고 한탄하시던 말씀이 종종 생각납니다.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분발하려고 무던히 발버둥 쳤습니다. 어머님, 아시죠? 어머님! 비록 76년간의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어머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깨끗하고, 정직하고, 용감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 봉사 하셨던 어머님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내면서, 어머님께서 항상 함께하셨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어머님!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겠습니다. 못다 사신 어머님 몫까지 더욱 열심히 살겠습니다. 주위 사람, 나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욱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더욱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자랑스러운 어머님의 자식이 되겠습니다.부디부디 편히 천국의 하늘나라에서 모든 근심 걱정 벗어버리시고, 저희 내외, 손주, 손녀 잘살아가는 모습, 자랑스럽게 되어가는 모습, 즐거운 마음으로 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어머님! 저희들, 항상 어머님과 함께하겠습니다.어머님의 큰아들, 두성이가 이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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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2 23:02

그 어느 날 - 김정희

콧물 훌쩍이는 손자와 택시를 탔다. 소아과 건너편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택시는 우리를 건널목에 떨어뜨리고 신호가 바뀌자 쏜살같이 달아났다. 파란 불이 켜진 뒤, 두 돌 지난 녀석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런데 녀석이 다른 손을 번쩍 들고 건너는 것 아닌가. 신기하고 기특하여 길을 다 건넌 뒤 물었다. 길 건널 때 손들고 가라고 어린이집에서 배웠어요.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겨우 말귀 알아듣고 몇 마디 하는 아이가 이런 교육을 받았다니 어린이집 보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였던가. 친구들과 여행 약속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횡단보도에 닿기 전 신호가 바뀌며 차들이 멈췄기에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겨우 버스정류장에 와서 거친 숨을 고르는데 누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부른다. 돌아보니 경찰관이 수첩 같은 것을 꺼내 들고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란다. 왜요? 아줌마 무단 횡단했잖아요. 어서 주민등록증 주세요. 이런, 이렇게 난감할 수가.아저씨, 급해서 그랬어요. 한번 봐주세요. 아니 아줌마만 봐주면 저 아줌마는 어떡해요? 경찰관의 손짓을 따라가니 몇 걸음 안 가 순찰차 앞에서 또 다른 경찰관에게 죄인처럼 서 있는 여인이 서 있었다. 아줌마가 달리니까 저 아줌마도 뒤따라 달렸어요. 허허. 경찰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속으로 퍽 우습기도 하겠다.라고 쏘아주고 싶었다.그 날 나는 내 인생에 하나의 역사를 기록했다. 말로만 듣던 딱지를 뗀 것이다. 거금 이만 원짜리를 기어이 끊기고 만 것이었다. 친구들과 여행길에 오르며 나는 한마디 했다. 나 오늘 딱지 뗐어. 액땜했으니까 잘 지내고 오자. 모두 환호했고 이틀간의 여행은 내 덕(?)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그 날의 딱지 한 장은 내가 아끼는 상자 안에서 다른 귀한 것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 가끔 희고 길쭉한 딱지를 본다. 그리고 내 삶에 있어서나 주변 생활에 있어서 또 다른 무단횡단은 없었는지 또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무작정 달려가진 않았는지, 기다려야 하는데 성급한 적은 없었는지 되짚어보며 정도를 지키는 삶이었기를 다짐해본다. 그리고 건강을 지켜가는 일에서도 너무 무리하지는 않았는지! 의사에게 딱지 끊길 일은 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게도 된다. 또한 가족을 대하는 데도 무단횡단 같은 무례한 사례는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만 원짜리 딱지 한 장이 반면교사가 되어준 셈이다.그날 이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무단횡단은 하지 않는다. 지난날의 그 기억이 부끄러워서다. 조금 늦어지고 귀찮아도 그 날의 교훈을 떠올리며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불을 기다린다. 내 마지막 삶의 길에 있어서도 그럴 것이다.△김정희 수필가는 〈표현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덕진문학〉에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자작나무〉와 〈마음에하나 찍듯〉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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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6 23:02

몽돌 서진

서진(書鎭)을 볼 때마다 바닷가 풍경이 떠오른다. 오늘도 문인화를 그리기 위해 화선지를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이어서 화선지 네 귀에 지난해 바닷가에서 주워온 몽돌 네 개를 올려 고정시켰다. 이 몽돌은 가족 행사로 안면도에 있는 샛별 글램핑장 야영 때 주워온 뒤 내가 보물처럼 아끼는 돌이다. 지금도 몽돌 서진을 보면 그때의 생각이 난다. 여명의 하늘이 밝아오는 아침잠에 깨어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에 나아가 나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다는 간조 시간이 되었던지 바닷물은 저만치 밀려가고 허연 백사장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부옇게 밝아오는 망망대해 하늘가에는 갈매기가 끼룩끼루룩 목청을 높이며 날고 있었다. 썰물이 되어 끝없이 하얗게 드러난 모래사장도 아름답지만 수억 년을 파도에 씻겨 닳아 몽돌이 된 조약돌이 밀려와 쌓여 바다 방패막이를 해주고 있다는 데 있어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끝없이 쌓인 몽돌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 위아래 옷의 호주머니가 가득하게 주워 담았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두 손에도 움켜쥐고 숙소로 돌아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몽돌은 모양도 예쁘지만, 색깔이 가지각색이다. 모양과 색깔이 예뻐 그때 주워온 몽돌을 지금 나는 책상 머리맡에 올려놓고 서진으로 이용하고 있다. 나는 몽돌을 사용할 때마다 바닷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몽돌에 미안한 생각이다. 수많은 세월 망망대해 바닷가 백사장에서 마음껏 뒹굴고 놀며 바닷물이 씻겨주는 전신욕도 못하고 외롭고 건조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또한 몽돌을 볼 때 사자성어 수어지교(水魚之交)를 생각하면서도 빗대어 불러주었던 파석지교(波石之交)의 이름이 생각나서이다. 물과 물고기의 만남 같이 친밀한 관계를 수석지교라 부른다면, 모난 돌이 파도를 만나 예쁜 몽돌이 되었겠구나 싶어 파석지교라 이름 지어 불러주었기 때문이다.물을 가리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부른다. 바다는 개울물이 모여 바닷물이 되기까지 걸림돌을 만나면 돌아서 가고, 웅덩이를 채우며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넓은 바다를 이룬다. 이와 같이 물에는 역행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따라서 물을 가리켜 상선약수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라고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하고 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른다. 이와 같이 물은 항상 낮은 곳에서 다투지 않고 겸손의 미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선약수라 하였지 않았나 싶다.인생은 채움과 비움, 비움과 채움의 반복이라고 한다. 또한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무엇을 비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도 물처럼 마음을 비우고 채우며, 무리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라고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그런 큰 뜻을 지닌 바닷물에서 파도와 친교를 맺으며 지내온 몽돌을 내 욕심 때문에 머리맡에 두고 서진으로 사용하려니 가끔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미안하다 몽돌아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바닷물이 철썩철썩 달려와 찌든 때를 씻어주고 가듯 가끔 깨끗하게 닦아주고 쓰다듬어 주어야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어서 너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문인화와 풍경화를 그려 보겠노라 다짐을 해본다.△한현수 씨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내 고향 토담집〉, 〈방안퉁수가 부르는 노래〉가 있으며 현재 덕진문학,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전주덕진노인복지관 방송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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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9 23:02

설날에 핀 보세란

정유년 새해 설날 아침이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니, 은은한 난의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설날 이렇게 때맞춰 난이 꽃을 피우고, 그윽한 향기를 뿜게 된 것은 30년 동안 난을 키워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은 아내가 그동안 난을 키우느라 애쓴 노력의 결과다. 전문가도 아닌 아내는 겨우 난을 살릴 정도의 실력으로 난을 키운다.우리 집에는 십여 분 정도의 난을 베란다에서 키운다. 그날도 대여섯 개의 화분과 난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의 난분에서 꽃대 두 개가 쑥 올라온 것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영하 8~9도의 추위에 얼어 죽을세라 얼른 거실로 옮겨놓았다. 설날 아침에 보니 길게 뻗은 꽃대에서 꽃잎 대여섯 개가 잎을 벙싯거리고 있었다. 그 조그만 잎 새 사이로 내뿜는 난의 향기가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그동안 난을 키우면서 동양난의 일종인 보세란(報歲蘭)으로만 알고 있었다.이번 기회에 잘 알아야 할 것 같아 사진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니 대만보세란(臺灣報歲蘭)이었다. 중국 및 대만 등에서 자생한다. 동양란 가운데 잎이 매우 아름다운 종류이다. 음력 정월 무렵에 개화한다. 설날 피는 꽃으로 새해를 알린다는 뜻인 보세란(報歲蘭)이라고 부른다.난의 역사가 제일 먼저 거론된 때는 공자의 논어 의란조(?蘭操)에서 나온다. 공자가 입신(立身)하기 전, 왕도(王道)의 실현이라는 뜻을 품고 천하를 전전했지만,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왕후(王候)는 없었다. 이에 실망한 공자가 낙향하는 길에 깊은 산속에서 난(蘭)을 발견했다.그 난의 향기가 그윽하고 자태가 고고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의란조(?蘭操)를 보면 난의 고고한 자태를 빌어, 자신도 군자의 길을 걷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렇듯 난의 문화는 공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문화라 할 수 있다.새해 설날에 보세란이 우리 집에서 꽃망울을 열었다. 기쁜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올해에는 사회와 우리 가정에도 상서(祥瑞)로운 일이 많기를 기대한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탄핵 판결에 모두가 승복하여 국기(國基)를 바로잡고, 경제도 살아났으면 한다. 또 통일이 되어 북한 주민들도 우리와 함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우리 집에서는 벌써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 힘들게 공부한 외손녀가 대학입시에서 자기가 희망하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설날 아침에 핀 보세란이 먼저 우리 집에 행복을 가져다 준 행운의 난이 되었다.△오창록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에서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행촌수필문학회, 전북문인협회, 신아문예작가회,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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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2 23:02

추억의 시래기 밥

꽃샘추위가 물러갈 무렵이면 까칠한 입맛을 돋우는 소박한 음식이 있다. 한 그릇에 담긴 맛과 정감으로 기운을 돋아주는 게 있다면 시래기 밥이다. 어린 시절, 집집이 처마와 그늘진 곳에 무청이나 배추 잎을 말린 시래기를 매달아 놓고 겨울부터 초봄까지 배를 채워주었다.긴긴 봄날 배가 고플 때면 어머님께서는 으레, 시래기밥이나 시래기죽을 내놓으셨다. 배고팠던 시절, 우리 가족을 켜켜이 지켜주었던 일등공신을 꼽는다면 단연코 시래기 음식이리라. 시래기는 나물 무침. 비빔밥. 된장국. 죽. 전 등을 만들어 먹던 식재료다. 물고기와도 잘 어울려 물고기 매운탕, 고등어 졸임, 추어탕을 끓일 때면 꼭 들어가야 하는 게 시래기였다.옛날에는 허기진 배를 달래야 하는 구황식품이었지만 지금은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시래기에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여 항암작용과 면역력을 강화하고, 칼슘? 철분? 미네랄 등이 들어 있어 골다공증과 빈혈 예방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시래기는 조물주가 우리에게 내려준 보약이다.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죽(粥)을 즐겨 먹었다. 한문으로 죽을 풀어보면 활궁(弓)자 가운데 쌀미(米)자가 들어있다. 내 생각으로는 배가 불러야 활을 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에는 죽 요리가 수십 종이 있는데 곡물을 기본재료로 여러 가지 식품을 섞어서 죽을 쑨다. 쌀 이외의 곡물로 쑨 죽에는 율무, 녹두, 팥, 콩 등이 있고, 곡물에다 채소나 나물을 섞어서 쑨 죽에는 시래기, 콩나물, 방풍, 아욱, 호박, 등이 있다. 동물, 어패류, 견과류 등을 이용한 죽들도 있다. 부잣집에서는 보양식이었지만, 우리 집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주던 구세주였다.어린 시절, 우리 집은 너무도 가난했다. 산골 다랑이 논 몇 마지기와 산비탈 밭뙈기가 전부였다. 가축이라고는 소 한 마리와 돼지, 닭 몇 마리였다. 아버지는 남의 일을 하면서도 담배 농사에 전념하셨고, 어머니는 비탈밭을 일구면서도 누에치기에 몰두하셨다. 일곱 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허리 펼 틈도 없었으니 얼마나 고달픈 삶이었을까? 오죽했으면 찬밥 한두 덩이를 시래기나 묵은 김치를 듬뿍 넣고서 끓여 놓은 죽으로 온 가족의 배를 채워야 했을까.어느새 고희의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릴 적 먹었던 시래기 밥과 시래기 음식이 생각난다. 시래기를 푹 삶아서 쫑쫑 썰어서 들기름 국 간장으로 밑간하여 양념이 배게 두었다가 씻은 쌀 위에 올려 밥을 지었다. 밥이 되는 동안 시래기 밥에 넣을 양념장을 만들어 놓았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시래기 밥 위에 고소한 양념장을 넣고 비벼주시던 어머니의 기억이 새롭다. 또 한 가지 추억이라면 시래기나물 무침이다. 시래기를 충분히 삶은 뒤 깨끗한 물에 씻어 놓고 된장과 마늘 다지기를 넣어 조물조물 버무려 밑간을 한다. 촉촉하게 양념이 스며들면 대파를 썰어 넣고 들깻가루를 약간 뿌려 놓으면 끝이다. 투박하긴 했지만, 어찌나 맛이 있던지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 했던가? 예전 같으면 옻닭이나 쇠고기, 돼지고기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시래기비빔밥? 콩나물비빔밥? 꽁보리밥 등 웰빙 음식이 있다고 하면 기필코 찾아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미를 그 누가 말릴 것인가.이 좋은 시대에 우리 모두 팔팔하게 운동하고, 건강식품도 챙겨 먹으며, 아프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또 있겠는가?△임두환 수필가는 〈대한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뚝심대장 임장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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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5 23:02

부서져야 산다

밀가루를 사려고 마트에 갔다. 국산 밀가루를 사려고 둘러보다가 하나 남은 우리 밀가루에 시선이 멈추었다. 가격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바구니에 담았다. 1960년대, 우리는 밀 농사를 지었고, 그 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가루로 빻아다 수제비나 부침개를 만들어 허기를 달랬었다.그 당시 우리 부모님께서는 날만 새면 들녘으로 나가 일에 매달리셨다. 하지만 논농사 수입은 농가 빚이나 세금 등을 내기 위해 쌀값이 가장 싼 추수 직후에 거의 다 내다 팔았기에 쌀은 늘 귀했다. 그러니 밀이나 보리농사를 지어 주식으로 대용했었다. 또 겨울 양식인 고구마는 캐다가 방 윗목에 밑동가리를 만들어 수북이 쌓아놓았고, 수확한 콩은 처마 밑에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들깨는 키가 커서 밭에서 타작하여 알갱이만 들여왔지만, 집에 들어온 콩을 갈무리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처음엔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으니까 신이 나서 하다 보니 내 일이 된 것이다.볕 좋은 날, 나는 마당에 포장을 깔고 거둬들인 콩을 펼쳐놓았다. 어느 정도 마른 성싶으면 처음엔 튀어날까 봐 발로 자근자근 밟다가 나중에는 긴 막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여기서 툭, 저기서 툭, 입을 쩍쩍 벌리며 노란 콩을 뱉어내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잘 참았다. 콩은 깨지고 부서져서 메주가 되고, 간장, 된장, 고추장이 되었다.들깨 또한 깻잎이 부스러기가 되도록 부서져야 고소한 알갱이를 뱉어내고, 이 알갱이가 부서지고 으깨져서 기름이 되고 가루가 되어 맛, 영양, 건강까지 챙겨주는 회춘 식품이 된다.얼마 전 친구들과 어느 식당에서 시래깃국을 맛있게 먹은 일이 있다. 요즘 날씨가 쌀랑하니까 따뜻한 국물 생각이 나서 냉동실에 있는 시래기를 꺼내 나름대로 국을 끓였지만, 맛이 별로였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그 식당에서는 들깨가루를 넣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들깨가루가 없어서 생 들깨를 조금 갈아 넣고 중불에 푹 끓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릴 때 먹었던 시래깃국, 바로 그 맛이었다.예로부터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했다. 나는 오늘 장 가르기를 했다. 지난 2월 초순 소금물에 담가놓았던 메주를 으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꺼냈다. 간장과 분리한 메주는 다른 항아리에 옮기고 잘게 부수어서 으깬 다음 소금을 뿌리고 꾹꾹 눌러놓았다. 항아리 속에서 얼마간의 숙성기간을 거쳐 맛있게 익으면 담근 장류로 조물조물 무치고 보글보글 끓여서 가족들과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훈훈해진다.이렇듯 밀이나 콩, 깨 등이 부서져 발효와 숙성을 거치면서 원 재료에 없는 유익한 성분이 생성되어 건강식품으로 재탄생하듯,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서로 엉켜 비비고 문지르며 수없이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할 수 있으며, 우리가 꿈꾸는 조화로운 세상이 되는 게 아닐까?흙덩어리도 부서져야 그 속에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부서져야 한다. 굳어진 땅이 아닌 상대를 위해 자신을 부스러뜨리는 겸손한 부드러운 땅이 되어야 한다.△한일신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이다.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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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8 23:02

그리움이 머무는 곳

어릴 적 우리 집은 여산 장터에 살았다. 그곳에서 20분쯤 가면 유성이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엔 우리 셋째 아버지의 집이 있었다. 셋째 어머니께선 홍시가 떨어지면 주워 두었다가 내가 가면 여산아,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갑게 맞으며 먹을 것도 주셨다. 언제나 어린 조카들을 함빡 웃으며 맞아주시던 셋째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모습이 언제나 그립다.그 집엔 선생님이셨던 사촌 오빠와 사촌 언니도 계시어 언제나 내 마음속엔 우리 셋째 집이 좋았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우리 친척들은 대부분 셋째 집으로 피난을 가서 같이 먹고살았다. 셋째 집은 넓고 방도 많았다. 한 여름이라 뒷동산에선 매미 소리와 새소리 들렸는데 가끔 멀리서 대포 소리도 났다.낮에는 텃밭에서 따온 옥수수도 쪄주고 고소한 미숫가루도 타주셨다. 장독대 둘레에는 채송화와 봉숭아, 맨드라미, 접시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밤에는 언니들이 내 손톱에 봉숭아 물도 들여 주고, 내가 배탈이 나면 셋째 어머니께서 내 목에 짚으로 만든 새끼줄을 걸고 뒷간으로 데리고 가서 빌어주셨다. 그게 아마 배탈을 낫게 하는 비법이었나 보다. 서울에서 공부하시던 사촌 오빠들도 전쟁 중이라 모두 집으로 돌아왔고, 오빠의 친구 한 분도 피난을 와 있었다.철없는 나는 전쟁 중이지만 이방에 가면 언니들이 있고, 저방에 가면 나를 작은 아씨라고 정답게 불러주던 보름달같이 예쁜 새언니가 있고, 사랑방에 가면 오빠들이 학교생활 이야기하는 것도 들을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평소엔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많은 친척들이 한데 모여 사니 그저 신나고 좋았던 기억뿐이다. 셋째 집 가족들은 어린 나를 누구나 예뻐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못 잊은 분은 오늘 만난 언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나라 지형도를 만들어 오라는 지리 숙제가 있었다. 신문지를 물에 푹 담갔다가 며칠 후에 꽉 짜서 풀을 섞어 우리나라 지도 모형을 만들라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엄두도 안 나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씨 착한 사촌 언니한테 찾아가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언니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래? 그럼 만들어보자. 하면서 종이 찰흙으로 우리나라 지형도를 만든 다음 물기가 마른 후 물감으로 색칠을 하니 훌륭한 지도 모형이 완성된 것이다. 나는 얼마나 신기하고 좋은지 뛸 듯이 기뻤다.그렇게 어려운 일을 척척해내는 우리 언니! 나는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 밖에도 재봉, 식물 채집 등 어려운 일만 있으면 찾아갔으나 그때마다 항상 기분 좋은 얼굴로 선뜻 도와주던 천사 같은 사촌 언니였다.그 당시 언니 나이가 스무 살쯤 된 때인데 대학교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랬던 언니께서 공주로 시집을 가신 후에는 만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몇 십 년이었는데 시월의 단풍이 곱게 물들던 어느 날 그 언니와 큰어머니의 외동딸인 사촌동생과 세 자매가 서울에서 만났다. 완전히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젊은 시절엔 친척들의 애경사에도 참석을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사촌동생의 장례식장에서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서 사촌 세 자매가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40~50년간이나 못 보며 지내다니, 그만큼 삶의 질곡이 만만찮았다는 증거다. 이제부터는 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을 때까지 그리운 얼굴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녀야겠다.△이여산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한 후 〈지구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필집 〈아름다운 인연〉 등 3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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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1 23:02

어느 날의 외출

보드라운 햇살이 내리는 휴일 오후, 아지랑이에 실려 온 봄이 나른한 여유를 싣고 부유하던 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떠오른 곳은 고인돌, 정확히 말하자면 고인돌을 왕복하는 탐방 열차 일명 모로모로 열차를 타보고 싶어서 망설일 겨를도 없이 고인돌 유적지를 향해 달려갔다.자동차를 개조해 운행하는 탐방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왜 나는 이렇듯 타는 걸 좋아하는 걸까? 아주 어릴 적엔 아버지 어깨에 올라앉아 무등을 타며 신이 나 했고, 놀이공원에서의 회전목마라든가 여러 가지 탈것들에 환호했었다. 특히 여고시절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는 걷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느린 전차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끝없이 떠들어대고 까르르 웃어대던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 탈것이 흔치 않은 이곳에서 탐방 열차를 타려고 줄을 서있는 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돈다. 짧은 기다림 끝에 탐방 열차에 올라앉아 흔들거리고 있노라니 또 하나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를 타고 등하교 하던 그 시절, 나는 늘 교복 상의 주머니에 옷핀을 꽂고 다녔다. 차장의 손에 떠밀려 겨우 올라탄 버스는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승객들이 꽉 찼는데 그 사이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못된 손, 음흉하게 뻗어오는 치한의 손을 힘껏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엔 성추행법이라던가 여성을 보호할만한 특별한 법이 없었기 때문에 만원 버스를 타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했었다.싱그러운 풀 향이 코끝에 스치는가 싶더니 열차는 어느새 고인돌 유적지 앞에 다다랐다. 고인돌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고창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많은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취락을 이루고 생활하여 왔음을 엿보게 하는 이곳엔 내 키의 열 배는 됨직한 커다란 고인돌을 위시해 아주 작은 고인돌, 납작한 고인돌, 뾰족한 고인돌 등 각양각색의 고인돌이 산등성이를 휘감고 산재되어 있다.가장 큰 고인돌은 어쩌면 그 옛날 천하를 호령하던 권세가의 것일지도 모르고, 가장 작은 고인돌은 빈한하지만 청렴하게 살았던 어느 선비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왕후장상일지라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말 없는 돌무덤으로 남아있을 뿐인 것을.녹아내린 사연이 너무 많아/굽이굽이 감아 도는 산등성이에/이끼 낀 몰골로 오도카니 서있다/안간힘 쓰고 살았어도/후회뿐인 지난날의 상념들은/땀방울 떨군 들녘에 뿌려버리고/영원할 것 같던 시간이 정지되던 날/그 자리에 선채로 돌이 되었구나/내려놓지 못한 전생이 하도 무거워/구부정하게 선 너는/혼령들의 한숨소리 듣고 있는 것인지희뿌연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난다.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듯 크게 두어 바퀴를 돈 후에 선인들의 편안함을 확인했는지 산기슭 너머로 사라진다. 태고의 깊은 혼은 몇 천 년이 지났어도 살아 숨 쉬고 세계인의 보물로 찬란히 빛을 발하는데 일백 년 인생사 내 모습은 훗날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게 될까? 어느덧 시간이 흘렀는지 싸늘한 바람이 볼을 때린다. 고인돌 사이를 오가던 관람객도 저마다 갈 길을 가고 그 자리엔 무거운 침묵만이 내린다. 부드럽던 봄 햇살도 어느덧 서녘 하늘로 잠을 청하고 삶에 대한 존경과 가치의 숭고한 정신을 떠올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른다.△문인순은 대한문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무장면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고창지부장과 평통자문위원, 고창군체육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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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14 23:02

기러기를 따라간 동장군

개구리기 놀라 깬다는 경칩(驚蟄)이 지났다. 서슬이 퍼렇던 동장군이 물러나고 새싹이 파릇파릇 움 트는 시기다. 그래서 그런지 대문을 드리운 라일락 가지 끝에서 파릇한 기운이 엿보인다. 경칩은 동지 이후, 74일째 되는 날로 양력으로는 대개 3월 5일 무렵이다. 이날이 지나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고 할 정도로 완연한 봄을 느낀다. 며칠 전부터 고로쇠 물을 마신다는 소식이니 얇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까 보다.40여 년 공직생활을 마칠 때가 되어 고민한 때가 있었다. 평생을 직장만 오가며 생활했으니 사회 물정엔 문외한이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면 받아줄 곳은 있을까? 만약에 갈 곳이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내 마음에 동장군이 자리 잡은 것이다.퇴직 후에 대한 걱정을 하다 보니 그날은 어김없이 오고 말았다. 고민을 한다고 마음의 동장군은 물러나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실컷 자보자는 심정으로 며칠을 집에서 뒹굴었다. 아내는 무슨 잠이 그렇게 오느냐며, 시내도 나가보고 친구들도 만나라며 성화를 댔다. 직장에 다닐 때 실컷 자보고 싶은 생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항상 잠이 모자라 피로가 겹쳐 눈이 충혈하기 일쑤였다. 겨우 동네 사우나 가는 것으로 한 달을 보냈다.우연히 어느 정년퇴직자 부인들이 모인 장소에서 오가는 말들을 잘 정리하여 소개한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정년퇴직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걱정하는 아내. 정년퇴직한 지 꽤 됐는데도 놀고 있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 놀기만 하면 사람이 처지고 빨리 늙는다고 걱정하는 아내.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집에서 매끼 밥을 차려 달래서 미워 죽겠다는 아내 등. 더는 자리에 앉아있기가 거북해서 자리를 피했다는 작가의 말이었다. 예비 퇴직자들이 모이면 퇴직하면 뭐 할래?가 인사다. 바로 내가 받는 인사가 되고 말았다.직장에 다니면서 취미생활로 한 점 두 점 수집했던 수석이나 분재 수집도 그만 둔지 몇 해 되었다. 그 뒤 시작한 것이 13년간의 서예 공부였는데, 갑자기 손 떨림 증후가 나타나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평탄한 아스팔트 길에 웅덩이가 생긴 것처럼 허무했다.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면 서예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월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걸핏하면 병원 신세 지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병원생활이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말았다.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떨리는 손이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는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은 문학이다 싶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에 입문했다. 내 마음의 동장군이 풀리는 경칩의 절기가 온 것이다.동료 문우님들은 나와 같이 손 떨림 증후가 있는 분이 없었다. 부러웠다. 선배들은 작품을 발표하고 동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데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선배들의 자상한 귀띔에 넋을 잃기도 했다. 두어 주 지났을까, 작품을 한 편 써 놓고 발표할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선배가 주는 용기에 나도 발표할 기회를 갖기 시작했다. 여러 문우들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시 읽어가며 수정하기를 거듭했다. 문장이 매끄러울 때는 손도 떨리지 않는지 자판위에서 춤을 춘다.경칩이 지나면서부터 동장군을 잊듯 문학에 빠지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글감이다. 내 마음을 짓눌렀던 동장군이 기러기를 따라 북쪽으로 갔는지 평화롭다. 지난해, 부끄럽지만 수필집과 시집을 출간하고, 부안 해변에 있는 펜션을 빌려 한 달여 혼자 숙식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경칩이 지났으니 다시 걸어야지.△김정수 시인은 시는 《한국국보문학》 수필은 《대한문학》에 등단했다. 2016년에 시집 詩의 창에 꽃비 내리던 날, 수필집 파랑새 둥지를 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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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07 23:02

학교현장에 행복의 비타민을

항상 밝게 그리고 즐겁게 생활하며 살아가는 어느 호텔의 지배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며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그는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어서 별의별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유독 머릿속에 기억되는 일이 있다.어떤 손님이 투숙한 지 한 시간쯤 지난 후 프론트에 전화가 걸려왔다.한지와 풀, 그리고 가위를 가져다주시오.갑자기 어리둥절해진 직원은 지배인에게 손님의 말을 전했고, 지배인은 직접 그 객실로 올라갔다.손님, 어디 불편한 점이 있으십니까?아니요. 꼭 필요한 데가 있어서 그러니 조금 전에 부탁드린 물건을 가져다주시오.지배인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요구한 물품을 가져다 드렸다. 참 이상한 손님도 있군하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 객실을 들어가 방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구멍 난 한지문이 곱게 발라져 있었다. 지배인은 그 즉시 호텔의 전 객실을 조사해 보았다. 찢어진 곳이 많았다. 지배인은 관심 있게 살펴보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불평하지 않고 소리 없이 문을 바르고 가신 투숙객이 한없이 고맙게 생각되며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고 말했다.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숙어지곤 한다. 우리 주위를 관심 있게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는가? 겉은 멀쩡하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 가정의 화목을 파괴하는 부정과 불성실, 직장에 대한 불평불만, 학생들의 현실도피적인 행동, 사회의 이기적인 몰인정, 몰이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 주변들이 이토록 허술하고 나약해져 가는 이 현실을 적시 진단하여 치유될 수 있도록 모두 작은 힘을 모아 상처들을 싸매 주어야 할 때인 것 같다.학교는 사랑의 실천 장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가르치는 학교의 현장에 도덕성 회복을 위한 교육은 지속되어 왔지만,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최근의 현상은 인간적 윤리의식의 결핍증세가 곳곳에서 나타나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학생의 가정들은 편부, 편모가 늘어나고 이혼 등으로 인한 부조화, 심지어 가정 폭력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요사이 어느 교장의 죽음은 학교가 얼마나 반목과 갈등 속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사회 역시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느끼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복의 비타민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이 모든 사회적 병리현상은 사랑과 관심의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비타민 결핍에서 오는 가정, 학교, 사회의 제 현상들을 사랑이란 단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 교사들은 진실한 사랑으로 꿈나무의 미래를 밝게 열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학교는 사랑의 실천 도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LOVE이다. LOVE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는 네 가지 의미를 살펴보자.첫 번 째 글자 L은 Listen 즉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방 말에 관심을 가지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두 번 째 글자 O는 Open으로 여는 것이다. 내 마음을 열어서 상대방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다. 아울러 내 약점도 솔직하게 내어 보임으로써 상대방도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세 번 째 글자 V는 Value로 가치를 의미한다.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그를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마지막으로 네 번 째 글자 E는 Express, 곧 표현하는 것이다. 사랑은 느낌으로만 끝나선 안 된다. 말과 혀로만 해서도 안 된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표현해야 함을 의미한다.당신은 지금 참된 의미의 사랑(LOVE)을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정오 수필가는 전북도교육청 장학관과 전주 전일중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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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31 23:02

희망의 불빛

선생님, ㄱ을 기억으로 쓰면 왜 틀리나요? 이름을 한문이 아니고, 왜 한자로 쓴다고 해야 하나요? tire의 발음은 왜 타이어인가요? 궁금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상당한 날카로움(?)이 깃든 질문들이 쏟아지며 좁은 교실 안이 시끌벅적하다. 익산 구도심에 자리한 어느 여고 정문 앞, 오랜 시간 비바람과 햇볕에 그을린 허름한 건물의 2층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다. 40~50년 전의 청소년으로 돌아간 중장년의 학생들이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서러움을 풀어보겠다고 머리를 싸맨 야학교실이다. 전등불 아래로 모여든 60대 전후의 이들 중?노년 학생들은 답답하고 어두웠던 지난날을 떨쳐내고 이제라도 밝은 내일을 맞이하겠다는 일념으로 책과 씨름하고 있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그들의 꿈은 검정고시에 합격, 당당하게 학력을 인정받는 것이다.저녁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아니~오. 대충대충 때우고 왔어요. 그러면서 손가방 속 누룽지며 고구마를 내놓고 시장기를 채운다. 애들처럼 군것질을 하는 교실 풍경에서 정겨운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금방 설명을 했는데도 선생님, 조금 전 뭐라고 하셨지요? 다시 말씀해 주세요. 수줍어도 열심히 질문하는 늦깎이들의 서툰 공부방이다. 그러기에 설명은 최대한 쉽고 천천히 해야 한다.눈빛 초롱초롱한 그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사색에 잠긴다. 하루 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온갖 힘든 일을 하며 가난한 시대를 까막눈으로 살았을 것이다. 서러움도 많았고, 숱한 날들을 남몰래 울기도 했을 것이다. 기억 조차 하기 싫을 만큼 아린 상처를 자녀들에게만은 대물림 하지 않으려고 허리가 휘는 줄도 모른 채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사람들은 꿈을 꾸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훌쩍 늙어가고, 젊은 시절 꿈은 멀어져 있다. 건강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거나, 먼저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배움의 꿈은 이루고 싶다. 그 현장이 야학교실이다.그분들의 열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나는 최근 1960년 후반 대학시절부터 몸에 밴 야학강사를 다시 시작했다. 당시 야학생들은 낮에는 점원이나 사환(使喚)생활을 하고, 배고픔을 맹물로 달래가며 주경야독했다. 야간학교에 찾아들었던 그 까까머리들은 이제 초로가 되어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겠지.당시의 그들은 젊었지만,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저 학생들은 중노년들이다. 각자 그 처지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배울 때를 놓쳐 서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과거에는 학업 시기를 놓치고 생업에 뛰어든 젊은 근로자들을 위한 산업체 학교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전 덕암정보고 산업체특별학급 졸업을 끝으로 역사 속에 사라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배움을 갈망하는 중노년이 많다. 미력이나마 봉사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삶은 자기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길을 향해 쉬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25시간을 하루 삼아 힘겹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년은 올해보다 좋아지겠지.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평생 공부하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나이는 부끄러움도 아니고 한계도 아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학교실 전등불 아래로 모여든 저 나이 든 청춘들이 가슴 속에 맺힌 한을 풀고 조만간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김형중 수필가는 익산 이일여고 교사를 거쳐 전북여고 교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시대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부회장과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행촌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신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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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4 23:02

설날과 수입계란

설날 제사상에 들러선 손자들을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이 빛살처럼 지나갔다. 그때의 제사음식은 가지 수도 많고 떡이며 전은 산봉우리 모양 수북이 쌓았다. 그런데 내가 차린 제사상에 올린 음식은 너무 간소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여자들은 제사상 앞에 얼씬도 못했는데 요즘은 마음만 있으면 절도한다. 어른들의 설복은 간편하나 아이들의 한복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다. 내 유년시절의 설빔은 할머니가 겨우내 짠 명주로 만든 빨강치마 노랑저고리는 로망이고 기쁨이었다.유교를 받들고 살아온 우리는 조상을 극진히 모셨다. 이러한 관습은 제사 음식은 우리 땅에서 난 가장 좋은 것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님들이 행여나 제사상에 토종이 아닌 음식을 낯설어 하실까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명절 음식을 하려면 꼭 필요한 계란의 공급이 부족하니 정부에서 서둘러 수입을 했나보다. 부족하면 넉넉한 곳에서 사다 먹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영 찝찝하다. 계란이 몇 개 남지 않았으니 어떤 계란을 살 것인지 망설이다 비싸도 우리 것으로 필요한 만큼 만 샀다. 나물 종류도 산지를 알아볼 방법이 없고, 수입 고기를 한우라고 속여 파는 세상이니 그저 조상님들의 아량을 바랄뿐이다.어릴 적 도시락에 계란 후라이는 귀한 반찬 이었다. 교실 난로에 켜켜이 올려놓은 도시락들 사이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냄새는 엄마가 내게만 특별히 챙겨주는 마음이 들어있었다. 소풍갈 때는 사이다 한 병과 삶은 달걀 한 개는 필수 기본 옵션이었다. 껍질 탁 소금 톡 하얀 흰자를 베어 물고 사이다 한 번 마시고 다시 노른자를 털어 넣고 사이다를 들이키면 소풍을 왔네 하는 실감이 났었다. 그런 추억의 계란이 되다니 씁쓸하다.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 한치 앞이 불투명하고, 국민은 찬반으로 등을 맞대고 있으니 어느 누가 설이라고 편할 수 있으리. 거기다 지난해 한 해 걸러 찾아온 AI(조류인플루엔자)는 독성이 강한 두 종류의 바이러스란다. 그래서인지 두어 달 만에 산란계의 3분의 1정도가 살쳐 분됐다. 우리나라는 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하면 3km 이내의 멀쩡한 닭까지 몽땅 쓸어 담아 땅에 파묻는다. 산목숨을 애도 한 마디 없이 묻는 사람이나, 당하는 닭들은 무슨 날벼락인가! AI가 오면 그때서야 방역을 한다고 교통을 통제하고 약을 살포하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있는 모양새다. 민초들은 불안하다.우리보다 기술이 좀 뒤진다는 태국기업의 대형 양계장에서는 로봇을 이용해 닭을 돌본다고 한다. 로봇에 달린 센서를 이용해 닭들의 체온과 활동을 측정해 발병을 미연에 방지한다고 한다. 우린 번번이 막대한 살생으로 경제적인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환경과 정서적인 문제까지 깊은 주름으로 점철 되어야 하는가. 우선 닭 사육방식을 개선해야 예방도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첨단 과학시대에 조금 생각하면 왜 방법이 없겠는가. AI가 올 때마다 드는 매몰비와 방역 비, 피해 농가에 지급하는 보상비를 합치면 천문학적 수치이리라. 이렇게 세금에서 빠져나가는 금액을 예방대책비로 쓴다면 이토록 비참한 살상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수입한 횐 달걀은 죄가 없지만 댕기지 않으니 쳐다보고 지나간다. 한편 생각하면 우리가 먹던 갈색계란은 안전한 먹거리였을까? 조악한 환경에서 항생제 까지 먹으며 낳아준 갈색계란이 횐 달걀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다. 동물이 병들면 그 연결 고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 또한 안심할 수 있을까!대선이 다가 온다. 설이 기다려지고 계란 까지 수입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갈 적임자는 누구일까?△이의 수필가는 전직 교사로 대학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행촌수필문학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자나이 마흔둘 마흔셋〉, 〈오이 밭에 새 둥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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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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