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2-22 07:54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수필

떨어진 낙엽을 보며

아파트 둘레 길을 걷기 위해서 새벽에 길을 나섰다. 샛별은 변함없이 반짝이는데 옆에 떠 머물러 있는 상현달은 빛을 잃어간다. 간밤에 세차게 불던 바람은 가로수의 무수한 나뭇잎을 성급히 떨어뜨려 놓았다. 낙엽이 발밑에 애잔하게 밟힌다. 인생이란 낮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이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사랑하라 인도 빈민가의 척박한 땅에 고귀한 사랑의 씨앗을 뿌린 마더 데레사수녀의 말이 생각난다. 젊어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주변 삶들이 이제는 어렴풋이 그 윤곽들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확실한 것은 영원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에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은 이 낙엽들처럼 다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기세등등하던 올 여름의 폭염도 9월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시절 앞에 꼬리를 사리고 말았다. 더위에 맞서 쉼 없이 돌던 선풍기도 이제 한쪽으로 비켜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나는 한여름의 찜통더위를 나만의 최고 피서 방법인 방콕을 즐겼다. 그저 집에 콕 박혀서 책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사십대에 찾아온다는 사추기의 터널도 이 여행을 즐기다 보니 지나칠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의 여정에 예고 없이 찾아온 나름대로의 어려운 시절도 무리 없이 이겨낼 수 있었다 책 속에서 마음의 위안과 값진 격려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삶의 지혜도 배울 수 있어 더욱 좋았고, 뒤늦게나마 살아온 자취를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나는 삼 년 전부터 성경을 하루 한 장씩 필사해 왔다. 그러다 보니 완필이 눈앞에 이르렀다. 그 동안 유례없는 무더위는 선풍기의 힘으로 밀어내고 나만의 책상 겸용으로 쓰는 식탁에 앉아 한 자 한 자 쓰고 나면 하루 지난 어제의 일기를 썼다. 고개만 돌려도 금세 있었던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이 일쑤였는데 생각을 곱씹어 어제 일을 나열하다 보니 기억력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 일상들을 삼 년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 왔다. 그리고 올 여름에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보기도 했다. 빌려온 책은 반납 기일이 있어서 독서에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찾아들 틈이 없어 좋았다. 만년에 좋은 친구가 자리해 주어 지난여름 극심했던 더위를 지나칠 수 있었다.가끔 친정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살아보니 아무 것도 아니어! 희망을 부풀려 걸어놓고 애면글면 했던 것들도 다 부질없음을 떨어진 낙엽을 보며 터득하게 된다. 세월의 물살이 속절없이 너무 빠른 속도로 흘러가 버리니 자선과 선행으로 지은 나만의 값진 수의에 이따금 생각이 머무는 때가 있다. 이제 나도 이것을 준비해야지 싶기도 하다. 자선은 가진 자만이 베푸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위로에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2003년에 복자로 시복 되었다가 올해 성인품에 오른 마더 데레사 수녀는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대하듯 마음을 담아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라고 했는데, 그분의 말과 행적이 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어려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해온 그분의 삶이야말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된다. 가을의 문턱에서 새롭게 다짐해 본다. 일상에서 나를 스치는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내어주는 하루하루이기를 바라고 싶다. 작은 것일지라도 받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비움으로 채워지는 충만감을 느끼며 살기를 염원해 본다. 하릴없이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스산해졌던 마음에 새로운 삶의 군불을 지펴본다.△서계숙씨는 〈순수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민들레의 기행〉을 펴냈다. 현재 전북문학관아카데미 수필반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10.14 23:02

임금님의 술

가을바람이 불면 술 한 잔이 생각이 난다. 젊은 시절 농사일에 땀 흘리고 잠깐 쉴 때 마셨던 새참이 그립기 때문이다. 막걸리로 시작한 농촌의 술 문화는 이제 약주, 맥주를 거쳐 고량주 까지 진전하여 시골 들녘까지 맥주나 고량주가 배달되는 세상이 되었다. 도시에서 직장인들이 퇴근 후 마시는 술은 하루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작업성과를 독촉하는 상사를 안주 삼아 마시는 술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맛이었다.어느 날 문득 옛날 임금님의 술은 어떤 술을 마셨을까 궁금했는데 우연히 임금님이 마시는 우리나라 전통의 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술 이름이 ‘온’이라고 했다. 보통 술은 쌀밥에 누룩을 섞어 빚는다. 쌀이 누룩을 만나 발효라는 과정을 거쳐 처음 나온 술이 단양주이다. 이 단양주를 다시 한 번 빚으면 이양주가 된다. 이 과정을 12번 반복하고 정제하여 빚은 술이 온이다. 아마 온이라는 술을 만들다가 신하가 술기운에 취해 횟수를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술맛이 궁금하였다. 나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 술을 마시면 걱정은 사라지고 보이는 여성은 모두 천국의 미인 같을 것 같았다. 중국 초나라 장왕 때의 일이라고 한다. 어느 날 장왕은 장수들과 늦도록 연회를 베풀며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날이 어두워지자 통 큰 장수가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는 여자의 손목을 슬그머니 잡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아마 술기운에 용기가 생겨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성추행을 당한 그녀는 엉겁결에 장군의 갓끈을 잡아 당겨 끊어버렸다. 그리고 빨리 불을 켜라고 소리를 쳤다. 장왕도 눈치를 챘지만 험악한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기지를 발휘하여 명령한다. “경들은 불을 밝히기 전에 모두 자기 갓끈을 버리시오”라며 연회석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그때 갓끈이 떨어져 나갔던 장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 장수는 그 뒤 초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앞장서서 공을 세워 빚을 갚았다는 임금과 술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50여 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가정에서 술을 빚을 수가 없었다. 술은 주조장에서만 제조하여 파는 독과품목이었다. 주세가 국가 수입의 비중을 크게 차지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서민들은 몰래 술을 만들어 보약처럼 마셨다. 당시 시골마을에서는 단속반이 들이닥치면 이웃마을까지 금세 전달이 되어 제조하던 술을 헛간이나 돼지 울에 숨겼다. 그러나 단속하는 사람들은 술에서 풍기는 발효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찾아냈다. 그렇게 발각되면 한번 봐달라고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술을 몰래 제조하다 적발된 뒤에 부과되는 벌금제도는 애주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술 제조가 자유롭게 허용되어 지역마다 특산주를 개발해서 판매하는 경쟁 사회가 되었다.요즘 우리 사회는 서로를 불신하고 오가는 말들은 사납다. 이럴 때일수록 한 잔 마시고 ‘카!’ 하면서 깍두기를 우지직하게 씹는 얼굴들이 보고 싶다. 좋은 일은 친구 덕이고 잘못 된 일은 내 탓이라며 텁텁한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싶다. 술에 취해 불그스레한 얼굴을 마주보며 마음을 열고 동네 모정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옛 친구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장병선씨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덕진문학〉 〈행촌수필〉 회원으로 문단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전주 덕진공원 문화재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10.07 23:02

노인의 유래

옛날에는 60세 이상을 살았던 사람이 드물어 평균수명이 짧았기에 장수를 자축하는 환갑(還甲 또는 回甲) 행사를 했다.(1940년대까지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44세였다.) 즉 천간(天干)의 첫 글자인 갑(甲)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이다. 환갑잔치의 유래는 저 멀리 고려시대 충렬왕 22년(1296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올해는 사람들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붉은 원숭이해로 1956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환갑을 맞이하는 해다.노인의 법정 연령 65세는 1871년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사고, 질병, 노령 등의 사회복지제도를 만들 당시 사회보험제도 상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를 65세로 결정한데서 비롯됐다. (이 때 독일 남성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50세도 안되었다고 한다.) 이 후 UN에서도 이 기준을 받아들이면서 국제적으로도 65세가 노인 연령의 기준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60세가 기준이었는데 1980년대에 노인 관련법을 제정하면서 65세로 기준을 바꿨다.과학과 의술이 발달해서 평균 수명 100세 시대가 눈앞에 다가와 지구촌 시대가 노인들로 붐빈다. 지금 태어나는 어린애들은 성인이 되어서 모셔야 할 노인들이 많기 때문에 어쩌면 고달픈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누군가가 그랬다. 노인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가는데, 본받을 만한 어른들은 안 계신다고. 우리나라는 2018년이 되면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 초과하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다. 그 뒤부터는 고령화의 추세가 가속화되어 2050년까지 급속도로 늙어갈 나라의 순서에는 일본, 한국, 홍콩 등이 앞장을 서고 있다. 세 명에 한 명 이상이 노인 세상이 되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저성장이 고착화 된다는 경제전문가들의 추론이다.이렇게 되면 사회 전반의 문화와 경제구조 등 모든 것들이 놀랍도록 변화할 것이다.대한노인회는 이사회를 열어 노인 연령 기준을 상향 조정하자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바가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개인 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지난날의 65세 이상 노인과 21세기 65세 이상 노인은 생각과 체력, 그리고 외모가 크게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리스의 격언에 집 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서라도 모셔라.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삶의 경륜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우쳐주는 격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인은 아집만을 가진 노인이 아니라, 지혜로운 어른을 말한다. 노인은 오랜 세월을 살아 왔기에 기억력도 떨어지고, 고집스런 행동이 강하다. 지나간 날들의 이야기를 내세우고, 매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이 모든 허물들을 메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삶의 경륜에서 얻은 지혜를 담은 통찰력이다. 풍부한 경험에서 얻어진 노련한 통찰력과 젊은이들의 패기가 어우러질 때 또 다른 사회 변화를 불러 올 수도 있을 것이다.대한의 어르신, 노인들이여!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비록 늙어 갈지언정 생각마저 낡아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젊은이들로부터 잔소리만 하는 노인네로 취급받아 따돌림 당하기 쉬우니 매사에 너그럽고 인자한 어르신이 되는 길, 외로운 신세를 덜어내는 길을 찾아보시기 바란다.△김형중씨는 〈수필시대〉로 등단했다. 문학박사로 전북여고 교장을 지냈으며, 원광보건대 교수다. 전북문인협회 이사와 행촌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9.30 23:02

지름길의 그림자

사람은 매일 유무형의 길을 가게 된다. 그 길이 제 길이든 지름길이든 매 순간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가깝고 빠르다는 속성(屬性)을 지닌 지름길의 유혹을 떨치기란 그리 쉽지 않다.어린 시절, 기회만 있으면 개구멍이나 샛길 통행을 했던 기억이 있다. 등하교 때 제 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밭 가운데로 질러갔던 일도 떠오른다. 가까우니 편하고 그 쾌감 또한 여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지름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간혹 선생님이나 밭 주인한테 들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심리를 알고 있는 어른들은 그러려니 하며 크게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요즘처럼 경쟁을 조장하는 세태와는 달리, 순박함이 묻어있는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언제부터인가 지름길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며 스스로 채근한다. 제 길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는 열등생 취급을 받기 일쑤다. 요즘 너나없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중 하나는바쁘다이다. 바쁘기로는 어린이들도 어른 못지않다. 방과 후에도 부모가 마련해준 경로를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안쓰러울 정도다. 어른들이 바쁘다는 것은 나름대로 선택과 판단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는 자신의 생각보다 부모의 의지에 따라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지름길로 눈이 가기 마련이다.발달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아동은 일정한 단계를 거쳐 발달한다. 연령 경계와 개인차가 있을 수는 있어도 모든 개인은 같은 단계를 같은 순서로 거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그다음 단계의 기초가 된다. 잎이 자라고 꽃이 피면 이내 열매를 맺는 식물의 순차적 성장과 어린이들의 단계적 성장은 같은 이치이다. 어린이들은 성장 발달 단계상 기초를 탄탄히 다지며,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야 한다는 것이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교육의 과정에서 속성(速成)의 이면에는 기본의 소홀, 단계의 건너뛰기, 인성의 경시라는 속성(屬性)이 숨어있다. 속성(速成)으로 인해 허약해진 기본과 뒤틀린 인성이 언젠가는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지름길로 달려 남보다 앞서 목표에 이를 수도 있겠으나, 이를 잘못 관리하면 자칫 자만과 나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감을 잃고, 두려움으로 망설이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초가 허약하고 단계를 건너뛰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어른처럼 잘한다하여, 마냥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어린이의 성장이 때로는 터덕거리거나 모자라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어린이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당연한 현상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상을 되돌아보며 지름길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자상하게 들여다볼 일이다.△문경근씨는 전북문인협회와 정읍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9.23 23:02

울컥한다는 것

내 핸드폰 벨소리는 에이미와인하우스의 발레리다. 나는 워낙 그녀를 좋아해서 이 노래를 벨소리로 정했다. 비록 짧은 소절이지만 하루에 수십 번은 듣는듯하다. 어느 날은 노래를 들으려 느릿느릿 전화를 받을 때도 있다. 발레리는 강해지는 것이라는 뜻의 슬라브어 권에서 쓰이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는 밸러리(Valerie)라고 표기한다. 에이미와인하우스는 아깝게도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약물 중독과 거식증으로 고통 받다 죽어간 에이미가 너무 아까워 울컥하며 경련이 인다. 이건 몇 년이고 변함없는 감정이다. 울컥한다는 것은 격한 감정이 갑자기 심하게 치미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울컥한다는 것은 워낙 북받치는 감정이라 꼭 눈물로 이어지는데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해져서 오히려 슬픔이 희석 되는듯하다. 이런 정화된 기분은 누구든 한쯤은 느꼈을 것이다.요즘은 어디서든 울컥하는 느낌을 받기가 쉽지 않다. 항상 뭔가 억울하고 답답한 일들이 많아 치가 떨리는 듯 진저리는 자주 치지만 감정이 격해져서 울컥해지는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세상은 항상 찌르며 대드는 송곳 같은 곳이어서 손잡이가 있는 안전한 쪽으로만 가고자한다. 그러나 안전한 쪽은 밋밋한 곳이기도 해서 그곳은 늘 건조하고 차갑다. 그래서 따뜻한 얘기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팔월은 운 좋게도 그 울컥하는 격한 감정을 몇 번이나 느낄 기회가 있었다. 애국가와 함께 시상대에 올라 울컥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며 우리도 함께 울컥하게 했던 리우의 태극전사들! 생각해 보니 장한 것과 울컥함은 동질의 것인 것 같기도 하다.연일 화염에 가까운 날씨가 계속되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아들이기보다 방화 셔터를 내리듯 창문을 닫아 화염을 차단하고 실내에 갇혀 지냈다. 폭염은 폭설보다 위험했으며 모든 게 정지된 듯 나른했다. 이런 날씨에 뭐든 피하기엔 극장만한 곳도 없지 싶다. 더구나 조조는 몰입하기 좋은 시간이다. 덕혜옹주와 터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나라 잃은 치욕과 식민지적 삶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게 하는지 분해서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 고종처럼 독살될까봐 평생 보온병을 끼고 다녔다는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도 보온병을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그 모진 세월이 안타까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감기가 들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보는 내내 울컥울컥해서 울음 끝이 길어졌나보다.영화 터널은 부실 공사로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딜러인 젊은 가장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분통이 터지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를 잃지 않아도 나라가 없는 것보다 더 서러운 대접을 받는 게 이시대의 지금 국민이 아닐까. 결국 스스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왔을 때, 그의 유쾌함을 가장한 담담함에 놀랐다. 상황의 어이없음이 억울하고 울컥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가 구출됐을 때, 터널에 갇혔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에 갇혀 다시 압사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갑자기 친절해진 군중을 향해 모두 다 꺼지라고 소리친다. 가슴이 뻥 뚫린 듯 후련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울컥했다. 요즘은 점점 울컥해지는 감정과 만나지질 않는다. 분통이 터지지만 물러서야 이긴다고 천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고 울분을 삼킨다. 세상은 자꾸만 울컥하는 감동이 없어지고 울컥의 또 다른 의미, 먹은 것을 갑자기 거세게 토하는 소리만 커지는 듯하다.△최화경씨는 〈좋은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음악 없이 춤추기〉와 〈달을 마시다〉를 펴냈다. 대한민국 문학예술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9.09 23:02

쟁기와 보습의 상생

사무실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따스한 사무실의 공기가 얼굴을 확 스친다. 그런데 문 앞의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할 사무실 살림꾼 여직원이 없다. 아직 안 왔나? 그러나 부지런한 그가 그럴 리가 없다. 어딜 갔나?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안개 같은 건망증이 걷히며 생각이 났다.음, 그래 맞아. 어제 내가 전주 출장을 보냈었지요즘 부쩍 늘어가는 건망증이 미워진다. 너저분한 서류들이 널려있는 책상, 주인 없는 컴퓨터가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볼펜을 들고서 일을 시작할 요량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집에서 출근할 때, 오늘은 이것과 저것을 매듭지어야지하고 왔는데도 도통 생각이 깡통 속이다.한참을 뒤적거리다가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던 것들을 종이 위에 메모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일 할 마음은 어디론지 도망가고 창 너머 푸른 숲을 맹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사람들과 지내는 일이 이런 이치도 있었구나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일이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어느 일이고 간에 양면이 마주서야 제대로 힘을 낼 수 있다는 것, 새삼 사무실 문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여직원 자리의 무게를 크게 느낀다. 그러면서 전통적 농기구 쟁기와 보습을 떠올린다.쟁기는 논 밭 갈이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농기구다. 소가 앞에서 쟁기를 끌고 가면 논밭의 흙이 뒤집어 진다. 그런데 쟁기질을 할 때 필수적으로 따라다녀 할 부속 연장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보습이라는 철제기구다. 쟁기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보습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언제나 땅을 뒤집는 땅 속에서만 일을 하는 부속기구이므로 땅위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구이기 때문이다.힘든 땅을 뒤집는 공은 언제나 쟁기에게만 있고 보습은 그 공과에서 제외되기 일쑤다. 그러나 어쩌다가 보습이 깨지는 날에는 쟁기도 꼼짝없이 쉬어야 한다. 보습이 쉬는 날 쟁기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쟁기뿐만이 아니라 이를 끌고 다녀야 하는 소도 별 볼일 없어진다.어디 그뿐인가? 자칫하면 농사일도 그르칠 수 있다. 보습은 그만치 하잘 것 없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연장이다. 반대로 쟁기가 쉬는 날에도 보습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 쟁기에서 분리되어 팽개쳐 놓기 마련인 보습은 뻘건 녹을 뒤집어쓰고서 쟁기가 일철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쟁기와 보습은 이렇게 상호 보완적 역할을 수행해야 만 그 공과가 평가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어느 한 쪽도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숙명이 주어져 있다.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도 다를 바가 없다.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상대를 가소롭게 치부해버리거나 일방적인 소행엔 능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희망도 없다. 그런 곳에서 꽃이 피어나리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자기본위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래서 대부분 오직 자기만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고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성숙된 사람들은 정말 찾아보기가 힘들다. 제발 좀 성숙해지시길 바랍니다. 욕지거리나 해대고 남의 의견 깔아뭉개면 득되는 게 뭐가 있나? 다만 본능적인 쾌감은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늘 티격태격 싸움질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쟁기와 보습의 원리는 상생에 두고 있다. 입으로 하는 상생 말고 실천하는 쟁기와 보습처럼 상생 모습으로 살자.△양규태씨는 〈문예사조〉로 등단했으며 부안읍장을 지냈다. 부안예총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변산 마실길 이사장으로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9.02 23:02

가시오이와 노각

순결의 상징 백합꽃이 다소곳이 피었다. 여름 내내 끊임없이 피는 제라늄과 채송화가 앞마당 가에서 형형색색으로 눈을 즐겨준다. 꽃대를 내밀고 하얗게 핀 옥잠화 향이 은은하게 퍼져,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게 꽃이다. 어느 때부터였던가, 꽃을 심었던 자리에 가지, 고추, 오이넝쿨이 어우러져있다. 나이가 들면 아름다운 꽃을 가꾸기보다 실속 있는 먹 거리에 욕심을 부리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일까? 눈을 즐겨주던 꽃들이 채소들에 밀려나 주객이 전도 되었다.앙증맞은 새끼오이신품종 가시오이모종 두 그루를 사다가 커다란 화분에 심고, 토종오이는 씨앗을 뿌렸다. 심은 씨가 사나흘 지나 흙속어둠을 뚫고, 밝은 햇볕세상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쌍떡잎을 나풀거리며 무럭무럭 자랐다. 가시오이와 토종오이모종이 나란히 서서 누가 먼저자라나 키 재기를 하나보다. 넝쿨손이 지주목을 휘감고 쭉쭉 뻗어나갔다. 활짝 핀 노랑꽃술 단맛을 아는 벌 나비가 모여들었다. 가시오이는 마디마디에 새끼오이를 매단 노랑꽃송이를 선보였다. 살아 숨 쉬는 생명, 앙증맞은 새끼오이가 하루가 다르게 크더니 아이팔뚝만 해졌다. 싱그러운 오이 살갗에 잔가시가 촘촘히 박혀있다.토종오이는 수꽃만 얼기설기 피어있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열매를 맺은 암꽃이 보이질 않는다. 암, 수꽃이 함께 필터인데, 설마 뒤늦게라도 피겠지. 느긋하게 기다려보리라. 꿀을 찾는 꿀벌만 윙윙거린다. 가시오이를 심심찮게 7~8개를 따먹었는데, 토종오이는 어이된 일일까. 어느 날, 자세히 살펴보니 노랑수꽃 사이에 암꽃이 눈에 띄었다. 그럼 그렇지! 뒤늦게 핀 암꽃이 수줍은 듯 다소곳이 숨어있다. 신품종과 토종은 꽃 맺음부터 달랐다. 개량종은 쭉쭉 뻗은 날씬한 몸매이며, 토종은 생긴 그대로 오동통한 모양새이다.무엇이든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가시오이는 길고 반듯하여 상품가치가 있고, 아삭한 식감과 오이향이 품격을 높여준다. 마디마디에서 열기 때문에 생산자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소비자는 싼값으로 먹을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수분이 많아 장아찌를 담으면 무르는 게 약점이라고 할까? 겉이 노랗게 늙은 토종오이 노각은, 속은 파란 청춘이다. 아삭아삭한 맛이 일품이며, 상큼한 오이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무침이나 장아찌로 두고 먹어도 손색이 없다. 오통통한 몸매에 작달막한 키로 수확량이 적어 비싼 게 흠이다.아삭아삭 한 맛 일품토종의 취약점을 연구하여 품질 좋고, 맛도 있으며, 더 많은 수확을 올리는 우량품종으로 품질개량을 하고 있다. 참다운 인격자를 위한 교육과 훈련도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정신무장이 아니던가. 오이가 자라는 입지적인 주변조건에 따라서 품질 좋은 상품이 생산되기도 하고, 뒤틀리고 볼품없는 불량품이 나오기도 한다. 아이들도 좋은 환경의 부모 밑에서 자라면 선하고 착하게 크지만, 가정환경이 좋지 않으면 외골수로 대인관계에서 원만하지 못한 것을 보았다. 좋은 품질의 오이를 생산하기 위해 퇴비도 넣고, 해충도 잡아주듯, 사랑하는 내 아이가 사회에서 대접받는 자녀로 성장시키려면 부모의 역할이 크다. 잘하는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하는 일은 바로잡아주면서 사랑으로 감싸주고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양희선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길 따라 꿈길 따라〉를 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 안골수필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8.26 23:02

무더운 여름도 삶의 부분이다

태양열이 살을 파고든다. 바람 한 점 없는 도로에 햇살이 작살로 내리꽂힌다. 오후 3시, 살다 살다 이렇게 더운 여름은 처음이라고 투덜대며 나이 드신 언니가 참다못해 내 일터로 피서를 왔다. 열려진 문으로 더운 열기가 훅, 따라 들어온다. 이 지긋지긋한 여름이 하루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단다. 아무리 지독한 여름일지라도 빨리 지나가면 가는 만큼 우리도 빨리 늙을 텐데, 그래도 좋으냐고 농담을 했다.며칠 전엔 너무 더운 날씨 탓에 입맛을 잃었을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점심 먹자는 전화를 드렸다가 벼락을 맞았다. 더운데 어딜 가냐?고. 덥기는 하고 기력이 없으니 느느니 짜증이다. 초여름에 에어컨을 달아드린다고 했더니 전기세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에어컨 바람이 싫어서인지 두 마디도 못하게 하셨다. 이렇게 더울 줄 알았다면 억지로라도 달아드렸을 텐데 후회막급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첫 인사가 더위에 어떻게 지내는가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죽을 것 같이 덥단다.방송에서는 연일 폭염에 온열환자가 늘어나고 가축과 양식어류가 폐사하고 있다며 통계수치를 발표한다. 94년 이래 가장 덥다고 한다.아, 맞아, 94년 여름. 무지하게 더웠던 기억이 난다. 뒤늦게 들어간 대학원 계절학기 수업을 마치고 오후 두어 시쯤 이글거리는 해를 맞받으며 한 시간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에어컨을 3단으로 켜도 너무 더워 속이 메슥거리곤 했다. 도저히 집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켠 친구네 매장 안, 사랑방으로 직행해서 벌겋게 익어버린 몸을 식혔던 기억이 또렷하다. 선풍기 2대로 버텼던 작업실엔 아예 두어 달이나 들어가지도 못했다. 친구네 집에서 수다나 떨고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와 겨우 잠들었다가도 금방 깨어 뒤척거리곤 했다.그저 그렇게 시간을 죽이며 여름이 빨리 가기를 바라고 바랐다. 그해 여름 나는 사는 게 아니었다. 그저 더위를 견뎠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견디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건 삶이 아니다. 시간을 운영해야 삶을 사는 것이다.이제 16년 여름, 나는 아무리 지치고 힘겨워도 내 몫의 삶을 직시하고 싶다. 충실하게 살아내고 싶다. 적어도 94년 여름처럼 허망하게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아침밥 준비하며 땀 흘린 후에 냉수욕을 하고 출근 전에 다시 한 번, 퇴근하고 찬물을 끼얹으면 그럭저럭 괜찮다. 차가운 물이 전신에 흘러내리는 감촉을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느낌도 시원하고 찜질방 같은 차안에 들어가 뜨거운 핸들을 잡는 일도 별로 나쁘지 않다. 다행히 여름감기도 걸리지 않고 심한 배탈도 나지 않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지 모른다더니, 너무 더워 사람이 오지 않는 매장 한쪽에서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켜놓고 자잘자잘한 부채그림을 100여 개나 그리며 잘 놀았다. 그려놓으니 선물할 데가 생겼다. 모처럼 귀국한 당숙을 보러 서울 가는 길에 울타리 같은 친구들도 만나 선물하고 당숙 당고모 대가족한테도 맘껏 나눠드렸다. 세상에, 내가 언제라고 이렇게 푸지게 뭘 선물해본 적이 있던가.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무더운 여름을 잘 살아내고 이제 말복이다.머지않아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추운 겨울이 빨리 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기상청이 생기고 가장 덥다는 이번 여름을 천천히 향유하듯이 말이다.△박미서씨는 〈에세이 문학〉으로 등단했다. 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그림에세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 옆에〉와 수필집 〈내 안의 가시 하나〉 〈이 찬란한 꿈을〉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8.19 23:02

섬진강이 울던 날

강이 운다. 화병 난 사람처럼 포효하고 부글거리고 서럽게 늘켜 운다.섬진강이 그렇게 몸부림치며 울던 날 지리산 능선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노니는 흰 구름을 만났다. 산 아래서 뭉실뭉실 능선을 타고 오르는 하얀 구름은 저 멀리 정령 치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모양이다.저녁 때 남도로 가는 길은 며칠을 밤마다 쏟아지던 폭우가 섬진강 바닥을 채우고 흘러넘쳐서 범람하면서까지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수년 전에 물 밭은 섬진강을 바라보며 곡성으로 돌아가던 그날도 떠오르고 그날 해저물녘 적란운이 노고단을 어루만지고 애무하던 이런 여름날 해거름이었다. 오늘은 적란운 대신 하얀 명주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지리산을 덮고 있다. 이미 섬진강을 채울 대로 채운 붉덩물이 비가 그쳤다는 표시인지 하얀 면사포를 두르고 지리산을 에두르는 중이다.지리산 계곡 의신 골에서 부터 내려오는 빗물은 그런대로 깨끗해서 보아줄만 했는데 반대로 앞 섬진강물은 흙탕물이다. 백사장이 이름다웠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게 사라져 버리고 풀숲우거진 강가 상까지 성난 물은 강바닥을 뒤집으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녹차밭들도 배나무들도 붉덩물에 발을 담근 채로이고 새로 공사 시작했던 황토지반은 이미 물속에 잠겨 방방하게 찬 흙탕물이 어디가 어딘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낮에는 하마터면 송림공원 주차장까지 잘름잘름 했다는데 내가 간 늦은 시간에는 그래도 세 칸이나 아래로 내려간 상태라 하였다. 오래전에 하동 송림공원에는 강가에서 굿을 하는 무인들 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계단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이날 남아있는 계단은 불과 몇 개였다.하동 송림공원 앞의 섬진강 계단에 물이 찼던 모양이 선명하다. 해질녘 노을빛으로 너른 섬진강은 울고 또 울고 배앓이 나서 뒹구는 아이들 마냥 그렇게 울고 있었다. 늦은 오후 배앓이 난 섬진강을 달랜다고 하동으로 내려가는데 함께 가는 동무를 구했지만 소식 없어 혼자라도 가겠다는 마음으로 한 시간 반 만에 하동시내에서 퍼버리고 앉아 울부짖는 섬진강을 만난 것이다. 섬진강이 저리 울면 강 사람들은 더 몸 둘 바를 모른다. 강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삼켜버린 논과 밭들을 건지지 못하고 그저 울다 지쳐서 절로 바다로 빠져나가는 날까지 물끄러미 바라 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뉘라서 자연의 성난 강물을 달랠 수가 있었을까? 줄 나루를 당기며 건너던 섬진강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그 너른 강 가득 내려가는 강폭은 언제부터 저리 넓었던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어쩌면 이번에 섬진강은 오래도록 배앓이를 할 것 같다. 상류에서 내려가는 물의 양을 보면 말이다. 가다보면 강 가운데서 소용돌이치는 샘솟는 것처럼 물굽이가 돌아드는 섬진강, 논밭과 많은 것들을 삼켜버리거나 혹은 휩쓸러 가게 한 이번 폭우는 분명 섬진강을 울리고 말았다. 아름다웠던 섬진강이 저리 아우성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늦은 밤까지 하염없이 섬진강이 우는걸 보면서도, 매급시 달랠 엄두도 못 내면서 배앓이를 하면서 울고 있는 섬진강을 보고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항상 폭우로 많은 물이 오원 천을 가득 채우고 내려가면 우리는 보통 섬진 댐에 갇히려니 했지만 상류에서 하동 포구 근처까지 내 눈으로 확인 한 것은 분명 섬진강이 통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정이 다 되어 올라오는 길 부글부글 끓는 섬진강이 눈에 선하여 잠 못 이룰 것 같다. 나는 왜 통곡하는 섬진강을 만나러 그 먼 곳을 달려갔을까△김여화씨는 수필집 〈아낙에 핀 물망초〉 〈행복의 언덕에서〉 등을 냈다. 임실문협회장을 지냈으며 전북문학상을 수상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8.12 23:02

수석과 수필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돌보기를 황금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생겼다.80년 내가 순창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 지역에는 호피석(虎皮石)이란 돌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돌의 색깔이 흡사 호랑이 가죽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둘만 모여도 화제는 호피석이었다. 그리고 당시 큰 음식점이나 웬만한 집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호피석이 몇 개씩이 진열되어 호피석이 품격의 상징처럼 보였다.호피석은 색깔이 선명하고 석질이 단단하며 가급적 큰 것일수록 가격이 높았다. 좋은 호피석을 본 사람들은 그 놈 참 잘 익었구나!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무렵을 전후하여 수석 전문 판매점도 많이 생겨, 외지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고객들로 인해 호황을 맞고 있었다.호피석은 크기에 따라 작은 것은 몇 만원에서부터 큰 것은 몇 천만 원까지 호가했다. 예전에는 하찮게 여기던 돌덩이가 큰돈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순박한 시골 농촌 고추장 고을 순창에 돌덩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던 것이다.호피석은 주로 순창군 동계면 동계천에서 많이 채취되었다. 호피석이라는 말이 있기 전에는 그 가치를 몰라 시골집 담장에도 잡석과 섞여 쌓아 놓은 담장이 많았다. 그런데 그 걸 그대로 놓아 둘리가 만무했다. 당장 큰돈이 되니 옛날에 쌓아 놓았던 담장을 헐어 호피석을 채취하는가 하면 틈만 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계천에 몰려와 수석을 줍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굴삭기까지 동원하여 하천을 파헤치는 등 극성을 부렸으나 결국 허탕을 치고 몇 백만 원만 날렸다는 소문도 있었다.호기심이 발동한 나도 어느 일요일 도시락을 싸들고 주민 네댓 명과 같이 동계천으로 갔으나 겨우 잡석 비슷한 검은 돌 몇 개만 주워 왔을 뿐이다. 그 시절 순창읍내에서 가축병원을 운영하던 친구는 가축병원에는 진열장과 널빤지 위에 온갖 크고 작은 수석들이 50여점이나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 수석 중에는 호피석은 물론 오석(烏石), 무주에서 채취한 깨돌, 장수에서 가져온 문양석(文樣石) 등이 있었다. 가축병원인지 수석판매장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그 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수필창작반에 들어와 공부한 지도 어느덧 5년여가 지났다. 모든 수필소재는 우수마발처럼 널려 있고 수필을 잘 쓰기위해서는 참신한 소재, 참신한 해석, 참신한 표현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와 이젠 내 머릿속에 못이 박혔다. 그리고 참신한 소재를 찾으면 이미 수필쓰기의 반은 성공한 셈이라 했다.그래서 그 소재를 찾으려고 머리를 굴리다 보니 옛날 내 친구가 수석을 줍던 생각이 떠올랐다. 수필소재를 찾는 일은 어쩌면 수석을 찾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친구가 보여주었던 수석채취에 관한 예민한 혜안이 새삼스럽게 부러웠다. 만약 그가 수필을 배웠더라면 명수필가가 되지 않았을까?왜냐하면 수석과 수필은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꾸미고 가공하지 않는 원재료를 취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 소재가 전적으로 취하려는 사람의 혜안에 의해서 선택되어진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더 보태면 둘 다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똑같은 것이 많고,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그것은 존재이유를 잃고 말 것이다.바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가공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돌은 애초에 수석으로 취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쓰인 수필 또한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수석과 수필은 공통점이 많다. 그러므로 수석을 보면서 때때로 수필의 의미, 지향점, 상상의 문제를 함께 떠올리는 것은 두 대상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이 아닐까?△수필가 김학철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이사영호남수필문학회, 한국미술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8.05 23:02

병원 이야기

작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친척 중모야라는 병으로 입원한 분이 있었다. 그 병은 일종의 뇌 혈전인데 수술을 해야 했다. 문병을 오시는 분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뇌를 수술하려면 지방 병원보다는 서울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고민에 빠졌다. 우물쭈물하다가 수술시기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서울로 가는 것이 좋긴 좋으나 수술을 빨리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알음알음 수소문하여 서울 S병원 응급실로 옮겨 즉시 수술을 했다. 수술결과도 좋아 바로 퇴원을 하였다. 그런데 집에 있으니 몸 한쪽의 마비가 왔단다. 부리나케 수술했던 S병원을 다시 찾았다.응급실은 항상 환자가 넘쳤다. 복도 한쪽에 3일이나 있었지만 입원실이 없었다. 시장바닥 같은 응급실이 너무 불편했다. 의사선생님에게 사정을 하여도 차례대로 입원을 해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입원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겨우 인맥을 통하니 입원하려면 50만 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돈을 건네니 없다던 입원실이 나왔다.내 동생 이야기다. 치아가 좋지 않아 치과에 갔다. 충치가 있으니 치아를 빼야 한다고 하여 치료도 하지 않고 하나씩 빼고서 틀니를 했다. 그 뒤 충치 치료도 하지 않고 의사 말만 들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얼마 전 제약회사의 사례비 문제가 연일 보도된 일이 있었다. 어느 제약회사는 45억 원을 의사들에게 주었다가 적발이 됐다. 포인트를 의사 자신의 명의로 적립하다가 발각되어 시민단체에서는 불법사례비를 준 6개 제약회사에 약값 환급 소송을 냈단다.다음은 내 이야기다. 치석제거를 한 지가 1년이 넘었다. 치과에 가야지 미루다가 며칠 전 단골 치과에 갔다. 방사선 사진을 찍어 보더니 충치가 두 군데 생겼다는 것이다. 신경치료까지 해야 할지 모르며 금으로 때우려면 7십만 원이 든다고 했다. 치과에 늦게 온 것이 퍽 후회되었다. 치석제거만 한 뒤 충치는 다른 날로 잡혔다.역사탐방을 하다가횡설수설이란 책을 쓴 최자홍 수필가와 친해졌다. 그 책 광고에 치과가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누구냐고 물으니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치과에 갈 일이 있으면 들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 집과는 좀 먼 편이지만 단골치과에 가지 않고 그 병원으로 가고 싶었다.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그 치과에 갔다. 늦은 오후였는데 손님이 가득하였다. 치료하는 칸막이 몇 군데에서 환자들이 동시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간호사가 많아 종합병원 같은 인상이 들었다. 기다리기가 무료하여 책을 읽다가 우산을 확인하러 밖의 우산대를 가보니 우산이 없어졌다. 몇 년간 나의 손때가 묻은 정든 우산, 거기에는 큼지막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왜 남의 우산을 가져갔을까? 나와 우산의 인연이 여기서 끝났다는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그렇게 상념에 젖고 있을 때 내 차례가 됐다. 의사는 치아 사진도 찍어보지 않고 충치가 있는 치아를 지적하며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표도 나지 않게 그 자리를 때워 주었다. 돈을 내려니 십만 원인데 1만 원만 내라고 했다. 단골치과에서 7십만 원짜리가, 1만 원으로 해결되는 순간이었다.몇 분 전 우산을 잃고 시무룩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어둑어둑해지는 차가운 겨울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가 기다리는 따뜻한 집으로 향했다.이 세상에는 너무나 돈에 눈이 뒤집힌 사람이 많다. 예로부터 인생은 고해라 했거늘 비록 주위로 부터 멸시와 조소와 천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욕심내지 말고 덤비지 말고 욕먹지 말고 손가락질 받지 말고 살아야 한다.△송일섭씨는 전주평화초등학교에서 퇴직했다.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7.08 23:02

새벽의 꿈

깊은 잠 꿈속에서 그립던 사람 만나서 행복했었는데 홀연히 사라져 버린 새벽입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들이 아쉬움으로 남아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재촉해 보지만 깨어버린 잠과 열려 버린 새벽은 변함없이 찾아오는 아침의 방문객을 맞습니다. 꿈속의 미소를 현실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움의 갈증에 냉수만 한 사발 들이킵니다.그대의 손길이 내게 닿으면 난 움직이는 산맥이 됩니다. 그대의 입술이 내게 닿으면 난 가득 찬 호수가 됩니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그대가 가라앉아 돌면 난 눈을 감은 하늘이 됩니다. 어디선지 멧새소리 가물거리고 그대의 눈물이 내게 와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됩니다.입을 버리고 말을 버리고, 춤추는 손으로 대답합니다. 춤추는 가슴으로 대답합니다. 우주는 주인 잃은 꿈꾸는 악기입니다, 악기가 울면 허공에 별 하나 뜨고 지상의 목숨들은 탈춤을 춥니다. 떨리는 나뭇잎도 가지 끝에서 출렁이는 물결도 바닷가에서 탈춤을 춥니다.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습니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십니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입니다.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떠오릅니다. 내 눈은 이제 빛입니다. 푸른 초원에서 그대를 향한 여름밤 빛입니다.나는 그대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습니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 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나는 종달새 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습니다.단 한 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인생, 단 한 번도 현실 밖의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 인생, 그런 인생은 인생도 아닙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보아야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인생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오늘 밤에도 그대의 꿈을 꾸고 싶습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 떼쓰지 마십시오. 정말 꿈이란 어딜 가나 지름길입니다. 꿈속에서라도 그대와 함께 하늘까지 갔다 온 기쁨이야말로 내 인생의 축북입니다. 매일 밤 그대의 꿈을 꾸고 싶습니다.목마른 서로에게 물 한 잔씩 건네주는 꿈,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 꿈에서 나는 때로 천사이지만 꿈을 깨면 자신의 목마름도 달래지 못합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꿈, 턱 괴고 모로 누우면 그저 절로 떨어지지만 농익은 꿈이 짓물러 터지면 허사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고 작대기로 후려쳐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닙니다. 바람도 구름도 한 점 없는 새벽 숲엔 별빛만 더욱 푸릅니다. 속가슴 가득 파란 하늘을 담습니다. 매일 별꽃을 바라보다 나는 작은 별 됩니다.더 추워지기 전에 어느 하루쯤은 혼자서 한적한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하늘 보고 눕고 싶습니다. 쳐다보이는 하늘이 이왕이면 뿌옇게 흐려주었으면 더 좋겠고 흐린 만큼 푸근한 가을 숲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집 주소와 숱하게 드나들던 슈퍼마켓이랑 병목현상이 잦은 출근길, 이런 것들도 그 날 하루는 저절로 함께 쉬이 잊혀 졌으면 좋겠습니다.물방울 하나가 새벽 꿈속에 떨어집니다. 꿈속의 물방울은 잠긴 문을 두드려 몽매를 흔들고 우둔을 깨워 내 삶을 적시는 울음입니다. 돌아다 볼 어제가 아닌, 미루어 둘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간 눈동자 위에 핏방울처럼, 채찍처럼 잠긴 문을 밀고서 아프게 날 깨우는 그대의 근심과 그대의 사랑입니다.△시인이자 아동문학평론가인 안도씨는 현재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문학관 관장으로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7.01 23:02

더덕 꽃향기

낯선 곳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났을 때 기쁨은 참으로 크다. 이런 때 반가움을 표현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아카시아 향처럼 다소곳이 다가가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고 흔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비처럼 양팔을 벌리며 다가가 뜨겁게 포옹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변의 시선이나 체면은 아랑곳없이 부등켜안고 어린애처럼 좋아서 폴짝폴짝 뛰며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이 전달되어 부러움과 함께 미소를 머금게 한다.나는 더덕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더덕은 초롱꽃 목으로 속씨식물 중의 하나인데 덩굴을 이루는 다년생 식물로 8~9월에 개화한다. 꽃도 예쁘지만 꽃보다 더덕이 지닌 맛과 향이 주는 매력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직한 모습이 탐스럽기도 하고 많이 먹어도 자생적으로 몸이 보호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더구나 우윳빛 속살에 은은한 향은 나를 유혹하고도 남음이 있다.껍질을 벗겨내고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고추장을 푹 찍어 입에 넣기라도 하면 바삭거리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식감을 더욱 자극하여 기분을 상승시켜준다. 내가 더덕을 좋아하는 애호가임을 알고계신 어머니께서는 시골 집 뒤뜰에 더덕 몇 뿌리를 심어놓으신다. 그리고 날마다 들여다보다가 뿌리에 약이 차는 4월초순경 쯤에 나를 불러서 대 여섯 뿌리 케어 더덕무침을 맛있게 해 주시곤 한다. 입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향기를 잃지 않는 더덕의 맛이야말로 매력의 도가니다.더덕구이 또한 이에 못지않다. 여러 가지 양념으로 색감을 내 보지만 그 특유의 향과 맛이 강하여 양념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그럴수록 자신의 독특한 맛을 더욱 강하게 내기 때문에 구이로서도 일품이다.장미향이 그윽한 토요일,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며 쉬고 있는데 남편이 오늘 점심은 남원에서 유명한 더덕구이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귀가 번쩍 띄어 벌떡 일어나 인터넷으로 맛 집 검색을 시작했다. 한참을 헤매다가 남원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집을 찾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낯선 가족들이 옹기종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맛 집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창밖이 보이는 자리를 찾아 앉으며 다양한 메뉴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더덕구이 정식을 시켜놓고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꼭 껴안으며 여기까지 웬일이야하며 더덕 꽃처럼 예쁜 얼굴을 옆으로 내밀었다. 리고 남편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했다.헐~ 정말이지 행복한 순간이었다. 20년 지기 고교 동창생 친구였다. 반가움에 부등켜안고 팔짝팔짝 뛸 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공중을 날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 눈빛을 보며 잠시 행복감에 젖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친구는 나와 남편을 자신의 가족들에게 소개를 해 주었다. 친구 가족들 또한 마치 내 가족을 대하듯 하여 반가움이 컸다.어린 시절 아빠와 산행을 하던 어느 날 문득 산딸기를 발견하고 칡잎에 한 움큼 따 주셨던 반가움과 그리움이 교차되는 기분이랄까?더덕 꽃 같은 내 친구! 더덕 향을 지닌 내 친구!친구란 존재는 가슴을 설레게도 하고 그리움에 젖게도 한다. 눈빛만 보아도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친구는 먼저 일어서며 이미 나와 남편의 식사비까지 미리서 지불하고 내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가끔 얼굴 보며 살자고 했다. 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훈훈하고 행복한 오후였다.△노은정씨는 월간 〈한비문학〉에서 동시와 동화작가로 등단했다. 한국아동문학회에서 동화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전북문학관 아카데미에서 어린이 성균관 교사로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6.24 23:02

내 나이가 어때서

금년에도 제일 많이 불리어지는 노래가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한다.그래 내 나이가 어때서 이제 난 70대인데, 80도 안 되었는데! 누군들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할까? 마는, 그래도 나이 이야기만 나오면 움츠러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나이를 알고 싶어 한다. 생면부지의 사람한테도 이야기 몇 마디하고 나면 나이를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몇 살이나 잡수셨어요?라든지 연세가 어떻게 되지요하고 묻고 싶다.그런데 나이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은연 중 자기 하고 비교하고픈 마음일 것이다, 나보다 많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일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기를 바라서이다. 물어보는 의도는 다양하다. 나보다 많다면 일단은 안심이다. 나보다 많은데 나보다 어른인데 그의 말을 들어야하고 따라야 한다는 안심이 든다. 작은 기쁨을 느끼게도 된다. 나는 저분에게 비하면 젊구나. 그래 나는 아직은 젊어! 하는 자부심도 든다. 내 나이는 몇 살이나 먹어 보여요? 하고서, 내 나이보다 적은 나이를 대면 내심으로는 기분이 좋다. 그렇게 젊음을 갈구했다. 그랬건만 어느 듯 나이 들어 어디서나 제일 어른이 되었다.어려서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랬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모두가 짐으로 와 닿았다. 어른스러움이 나를 얽맸다. 무엇이든 잘 해야 하고 함부로 말도 못하고 행동거지도 본이 되어야 한다. 딱히 누가 그래야 한다고는 안하지만 내 자신이 그렇게 된다. 내가 올바르게 해야 후배들이 본을 보고 따라서 할 것이다.는 생각이 행동의 제약이 된다.어느 때인가 한 어른이 술에 취해 할 소리 안 할 소리 하며 주책을 떠니 모두가 하는 말, 나이 먹은 사람이 저게 뭐람 하며 격멸하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도 때로는 자유스럽게 행동하고 싶고 어린아이 노릇도 하고 싶다. 어른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동심이 되고 싶은 마음은 어른에게도 있다. 나이는 먹고, 멋은 든다.는 말이 있다. 건강한 몸은 건강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한다. 마음이 편안해야 건강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데 우리 사회도 그런 것 같다. 최근에는 사람들 심성이 거칠어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은데 우리의 마음이 건강해져서 사회도 건전해졌으면 좋겠다.내 나이 팔십을 바라보지만 결코 나는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산다. 마음은 항상 이십대이다. 무엇이나 할 수 있어,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 먹음을 거부한 나는 누가 나를 할머니라 부르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가 할머니는 할머니구나 하고 인정을 하면서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니야 하는 부정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나는 나에게 묻는다. 내가 할머니인가? 물론 현실적으로는 여덟 명의 손자가 있고 손자며느리에 증손자도 있다. 컴퓨터도 자유자재로 하고 모르는 것 있으면 컴퓨터에서 검색해 찾아낸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닌 지도 40년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만 운전하라며 밤낮으로 전화를 한다. 비가 온다든지 눈이 오는 날은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아니면 눈이 오니까 운전하고 나가면 위험하다고 야단들이다. 때로는 이런 전화가 부담스럽다. 너희들보다 내가 더 알아서 조심할 텐데 하고 중얼거려진다.한번은 새벽교회를 자전거 타고 갔다 오다 넘어져 팔과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다. 당황한 나는 누가 볼세라 얼른 일어나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와 보니 피가 옷 위로 흘러 솟아 피범벅이 되었다. 혼자서 후후 불어가며 약을 발랐다. 그래 속으로 어쩔 수 없이 할머니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그래도 난, 그래도 나는하고 내적으로 부정하는 소리를 외친다. 열정과 긍지를 가지고 뛰며 달린다. 내 나이가 어때서 아직도 난 청춘이다. 누가 뭐래도 난 청춘이다 속으로는 이렇듯 외치며 힘차게 살아간다. 나는 오직 청춘할머니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이강애 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이루며 사는 삶〉이 있으며, 영호남수필문학 임실문학 행촌수필문학에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6.17 23:02

맛보기 인생

며칠 전 대형매장을 갔었다. 꼭 무엇을 사겠다는 것보다는 둘러보는 눈요기를 겸한 나들이였다. 아내와 카트를 밀고 다니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식품매장을 지나칠 때는 아내가 부지런히 맛보기 음식을 가져왔다. 점심 무렵 시장하던 참이라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이쑤시개에 찍어주기도 하고, 작은 종이컵에 담아주기도 했다. 처음이라서 어색하기도 했고 맛본 뒤에 그냥 돌아서기도 미안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러는 걸 어찌하랴.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나의 생애는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조금씩 맛보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농구를 좋아했으나 그때뿐이었다. 축구와 배구도 해보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탁구와 배드민턴을 하다가 골프에 입문했다. 그런데 요즘 골프채 가방은 거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수영, 스케이트도 해보았지만 맛보기 정도였다. 여가에 장기, 바둑을 즐겼던 젊은 날도 있었고, 고스톱을 치며 날밤도 새웠다. 등산에 흠뻑 빠진 때가 있었고, 낚시에 미친 시절이 아스라하게 떠오르기도 한다.다방 레지가 건네는 모닝커피를 마셔보았고 비싸다는 루왁 커피 맛을 본 적도 있다. 요즘은 아메리카노 커피도 잘 마시며 봉지 커피도 즐긴다.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고 소주, 맥주, 양주, 마오타이, 보드카, 럼주도 마셨다. 물고기도 잡고 토끼사냥도 해보았다. 죽을 고비도 넘겨보았고 교통사고도 당했다. 이런 병도 앓아보았고 저런 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영어, 독일어, 중국어를 배워보았지만, 지금은 도로아미타불이다. 독서를 유일한 취미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책을 멀리한 지 오래다. 한때 시를 쓴다고 끙끙댔지만 이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노래를 부르고 드럼을 배워보았건만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을 뿐이다. 여행을 다니며 명승고적도 답사했다. 자전거, 전차, 기차, 자동차, 배, 비행기도 타보았다. 학창시절 이 학교 저 학교도 다녔고 교직생활 중 이런저런 학교도 근무 해보았다.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하고 데모 현장에도 가보았다. 야당에도 투표해보았고, 여당을 믿어보기도 했다. 후진국에서 시작하여 개발도상국, 선진국 문턱에서도 살고 있다.개근상, 우등상, 훈장도 받았다. 좋은 사람도, 사람도 만났다. 세월의 풍상 속에 많은 친구들이 내 곁을 스쳐 갔다. 군대에서 예비군에서 훈련도 지겹게 받았다. 여자를 사랑해 보았으며, 결혼하여 자녀와 손자 손녀에 대한 사랑도 알았지만, 부모, 형제와의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다음 세상을 그리며 성당에도, 교회도 나간다.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보았고, 신흥종교 교단에도 나가보았다.10대의 풋풋한 삶도 맛보았고, 청년, 중년, 장년의 삶을 살아왔다. 농촌 초가집에서 대가족으로도 살았고, 지금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부부와 조용히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중 몇 가지뿐이라는 걸 깨달았다.이렇게 나는 무엇이든지 진득하게 몰두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맛보기로 살아온 것 같다. 때문에 무엇이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쫓기는 것도 아닌데 남은 생애 동안 깊이 파고들 것을 찾고 싶다. 수필에 입문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슬그머니 꾀가 나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그렇다고 달리 몰두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수필의 맛보기도 끝났다. 더 깊이 몰두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을 노래한 천상병 시인도 세상 눈요기를 맘껏 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도 못 다한 삶을 맛보기 위해 분주하게 나들이를 해야 할 것 같다.△김현준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으며, 남원 한빛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6.10 23:02

전주종합경기장 단상

전주문인협회에서 문학기행을 가는 날이었다.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에서 출발할 예정인데 나는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추억이 서린 종합경기장을 들러보고 싶어서였다.전주종합경기장은 제44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논을 메워서 1963년에 준공하였다. 이후 1980년에 제61회 대회가. 1991년에는 제72회 대회가, 그리고 2003년에는 제84회 대회가 개최된 장소다.제44회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될 당시에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축구선수로 그 대회에 참가했다. 제61회 대회에는 전라북도 축구협회 전무이사로, 그리고 제72회 대회에는 전라북도축구협회부회장으로 참가했다.그런데 44회를 전주에서 그 대회를 유치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경기장도 문제였지만, 각 시도의 선수들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44회 대회를 이곳에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쳐 전북도민의 저력을 발휘하면서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이 대회를 통해서 전주는 멋과 맛의 고장이며 인심 좋은 고장임을 전국에 또 한 번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맛의 고장이란 그 지역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전주는 달랐다, 이미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으로 맛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선수들이 민박을 통해서 각 가정에서 맛을 본 음식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이후 종합경기장은 전국체전 외에도 전국소년체전이나 전국규모의 많은 행사가 많이 유치되었다. 어느 지역을 가나 대부분의 경기장마다 출입문이 네 개였다. 대개 동서남북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문이 다른 문보다 규모가 큰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슷한 콘크리트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전주종합경기장은 달랐다. 수당문은 삭막한 몰골을 들어내 보이는 콘크리트 문이 아니라, 은은한 한국미를 자랑하는, 단청으로 말끔히 단장된 고풍어린 일주문이었다. 그것을 보고 선수들은 전주가 천년고도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경기장 동편으로 도열해 심어져있던 이태리포플러나무들이 외지에서 온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부분 조경수로 듬성듬성 빈 공간을 채우기에 급급했는데, 키가 큰 포플러가 단지처럼 한쪽을 메우고 있었다. 라이터가 없던 시절에 성냥개비로, 이쑤시개와 나무젓가락, 그리고 펄프용으로 경제성이 많은 그 나무들을 보고 많은 선수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지금은 그 자리에 100m달리기 4레인이, 그리고 나머지는 주차라인이 그려져 있다.원래 종합경기장에는 별도의 정문이란 호칭이 없었다. 하지만 전주의 특색을 나타낼 수 있는 출입문 하나를 설계하고 그 비용을 (주)삼양사에 의탁했다. 그 회사 회장의 호를 딴 수당문이 된 연유였다. 그래서 전주시민들은 지금까지도 수당문 외에는 경기장의 문 이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시민연대에서 수당문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보도를 접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었는데 수당문이란 현판만 철거되었다. 그것을 보고 이름표를 떼어내거나 바꿔 달면 모든 것이 청산된다는 생각이 들어 찜찜했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이어서 집행을 유예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나는 욕심을 부르지 않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란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랐다.△수필가 이희근씨는 계간 〈문학사랑〉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산에 올라가 봐야〉〈사랑의 유통기한〉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6.03 23:02

신리 가는 버스

버스는 서학동의 교대 앞을 지나서 좁은목을 돌아, 시내 외곽으로 나와 신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세 살배기 외손녀 녀석 말대로 주황버스(일반버스)다. 의자가 꼭 차 있는 파랑버스(좌석버스)보다 차안이 넓어서 좋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물론 승용차보다도 주황버스 타기를 좋아했었다.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유월의 산 빛은 온통 진초록이다. 오월, 연초록 때의 부드러움을 벗어나서 이젠 생동감 넘치고 역동성에 생명감이 출렁이는 진초록이다. 그 싱그러운 산 빛에서 부드러웁도록 젊음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진초록을 좋아한다.아무튼 버스 요금 800원을 지불하고서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덤으로 얻는 포만감의 하나가 아닐까. 나는 신리에 산다고 한다. 그러면 공기 맑아서 좋겠구먼하고 받는다. 그렇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면 숨 쉬는 맛이 달라진다. 제법 시원한 것 같음을 느낀다. 실제로, 아니 기계로 측정 해 보지 않아서 수치상으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실은 굳이 공기 맑은 곳 경치 좋은 곳을 택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정년퇴임을 하면서 찾아 온 곳이 신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 요즘 유럽에 있다는 다운시프트(downshift)족도 아니고, 도시 기피증이란 말 같은 것은 생각 해 보지도 않았다.하여간 좀 한가롭고 공기도 맑은 것 같고, 그보단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을 볼 수 있음이 좋아서 옮겼을 뿐이다. 4월엔 보이는 산마다 꽃밭이었기도 했다. 높고 낮은 산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산마다 산벚꽃으로 하이얗게 수를 놓은 듯 고왔었음도 놓칠 수 없는 경관이었다.어찌되었건 나는 요즈음 더욱 신리로 가는 버스만 타도 좋다. 그 중에서도 주황버스가 더 좋다. 그것은 세살배기 그 녀석이 입구에서 통통거리며 뛰어 가서 좌석을 하나 차지하고 좋아하며, 두리번 두리번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귀여운 모습이 선해서 더욱 좋은 것이다. 물론 버스 안이 복잡하지 않을 때의 일이다.신선하고 천진한 호기심으로 마냥 환하게 웃음 주던 녀석 모습은 언제 떠 올려도 행복하다.그러니까, 그 녀석이 3개월 여를 우리집에 와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사랑스러운 기억들을 많이 남겨 놓고 갔다.하부지 이게 뭐야?노오란 민들레를 비롯, 작은 풀꽃들이며 제가 처음 보는 것들이면 그냥 이게 뭐야라고 묻던 일. 과자를 맘대로 골라잡는 재미로 동네 슈퍼에 가자고 떼를 쓰던 일. 세 칸짜리 통근 기차(전주-군산간)를 타고, 폴짝폴짝 뛰면서 꽃기차(기차 외부에 꽃이 그려져 있음)탔다고 좋아 하던 일 등.하기야 지금, 그 녀석은 싱가포르에서 2층 버스를 타고 또 그렇게 좋아 한다고 하지 않는가.어쩌면 녀석은 버스 타는 재미를 빨리 터득한 건지 원.그런데 이런 재미도 내역도 모르는 이들은 아이고 바쁜데 웬 시내버습니까?하면서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하라고 권하기 일쑤다. 그렇지만 나는 혼자서 속으로 대답한다. 그냥 웃으면서.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난 버스를 탈거야. 그 녀석이 좋아하던 주황 버스를. 그리고 느리게 살 거야. 저속 기어로 갈 거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쿨(cool)하게 살 거라구--후후.△윤이현씨는 〈아동문예〉로 등단했으며,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가을하늘이 등재돼있다.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한국미래문화연구원장, 전북아동문학회장을 지냈고, 현재 완주문협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5.27 23:02

어깨를 끼고 달리면 편하다

아이와 함께 낙원촌 캠프에 가는 날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날은 유난히 길이 막혀 시간이 촉박해져서 마음도 약간은 조급했다. 기차역 앞에 당도하니 정말 몇 분이 안 남았다. 우리는 둘이 손을 잡고 달렸다. 플랫폼에 나오니 기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열차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 때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을 달리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매일 길을 나서보면 언제나 많은 사림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무엇 하는 사람들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두 바쁜 표정으로 누구보다 빨리 갈려고만 한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남보다 앞서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길을 나서면 빨리 가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빨리 도착해야 할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먼저 도착한 사람이 행복을 모두 차지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뒤에 쳐져 있는데 혼자 외로이 달려서 잡은 결과가 행복일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되새겨지는 이야기가 있다. 내 인생의 지평을 더 넓게 펼쳐주었던 한 이야기를 생각한다.햇살이 뜨거운 여름 길을 땀을 훔치면서, 몇 사람의 동행자가 역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자. 시간을 재촉하면서 걸으며 가끔 시계를 보는 사람도 있다. 앞으로 3분밖에 남지 않았어도 모두는 각별히 초조한 모습은 아니고 조금 보폭이 커지고 속도가 빨라진 정도였다. 드디어 역의 구내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열차가 들어왔다.고 외쳤다. 그때 누군가가 간발의 틈도 없이 어깨를 끼고 달리자라고 해서 함께 어깨를 끼고 달렸다.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차시간이 늦어질 때면 뛰는 일은 자주 있는 데 어깨를 끼고 달려본 적이 있는가. 도착해서 어깨를 끼고 달리니 훨씬 편하고 빠르네요.라고 했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런 때일수록 혼자 달린다. 같이 가다가는 발이 늦은 사람 때문에 손해를 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도착했다 해도, 나중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생활 현실이다. 그런데 어깨를 끼고도 달리면 편하고 빠른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우리 인류는 21세기를 어떻게 맞아들여 무엇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지금까지 시대착오적인 잘못된 목적도 수단도 종지부를 찍고 이제 새로운 도정으로 나 보다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함께 어깨를 끼고 가자. 가정, 사회, 나라, 아니 온 인류가 모두 유일무이한 행복의 열차에 타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가 어깨를 끼고 타는 것이다.한 해의 마지막 날, 0시를 통과하면서 모두 새 단추를 끼지만 내 마음에 새 태양이 밝아오지 않는 한 새 날은 오지 않으리라.그러나 희망의 열차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우리 철도 100년사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 초고속철도가 운행되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단 두 시간 반 만에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의 행복도 그렇게 빨리 실어다 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혼자 빨리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발 다치지 말고 누군가하고 사이좋게 팔짱이라도 끼고 걸으며 행복의 열차로 다가가자. 묵은 관념의 옷을 과감히 벗어 꽃피는 계절에 행복의 열차를 타러온 사람들과 어깨를 끼고 달리자.△조윤수씨는 〈수필괴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바람의 커튼〉 〈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 〈차마고도〉등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5.20 23:02

말(言) 무덤

하회마을을 나와 귀갓길에 올랐다. 네비게이션이 집까지 안내하는 시간은 3시간 이상 걸리는 긴 거리였다. 안동에서 예천, 남상주 IC에서 대전, 그리고 전주까지, 갈 때와 방향만 다를 뿐 빙빙 돌고 돌아야 하는 동선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쩌랴. 하회 마을 역시 낙동강이 휘감아 돌던 곳에 있었으니 내가 강이 되어 돌아가는 수밖에. 도로가 굽이 길과 오르막이 많고 공사구간이 많은데다 비가 내린 탓에 바닥이 온통 흙투성이서 차 룸미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나온 시간들이 온통 흐릿했다.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이르렀을 때 말 무덤이란 입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당연히 말(馬)무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言)무덤이었다. 차를 길 한 쪽에 세우고 안내판을 따라 들어갔다. 마을에 여러 성씨가 모여 살았는데 집안끼리 싸움이 그칠 줄 몰랐다. 어느 날 지나던 나그네가 마을이 풍수적으로 개가 짖어대는 모습을 띤 혈이라서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 주둥이 송곳니 되는 곳에 날카롭게 생긴 바위를 세 개 세우고, 앞니가 되는 곳에 바위 두 개를 세워 재갈을 물리게 하였다. 끝으로 싸움을 일으킨 발단이 된 말(言)을 묻어 말(言)무덤을 만들었더니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잘 지냈다.는 유래담이었다.내 말은 남이 하고 남의 말은 내가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와 같은 말을 바위에 새겨 말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채찍하고 있었다. 「논어」에서도 일에는 민첩하되 말은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다.이렇듯 동서고금을 통해 말과 관련된 속담이나 경구가 많은 것은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면서 말실수를 가장 많이 하며 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을 전달하다 보면 보태기 마련이지 덜지는 않는다. 말은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한 쪽 말만 경청하거나 듣기 편하고 좋은 말만 가려서 마음에 집어넣는다. 이것으로 끝내면 좋으련만 상상력을 무한대로 발휘하여 자기 생각까지 덧칠을 한다.이 과정에서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거나 특정인을 말로 죽이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있는 조직이나 사회는 늘 분쟁과 갈등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불신이 기생식물처럼 붙어 다닌다. 우리는 아침햇살처럼 맑고 깨끗한 말을 하기보다 어둡고 칙칙한 말을 하면서 살 때가 많다. 소망적인 말보다 절망적인 말, 품어주는 말보다 밀어내는 말, 등을 대주는 말보다 등을 돌리는 말, 아랫목처럼 따스한 말보다 차디찬 얼음 같은 말을 많아 하며 살아 왔다.귀갓길,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쓸 데 없는 말을 모아 말(言)무덤에 묻은 선조들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한 말 가운데 말(言)무덤에 매장해야 할 말은 얼마쯤 될까. 감사하지 못하고 뱉어낸 불평, 불만, 원망, 망은의 말. 겸손하지 못하고 쏟아낸 교만, 자랑, 오만스러웠던 말. 경외하지 못한 불경스러웠던 말, 순종하지 못한 고집스러웠던 말. 관대하지 못한 인색하고 탐욕스러웠던 말들 천지였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내가 한 이런 말 때문에 상처받았거나 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이 말들에 대한 부고장을 보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겨울오후가 저물고 있었지만 다가올 시간들이 청명하고 가지런하게 쌓여 대낮 같았다.△최재선씨는 월간 〈창조문예〉에서 수필, 계간 〈에세이〉에서 동시로 등단했다. 수필집 〈이 눈과 이 다리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무릎에 새기다〉가 있으며, 현재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4.29 23:02

나른한 어느 봄날

그해엔 딸을 많이 낳아서 동네에 또래 친구들이 열한 명이나 되었다. 우리는 떼로 뭉쳐 다니며 고무줄놀이, 술래잡기, 목자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도 많았는데 나는 자치기가 재미있었다.작은 막대 양옆을 사선으로 자른 끝을 큰 막대로 때려서 뛰어오른 작은 막대 옆을 탁 치면 멀리 날아가며 내는 바람소리가 좋았다. 때로는 앞 냇가 강변에 나가 돌을 골라 경계선을 만들고,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어 서로 자기 땅이라고 여기면서 무언가 열심히 심기도 했다. 떡잎이 날 무렵 비가 오면 텃밭이 떠내려 가버려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생산이 목적이 아니도 다만 여러 친구들의 소꿉놀이터였을 뿐이었니까.어느 날, 친구들과 방천으로 나물을 캐러 갔었다. 처음엔 모두들 열심히 캤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겨우내 움츠렸던 봄은 행복을 채워주려고 우리의 눈길과 발길 닫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향기를 피우며 유혹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지쳐 집에 가자고 친구들을 부르며 일어서는데, 멀리 물길에서 벗어난 작은 웅덩이가 보였다. 물가가 새파란 게 나물이 있겠다싶어 뛰어갔다.물기를 머금은 풀 속에서 쑥이며 미나리를 뜯다가 바라보니 파란하늘과 흰 구름이 물속에 잠겨있고 물이끼 덮인 돌덩이들 사이로 송사리들이 몰려다녔다. 물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데 물속에 다른 세상이 잠겨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잠시 예쁜 동화나라에 놀러 온 것 같았다. 행복해하며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을 하나 던지니 동그랗게 파문이 일며 물고기들이 흩어졌다. 심심한데 물고기나 잡아볼까 싶어 발을 담그니 발이 시렸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발을 물속에 몇 번 넣었다 뺐다 반복하니 괜찮아졌다.물속에서 발을 옮기는 대로 물결이 밀려가며 이끼가 흩어져 물은 흐려지지만 돌덩이를 들어보니 미꾸라지도 숨어 있었다. 어쩌다 두 손으로 미꾸라지를 움켜잡으려는데 손바닥에 닿는 순간 타다닥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며 일어서다 넘어질 뻔했다. 다시 고무신을 양손으로 잡고 발로 살며시 돌을 떠들어 물고기를 잡아보려 애를 썼지만 마음같이 잘 되지 않았다.큰 고기 잡기를 포기하고 송사리나 잡아볼까 하고 나물소쿠리를 비워서 물속에 넣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쫒아 다녔지만 힘만 빠지고 발바닥도 아파 물가로 나왔다. 그래도 재미가 있어 좋아했는데 종아리에 이상한 느낌이 있어 바라보니, 거머리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나물 뜯던 칼을 쥐고 거머리를 떼어보려니, 팔이 떨리고 온 몸이 굳어 눈물만 흘리다 방방 뛰며 엉엉 울었다. 흩어졌던 친구들이 뛰어와 왜 그러느냐고 묻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내 종아리에서 피가 흐른다는 소리를 듣고 내려다보니 거머리는 떨어지고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 앉아있으니 누군가 쑥을 찧어 다리에 붙여주며 손으로 누르라고 했다. 잠시 쉬었다 땅에 쏟아 놓았던 나물을 주워 담아 들기도 귀찮아 나물소쿠리를 배에다 붙이고 두 손으로 안고 걸어왔다. 대문 앞에서 배에 댔던 소쿠리를 떼어드니 나물이 한 주먹도 안 되었다. 걸어오면서 소쿠리 양옆으로 흘려버렸나보다. 소쿠리를 대문 기둥에 탁 때려 몇 개 안 되는 나물과 흙을 털어 버리고 이래저래 기운이 다 빠져 나른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하늘을 보니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그때 나는 아, 해님이 나를 예뻐하셔서 나만 따라오고 있었구나! 생각했었다. 나른한 어느 봄날 있었던 일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문진순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해 안골수필문학회에서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6.04.22 23:0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