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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우리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며칠전 청와대 상춘재에서 이뤄진 1시간짜리 인터뷰에서 단 하나의 탄핵사유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이야기들이 오해며 허구라고 반박했다. 또 개혁과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합류, 자신의 탄핵을 오래전부터 기획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친정인 새누리당 역시 싸늘한 분위기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 발언은) 민심과 동떨어진 언급이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며 합리적이지 못하고 적절하지 못한 인터뷰였다고 평했다어떤 정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의 설 밥상에 국정농단이란 주제도 모자라 오리발까지 올려놨다고 하면서 반박할 게 있으면 청와대 관저에 숨어 떼를 쓸 게 아니라 헌재에 나와 스스로 변호하길 바란다고 했다.난국에 태어나지 안 했어야 했나. 거짓말을 너무나 잘하는 공주였나. 왕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백설 공주였나. 그런 공주를 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 공주를 저 멀리 쫓아냈어야 했다. 훌륭하게 거짓말하는 공주가 되었다.어울려서는 안 되는 공주의 남자(최태민)를, 만나지 안 했어야 했다. 거기에서 시작했고 그 뿌리에서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다.온 나라를 거짓말 왕국을 만들었다. 그런 공주에게 나라를 맡겨 온 나라가 거짓말 경쟁국이 되었고 쑥대밭이 되었다.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다. 착하고 유능한 각료들도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거짓말이다. 사실무근이다. 유튜브에 나오는 내용이 거짓말이고 사실무근인가? 녹취록일 뿐 사실 확인은 안 되었으며 판단은 구독자의 몫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말도 거짓말인가. 청문회에서 물어보는 호가호위했던 거창한 여자 한사람 이름(최순실)을 들어보지도 전화 한일도 만나지도 모른다고 했다. 기억도 없다고 했고 .알 것이라고 했는데 모른다고 대답 했다. 뻔뻔스럽다. 2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탄핵에 찬성했다. 배신자일까?박근혜 대통령을 보는 시선은 두 가지인 것으로 나눠지는 것 같다.수첩공주로 보는 면에서 수첩에 적은 대로 인사도 발언도 하고 대통령의 딸이었고 정치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아버지로 부터 정치 수업을 받았고 그 인기 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소통을 못하고 한번 믿으면 끝가지 믿어주는 태도도 마찬가지다.다른 면은 1974년 8월15일 어머니, 5년 후 1979년 10월26일 아버지를 잃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청와대를 나올 때의 의연한 모습을 말하기도 했다. 부모도 안 계시고 남편도, 자식도 없으나 재산은 있으니 부정 없이 잘 할 것이다라고. 평범하게 산다 해도 행과 불행은 있게 마련이겠으나 평범한 인생이 부럽다고. 그리고 TV를 통해서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마음까지 편해진다고 했단다.요즘에는 TV에 대통령의 모습이 나오면 시선을 돌린다.한나라에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신분에 맞게 하셔야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 너무 많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많이 유튜브 동영상에 또 스마트폰 카카오에 보이는 상황이다. 서울 사는 친구가 박사모 모임에 나가서 태극기를 휘저으며 의견을 제시했다기에 또 한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탄핵 끝까지 꼭 가야 할까 생각되기도 했다.불확실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거기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만민평등 복음정신에 어긋나는 미국 우선주의는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새해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건강관리 잘 하자.△이남구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등단했으며, 전주대 사대부고에서 퇴직했다. 전북수필문학회장과 영호남수문학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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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0 23:02

소한에 핀 명자

지난 12월 초, 뜨락 담 아래 새똥 빠지게 명자나무의 꽃이 두 세 송이 살짝 얼굴을 내밀더니, 이번에는 모든 사물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추운 절기인 소한 무렵 검붉은 숭어리에서 대여섯 송이가 활짝 피어 내 눈을 의심케 했다.춘삼월에 피어야 할 꽃이 동지섣달 매서운 시절에 꽃을 피우다니 이상의 현실에 난감하면서도 나는 한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우리 집 뜨락의 명자나무 꽃만이 양지바른 언덕에선 개나리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런 이상 현상이 모두 제트기류 때문이란다.그러더니 대한이 당도하자 그 이름값을 하며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1주일 가까이 계속되어 힘들었다. 원래 겨울철 추위는 입동(立冬)에서 시작하여 소한(小寒)으로 갈수록 추워지며 대한에 이르러서 최고에 이른다고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산골짜기와 하천이 있어선지 시내보다 5도 정도 더 낮게 체감한다.2017년 정유년을 붉은 닭의 해라고 한다. 그동안 수많은 닭들을 보아왔지만 붉은 닭은 생소하다. 그러나 어감 상 붉은 닭 하면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좀 더 이해를 돕자면 붉다는 것은 밝다는 뜻이기도 해서 정유년을 밝은 닭의 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밝다는 것은 사람에게서는 총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유년을 총명한 닭의 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상서로운 기운에, 나도 생각지도 않은 꽃을 보니 기분이 좋아 수반에 꽂아 보름 정도 더 감상했다. 향기가 멀리까지 간다는 천리향 작은 철쭉 분을 방안에 들여 한결 코와 눈의 호사도 부려보았다. 방안 가득한 향을 인공 향수와 비하랴. 그 맑고 상큼한 향 때문인지 추운 날인데도 추운 기분은 뒤로 물러서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있다.어느새 70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달려온 나를 반추해 본다. 풀 한 포기도 자연의 일부로 다 제 길을 가는 게 뭐 나쁠까마는, 꼭 정원의 예쁜 꽃 보다는 길가의 풀 한 포기로 만족하면서 욕심 없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꽃을 대단히 좋아는 나는 올해에는 뜨락에 꽃 양귀비와 수레국화를 심으려 했지만 이름 없는 들풀들도 함께 심어보려 한다. 내가 들풀들을 유독 좋아하는 것은 그 풀들이 저마다 독특한 풀 향기를 내뿜고 있어서가 아니다 세찬 바람엔 조용히 누워주고 잔바람엔 살짝 일어나 그윽한 향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무명의 들풀들도 비가 오면 모두가 젖는다. 들풀은 그 속에서 온몸을 적시며 발뒤꿈치를 든다. 누가 알아주랴 그의 이름을, 그래도 그들은 파란 생명의 등불을 켠다. 이름은 없어도 신선한 등불을. 그리고 들풀은 들풀끼리 어울려 산다. 갖가지 모양새, 수수한 차림새로 오가는 길손이야 보든 말든 바람 부는 대로 하느작거리는 몸짓으로 서로 어깨를 비비며 머리를 맞대고 하냥 즐겁다. 거목의 꿈은 아니어도 생명의 빛을 세상에 펼친다. 푸르게 그러나 조용히 설레면서 들풀은 들풀끼리 어울려 산다. 이러한 들풀들을 심약한 가지의 양귀비와 수레국화 사이에 심어 놓으면 서로 의지하며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화원에서 구입해 피우는 꽃도 좋지만, 들풀과 더불어 마음속에 항상 곱고 알알이 맺힌 작은 송이를 만들며 웃고 살면 일석이조로 건강하고 행복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부터 세상이 뒤숭숭한 세월 속에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꽃을 보고 가꾸며 위로하고 그럴수록 자신을 돌아보며 후회 없는 여생을 보내고 싶다.붉은 닭의 해인 올해는 닭의 오덕 중 여명을 알리는 부지런함과, 여럿이 먹이를 먹는 것에서 배려하는 마음을 올해는 더 배우련다.△임영희 수필가는 전북백일장에 시가 당선되어 문학에 입문해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현재 전북문화 해설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이야기할머니로 유치원 봉사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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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3 23:02

겨울 햇볕과 함께

아침 공기가 차갑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 정보대로다. 겨울이면 춥고 눈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막상 닥치니 추위에 몸은 움츠러들어 생활에 불편함을 느낀다. 아침 뉴스를 들었다. 하루하루 전해지는 뉴스가 희망보다는 참담하고 우울한 소식이 더 많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영민하지 못하면 국가는 혼돈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에 떨어지게 된다는 점을 자주 느끼게 한다. 해를 넘기며 벌어지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예부터 사람의 기본은 진퇴를 잘한 사람이라 배웠다. 나라가 빨리 안정이 되었으면 한다.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기린봉에 보이는 눈이 하얗다. 차가운 날씨에 녹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겨울의 햇볕은 포근하기도 하다. 거실에 옮겨 놓은 화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겨울잠에 빠져 있는 화초의 모습이 느긋해 보인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옹기종기 어깨와 팔을 맞대고 있는 모습들이 친근하다. 아마도 춥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바깥 자연과 더불어 지낼 일이 기다려지는 눈치다. 겨울이면 거실로 오고, 봄이면 바깥으로 나가는 환경에 순응하는 법도를 익히는 듯하다.따뜻한 겨울 햇볕을 받으며 거실의 화초를 보면서 진퇴라는 말에 생각이 머문다. 어릴 때 다투고 싸우던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한 번 뒤로 물러섰다면 싸우는 일이 없었을 거 아닌가. 어려서 물 뿌리고 청소하며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고 나아감과 물러섬을 배워왔건만, 고희를 살아온 내게 진퇴를 아는가, 누가 묻는다면 제대로 실행을 못 하였으니 그저 웃을 따름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직분을 다하고, 일을 마치면 물러나야 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은 진퇴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매한 내가 진퇴를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마는 누구나 자신을 위한 생각은 있으리라 여긴다.세상일은 진퇴로 이루어지고 마감한다는 생각이 든다. 순리와 천명에 따라 현명한 진퇴를 결정한 사람에게는 존경과 찬사가 뒤따르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역사에도 길이길이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진퇴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여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는 나라보다 개인의 영욕이 앞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생뿐만이 아니다. 전쟁에서도 진퇴의 판단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남는다. 현명한 진퇴로 사랑과 존경받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우리는 흔히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다는 말을 자주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가. 태평 성대한 시대를 요순시대라 말한다. 요순의 뒤를 이은 우임금의 일화가 있다. 우는 치수 사업을 잘해서 태평성세를 이룬 임금이다. 치수 사업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청렴하였던지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면서도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모습을 보면서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지도자, 정치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가짐이 더욱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고사에 오이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고, 과일나무 아래서 갓을 바로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멀리서는 밭에서 오이를 따는 모습이고, 과일을 따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으로부터 의심 살만한 행동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정해지면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나라가 비리로 먹칠 되어 있는 모양새다. 국가 비리로 법원의 심판을 받아 결과가 나올 것이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고 모두 발뺌을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고 존경했다면 오늘날의 탄핵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많은 사람이 원할 때 오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진퇴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한 나라의 혼돈 시대를 피할 수 있다. 국가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정체 상태이다. 하루빨리 이 모든 일이 해결되어 나라가 정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따뜻한 겨울 햇볕을 받으니 바깥 추위를 잊은 듯하다. 고서인 소학의 쇄소, 응대, 진퇴의 구절이 생각나서 다시 새겨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를 먼저 수신하고 치국에 뜻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윤재석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 협회원, 영호남 수필문학회원이다. 안골은빛 수필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수필집 〈삶은 기다림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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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4 23:02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

그가 훌쩍 떠난 지 일 년이 넘었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온 산에서 넉장거리 하던 재작년 가을 어느 날 그는 갔다. 그 해 봄에만 해도 생때같았던 그가 몇 달 사이에 그만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봄의 끝물쯤이었을까, 그가 위암이라는 소식이 풍문에 들려왔지만 직접 물어보기 멋쩍어 언저리만 맴돌며 살피기만 했다. 워낙 밝은 표정인 데다 평소처럼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식성으로 보아 병이 그리 위중하리라고는 짐작조차도 못 했다. 수술하고 잘 조리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개복하고 보니 복막까지 전이되어 더는 손을 대지 못하고 닫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살다보니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하루하루가 바쁘다. 타고난 조급증 탓에 몸이 바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쁜 것인지도 모른다. L의 병세가 빠른 속도로 악화하여 집에서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 보지 못했다.그를 병원으로 옮겼다는 연락이 왔다. 의식이 왔다 갔다 하여 임종예배까지 미리 드렸다기에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다급히 병원으로 찾아갔다. 몸이 밭아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늠름했던 풍채는 어디로 가고 몰골이 너무 왜소하게 보였다. 그래도 듣던 것보단 약간 나았다.가족들은 의식조차 없었는데 하루 사이에 사람을 모두 알아보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좋아졌다며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을 위한 배려였을 줄이야. 수발하던 부인이 내가 왔음을 알리자 감았던 눈을 뜨며 희미하게 웃었다. 가만히 손을 잡았다. 그도 손을 맞잡았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편안하게 그는 저 세상으로 갔다. 그가 떠난 지 벌써 2년째, 지금도 지인들끼리 모이면 그의 얘기하며 추억을 더듬는다. 시간이 갈수록 추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그와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더욱 또렷해지고 어제 일처럼 느껴짐은 어인 까닭일까.나는 요즘 들어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사후세계에 대해 궁금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어느 것 하나도 답이 없다. 그러잖아도 짧은 인생을 죽어보기 전에는 티끌만큼도 알 수 없는 사후세계에 대한 사유로 허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그보다는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때가 많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지인들의 부음을 전해 듣고 문상을 다녀온 날이면 이런 생각들이 더욱 깊어진다. 내가 죽어버리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 애착을 가지던 일들이 시들해지고 가슴이 스산해지며 모두가 덧없이 느껴진다.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죽음이란 것을 맞이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실제로 사는 모습을 보면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소유에 집착하며 욕심껏 움켜쥐고 아등바등 사는 사람이 많다. 하나같이 생명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두려워 떤다. 나도 그들의 하나이지만.삶에 대한 애착이 결코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살면서 잊었던 것을 챙기듯 가끔은 죽음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 애착을 가지고 아끼는 것들을 천칭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담고 반대쪽에 죽음을 올려 기울기를 달아볼 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남은 시간의 빈 그릇에 어떤 삶의 내용을 채워야 할까? 죽음을 전제로 삶의 가치를 천칭에 저울질하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며 살아야겠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소망을 담아서.△윤철 수필가는 김제 출신으로 전북대 행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했으며 수필전문지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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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7 23:02

민주공화국 열차

우리는 요즈음 TV, 신문, SNS 등에서 국회청문회나 특검들의 심문 앞에서 당연히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증인들이나 죄인들이 묵비권을 행사 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감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그래서 요즈음 죄인들이 죄를 짓고서 빠져 나갈 길은, 첫째, 무조건 부인하고, 둘째, 변호사를 선임하고 셋째, 그것도 저것도 안 되겠거든 아예 숨어버리면 된다는 말이 회자 되고 있다.우리나라의 법에는 경찰들이나 법집행자들이 죄인들을 구속 할 때는 소위 미란다 법칙을 말해준다. 즉 피의자는 진술거부권을 가지고 있으며 피의자의 진술이 그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과 피의자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그래서 인지 죄인들 모두, 하나 같이 부인을 하며 변호사를 선임하고 있다. 우리의 직업 중 남의 일을 대신해 주는 대리라는 직업이 있는데 대리운전기사, 대리강사. 대리모. 등 수없이 많다.지난날 우리는 대리 대통령의 통치하에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최순실아라는 여자가 대통령을 대리해 국정을 농단을 하여 이 나라를 참담하게 했고, 나라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광화문 앞에 모여서 촛불을 밝히고 나라를 바르게 세우자는 군중집회를 열고 소리를 높였다. 어떤 정치가는 바람이 불면 촛불은 곧 꺼질 거라 했지만 촛불은 아지도 그칠 줄 모르고 불타고 있었다. 지금은 비둘기 열차보다도 더 느린 탄핵열차를 발차시켰지만 이 탄핵열차는 속도가 국회 역에서 청와대 역까지 다가가며 무서운 탄력을 받으리라 생각한다.일부 사람들은 헌법재판소라는 역에서 기각되어 다시 뒤돌아 올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촛불대신 태극기를 들었지만 분명코 탄핵열차는 무사히 질주하여 목적지에 도착해서 새로운 기관사가 운전하는 대한민국 공화국 열차에 모든 국민들이 탑승하여 모두가 소원하는 복지국가로 함께 달릴 것이다.한 때는 고속성장을 하며 세계조선업 1위를 차지했고, 디지털강국 이란 명예를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 추락되고 말았다.노블레스 오블리주 라고 지도층이 더 모범을 보여줘야 하는데, 지도층들이 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가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이제는 정권을 바꾸는 것이아니라 정치를 바꾸어야한다고 잠용들이 일어나 외쳐대지만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인지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러는 사이 미국, 중국, 일본 강대국들은 자기나라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정치, 경재, 등 우리나라를 목조여 오지만 아직도 우리 정치인들은 대권 등 자리 싸움에만 연연하며 양분화 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이제는 모든 국민이 지혜와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다. 국민 모두가 잘살고 평등한 민주주의 복지나라를 끌고 갈 민주공화국 열차를 다시금 힘찬 발차를 해야 한다.△ 전주웅 수필가는 2001년 문예사조로 등단했다. 한국전력공사에서 퇴직했으며 전북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문예창작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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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0 23:02

청동 주전자

보물 1683-2호인 하피첩(霞巾+皮帖)은 다산 정약용이 1810년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부인이 보내준 치맛감에 학연, 학유 두 아들을 위해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본래 네 첩이었으나 하나는 사라지고 세 첩만이 전한다. 얼마 전 서울 옥션 경매장에서 정약용의 하피첩은 7억 5000만원이라는 고가에 낙찰됐다. 하피첩이 경매장에 나오기 까지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한 폐지 수거자에게서 발견된 하피첩은 고서적 수집상에 넘어가고 다시 이것이 서울 옥션 경매장에 모습을 보이면서 세인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이렇게 우리의 문화재가 고가로 경매되는 것은 첫째는 수집가의 수집의 벽으로 공급이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작품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귀한 문화재가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키려는 많은 국민들의 관심사가 높아지는 작금의 현실이다.나는 화요일 오후가 되면 낯 익은 소도시의 경매장엘 간다. 소품으로 된 청동제품 그것도 특히 청동 주전자를 낙찰받기 위해서다. 경매장에는 근현대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물품들이 출품된다. 우리 생활에서 낮 익은 물품들이 주를 이루지만 희귀한 물건들도 가끔씩 출품되어 열띤 경매의 경쟁으로 호가를 올린다. 다행인 것은 사라져 가는 민속 물품들도 상당수 출품되어 경매장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연출되어 여간 흥미롭지가 않다.56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청동주전자를 100여 점, 청동 불상을 20여점, 청동 향로와 화로를 10여점 수집했다. 그 중에서 제일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은 청동 주전자이다. 주전자 모양이 천차만별이어서 여간 귀엽지가 않다. 지금까지 수없이 낙찰을 했어도 단 한 번도 똑같은 물건이 아니었다. 다행이다. 재수좋은 날은 3-4점 낙찰 받기도 했고 제품이 출품되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허다했다. 그리고 주전자 모양이 주변의 동물모양의 오리, 개, 소, 돼지, 여우 등을 본떠서 만든 게 대다수인데 모두가 다양한 특징을 지녔다. 주로 중국의 명나라, 원나라,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모두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 참으로 흥미가 쏠쏠하다.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주전자를 보면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고 나만이 느끼는 큰 보람을 얻게 된다. 자연 청동 제품만을 고집하다보니 불상도 20 여점 수집을 했는데 책장에 잘 진열해 놓았다. 그리고 아침으로 합장 배례 후 출근하다보면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낀다. 종교의 마력이다.이제는 진열해야 할 장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 책장 틈 사이 이곳저곳에 겹치게 넣어 두다보니 무질서함이 그야말로 고물상이다. 집사람은 아연 실색을 하고 정리하라고 성화지만 나만이 즐기는 물건이라 가끔 끄집어내어 놓고 먼지를 닦아주면 반질반질한 윤기가 여간 매력적이 아니다. 이제 장을 놓을 자리를 물색해야 되지만 한 점 한 점 모아지는 소품들이 내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또한 기쁨을 안겨주는 것들이어서 나는 화요일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기쁨의 날이 되었다.△최상섭 수필가이자 시인은 김제 출생으로 한국시와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독서진흥위원과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등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까치는 징검다리에 수(繡)를 놓고〉 등 6권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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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3 23:02

고향은 다르지만

고향은 그리움이다. 누구든 태어난 고향이 있고 그 고향을 잊지 못하여 일생동안 향수에 젖은 채 고향을 찾아가곤 한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보금자리다. 들길을 헤치고 가다보면 건너다보이는 고향집. 푸른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옛 고향집은 언제 가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놈이 갑자기 제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에 무심코 00산부인과라고 말했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아들 녀석은 나의 농담을 곧이 곧 대로 듣고 학교에 가서 산부인과가 고향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녀석이 학교에서 알아오라고 했다면 자세히 알려주었을 텐데 지나간 이야기로만 듣고 대답해 준 것이다.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미안한 마음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고향이라고 설명을 해주다보니 또 하나 문제가 발생했다. 나의 직장 특성상 이사가 잦아 나, 아내, 아들, 딸 넷 다 고향이 다른 꼴이 된 셈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 고향은 제 1고향, 아들 딸 고향은 제2의 고향이라고 둘러댔다. 흔히들 타향도 정들면 제2의 고향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일부 사람들 중에는 고향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편향된 애향심으로 잘못 활용하려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개인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이용하려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향이 같다고, 출신 학교 동문이라고, 성씨가 같은 집안이라고 암암리에 챙기고, 뭉치고, 어울리고, 서로 봐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토박이들은 고향이 다르다고 텃세까지 부려 뭇 사람들의 타향살이를 힘들게 한다. 결국 지역감정으로 발전되어 국토 개발의 불균형, 인재 등용의 차별이라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편향된 고향 사랑이 사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주범인 것이다. 이 같이 고향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갖가지 부정적인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뀌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이렇게 노랫말을 지었다.고향은 다르지만 한겨레이고, 얼굴은 다르지만 이웃이라네./조상이 물려 준 흰 옷의 정신, 받들어 오늘의 거울로 삼자./ 사는 집 다르지만 한마음이고, 차린 옷 다르지만 한뜻이라네./ 지키는 질서에 명랑한 하루, 펼치어 내일의 꿈을 이루자./ 일터는 다르지만 보람찬 하루, 하는 일 다르지만 슬기로워라./ 다듬고 익히어 내 할 일 다 해, 우리의 새날을 가꾸어 가자./한국방송협회에서 주최한밝고 바른 우리사회 건설을 위한 온 국민이 함께 부를 노래 가사 현상 공모에 입선한 작품이다.최창권 작곡, 이용 노래로 고향은 다르지만이라는 제목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한동안 마을과 학교, 회사, 건설현장 등에서 확성기로 틀어주었는데 노래의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건전가요는 내용이 아무리 건전해도 생명이 짧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이용의 노래 곡목 속에 나와 있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요즈음은 동요 속에 그리는 아름답고 정겨운 고향은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꽃피고 새소리 들리는 시골마을 고향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고속도로 로 변했고 아파트단지와 공장 건물로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고향마을은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의 고향은 그대로 남아 있어 힘들고 치쳤을 때 언제나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안식처는 마련해 준다. 도시생활 속에서 부대끼며 이 사람 저사람 눈치 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고달픈 현실에서 고향은 언제나 엄마 품속같이 아늑함을 주고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해마다 귀성객의 행렬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한마당 잔치를 보는 것 같다. 우선 마음부터 들뜨는 게 고향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모처럼 복권 한 장 사 지갑에 넣고 다니는 일주일처럼 마음 넉넉했다. 고향은 다르지만, 고향의 본질을 찾아 다 함께 같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최성철 수필가는 〈대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군산구불문학 회원이며 대한문학 작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초등 교장직을 정년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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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0 23:02

우정 - 이명철

친구가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란 전화를 받았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였다. 그런데 수술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수술을 했을까?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내내 가슴이 조여 왔다. 예상치 못한 병에 대한 두려움이 무겁게 밀려온다.그의 부인이 간병하고 있었다. 푸석한 모습들, 친구의 얼굴은 야위고 초췌했다. 핏기는 없으나 눈빛은 형형(熒熒)하였다. 급할 것도 없어 천천히 물어보았다. 무슨 수술을 했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쓸개를 떼어냈다고 대답하였다.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된데? 판에 박은 소리지만, 그 말 외에는 적당한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쓸개 하나 떼어내도 사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데.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친구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나 이제 쓸개 없는 놈 되었어야.그래, 나이 먹으면 쓸개가 없는 듯해야 돼. 그리고 너는 본래 쓸개가 없는 놈이었잖아! 우리는 병원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어댔다. 농(弄)은 그렇게 해도 친구나 나나 씁쓸한 웃음을 웃고 있는데, 친구의 부인이 수술결과가 좋다는 등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여 주었다. 끊어지다 이어지다 이야기는 반복되면서 시간은 흘렀다.친구는 가끔 창밖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름살이며 희어져가는 머리카락이 묘하게 햇살에 처량한 빛을 몰고 왔다. 병원 뜨락에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단풍들고 낙엽지고, 앙상한 가지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가랑잎이 친구의 얼굴과 겹친다.이 친구는 나와 유독 가까이 지냈다. 군에 입대하기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놀다가 군용열차가 논산훈련소로 떠날 때까지 역전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고, 9개월 9일 간의 짧은 군대생활이었지만 제대 후 제일 먼저 찾은 것도 그였다. 직장도 함께했다. 같이 가서 시험을 보자고 했다. 친구는 네가 먼저 들어가서 근무해보고 좋으면 말해.라고 하여, 교육 받는 동안 시험이 있기에 원서를 사서 친구의 집에 보내주었다. 그는 바로 합격하였고, 30여 년이 넘도록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였다.그는 항상 나보다 생각이 깊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먼저 소식을 전하는 건 대부분 그였다. 혹여 내가 먼저 소식이라도 전할라치면, 야, 너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구나.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항상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고 농을 했다. 나보다 생일이 좀 빠르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간에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는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한다. 만나면 별로 할 말이 없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궁금하고 만나고 싶어진다. 술은 고작 몇 잔이면서도 항상 나보다 더 마신다고 장담한다. 서로 언짢은 말을 해도 그러든 말든 한다. 그는 늘 나에게 작고 아담한 푸른 소나무 같은 존재였다. 특별하지는 않으나 60년을 이어온 끈끈한 우정이다.?그와 나는 대나무막대기를 타고 놀던 죽마고우(竹馬故友)는 아니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중과 포숙아 같이 혜안(慧眼)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희생하여 후세에까지 우정의 표상이 된 관포지교(管鮑之交)도 아니다. 그저 무덤덤하게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참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벗은 나이나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험한 인생길에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벗이 될 것이다. 좋은 벗은 조건이나 상대방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이 좋은 벗이 되어야 한다. 그만큼 순수한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와 나는 가슴속 꽃잎들을 꽃으로, 열매로 결실을 맺어가는 친구다.벗은 현실이요, 우정은 이상이다라고 했다. 벗은 눈앞의 꽃이라면 우정은 무화과처럼 안으로 피우는 꽃이다. 생각해보면 그와 내가 같이한 지난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앞으로도 살아생전 현실의 벗으로 영원한 우정으로 계속 이어갈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가 있어 든든하고 행복하다.△이명철 수필가는 1999년 〈지구 문학〉으로 등단, (사)한국문인협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이며 고창문인협회 제 8대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는 〈학교-지역사회연계 문화예술프로그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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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13 23:02

돌아온 허수아비 가족

허수아비를 보면 어린 시절이 생각나 저절로 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에는 엿장수들이 빈병이나 녹슨 쇠붙이, 헌 고무신은 물론 삼베 걸레도 엿과 바꿔 주었다. 그래서 들판에 삼베옷을 입고 서있는 허수아비들이 가끔 수난을 당했다.개구쟁이들이 허수아비의 옷을 벗겨 엿과 바꿔 먹어 허수아비들은 알몸으로 모자만 눌러쓰고 밭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허수아비들은 날씨가 덥거나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논밭을 떠나지 않았다. 허수아비들은 농민들의 말을 잘 따르고 고락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농민들이 너도 나도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로 떠나자 허수아비들도 덩달아 농촌을 떠났다.내 생(生)의 들판에도 크고 작은 참새 떼가 많았다. 이럴 때 내 잠자는 영혼을 다시 한 번 일깨운 허수아비. 훠이 훠이, 참새를 쫓는 묵언의 함성이 환청으로 들린다. 그 음성을 기둥삼아 내 정신의 들판이 황금빛 생명의 물결로 출렁일 수 있기를 빌어본다. 나는 가을바람에 소매 자락 펄럭이는 허수아비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쌀독에 거미줄 치던 가난한 세월에도 해마다 기대가 부푸는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이면 마을에서는 날 새들로부터 곡식을 지킨다. 한줌도 안 되는 곡식을 놓고 사람과 짐승이 피비린 쟁탈전을 벌이는데 흉년드는 해일수록 목숨 걸고 달려드는 참새 떼들을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농촌을 떠난 허수아비들은 차림새가 달라졌다. 모자도 허름한 밀짚모자가 아니고 입은 옷도 떨어진 삼베옷이 아니다. 모자나 옷 모두 메이커도 다르고 색상이나 모양도 각양각색으로 패션이 다양해졌다. 개중에는 유명메이커를 입기도 한다. 또 도회지의 축제장이나 공원, 도로 주변의 화단에 여럿이 서있다. 그 모양도 양팔을 벌리고 서있는 게 아니고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어 보기엔 화려하다. 하지만 늦은 밤 공원의 가로등불 밑에 서있는 허수아비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고향을 떠난 실향민처럼 보여 측은하다. 젊은이들과 함께 허수아비도 떠나버린 농촌은 힘없고 경제력도 넉넉지 못한 노인들만 남아 적막하고 쓸쓸했다.농촌을 떠나 도회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안락한 노후 생활을 위해 하나 둘 귀농을 하더니 요즘은 젊은 청년들 중에서도 귀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도회지 에서 귀농하는 사람들을 따라 허수아비도 귀농을 하고 있다. 귀농한 허수아비는 들판의 논에서 참새들과 벗하던 옛날과 달리 주로 산골짜기 과수원이나 밭에서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같은 크고 사나운 짐승들을 지킨다. 고향의 산골짜기에서 만난 허수아비는 혼자가 아니다. 허수어미와 함께 있다. 허수어미는 옷도 멋있게 입었다. 빨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등산모자도 썼다. 지팡이도 들고 서있어 멋있고 힘차게 보인다. 허수아비 혼자일 때보다 마음이 든든하다. 사나운 짐승들도 부부가 함께 지키고 있으니 함부로 농작물을 해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허수아들과 허수딸이 없는 게 조금 아쉽다. 허수아비에게는 허수어미가 옆에 있으니 머지않아 허수와 허순이도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농촌에 새바람이 이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귀농인도 반갑지만 젊은이들의 귀농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 소식을 듣는 기분이다. 농촌에 노인들만 남아있어 대를 이을 사람들이 없었는데 젊은이들이 귀농하여 농촌이 다시 활력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서 젊은 아낙네들의 웃음소리와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젊은 귀농인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면 좋겠다. 해마다 가을, 농촌의 황금벌판에서 농민들과 돌아온 허수아비 가족이 함께 어울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깃발을 내걸고 풍년가를 부르며 한 판 축제를 벌이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작가회 부회장과 전북문협이사, 전북수필부회장. 행촌수필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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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6 23:02

"다시"의 교훈

이웃집 할망구가 날 보더니/ 가방 들고 학교 간다고 놀린다./ 지는 이름도 못쓰면서/나는 이름도 쓸 줄 알고/ 버스도 안 물어 보고 탄다./ 이 기분 니는 모르 제.83세의 늦깎이 나이로 한글을 깨우친 어느 할머니의 내 기분이라는 시다. 이 시 속에는 웃음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내내 빙그레 웃음 짓게 한다. 인생을 다시 산다는 기분에 얼마나 좋을까?한동안 뜸했던 아내가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되었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 할까마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대단하다. 인생에서 다시라는 말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즘의 아내를 보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다시라는 말이 새삼 고맙다.세월을 살다보면 어떤 인생이라도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것은 자기 몫이다. 어린이들이야 부모가 일으켜 세우지만 성인이 된 우리를 누가 다시 일으켜 주겠는가? 그 다시 일어남이 인생이라 말하고 싶은 이유는 주변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 죽은 사람들을 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나 다시 일어서리라/더 이상 여기서 슬퍼할 수만 없어/ 어제까지 아픈 가슴 넓은 품에 맡겨버리고/두손을 굳게 잡고/나 다시 일어서리라/오 저 높은 곳 바라보며 나 다시 일어서리라.이 복음 성가의 다시는 나와 아내의 반면교사가 되었다.좋은 선생님은 과연 누구일까? 야단치며 채찍 하는 선생님인가. 아니면 괜찮아, 다시 해보자고 용기를 주는 사람인가. 나는 당연히 후자 쪽이라 생각한다. 가수는 한 곡의 노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백 번을 다시 부르고 또 부른다.소녀시절 가수를 꿈꾸었던 나의 아내는 갑상선 암을 수술하고 목소리가 변하여 노래는커녕 대화도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 까지 오는 데는 수많은 고통과 슬픔이 따랐다. 가장 큰 것은 좌절과 함께 찾아온 존재적 상실감이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노래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게 행복이었을 텐데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서러움이 질곡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 쉰 목소리에 갈라진 음성은 좌절하는 실망의 도를 넘었다. 관광을 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불안으로 몸을 떨기도 했다.언젠가 TV에서 국민 가수라 불리는 어느 대중 가수가 지금은 회복이 되었지만 한 때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노래를 부르지 못해 얼마나 갑갑했던지 자살까지 하고 싶었다는 심경을 털어 놓았다. 나는 순간 곁에 있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 가수가 아내의 고통을 대변한 셈이다.나는 순간 가능성을 열어 놓고 아내의 노래를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아내의 노래 선생을 자청했다. 여보! 좋아요. 다시 한 번 불러 봐요 하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때로는 아내가 신경질을 내기도 했으나 무시하고 나는 수없이 다시를 외쳤다.드디어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 아내의 노래 속에서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실감났다. 아내는 작년 군산의 작은 콘서트홀에서 상을 받더니 이제는 더 큰 무대로 나서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아내의 모습이 더욱 빛났다. 다시 라는 말이 지금은 내 아내 인생의 행복을 채워주고 있다. 만약 다시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아니 다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 아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인생이 즐겁고 다시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희망은 내일의 꿈이기도 하다. 이 같은 기쁨이 아내의 육십 인생을 새롭게 달구고, 다시 일어섬에 대한 감사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다시라는 말을 되새겨 보며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한성덕 수필가는 대한문학회 이사이자 행촌수필 회원으로 신아문예대학 수필 창작반에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단 하루만이라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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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30 23:02

서른 살 고무나무의 교훈

잎이 넓어 공기 정화 작용이 뛰어나고 광합성도 매우 활발하여 카펫이나 벽지 등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를 흡수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는 고무나무가 우리 집에 자리한 지도 어느새 30년이 되었다.어느 지인이 새집에 입주한 기념으로 고무나무 화분 하나를 가져왔다. 그동안 네 번이나 이사를 하는 동안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가는 곳 마다 잘 적응하며 시들지 않고 어른 키 만큼 쑥쑥 자라준 준 것이 대견하다.고무나무는 이사할 때마다 항상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자리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잎이 헤싱헤싱하여 수형도 엉성 하자 짝꿍도 은근히 구박을 하며 내다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봄날 눈 딱 감고 밑 둥에서 약 30cm만 남기고 과감하게 싹둑 잘라서 네 개의 화분으로 분양을 하였다. 그리고 이 고무나무가 과연 어떻게 될까 자세히 관찰을 해보니 자른 줄기에서 하얀 액체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러더니 두어 달이 지나자 한 가지에 겨우 서너 개의 잎만 붙어있던 초라한 나무 등걸의 여기저기서 20여개 나 되는 잎이 뾰족뾰족 돋아나기 시작 했다. 이후 3년이 지난 오늘날엔 서른 개도 넘는 잎이 무성해져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생명 보전을 위한 자기만의 사투가 죽음을 무릅쓰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 잎들이 마치 새로 얻은 독수리의 부리와도 비슷했다. 독수리의 수명은 80년 정도지만 그 부리는 40년쯤 살면 낡아져서 점점 못쓰게 된다. 부리를 못 쓰게 된 독수리는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40년이 된 독수리는 삶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다시 생명을 이어가느냐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된다. 이 때 의지가 약한 독수리는 짧은 생을 마감하지만 삶의 의지가 강한 독수리는 낡고 못쓰게 된 부리를 재생시키기 위해 하늘 높이 오른 다음 온 몸을 바위 위로 내리꽂아 낡은 부리를 뽑아내고 새부리를 얻어 다시 40년을 맹금류의 수장으로 살아간다고 한다.노인의 생각하나 바꾸는 것이 산을 옮기기보다 힘들다 했던가? 만약 내 삶의 방식이 낡고 효능이 떨어져 능력을 잃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삶에 도전 할까? 아니면 주어진 운명만 탓하며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고 결국 굶어죽는 독수리처럼 새로운 삶의 기회를 놓치게 될까?나는 고무나무의 회생을 보며 고무나무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는 아름다운 비결을 배웠다. 고무나무는 공격을 받아 몸에 상처가 나면 반항하지 않고 눈물로 대응을 한다. 고무나무는 상처를 통해서 눈물을 흘리지만 이 눈물은 마냥 슬픔에 젖은 눈물로 나무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단한 고무를 만들어서 상처부위를 덮고 그 수액으로 고무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신발이 되어주고 기쁨이 되어준다. 상처를 받았지만 흘리는 눈물로 오히려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고무나무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흘리는 눈물로 더욱 강하게 대응하여야 한다.나이 먹을수록 제자리에 안주하려 하지 말고 제 고집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새 부리를 가진 독수리처럼 거듭나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진실만이 영원한 게 아닐까? 아집으로 사면초가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고무나무에서 교훈을 배워야한다. 고무나무는 햇볕이 없어서 힘들수록 그냥 말라 죽는 게 아니라 더욱 열심히 가지를 뻗고 잎을 만들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힘이 들수록 좀 더 자신을 계발하고, 분투하자.△ 수필가 박영숙 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며, 전북문학관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늘푸른 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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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23 23:02

수수동 희필 - 물에 들다

냇물에 갈 때 마다 돌을 던진다. 기껏해야 종아리도 못 미치는 깊이지만 돌이 쌓이면 물의 흐름은 조금씩 느려진다. 얼기설기 쌓인 틈으로 새어나가면서도 그 안 물은 금방 풍성해진다. 자리 잡힌 돌 부피 하나에 흘러가는 방향을 바꾸고 더디어졌다가 소리를 내기도 하는 게 개울에 흐르는 물이다.수년전 산 맞은 편 냇가를 석축으로 쌓는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있었다. 냇물 위로 축축 늘어진 산 쪽의 나뭇가지들이 무자비한 중장비로 꺾이고 베어져 한마디로 휑한 풍경이 돼버렸다. 내 바닥을 긁어내고 물길을 직선으로 만드는 것이 수해방지 때문이라니 할 말도 없었지만 그때 사라진 자연미가 아쉽기 그지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되자 사람의 손으로 뒤적거려놓은 그 자리가 다시 새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잠시 직선으로 흐르던 물길이 방향을 돌리고 반대편에 자갈을 채우며 새로운 곡선을 만들어 냈다. 나무들도 다시 물 쪽으로 가지를 뻗어 내는가 싶더니 꺾이고 베인 상처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머루, 때죽나무, 단풍나무, 노각나무, 돌배나무 등, 나무의 푸른빛들이 다시 당당해진 것이다.덕분에 해가 뜨는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나무그림자가 냇물에 가득하다. 폭이라고 해봤자 징검다리 예닐곱 개 건너는 정도지만 한낮 가득한 햇볕은 오후가 되면 서쪽 그림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울타리삼아 집 가장자리에 사다 심은 작은 나무들이 어느새 커 생긴 그늘이다.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준 것이다.성벽처럼 비탈이 진 산에 촘촘히 선 나무들은 저마다 해바라기를 하느라 키들이 크다. 그 큰 나무들 틈에 하얀 꽃을 피우는 노각나무도 섰지만 가까이 갈 수 없이 칙칙한 숲이기 때문이다. 노각나무 하얀 꽃들은 여름이 짙어지기 전 주변 숲속으로 대부분 져 내리지만 몇 꽃송이들은 물 위로도 떨어진다.잎이 하얗고 꽃술이 노란 노각꽃 낙화유영은 차라리 귀족적이다. 마지막이라는 자태의 비장미가 없다. 봄에 호르르 지거나 가을에 쓸쓸히 지는 이미지가 아니다. 떨어진 꽃송이지만 나무와 인연을 끝내기 전 그대로다. 그냥 떠 있거나 맴을 돌거나 물살에 넘쳐 흘러가거나, 그 어떤 것 중의 하나라도 경박하지 않고 도도하다. 작년부터 냇물에 돌을 던지기 시작한 이유도 실은 물 위에 그 꽃송이들을 가둬두기 위함이었다.몇 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무더위였다. 남한유일의 고원지대라 시원함을 자랑했던 산동네, 수수동에 찾아온 염장군의 기세가 여느 해와는 전혀 달랐다. 한여름에도 냉방기가 필요 없었던 집이었지만 그 서기를 피해 집 아래 냇가를 찾는 것이 이젠 일과가 돼버렸다.명색이 전원주택이라 일하다 버려진 흙 묻은 면장갑이나 걸레들은 모아 빨래를 하기도 한다. 둑 공사 때 꺾였던 때죽나무를 다듬어 만든 방망이로 빨래를 두들기면 소리의 청량함이 계곡에 가득해진다. 내가 만들어내어 내가 즐겨듣는 소리다. 그렇게 방망이질 빨래를 하고 있는 동안 아내는 돌에 앉아 탁족을 하고 있지만 결코 어긋난 연출은 아니다. 맑게 흐르는 물이 아까워 물에 드는, 물놀이의 풍요를 내가 즐기는 것뿐이다.오늘도 물가를 찾았다. 조금 더 더워지는 시각이 되면 아예 몸을 물에 담그고 대사리를 잡기로 작정을 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놓여있지 않다.산딸기가 드디어 익었네.아내가 물 가장자리 숲 쪽을 손으로 가리킨다. 전에 영 볼품없이 물 쪽으로 늘어져 있던 산딸기 가지에 어느새 까맣게 열매가 익었다. 질 새라 나도 이리 뻗었다는 듯 싸리나무가지도 물 위로 늘어졌다. 얼굴에 검은 점 가득한 주황색 산나리도 그 틈에서 몸을 흔들고 있다. 분명한 야생종인데 어느 화원에서 키운 것보다 더 훌륭한 자태다. 산딸기가 손안에 모아지는 동안 팔뚝에 스친 싸리나무 꽃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잘디 잔 보랏빛 꽃들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물 위에서 맴을 돈다. 맴을 돌다 천천히 흘러간다.△수필가 선산곡 씨는 1994년 '문예연구'로 등단. 수필집 'LA쑥대머리' '끽주만필' '속아도 꿈 속여도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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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16 23:02

구름이 천지를 가리우니

백두산 서파 산문에 도착하니 작달비가 쏟아진다. 맑은 천지가 보고 싶어 찾아왔는데. 굵은 빗줄기가 원망스러워 하늘만 올려다본다. 내일 북파로 올라가서라도 꼭 한 번은 천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활짝 핀 만병초가 산을 덮었다. 드문드문 쌓인 눈 덩이는 비가 내려도 녹지 않고 남아 있다. 우주선을 타고 별나라에 온 우주인 같다. 낯설고 물설다.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며 야생화를 탐사했다. 그곳의 꽃향기를 흠뻑 가슴에 담았다. 천지를 보려면 천사백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가이드는 이런 날씨에 천지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씨가 변덕을 부리니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고 한다.무엇을 선택해야 할 때, 항상 망설임이 뒤따른다. 요즈음 무릎이 편치 않아 걱정 되었지만, 천지를 보러 왔으니 못 보고 내려온다 해도 올라가야 한다. 운이 좋으면 천지를 보고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한참을 지나니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우비를 입고 계단을 올라가다 일행 중 비가 내려도 개의치 않고 올라갔던 부부를 만났다. 궁금했다. 천지를 봤느냐.고 물어봤다. 구름이 잠깐 걷혀 맑은 천지를 보고 오는 중이란다. 우리도 올라만 간다면 천지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조급해진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숨이 차오르며 땀이 흘러 얼굴에 강줄기를 만든다. 하지만 정상에 오를 기대감과 천지를 본다는 희망이 버티게 해주었다. 무릎이 허청거릴 때쯤 토라진 천지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 속에 잠겨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얼굴을 베일에 감춰두고 보여주려 하지 않는 천지를 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버선발로 뛰어오지 않아 섭섭해서 토라진 것인지, 삼대가 적선을 하지 않아서 그러는지, 아니면 만나기 싫은 사람이 와서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날씨라고 들었으면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다가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천지에서 마시는 소주의 맛을 즐기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한 번 구름 속에 감추어 둔 얼굴을 쉬이 드러내놓지 않는 천지, 전라全裸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뒤집어쓴 면사포 속에서 곁눈질만 하며 애를 태운다.백두산 천지에 대한 기대와 상상이 많았다. 산골짜기에 야생화가 곱게 피어있는 그림엽서 같은 천지, 뭉게구름 떠다니는 파란 하늘이 푹 잠겨 더욱 쪽빛이 된 천지, 청노루, 산토끼, 다람쥐, 꿩이 새끼를 기르며 사는 무능도원 같은 곳,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이 시원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지는 구름이 가려 보지도 못하고, 두 손을 담구지 도 못 한 채 드센 비바람을 만나 아쉽다. 걸음이 무겁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백두산의 절경을 만났다. 구름의 조화가 경이롭다. 천지를 앞에 두고도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듯, 하늘이 밀당을 한다. 먼 산과 골짜기에 핀 야생화를 품었다가 풀어놓으며 수 만장의 수묵화를 그린다. 구름이 있어 백두산의 경치가 더욱 신비로웠다.다음 날 북파에서도 어제보다 더욱 심한 구름의 훼방으로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진작품으로 백두산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찰나를 보았다. 야생화가 활짝 핀 백두산, 별똥별이 쏟아지는 순간, 하얀 뭉게구름 잠긴 천지, 해 뜨는 아침이 액자 속에서 다양한 천지를 보여주었다. 순간들을 포착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동안의 기다림과 고독, 지난했을 작가들의 발걸음이 작품 속에 스며있다. 백 번을 찾아오면 두 번 볼 수 있다는 백두산의 모습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보여 달라 조르던 내 욕심이 민망했다.△박귀덕은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삶의 빛, 사랑의 숨결',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걸어오다'등을 출간했다. 작촌문학상을 수상했고 행촌 수필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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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09 23:02

해도 되나요

눈이 내릴 때 삶의 무상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가짜 시인 행세를 한 적이 있다. 한 쪽에 모아두었던 시집을 꺼내어 정독을 하고, 감정 떠오르는 대로 시 쓰기를 흉내 냈다. 보이는 것이 모두 시의 소재였고, 수필 쓰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기만 시인이 던진 말이 가슴을 찔렀다. 함부로 시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다가 안 되면 결국 가짜 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이비 시인이 너무 많아서 행복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K시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선생님의 평가는 더 냉혹했다.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시 50편은 외우고난 다음에 써야한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며 30여 편 중에서 대여섯 편만 남기고 나머지는 빨간 볼펜으로 엑스선을 그었다. 창피했다. 그 뒤로 짝퉁 시인 행세를 그만 두고 글 가는 대로 사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컴퓨터를 뒤지다가 수년 전에 사장시킨 그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해도 되나요라는 시가 울컥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 글을 쓰던 때의 혼령이 되살아나는 듯했다.그리워해도 되나요 꿈에서라도그대 가슴에 얼굴 묻고 / 따뜻한 체온 느껴도 되나요길을 걷다가도 / 문득 문득 떠오르는 당신사랑한다는 말 / 염치없지만 / 단 한번 단 한번만이라도 해도 되나요내 뜨거운 심장으로 / 그대를 온통 멍들게 해도 되나요내 그리운 이여 / 견디다 못해 지쳐 쓰러질 때당신 사랑했다는 말 진정 해도 되나요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것 같다. 꿈에서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 문득 떠오를 만큼 만나고 싶었던 이. 사랑한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로 가슴 벅찬 짝사랑은 아니었는지.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고,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또 다시 멀어지는 슬픈 사랑이야기인 듯싶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향해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했고, 그 열정은 뜨거웠던 것 같다. 그리워해도 되나요 느껴도 되나요 사랑해도 되나요 이루지 못할 사랑일지라도 진정 사랑했다는 말은 하고 싶었던 것 같다.누구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가슴 설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이 시의 제목은 시애詩愛이었다. 시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애절하던 때였다. 마치 시인이나 된 것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릴케가 되고 소월이 되고, 때로는 설렘과 번민과 가슴앓이로 밤잠을 설칠 때였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지쳐 쓰러질 정도로 시어詩語 하나를 목마르게 갈망하던 때였다. 결국 포기해야 했다. 시는 수필보다 더 가시밭길이었다. 사랑이 핑크빛만은 아니듯 시창작의 길도 끝없는 고뇌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되나요〉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내 지난날의 초상인 듯하다. 누구에게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고 의지하며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읊조렸던 것이리다.누군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망설일 때가 있다. 나 또한 인생의 기로에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고 결국 나 스스로 갈 길을 결정하면서 살아왔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과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갈림길에서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했든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잘못된 선택이었더라도 그것은 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픔이 컸던 만큼 더 성장할 수가 있었다. 인생은 60부터라는데 앞으로 펼쳐질 내 운명에 또 어떤 선택의 갈림길이 있을지. 이렇게 해도 되나요? 그저 신의 뜻대로 믿고 따를 수밖에.△백봉기 수필가는 군산 출생이며 한국산문 수필공모에 당선됐으며 KBS 프로듀서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있으며 수필집 '팔짱녀'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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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02 23:02

띠풀

평소 자주 다니던 산책로가 엉망이다. 도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막아버려 다른 길로 돌아다녀야 한다. 늘 다니던 길이 그렇게 되어 버리니 아쉽다. 어느 땐 나도 모르게 그 길로 들어섰다가 되돌아 나오곤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니 자연히 그 길과 멀어졌다. 이제 새로운 코스가 당연한 길이 되어 버렸지만 옛길이 그리워 그 근처를 서성거려보기도 한다. 그러다 달라진 길 모습이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람들의 발자국 따라 다져졌던 길은 어느새 풀들이 수북해서 선뜻 발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어지니 순간에 이렇게 되어 버리는구나 싶다. 문득 맹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孟子謂高子曰(맹자위고자왈)/山經之蹊間(산경지혜간)/介然用之而成路(개연용지이성로)/爲間不用(위간불용)/則茅塞之矣(즉모색지의)/今茅塞子之心矣(금모색자지심의)’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산길이라도 사용하면 길이 되지만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띠풀이 자라서 길을 막는다. 지금 그대의 마음을 띠풀이 꽉 막고 있구나.’하는 내용으로 사람의 본성도 마찬가지라서 수양하지 않으면 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면서도 실현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누군들 그 사실을 모를까. 알면서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리라.오래된 일이다. 상당히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있었다. 마음 내키면 아무 때나 드라이브 가고 여행을 다니면서 거리낌 없이 속내를 보이던 사이였다. 한 가지 다르다면 그쪽은 농담을 좋아하고 나는 그런 농담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쪽에서 하는 말은 대부분 농담이고 내 쪽에서 하는 말은 전부 진심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었다.어느 날, 그쪽에서 오는 농담을 별생각 없이 받아넘겼다. 그런데 친구는 본인이 한 말은 농담으로 했다고 생각하면서 내 말을 진담으로 알아듣고는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 나와 결별을 작심했다고 하는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라 변명조차 하기 싫어 그 길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몇 년이 흐른 뒤 정반대의 일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내가 무척 마음 상하는 일을 당했다. 정말이지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만한 일로 정을 끊어 버린다면 내 곁에 과연 친구가 몇이나 남게 될까, 세상 살면서 외톨이가 될까 두려웠다. 어떻게 하든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내 마음의 상처가 가실 때까지는 자주 마주치지 말자는 생각으로 되도록 오래 대면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결과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다시 전처럼 가까운 관계로 회복되었다.먼저 친구와는 그야말로 띠풀로 막힌 길이 되어 버렸고 나중의 친구와는 더는 그런 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위기를 넘겼다. 먼저 친구와의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나중의 친구 관계는 내 쪽에서 띠풀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가끔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다. 지나고 나서야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인생 공부는 왜 꼭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인지. 하긴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내가 조금은 성숙해졌는지도 모른다.부딪치고 꺾이면서 생긴 상처들을 안고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치받고 일어날 때 어떤 희열을 느끼기도 했고, 극에서 극을 넘나드는 감정의 변화가 때론 삶의 무게를 높여 주기도 했다. 생각이 단순하지 못하다는 것은 맑은 성격이 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삶의 굴곡을 들여다본 경험이 세상을 깊게 보는 눈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어찌 보면 그 친구의 결별이 오히려 내 삶의 길을 올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지침서가 된 듯싶다. 내 본성을 잃어버리거나 어긋나는 일 없이 잘 비껴갈 능력을 키워 준 것이리라.이렇듯, 한 번 겪은 띠풀의 경험이 있었기에 내 안에는 그런 띠풀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간다.△김재희는 '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으며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장승'으로 등단한 뒤 수필집 '그 장승을 갖고 싶다'등을 출간했으며,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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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25 23:02

파도

하늘이 파랗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햇빛이 강하게 비친다. 날씨는 가을이라 덥지도 않고 선선하여 나들이하기에 좋다. 이런 날이면 마음이 울적하여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해변을 찾아 갔다. 들녘엔 벼들이 노랗게 익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풍성하게 잘 익은 과일이 빨갛게 물들어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구불구불한 해변을 따라 바다풍경을 바라보면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며 기분이 상쾌하다. 바닷가 풍경은 주변의 나무들과 어울려 더욱 아름답다. 아득하게 보이는 수평선과 푸른 하늘, 맑은 공기는 처음 보는 듯이 우리를 반긴다. 한적한 마을의 풍경은 지난 날 어릴 적 고향마을을 생각나게 한다. 대나무가 있고 측백나무의 울타리도 주변의 나무들과 잘 어울려 있다.바닷가에 닿았다. 모래밭을 걸으며 파도가 밀리고 밀려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주변은 고요하고 적막한데 파도만 철썩이며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밀려왔다가기를 반복한다. 손을 들어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파도를 향해 큰소리를 쳐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부딪치기를 계속한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널따란 모래밭을 따라 산과 바위가 있는 곳으로 하염없이 걸어간다. 머나먼 수평선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를 벗 삼아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해변의 추억을 만들어 간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철썩철썩 다가오는 물결을 하나둘 헤아리며 발자취를 남겼다.파도는 왔다가 밀려가고 밀려가면 다시 한 몸이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진다. 파도는 폭풍을 만나면 거세어진다. 집채 같은 커다란 바위도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이 거세게 밀려든다. 그리고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다시 한 몸이 된다. 성난 파도가 힘차게 바위를 치거나 잔잔한 파도가 조금씩 어루만져도 모두 하나가 된다. 우린 서로 의견이 맞아 친하게 지내거나 뜻이 맞지 않아 대립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서로 다투기도 하고 헤어져서 다시 만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파도는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잔잔하게 살살 다가와도 다시 하나가 된다. 밀려갔다가 다시 밀려오듯이 서로 화합하고 융화하기를 반복한다. 나도 파도처럼 이렇게 하나 되는 지혜를 갖고 싶다.파도는 폭풍우에 흘러내리는 흙탕물이나 졸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나 가리지 않는다. 바람과 함께 부딪쳤다가 부서지고 다시 모아 하나가 되기를 쉬지 않고 반복한다. 흙탕물은 싫고 맑은 물은 좋다고 투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모두를 다 보듬고 어르며 함께 생활한다. 모양이 더럽고 지저분한 것이나, 냄새가 좋고 나쁜 것도 가리지 않는다. 부모와 같이 포근한 마음으로 감싸며 떠안고 보살피는 것 같아 보인다. 나도 파도처럼 모든 걸 떠안고 포용하며 지내고 싶다.사람들은 좋은 일은 오래오래 기억하며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싫거나 짜증나는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가슴 속에 남아서 두고두고 애를 태우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주변을 뱅뱅 돌면서 괴롭히는 경우가 있다. 즐겁고 신나게 생활해도 인생이 짧은데 거슬리는 일로 근심하고 걱정하며 고달프게 지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남기고 싶은 발자취나 지우고 싶은 흔적들을 모두 깨끗하게 씻어 지워버린다.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나도 파도처럼 잊고 싶은 기억들을 모두 한꺼번에 지워버리고 하얀 백지처럼 깨끗하게 되돌리고 싶다.오늘도 파도는 쉬지 않고 부딪치고 부서지며 다시 모아 하나 되고 모든 것을 끌어안으며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린다. 언제나 새롭고 단정하게 새 손님을 기다린다. 나도 파도처럼 모두 지워버리고 새 손님을 기다리고 싶다.△최동민씨는 교직에 재직하다 퇴직했다.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창암 이삼만 선양회 초대작가(문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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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8 23:02

레드슈즈

어느 여행 잡지에서 니스를 보지 않고 나이스(nice)를 말하지 말라는 글을 보았다. 글에서처럼 니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강렬한 태양, 검푸른 바다,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해안 도시 니스는 일 년 내내 관광객으로 붐비는 세계적 휴양지다. 니스와 붙여 부르는 깐느는 한 도시 같은 다른 도시다. 니스 깐느, 니스 카니발과 깐느 영화제는 역사로나 규모로나 세계적이다. 영국 왕실가족이 주로 찾는 니스 깐느는 그래서인가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다.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길은 낭만과 여유가 넘친다. 그 길을 걷고 있는 백발의 노부부는 먼 옛날 신혼여행의 단 꿈에 젖어 있는 듯했다. 부인의 신은 레드 슈스, 레드 슈즈를 신고 해변을 걷는 노부부에게서 완숙한 행복을 읽을 수 있었다.파리를 출발하여 스위스와 이탈리아 모나코를 거쳐 니스 깐느에 도착한 것은 1985년 2월 15일 쯤이었다. 손자 홍기가 막 돌을 지났을 때 딸 내외와 친구 김성균(교장)과 함께 즐긴 15일 간의 유럽 여행은 생애의 마지막이자 가장 의미 있는 행사였다. 김성균은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몹쓸 병에 걸려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여행에서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인상은 니스 해변에서 보았던 노 숙녀의 레드 슈즈다. 왜였을까? 아마도 빨강의 색채적 발산력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뜻이다. 노인과 빨강, 어찌 보면 아주 대칭적인 개념 같지만 그래서 오히려 인상 깊게 어울리는 개념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색의 배치와 사용이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젊었던 시절 백화점 쇼윈도우에 걸려 있는 레드 슈즈를 보면서 강렬한 연정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 대상은 없었다. 있다면 저 레드슈즈를 신은 어여쁜 발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여자는 손발이 얼굴보다 예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색의 호감도에서 나는 빨강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빨강과 레드슈즈와 연정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빨간색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에 움츠리고 있던 연정이 레드 슈즈를 통해 살아난 것으로 해석했다. 물론 레드 슈즈에 대한 망상은 허무로 이어졌다. 안델센의 동화 빨간 구두를 모티브로 한 영화 분홍신(The Red Shuse)은 그 주인공이 어느 장례식장에서 빨간 구두를 벗기며 죽는다는 황당한 스토리다. 이처럼 빨강이 꼭 좋은 징조의 색깔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긴 하다. 학창 시절 어느 모임에서 만난 여자 친구의 빨간 구두는 단번에 나의 감정을 사로잡았다. 좋은 인연으로 이어가는 듯 진지하고 열렬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흔히 말하는 결별의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중희(전주 출신)씨가 작사한 남일해의 노래 빨간 구두 아가씨 솔 솔 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똑 똑 똑 구두 소리 어딜 가시나/한 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발 거름 하나 둘 혼자서 가네/솔 솔 솔 닥아 온 빨간 구두는 어느 날 소리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살아졌다. 비련이랄 수도 없는 해프닝쯤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나는 더 이상 빨강구두를 좋아할 수 없었다.손연재를 비롯한 많은 리듬체조 선수들은 화장을 짙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손연재 뿐만 아니라 배구스타 김연경도 많은 여자 선수가 예뻐 보이기보다는 자신감을 얻고 지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한다는 인터뷰내용을 본 일이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도 선수들의 화장은 예뻐 보이기 위한 것 외에 강해질 수 있다는 자기최면을 거는 것이라며 김현경 선수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 핵심적 화장품은 물론 빨간 립스틱이다. 가수 임주리가 불렀던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화장품 회사의 빨간 립스틱을 동나게 할만큼 선풍적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다. 빨간 립스틱과 레드 슈즈, 여인들의 도전적 애정 표시의 대표적 브랜드이고 정렬적 고백의 상징처럼 되었다.오늘부터 한 달간 코리아 쎄일 페스타행사가 열려 백화점 쇼윈도우에도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 옛날 친구를 그리며 혹시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레드 슈즈를 보러 가보아야겠다.△안홍엽 수필가는 남원에서 태어나 익산 남성고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전주 MBC 편성국장으로 재직 중에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산문집 '사랑이 꽃비 되어'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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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1 23:02

속이 빈 밑동

창밖에 펼쳐진 하늘이 아스라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물결 잃은 대해大海 같다. 앞 동棟 옥상 가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환풍기도 까딱하지 않는다. 그 뒤 뾰족 선 안테나가 쓸쓸하다. 이런 날엔 열 마리도 더 되는 까치 가족이 몰려와 서로 어르는지, 다투는지 한 바탕 옥상을 휘젓다가 약속이나 한듯 안테나 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았으면 좋으련만.옥상 바로 밑창에서 흘러내린 녹물, 남루한 벽이 보기 싫어 얼른 오른쪽으로 눈길을 옮긴다. 정문에서 시작한 철제 울타리 아래, 토담처럼 세로로 늘어선 철쭉. 지난봄 이 우중충한 아파트에 빨강, 하양, 노랑으로 환한 빛을 뿜어주던 것들이다. 그 뒤에 듬성듬성 서 있는 살구나무, 배롱나무, 감나무가 눈길을 붙잡는다. 지난여름 보는 것만으로 침샘을 자극하던 노란 살구,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계속하던 주홍색 백일홍 꽃, 지닌 가을 가지가 휘게 열려 있던 아기주먹 만한 감들. 지금은 꽃도 열매도 다 떨구고 거무죽죽한 빈 가지로 허공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 날들은, 그 날들이 설령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되살아난다고 하던데, 내게 지나간 날들은 하나같이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우중충하다.아파트 정문은 문이 없어 좋다. 벗겨야 할 빗장도, 끌러야 할 자물통도 없어 좋다. 경비실에 사람이 있다지만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 누구 하나 통제하지 않아 좋다. 허리 굽은 노파가 유모차 같은 보행기를 밀고 나가고 이어 검은 잠바를 입은 중년 남자가 활갯짓을 하며 나간다.얼마 뒤 택시 한 대가 정문 앞에 선다. 택시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택시를 바라본다. 누가 찾아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닌데 반가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다. 택시에선 젊은 부부가 이제 막 걸음을 걷기 시작한 듯한 아이를 데리고 내린다. 그들이 내리자 택시는 빈차 표시등을 밝히고 사라진다. 허전한 가슴을 내버려둔 채 눈은 계속 정문에 멎는다. 과일장수 트럭이 정문 안으로 들어온다. 들어와 1동과 2동 사이 주차장에 서더니 농장에서 직송한 꿀 사과가 한 보따리에 오천 원. 마트에서 만 원짜릴 싸게 싸게 파니 싸게 싸게 나와 가져가세요.를 반복한다.고개를 돌려 왼쪽을 본다. 야트막한 산의 기슭, 앙상한 잡목들 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늙은 오동나무에 눈을 맞춘다. 몇 해 전 몰아친 태풍에 꺾인 중동 북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다. 태풍이 지나간 뒤 복구요원들이 톱질을 하기에 꺾인 가지를 잘라내는가 했는데 잔가지만 잘라 놓아 그 모양이 옷 다 벗은 늙은이의 삭신 같다.몇 해 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앞 전나무 숲으로 가는 길을 걸은 적이 있다. 길가에 있는 거대한 나무통 안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가 부둥켜안고 환희 웃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사방으로 벋은 어린이 몸통 굵기의 뿌리 위에 얹혀 있는 속이 빈 밑동이었다. 수령 육백 년이 넘은 전나무 고목이 지난여름 태풍에 부러진 것이라 했다. 속은 두 사람이 들어가 부둥켜안고 남을 만큼 넓은데 갓은 절구통 둘레만큼이나 얇았다. 밑동에서 우둠지까지 속을 단단히 채우며 나이테를 늘려왔을 긴 세월. 위의당당威儀堂堂했을 모습은 간데없다. 그 밑동 바닥에서 회색 바람이 일어 맴도는가 싶더니 이내 가슴 안으로 밀려듦을 느꼈다.중동이 꺾여 불안하게 늘어져 있는 저 오동나무도 밑동이 비어 있을 것이다. 늙어 속이 비는 것이 어디 나무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묵으면 묵을수록 속이 비어, 거기서 이는 바람이 갈수록 거세질 테니까.△김형진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수필과 평론으로 등단했으며 '수필문우회' 회원이며 '토방' 동인이다. 수필집 〈종달새〉, 〈흐르는 길〉, 〈바딧소리〉와 수필평론집 〈이어받음과 열어나감〉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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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4 23:02

한옥마을의 꽃송이

전주 한옥마을에 화사한 꽃송이가 나부낀다. 많은 관광객이 길거리를 메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꽃송이, 바로 한복 입은 여성이다. 지나면서 보면 어찌 아름다운지 몇 번이고 돌아보고 싶어진다. 우아한 자태가 마음을 이끈다. 거기에 꽃 댕기까지 매면 한결 아름다워진다.오늘 본 한복 입은 여성은 대전에서 구경하러 온 여학생이었다. 하나같이 하얀 피부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 적당히 세워진 코, 붕어처럼 작은 입을 가진 여섯 미인이었다. 흰 저고리에 파란치마, 빨간 저고리에 남색당초문 치마, 옅은 배추색 저고리에 빨간 치마, 박꽃색 저고리에 회색금박문치마 등 차려 입었다. 마지막 여성은 금박문 빨간 댕기를 매어 더욱 아름다웠다. 이들이 방실방실 웃으며 사진을 찍고 깔깔거리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았다. 또 남녀 한 쌍도 한복으로 차려 입고 손을 잡고 걸으니,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더 많지만 눈에 띄는 것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양복만 입은 곳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한복과 양복을 입은 사람이 섞여 있으니 한복의 우아한 모습이 돋보였다. 한복은 우선 색상이 튀어난다. 어떤 한복이든지 색이 밝고 화사하다. 그러니 잡초 밭에 꽃처럼 눈에 띈다. 거기에다 요즘 여성은 어찌 예쁜지 모르겠다. 키도 날씬하고 균형 잡힌 몸매에 얼굴도 잘 가꾸어 미운 사람이 없다. 이런 자태에 예쁜 한복을 입었으니 돋보이지 않으랴.한복은 우리나라의 전통의상이다. 조상 대대로 입고 살아왔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보면 한복을 입고 있다. 조선시대의 인물화에서도 한복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려서도 일상복으로 한복을 입었는데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양복을 입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편리함 때문에 양복에 밀려났지만 소홀히 대해서는 아니 될 고유의상이다. 문화는 발전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뿌리까지 바뀌어서는 아니 된다. 근본은 살리고 부분적으로 편리하게 변화하는 것이 옳은 일이려니 싶다.나는 평상시에는 양복을 입지만 전통의식을 치룰 때는 한복을 입는다.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덧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는다. 그래야 제사를 지내는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차려 입으니 손자도 따라서 한복을 입고 참석한다. 기특한 일이다. 아내도 한복을 입고 제사를 모신다.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모두 그럴 것이다.요즘도 결혼식장에 가보면 신랑신부가 폐백을 드릴 때에는 한복을 입는다. 양가의 어머니도 고운 한복을 차려 입는다. 부모의 팔순잔치나 금혼식, 회혼식에는 한복을 입는 사람이 많다. 평상시에는 편한 양복을 입더라도 의식을 갖추는 데는 한복이 주류를 이룬다. 좋은 경향이라 여겨진다.여성은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경향이므로 예쁜 한복을 입어 더 예뻐졌으면 한다. 전주 한옥마을에 오는 여성들은 모두 한복을 입어 아름다움을 자랑했으면 좋겠다.△김길남 수필가는 〈논두렁 밭두렁〉 외 수필집 6권을 펴냈다. 행촌수필문학상, 은빛수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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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8 23:02

편지 이야기

편지를 직접 써본지가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편지를 처음 써본 것은 강산이 여섯 번을 변하고도 남았을 60여 년 전의 일로 일찍이 한글을 익혀 고향마을에서는 신동(?)이라는 유명세를 타던 때라 이웃 어르신의 부탁으로 군대에 간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 드리고 불러주시는 대로 답장을 대신 써준 것을 시작으로 마을 형님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며 문학가의 기틀을 다진 셈이지만 내 이름으로 받아본 첫 편지는 군대에 간 6촌 형님이 보내주신 군사우편이었다.나이 차가 많은 관계로 대하기가 어려워서 평소에는 만나도 어색한 인사나 나누는 정도였는데 얼굴을 안보고 글로만 쓰는 편지에는 구구절절 무슨 말을 해도 거리낄게 없었기에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았는데 형님이 군대생활을 하는 3년 동안 받은 편지가 무려 1천 여 통에 달했고 나 또한 비슷한 분량의 답장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아련한 추억만 남아있을 뿐이다.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매일 안부를 주고받으며 교분을 쌓다보니 새록새록 정이 들어서 형님이 제대를 하신 뒤로는 끈끈한 혈육의 정을 나누며 친분관계를 유지해 오던 중에 형님께서 삶의 터전을 전주로 옮긴 후로는 문중 시제 때나 한 두 번씩 만나 회포를 풀곤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문중의 대소사라면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시던 형님께서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10년 넘게 안부조차 모르는 채 살고 있으니 무심하고 각박한 세태가 원망스럽다.예전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문안편지를 써 보내고 연말연시면 연하장을 보내는 일이 생활의 한 부분이었는데 집집마다 전화가 보급되면서 소통방식도 편지에서 전화통화로 바뀌었고 컴퓨터가 등장하고부터는 전자우편인 이메일이 소통수단으로 각광을 받더니 휴대폰과 스마트폰이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손 편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문자메시지나 카카오 톡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편지를 한자로는 便紙, 片紙로 표기하는데 종이에 안부나 소식을 간단하게 적어 보내는 서신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종이가 없던 시대에는 대쪽이나 나무판에 글씨를 써 보냈기에 옛날에는 편지를 서간(書簡)이나 간찰(簡札)이라고도 했고 편지는 대쪽의 의미를 갖는 간(簡)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이 일반화된 것이 오늘날의 편지라고 한다. 편지는 글을 써서 보내는 문자활동의 하나로서 영어의 lettr가 문자라는 의미 외에 편지라는 뜻도 갖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노벨문학상 후보작가로 해마다 한국인들에게 기대와 실망을 번갈아 안겨주고 있는 우리고장 전북출신인 고은 선생의 가을 편지라는 작품을 음미하다 보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친구들에게 불현듯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온 누리에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사색하기 좋은 계절,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편지 한 통이라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김희선 수필가는 정읍문화원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정읍지부장, 한국예총 정읍지회장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농촌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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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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