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6 13:27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수필

수지맞은 날

정성려 주인을 닮아 욕심이 많은 걸까? 처마 밑에 한 뼘의 둥지를 짓고 사는 우리 집 제비는 햇빛이 화사한 봄날에 강남에서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까지 욕심많게 두 번씩이나 새끼를 부화 시켰다. 봄에 태어난 새끼들은 순조롭게 잘 커서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그렇게 떠났다. 뒤이어 수컷으로 보이는 한 마리가 둥지를 떠나지 않고 주변에서 배회하며 지키고 있었다. 어미제비가 또 알을 낳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2주정도가 지났을 쯤에 둥지를 나온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고 분주하게 둥지를 들락거리더니 며칠 뒤 새끼 5형제가 둥지위로 노란부리를 내밀고 올라왔다. 여름에 태어난 새끼들은 강한 햇볕에 달궈진 지붕의 열기와 한낮 이글거리는 콘크리트 마당의 지열로 좁은 둥지에서 부대끼며 무척이나 더웠을 것이다. 그래서 둥지를 박차고 세상 밖으로 훨훨 날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걸까? 여물지 않은 노란 부리를 내밀고 어미의 먹이를 받아먹는 귀여운 모습을 보며 며칠은 더 지나야 날겠지 싶었다. 그런데 짧은 장마가 지나고 유난히 극심한 기록적 폭염에 새끼제비들이 견디지 못해 둥지 탈출을 시도한 모양이다. 4형제는 다행히 높이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5형제 중 제일 못난이 한 마리가 높이 날지 못하고 마당에 주저앉고 말았다. 염소 뿔도 녹는다는 대서, 전주지방의 최고 기온은 36.3도까지 치솟았다. 푹푹 찌는 더위에 지쳐가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식물이나 작은 생명들도 사투를 벌이고 있다. 목줄에 묶여 사는 우리 집 지킴이 세월이가 여느 때와 다르게 갑자기 앙칼지게 컹컹 짖어댄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걸 짐작하고 얼른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마당에서 새끼제비와 길고양이가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당에 주저앉아 힘겹게 날개짓을 하며 날아보려는 새끼제비와 어디선가 나타난 길고양이가 맞닥뜨린 것이다. 순식간에 새끼제비는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 광경을 본 어미제비는 큰 소리를 내며 구조요청을 하는 건지, 아니면 힘내라고 응원 하는 건지 요란하게 마당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어미 제비인들 길고양이를 이길 수는 없다. 물론 날지 못하는 새끼제비도 길고양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맛있는 먹거리를 발견한 길고양이는 새끼제비를 날름 잡아 도망 갈 찰나에 나에게 발견 되어 내 고함소리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집에 없었더라면 길고양이는 쉽게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날지 못하는 새끼제비는 순간 살기 위해 퍼덕이며 있는 힘을 다했지만 날지 못했다. 어쩜 허무하게 길고양이의 먹잇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위험은 모면했지만 놀란 새끼제비는 계속 날개 짓을 하며 날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둥지에 다시 넣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새끼제비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힘차게 날아 형제들이 앉아 있는 전깃줄에 안전하게 앉았다. 5형제가 다시 모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새끼제비를 보호하기 위해 찍찍거리며 새끼 주변을 빙빙 돌던 어미제비의 모성애에 한편 놀랐다. 아마 내년에 금은보화의 박씨는 아니어도 향긋한 봄소식을 물고 다시 찾아올 것이다. 마침 토요일이라 집에 있었기에 다행히 새끼제비를 잃지 않았다. 정말 오늘은 수지맞은 날이다. /정성려 정성려는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에 당선하였으며 전북수필 회원이, 행촌수필 부회장, (사)한국편지가족 전북지회장을 맞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10.21 16:30

[금요수필] 지기지우 - 이해숙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내 삶에서 그런 만남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헤아려본다. 우리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꿈을 글로 그린 적이 있다. ‘나이 든 후에 깃들일 거처, 살고 싶은 집’ 하늘 마당의 꿈. 요원하여 꿈이고 이루기 어렵기에 꿈이라한다면 우리가 받은 선물은 꿈 너머의 꿈이었을까? 그들은 45년 지기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막걸릿잔을 기울인다. 진로를 모색하던 까까머리 시절 도서관에서 만났다. 각각 공고를 졸업하고 공대 진학이 목표였고, 농고 졸업 후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파일럿을 꿈꿨다. 공대를 졸업한 친구는 당시 굴지의 건설회사에 입사하여 토목기사로 건설 현장을 누볐고, 종합건설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전문분야 최고의 자격인‘토목기술사가 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결과였으리라. 파일럿 꿈이 좌절되고 공무원이 된 남편은 오랜 세월을 힘께한 직장에서 퇴직하였다. 사업가로, 공무원으로 각자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우정, 45여 년 지켜온 그들의 돈톡한 사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에 버금갈 남편은 신실한 토목기사 친구를 두었다. 남편은 주어진 삶에 성실했고 행운도 따랐기에 안정되고 순탄하게 여기까지 왔다. 사업체를 운영하며 노후에 영위할 전원주택을 물색하던 그 친구는 공들여 잘 지어진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마당을 빙 둘러 소나무가 무성했다. 친구의 새 집 장만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벌에 쏘여가며 전지를 해주었다. “자네 집이 장만되었으니 이제 내 집 장만을 위해 두루 살펴보아 주게” 부탁했단다. 흔쾌히 그러마! 했다고. 봉급생활자로 빠듯한 우리보다 형편이 월등한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이층집이었다. 집터로는 안상맞춤인 아트막한 언덕배기의 전망 좋은 집, 일,이층 전면이 통유리로 된 튼튼한 주황색 벽돌집, 담 없이 쌓은 정원석 축대며, 빙 둘러선 소나무와 철쭉으로 친 울타리, 우리와는 경계가 먼 궁전처렴 보였다. 집과의 인연은 묘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지기지우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그분들이 노후를 위해 마 련한 전원 주택을 이득없이 우리 가족에게 양보한 것이다. 계약 후 어느 화가 한분이 우리집을 갤러리로 활용하고 싶어 웃톤을 제시했다지만 우리와의 약속을 지켜준 것이다. 그분은 작년 우리 집 가까이 집을 지어 이사 오셨다. 여태 빌다른 도움을 드린적도 없는 우리에게 “자네 혹시 내가 도울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게,” 좋은 친구를 두기보다는 좋은 친구가 되는 일이 더 의미 있을 텐데, 우린 줄곧 후의를 입었다. 하늘 마당! 히늘이 마당 가득 노니는 마당이 넓은 집을 꿈꿨다. 환한 햇살이 물밀듯 밀려들어 집안 곳곳을 쬐어 소박한 삶을 말려주면 좋을 집, 키가 큰 책장에 읽고 싶은 책을 빼곡하게 꽂아두고 독서로 소일할 수 있는 쌉쌀보드레한 차를 마실 수 있고 들썩아는 도회와는 저만치 나앉아 있는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쑥대 이엉을 엊은 집에서도 호연지기를 꿈꾸며 학문에 열중한 선인들 무릎을 겨우 들일 좁은 거처에서 빈한한 연명을 하면서도 누대의 세월 속에 더욱 빛났던 도연명의 거처, 그에 비하면 우리 가족이 몸담은 이 집은 복에 겹다. 이해숙은 <수필시대>로 등단했으며 전북시낭송협회 사무국장, 행촌수필문학회 이사를 역입했다. 원종린문학상, 시흥문학상을 수상 했고 수필집 『진달래 꽃술』이 있다.

  • 오피니언
  • 이강모
  • 2021.10.07 14:43

[금요수필] 계란의 교훈 - 윤 철

윤철 학교 다닐 때 기말시험을 앞두고 친구가 노트를 빌리러 왔다. 그는 노력에 비해 성적은 별로였으며 다른 면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그저 아주 평범한 친구였다. 하지만 나는 두드러짐이 없는 그가 항상 편해서 좋았다. 그런데 그는 오면서 계란 한 꾸러미를 가져왔다. 친구끼리 인사지만 무얼 주고받는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때였다. 그 계란 때문에 나는 그의 집이 시골인 것을 알았다. 도드라지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모습의 그 친구는 이미 내가 달걀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 깊고 세심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계란 한판을 가져온 것이다. 양계장을 하는데 방사한 토종닭이 낳은 초란으로 알이 작은 유정란이었다. 계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바쁘고 식욕이 없는 아침엔 찐달걀 하나에 우유 한 컵으로 아침을 대신할 정도다. 요즈음도 아내는 반찬이 허술하다 싶을 때면 내가 계란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계란프라이를 하거나 뚝배기에 고봉으로 부푼 달걀찜으로 식탁을 풍성하게 만든다. 계란국,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등이 대표적 계란 간편 요리들이 우리집 주 식단이다. 그런데 라면만큼 계란과 궁합이 잘 맞는 음식도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라면 조리법이 있다. 라면을 끓일 때 계란 물을 미리 풀지 않고 다 끓인 다음, 먹기 직전에 날달걀 하나를 탁 깨어 넣고 휘휘 저어 풀어주면 국물이 틉틉하고 내 입맛에 딱 맞는 비법이다. 이래저래 우리 집 냉장고에서 지금도 떨어지는 날이 없는 일등 부식이 계란이다. 친구는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이다. 남들은 과묵하다고 칭찬을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사실 그는 때와 상대에 따라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을 잘못하기 때문에 입을 잘 열지 않는 편이다. 그러면 나의 달변은 말을 잘하는 몸에 밴 성품 때문일까? 아니다. 그냥 성품이다. 요즈음도 그 친구를 만나 반주로 소주 몇잔 기울이면 야물게 채운 그의 입 지퍼를 열어젖혔다. 계란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내 말 아직도 잊지 않았지? 그 친구는 서두가 항상 자기집 양계 이야기를 필두로 주로 닭에 관한 얘기들이 주 소재다. 이야기를 하던 중에 죽은 것 같지만 분명 살아있고,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음을 표 내지 않는 것이 계란이라고 강조했다. 친구는 계란이나 계란으로 만든 음식을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을 ㅤㅎㅒㅆ기 때문에 이제는 그의 말을 잠언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반복되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계란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가끔 잊고 산다. 끓는 물 속이건 프라이팬 위에서건 때로는 산채로 입에 들어가도 반항하지 않고 한입 먹거리로 순교하는 계란을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다. 며칠 동안 품었던 달걀 속에서 티끌 같은 생명이 뛰고 있는 것을, 지구의 윤회와 같이 확실한 생(生)의 약동을 보았던 피천득 선생님의 〈생명〉이란 시가 생각난다. 21일 동안 품어주면 앙증맞은 날갯죽지가 달린 병아리로 태어나 자신의 존재를 천하에 알린다.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계란이지만 살아있는 생물이 분명하다. 반항하지 않는 조용한 생명체는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이 최고의 묘약이라고.... /윤 철 윤철 수필가는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을 하였으며 수필전문계간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한 수필가로서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8.26 15:40

하모니카 사랑

정석곤 씨 어릴 적에는 생활주변 자연물로 만든 우리의 악기들이 있었다. 풀잎을 뜯어 입술에 대고 불어 연주하던 풀피리, 보릿대로 만든 보리피리, 버드나무 껍질 대롱에 서를 만들어 부는 호뜨기 등이 있었다. 겨우 단순한 고저장단 소리를 내는 정도라 노래를 연주한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방으로 쏘다니며 불고 다녔다. 몇 년전에는 문화예술교실 하모니카반에 등록을 하고 하모니카도 샀다. 20여 명의 수강생들이 매주 목요일 오후면 3층 학습실에 모여 2시간 넘게 연습했다. 주로 하모니카 기초 연주법인 다장조의 음계를 따라 들숨과 날숨을 익히고 다장조 동요와 가곡 그리고 가요를 연습했다. 11월 초에는 중강당에서 우리만의 음악으로 즐기는 100세 인생 소소한 음악회도 열었다. 연말에는 전북교육문화회관에서 송년의 날 큰 잔치를 벌였는데, 갑돌이와 갑순이 서울의 찬가를 연주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고음과 저음의 음계가 서툴지만 하모니카를 연주한다는 자체가 기뻤다. 계속 하모니카를 배우고 싶어 노인복지관 3층 소망반에서 활동하는 하모사랑 동아리에 갔다. 책상에는 하모니카가 6개씩 놓여 있고, 보면대에는 두툼한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회원 20여 명이 바른 자세로 앉아서 연주를 막 시작했다. 옆 반주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며 앞 모니터는 악보와 계이름이 나오고, 파란 세로막대는 하모니카가 연주할 음의 노랫말을 가리키며 부지런히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강사는 컴퓨터에 곡명을 입력하더니 왼손은 마이크를 잡고 오른손으로 하모니카를 불며 지도를 하는 베테랑이었다. 수업 분위기와 연주 실력에 주눅이 들어 부풀었던 기대가 어긋났다. 내 연주 실력은 유치원 수준인데 동아리 회원들은 모두 대학생 수준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없다. 그래서 악기 연주를 잘하는 이들을 보면 부럽고 내가 작아 보인다. 대학 입학시험에 음악이론과 실기가 있었다. 그래서 3학년이 되어서야 풍금을 처음 만져보았다.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밤 늦게까지 혼자서 교재만 보고, 똑같아요 학교 종 등을 독학했으나 시험 당일은 전혀 쳐보지 않은 지정곡을 연주했었다. 초임발령을 받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하모니카를 배우고 싶었다. 순창 섬진강 상류 건너에서 근무하는 동창은 여러 악기연주에 재능이 많아 아이들을 잘 가르쳤다. 그래서 그에게 하모니카를 배워볼 욕심으로 가서 모니카를 빌려 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한 번도 연습을 못한 채 잃어버렸다. 그 뒤에도 하모니카를 배우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새 하모니카를 샀다. 그 하모니카는 지금도 긴 세월 동안 내 책상 서랍을 지키고 있다. 내 귀에는 지금도 하모사랑 동아리를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이 들리고 있다. 강사는 개인 교습을 받아야 따라갈 수 있다고 했다. 반장은 그냥 들어와도 연습하면 따라할 수 있다고 했다. 두 분의 말 중 어느 한쪽을 택했더라면 지금쯤 하모니카 연주 실력은 제법 늘었을 것이다.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새가 모이쪼듯 다시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정석곤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하여 <대한문학>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등 수필집을 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8.19 16:35

구름이 머무는 곳

박일천 울도 담도 없는 산사에 들렸다. 나는 빛바랜 일상이 이어질 때면 가끔 산을 찾는다. 깊은 산에는 고요한 산사와 오래된 풍경이 있다. 그 풍경 속에는 문명에서 멀어진 태고의 길이 있다. 그 길은 흙에 덮여 보이지 않는 인고의 사연도 알고 있을 듯하다. 골짜기를 따라 암벽을 끼고 있는 초입에 들어서면 누가 만들다 버려둔 듯한 석상이 바위너설 아래 놓여 있다. 다가가 보니 코가 납작한 얼굴, 그 옆에는 입을 해벌리고 웃는 모습. 만들다 만 듯 투박한 돌부처들의 순박한 인상이다. 불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엉성하다. 오다가다 지나며 심심풀이로 새겨 놓은 자화상들일까. 구름이 머물다 간다는 이곳 운주사는 입구부터 다른 산사 달리 새로운 시대를 열밍하는 누가 장난을 친 듯 그냥 맘내키는 대로 배치한 사찰이었다. 울타리와 천왕문도 없이 구층석탑이 입구에서 부터 우리를 맞이 했다. 그런 무질서가 묘하게 이곳 지형과 어우러져 신비감을 자아낸다. 이곳은 가람을 둘러보는 것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상과 탑을 보러 발품을 팔아야 했다. 에움길을 돌자 절벽이 연이어 나타났다. 큰 바위에 상형문자처럼 선이 그어져서 세세히 살펴보니 마애불이다. 긴 세월 비바람에 마모되어 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시늉만의 선으로 그린 것 같은데 그나마 코와 귀가 살아있어 중생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주사는 곳곳에 보기 드문 원형 탑이 많다. 대웅전 앞의 석탑은 위층이 많이 부서져 내려앉아 4층 정도만 남아 있다. 산중의 탑은 세월 따라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로 부서진 탑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능선 아래 널따란 너럭바위에 두 개의 와불이 세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이 와볼을 일으켜 세우면 모두가 평등한 미륵 세상이 온다는 설이 있다. 정말로 그런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산길을 휘둘아 가자 큰 바위아래 비를 피해 있는 듯한 석불이 보였다. 이곳은 어디를 가든 불상이 수시로 나타난다. 선만 남아 있는 눈 속엔 미륵의 세상이 가물가물 사라지고, 귓가에는 지난날 서러운 목소리가 가뭇없이 떨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주사는 미륵 세계를 염원하는 중생들의 안타움이 가득한 곳이다. 고려 초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풍수지리상 우리나라는 배 모양인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배의 중심인 국토의 중앙 화순 땅에 천불천탑을 세워 중심을 잡으려 했다고 전한다. 이곳은 그 옛날 기댈 곳 없는 백성들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았던 곳이다. 가엾은 중생들의 슬픈 신화가 구석구석 뿌리 내리고 있다. 석불은 이제 눈멀고 귀가 먹었다. 부서져 내린 입에 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흙이었다가 암석이 되고 들부처였다가 바람에 깎이어 다시 흙이 되어가는 블상들. 석상의 눈과 귀가 부서지듯이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리. 그 흙이 다시 돌이 되면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다시 모여 그 옛날처럼 소원을 담아 만들지도 모른다. 내리막길에 하늘가 흰 구름이 탑 위로 지나는 모습은, 구름이 머무는 운주사라는 이름이 딱 어울린다. 천년 세월의 흔적을 찾아 느릿하게 오래된 풍경 속으로 빠져든 하루였다. /박일천 박일천은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토지문학 수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협 회원, 샘문학회장으로 활동하며 수필집 <바다에 물든 태양>, <달궁에 빠지다>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8.12 16:31

꼬리표

이성수 수필가 이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이름은 빛나고 어떤 이름은 오명이 된다. 생각할수록 신통하다. 그 연원이 분명히 있고 이름 뒤에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이 중에 꼬리표는 살면서 항상 멍에가 된다.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제약을 받는다. 젊은 날에는 살기에 바빠 이런 꼬리표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된다. 사람이라면 좋은 소리를 듣고 살기를 원한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이 있다. 생물의 생존경쟁의 결과를 위미하는 말로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우월해 보이려는 자존감이 있다. 내가 만들지는 않아도 남들이 평소 행동을 보고 붙여준 꼬리표를 말한다. 꼬리표는 나를 어떻게 불러주는냐에 따라 두 가지가 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주관을 지키며 가슴이 뜨거운 의리를 가진 긍정적 꼬리표와 융통성 없고 말이 많으며 따지기 좋아하고 인색한 부정적인 꼬리표다. 그동안 우리가 만난 사람글을 보면 각양각색이다. 살면서 욕먹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남을 욕하기는 쉬워도 상대를 존경하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에서 존경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을 눈여겨 본다. 테니스 모임의 연장자 백 교장은 몇년 째 기부를 하고 계신다. 그의 배려하는 마음은 삶의 존재가치를 한층 더 성숙하게 한다. 그에게 선물을 받을 때면 괜히 마음이 흐믓해진다. 우리와 맺어진 정이 15년이 넘는데 선생님은 회원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 선물을 한 아름씩 주기도 한다. 그리고 올해는 집에 초대해서 퀴즈, 게임을 통해 상호관계를 도탑게 한다. 말은 쉬워도 실천은 쉽지 않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각자 나름의 품격이 있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관계를 가진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사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 3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존경을 받고 하직한 사람들이 많다. 빈손으로 떠난 김수한 추기경, 한 줌의 재를 남긴 성철 스님 등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빛나는 삶이 있기에 오늘의 세상이 있는 것 같다. 살면서 항상 관용과 포용을 베풀고 오늘을 정직하게 살며 내일은 신뢰를 기다리자. 함께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자.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 행동을 눈여겨 보며 덕을 가늠한다. 내가 만들지 않은 꼬리표지만 분명 내 이름과 함께 항상 뒤따라 다닌다. 한 번 붙은 꼬리표는 지우개로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왕이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멋진 꼬리표를 남겨봄직도 하다. 좋은 품성은 세속적인 소유물보다 더 귀하며, 그것을 형성하는 일은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일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다. /이성수 수필가 ▲이성수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은빛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플을 동해서 정화된 사회 가꾸기에 힘쓰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8.05 16:37

작은 새의 이야기

박경숙 수필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종종 분수를 알면서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결국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삶의 복합성 때문에 분수를 넘는 뱁새 꼴이 되기 마련이다. 새마다 각양각색이다. 황새는 몸집이 크고 당당하지만 뱁새는 작고 초라해 볼품이 없다. 그래도 뱁새는 황새가 별거냐며 보란 듯이 흉내를 내본다. 황새는 아랑곳없이 너쯤이야!하고 커다란 날갯죽지를 치켜들고 긴 다리를 내민다. 뱁새 역시 한 치도 안 되는 보폭으로 한 자가 넘는 황새걸음을 따라 하다 이윽고 우지직!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나뒹군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는 소녀가 있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 아이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소식을 끊고 자취를 감춰버려 황망한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절도죄로 파출소에 잡혀 있는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대했을 때의 순수했던 내면까지 피폐해져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했다고 한다. 여린 풀잎과 같던 아이가 이 거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또래들의 삶을 동경했지만 술고래 아버지와 병든 할머니와 살며 생활고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게 많은 철부지 소녀가 아닌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살면서 온갖 욕구를 부추기는 현실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가 있었을까? 사랑과 물질의 결핍을 이겨내지 못한 어린 것이 사회에서 격리될 수 밖에 없는 게 온전히 그 아이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이미 자신이 뱁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황새를 쫓기는 원치 않았지만 황새의 보폭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버거웠을 것이다.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높은 가르침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늘 고민인 뱁새였다. 그러니 모든 뱁새의 비극이 그저 나약한 의지나 허영심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생겨나는 숱한 틈들로 말미암아 시나브로 가혹한 운명의 무대에 내몰리는 뱁새도 있다. 요즘 하루가 멀다고 청렴을 최고의 기치로 삼아야 하는 정치인들의 뇌물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그 진실이 뇌물이냐, 선물이냐, 차용이냐, 하는 것은 검찰과 법원에서 결정할 일이니 개인인 내가 판정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약자가 뇌물을 건넬 때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는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것, 둘째는 권력자를 등에 업고 이득을 보자는 거다. 결국 권력을 남용하여 부조리를 저지르는 황새 가면을 쓴 뱁새들이 아닐지. 우리 역시 애정이나 관심 혹은 사회적 의무나 사명으로 종종 원치 않은 상황에 내몰리고는 한다. 끊임없이 우리를 또 다른 사회적 일탈과 새로운 시험 앞에 놓이게 한다. 혹여, 내 주변 사람을 황새걸음으로 걸어가도록 내몬 적은 없을까. 분명히 거기에는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도 함께했으리라. 바야흐로 자비로운 마음과 공공연한 도덕성이 끝 간데 없이 확산되고 있다. 가끔 내 주위의 진실을 외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환하게 웃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가엽은 작은 새의 눈물이 스치고 지나간다. /박경숙 수필가 △박경숙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등단하였다. 전북문인협회와 행촌수필, 영호남수필, 계간수필문우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전북수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천일제면 대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7.29 19:12

첫 꿈

김연주 꿈, 분명 꿈이었다. 내가 고대하던 꿈을 꾼 것이다. 천지개벽이라도 한 것일까? 햇볕 쨍쨍한 대낮 하늘에 별 하나 걸려있다. 온통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 곳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 유토피아를 연상케 한다. 사람,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해 낮별 바라기를 하면서 웅성거리는 길거리는 그야말로 축제속의 축제였다. 많은 인파속에 내리는 한 줄기 빛이 섬광처럼 내려진다. 슬며시 한 여인의 모습이 내 곁에 서성이더니 다시 오른다. 별이 된 여인이 내 곁을 스치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들의 우상처럼 다가 온 별을 보며 새벽녘에야 설핏 어머니라는 느낌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뜨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어머니.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꿈속을 헤매는 중이다. 건강하고 총기백배 했던 어머니. 세월이 흘러 백수 무렵 어머니 꿈에 갓을 쓴 남자가 나타나 따라오라 해서 기를 쓰고 뿌리쳤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가끔 생각이 나는지 이야기를 자주 꺼내신다. 갓을 쓰고 나타난 사람이 누군데요?, 나도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세월에 부대끼며 혼잣말도 늘어나면서 한마디 하신다. 왜 이렇게 안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아니, 엄마가 안 간다고 했는데 누가 데려가요., 그런가? 그래도 이젠 천국으로 가야지, 그럼, 이젠 가실 준비가 되셨나요?, 아니, 그냥 가야지 요양보호사의 따뜻한 보살핌 때문인지 정신은 참 밝으셨다. 꼿꼿하게 몸을 가누고 앉아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지난 추억을 회상하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건강복을 타고 나신 어머니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매일 규칙적으로 집안일도 척척 하셨다. 항상 곁에 있어 줄줄 알았던 어머니는 백 한 살이 되던 여름 아침 밥상을 받으신 후 잠을 자듯 이승의 인연 끈을 놓으셨다. 꿈에서라도 한 번 쯤 보고 싶었지만 일 년이 넘도록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정한 세월만을 탓하며 그저 잘못한 일들만 기억 속에 맴돌았다. 그 후 373일 만에 꾸게 된 첫 꿈. 눈을 뜰 수 가 없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려고 밤 새 꿈속을 헤매었다. 늦게라도 별이 되어 오신 어머니의 모습에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첫 꿈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니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간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근황을 꿈속에서라도 순간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 꿈 냄새 남기고 가신 어머니를 언제쯤 또다시 꿈에라도 만나 볼 수 있을지. 딱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긴 밤이 아니어도 좋다. 내 생전에 어머니 별 한 번 품고 싶은 게 욕심일까. 1년에 한 번만이라도 별 하나 띄우기를 빌어본다. 나이 들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스스로 건강을 챙기고 내 할 일은 스스로 하고 더불어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이 불문하고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 또한 건강의 비결이지 않은가. 소박하고 순박한 모습으로 욕심 없이 살고 싶다. 나이 먹었다고 남에게 받으려만 말고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간절한 기원을 합장한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보는 게 소원이다. /김연주 김연주는 작촌신인문학상, 녹색수필상을 수상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전북펜문학, 시와 산문문학회 동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산문집 <마음 밭에도 풀꽃을 심어>, <세월이 바람처럼 흘렀다>. 동시집 <작은 꽃별들> <세상에서 제일 큰 꽃밭>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7.22 16:49

작은 보따리 하나 던져두고

이용만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는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 끼익~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다. 이놈의 자동차는 한밤중에도 쉴 줄을 모른다. 조마조마하다. 길 한 번 건너가려면 수도 없이 두리번거려야 한다. 그러다가 기어이 사고가 났다.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끼익~ 하면서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차들이 주욱 늘어서고 무슨 구경거리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거리에 피가 흥건하고 머리를 치인 할아버지 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경찰차가 달려오고 앰블런스가 할아버지를 싣고 갔다. 이미 숨은 끊어진 상태라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그 할아버지가 들고 다니던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보따리를 향하여 둘러섰다. 경찰서로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병원으로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따리를 펴보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 놓고 간 보따리 그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공수래공수거라고 하더니 죽는 순간엔 마지막 보따리까지 훌쩍 던져두고 빈손으로 떠나갔다. 요즈음은 모양도 좋고 기능도 편리한 가방이 많으련만 아무도 들고 다니지 않는 작고 허름한 보따리 하나. 결국 그는 그것마저 던져두고 떠나간 것이다. 어찌 그 사람뿐이랴. 누구나 마지막 갈 때는 작은 티끌 하나라도 들고 가지 못한다. 그런데 왜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것일까. 보따리는 대개 집을 나서서 멀리 갈 때에 챙기는 필수품이다. 아니면 잠시 며칠 길을 떠나거나 집을 떠나 잠자리가 바뀔 때 필요한 물건들을 줄이고 줄여서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챙겨 넣는 행랑이다. 말하자면 작은 살림살이인 것이다. 이처럼 보따리도 여러 가지가 있다. 달랑달랑 손에 들고 가는 작은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물건이 골고루 들어있는 보따리장사 규모의 큰 보따리도 있다. 예를 들면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는 선비의 보따리에는 출세의 길이 들어있고, 외국 방문을 위해 출국하는 사람들의 보따리에는 그 나라의 문물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 챙겨 든 보따리 하나. 그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행로의 행장일 것이다. 긴긴 인생의 행로라 하여 어찌 많은 것들을 챙겨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결국은 자기가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의 무게이리라. 어쩌면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보따리 하나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것 마저도 생의 행로를 마감할 때는 훌쩍 던져두고 간다. 가면 오고, 오면 가는 생노병사의 인생이거늘 공수래 공수거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짜피 우리는 가는 것이니 하루를 살아도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청정한 본래 마음을 잃지 말자. 욕심내어 큰 보따리 만들지 말고 어느 때 놓아도 아깝지 않을 작은 보따리 하나만 들고 다닐 일이다. 이제 돈과 권력, 명예를 뒤쫓아 달리던 모습에서 걸움을 멈추고,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임을 명심하고 평범 속에 행복을 찾도록 노력하자. /이용만 △이용만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하여으며 『수필문학』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임실지부장 역임했으며 수필집 『세월 앞에 내가 서서』 외 다수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7.15 16:15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전길중 시인은 시 쓰기가 즐거워야 하는데 고통을 말한다. 시 쓰는 일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일이라 익히 들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이나 경험, 반짝이는 에스프리(esprit)로 시를 완성했을 때 희열이나 보람은 고통을 치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가사를 돕는 일은 소를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일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과 친해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장이 되어 책과 가까이하였다. 고등학교 때는 하숙 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낙서로 끄적이곤 했다. 그 후 교지에 작품을 게재하기 위해서 낙서한 것을 정리해 시인이신 조두현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활자화 된 작품을 보니 묘한 흥분이 일었다. 이런 계기로 대학 시절에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이동렬 교수의 불문학 시간에는 스탕달, 말라르메, 보들레르, 랭보 등을 접하였다. 전채린 교수님이 청춘은 연애할 때 빛난다.라는 말씀에 행여 앙드레 지드의무상주의에 청춘의 특별함이 있을 듯하여 그의 작품 좁은 문, 교황청의 지하도전원 교향곡 배덕자등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사회에 나와 전북문학에 작품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날 정기총회에 참석했는데 미등단 자에게 투표권을 주느니 마느니 논란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등단에 무관심했던 나는 시가 좋아 시 쓰면 시인이지. 하는 지론으로 등단을 결심했다. 그런데 문덕수 교수님이 초회는 추천을 해주셨지만, 이후 수년 동안은 천료를 해주시지 않고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하셨다. 이를 수련의 과정아라는 생각을 못한 나는 포기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도전하여 1987년 초에 추천이 완료 되었다. 이후 전국 일곱 명의 시인들이 의기투합하여 「칠요시」라는 동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구상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詩는 말씀 言에 절 寺로 이루어졌다 하시면서, 절에서처럼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시를 대하라고 당부하셨다. 어느 선배 시인께서 "글이 좋은데 사람이 나쁜 사람, 글은 별로인데 사람이 좋은 사람, 글도 좋고 사람도 좋은 사람으로 구성된 것이 시단이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할까?라고 자문을 해본 적이 있었다. 릴케는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라고 했다. 시를 쓰는 고통 자체가 삶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시가 일정한 틀로 정해져 있거나,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시 쓰기 기법 등을 말하는 책은 시 창작 이론의 기본서일 뿐이다. 리처드 바크까 쓴 「갈매기의 꿈」에서 갈매기 조나단이 어려운 한계를 넘어 고속비행에 성공한다. 부단한 노력과 고행을 거쳐 꿈을 이룬 것이다. 시인도 이와 같을 것이다. 꼭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 없이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어느새 숙명적으로 시와 동반자가 되었다. 혼자 걷는 길을 같이 가며 삶의 무게를 나누는 시, 언제든지 안식처가 되고 처진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그리우면 대상이 되어주는 시, 긴 여정을 서로 다독거리며 나는 오늘도 기의 길을 향하고 있다. /전길중 △ 전길중은 1987년 <시문학>으로 등단하여 한국문협 감사, 한국 문학신문 편집국장,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문학 백년상, 전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안경 너머 그대 눈빛』,『그녀의 입에 숲이 산다』 등 7권의 시집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7.08 16:32

산다는 것은

김덕남 수필가 새해 인사로 덕담을 건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다. 나이 들어가는 탓일까. 요즘 더 세월이 빠르게 달아나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허리 협착증으로 고생하던 동갑내기가 견디다 못해 몇 해 전 허리 시술을 했는데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또 어깨 수술을 받았다며 아홉수 넘기기가 그리도 힘들고 무섭더냐. 한다. 그 동네를 떠나 온 지 벌써 여러 해. 남편의 건강 변화와 코로나 괴질로 여유롭지 못한 마음에 나는 그녀의 근황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못했다. 관상동맥 스텐트를 꽂은 남편의 친구가 작년 가을 산행 중에 넘어져 응급실을 다녀온 뒤 내내 마음을 졸여오더니, 새해를 맞아 팔순이 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라고 했다. 인생 고난이 어느 시기를 고려하며, 생명의 끝이 어느 나이를 예외로 하던가. 아홉수 이야기는 우리네 민속적 금기일 뿐, 아홉이란 숫자는 완전하고 가득 찬 수로, 십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새로운 변화에 앞서 조심을 이르는 선조들의 지혜의 가르침이다. 모두가 짧은 인생길의 허무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약해진 노년의 심정들이었다. 코로나19로 집합 금지와 거리두기를 강제하는 요즘, 매달 만나던 동기들도 못 본 지 오래인데 취미활동마저 중단하고 나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별한 나들이 없는 내 일상은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화장하는 일과 멀어지고 매무새도 허술해져 활력 없는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나다닐 때는 잊고 지내던 내 몸의 작은 통증들까지도 무기력한 나를 얕보며 여기저기서 때로 아우성친다. 백신의 불안은 여전하여 올해도 마스크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하니. 내 생의 아까운 시간이 또 얼마간 그렇게 위축되고 답답하게 흘러갈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게다가 요즘 유난히 멀쩡하던 지인들의 황망한 타계 소식들은 나를 더욱 허탈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또 가까운 후배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들었다. 그녀의 죽음에 왜? 왜? 도무지 믿기지 않는 나는 몇 번을 되묻기만 했다. 코로나19로 모든 활동을 접고 은둔하는 시간을 보낼 때도 그녀는 취미활동을 이어가며 헬스장으로 거침없고 씩씩한 행보를 했다. 그런 그녀의 생전 모습들이 자꾸 떠올라 나는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다재다능하고 많은 사람과도 잘 어울리며 늘 당당하던 그녀는 정년퇴임 후, 물 만난 고기처럼 세계 곳곳을 누비며 넘치는 에너지로 삶을 즐겨 나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라산 등반, 차마 고도 여행을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동안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었던 그녀였다. 친구가 볕이 너무 좋아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며 점심이나 하잔다. 칠십 문턱도 오르지 못하고 삶을 끝낸 그 후배가 한 줌의 재로 되는 시각, 나는 반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에 정성껏 분을 바르고 모처럼 입술연지도 발랐다. 높이 올려 둔 구두도 꺼내 신고 스카프로 한껏 멋을 냈다. 이제 그녀의 활발했던 몸짓과 유쾌한 웃음소리는 이 천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또각거리는 내 구두 소리에 애써 우울했던 마음을 날려버린다. 나는 잠시 후면 친구의 반가운 얼굴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것이다. 따스한 햇볕이 내 안으로 더 깊숙이 안긴다. /김덕남 수필가 김덕남 수필가는 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이 있으며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7.01 16:37

산다는 것은

김덕남 수필가 새해 인사로 덕담을 건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의 봄이 깊어간다. 나이 들어가는 탓일까. 요즘 더 세월이 빠르게 달아나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허리 협착증으로 고생하던 동갑내기가 견디다 못해 몇 해 전 허리 시술을 했는데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또 어깨 수술을 받았다며 아홉수 넘기기가 그리도 힘들고 무섭더냐. 한다. 그 동네를 떠나 온 지 벌써 여러 해. 남편의 건강 변화와 코로나 괴질로 여유롭지 못한 마음에 나는 그녀의 근황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못했다. 관상동맥 스텐트를 꽂은 남편의 친구가 작년 가을 산행 중에 넘어져 응급실을 다녀온 뒤 내내 마음을 졸여오더니, 새해를 맞아 팔순이 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라고 했다. 인생 고난이 어느 시기를 고려하며, 생명의 끝이 어느 나이를 예외로 하던가. 아홉수 이야기는 우리네 민속적 금기일 뿐, 아홉이란 숫자는 완전하고 가득 찬 수로, 십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새로운 변화에 앞서 조심을 이르는 선조들의 지혜의 가르침이다. 모두가 짧은 인생길의 허무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약해진 노년의 심정들이었다. 코로나로 집합 금지와 거리두기를 강제하는 요즘, 매달 만나던 동기들도 못 본 지 오래인데 취미활동마저 중단하고 나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별한 나들이 없는 내 일상은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화장하는 일과 멀어지고 매무새도 허술해져 활력 없는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나다닐 때는 잊고 지내던 내 몸의 작은 통증들까지도 무기력한 나를 얕보며 여기저기서 때로 아우성친다. 백신의 불안은 여전하여 올해도 마스크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하니. 내 생의 아까운 시간이 또 얼마간 그렇게 위축되고 답답하게 흘러갈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게다가 요즘 유난히 멀쩡하던 지인들의 황망한 타계 소식들은 나를 더욱 허탈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또 가까운 후배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들었다. 그녀의 죽음에 왜? 왜? 도무지 믿기지 않는 나는 몇 번을 되묻기만 했다. 코로나로 모든 활동을 접고 은둔하는 시간을 보낼 때도 그녀는 취미활동을 이어가며 헬스장으로 거침없고 씩씩한 행보를 했다. 그런 그녀의 생전 모습들이 자꾸 떠올라 나는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다재다능하고 많은 사람과도 잘 어울리며 늘 당당하던 그녀는 정년퇴임 후, 물 만난 고기처럼 세계 곳곳을 누비며 넘치는 에너지로 삶을 즐겨 나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라산 등반, 차마 고도 여행을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동안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었던 그녀였다. 친구가 봄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볕이 너무 좋아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며 점심이나 하잔다. 칠십 문턱도 오르지 못하고 삶을 끝낸 그 후배가 한 줌의 재로 되는 시각, 나는 반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에 정성껏 분을 바르고 모처럼 입술연지도 발랐다. 높이 올려 둔 구두도 꺼내 신고 스카프로 한껏 멋을 냈다. 이제 그녀의 활발했던 몸짓과 유쾌한 웃음소리는 이 천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흐드러진 봄꽃 아래로 또각거리는 내 구두 소리에 애써 우울했던 마음을 날려버린다. 나는 잠시 후면 친구의 반가운 얼굴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것이다. 봄볕이 내 안으로 더 깊숙이 안긴다. △김덕남 수필가는 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이 있으며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5.06 17:47

양심 거울

신팔복 수필가 점심을 먹고 플라스틱 물병과 폐지를 들고 나와서 아파트 쓰레기 수거함에 구분해 넣고 길을 나섰다. 요즘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오늘은 공원이나 천변이 아닌 시가지로 발길을 옮겼다. 직장이 있어 많이 다녔던 서남당 길로 접어들었다. 소서의 열기는 맥을 못 추케 했다. 조금 걸었는데 결국 등줄기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이마에서도 자꾸만 땀이 횰러내렸다. 땀을 닦은 손수건이 금방 축축해졌다. 깊은 계꼭 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이나 한 통 먹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옛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약골로 접어들었다. 골목길 돌담 밑에 보기도 흉하게 생활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난잡할까 하며 가까이 다가가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내 모습이 거울에 나타난 게 아닌가?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은 마치 내가 쓰레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벽면에 걸려았는 기다란 거울, 그 위에 써놓은 검정 글씨는 양심 거울이었다. 양심을 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주위에는 CCTV도 있었고, 현수막도 쳐 놓아 분리수거를 계도히고 있었지만, 버리는 행동은 막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늘이 알고 땅은 안다. 심지어 과격한 말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심을 잃어버린 행동은 이웃들의 신경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지저분하게 너부러져서 썩어가고 가고 있어 비위생적이다. 혐오감까지 준다. 양심은 어떤 행동이나 말이 자신의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도덕적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양심 거울은 자기 마음을 거울에 비춰보라는 뜻일 것이다. 깨끗하고 올바른 행동인가, 음흉하고 비뚫어진 행동인가를 반성해보란다. 사회공동체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조금은 불편해도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이윳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남을 속이는 거짓말, 남몰래 버리는 행동, 공공시설물을 파괴하는 비행 등은 양심을 팔고 사회를 좀먹는 행위다. 거읗을 보면서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양심을 속이는 행동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다. 등산할 때 보면, 철부지가 아닌 알 만한 사람들인데 가져온 음식을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룰 함부로 버리는가 하면,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페트병이나 빈 술병, 과자봉지 등을 슬그머니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부끄러운지 보는 눈을 피해 밑에 묻거나 나무 틈새에 숨기는 나쁜 마음도 있다. 건축폐기물을 산에 버리는 짓이나 기축 배설물을 냇물에 흘려보내는 비양심적 행동은 자기만 알고 이웃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잘못된 행동이다. 오늘날 자연은 산업발달과 비례하여 훼손되어 가고 있다. 냇물과 바다에 유입된 플라스틱이나 스치로폼, 폐비닐 등 작은 조각들이 조류나 어류의 뱃속에서 뭉쳐 나오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다. 놀랄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들이 먹이사슬로 이어져 인간에게 해를 끼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아 우려스럽다.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 후손들이 이어받을 자연과 환경을 보전해 나가야 한다. 작은 일이지만 실천하는 양심이 꼭 필요하다. 공원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도 그냥 핀게 아니다. 누군가의 돌봄과 배려가 있었기에 훌륭하다. 환경을 살리는 적은 노력, 분리수거가 자기 양심과 지구의 미래를 살려낸다. 묵묵한 양심거울이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 신팔복 수필가는 중등교사로 퇴직하여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협회원, 진안문협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마이산 메아리>등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4.15 18:08

삼례촌 봄나들이

백봉기 수필가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어느덧 새생명들이 자리를 잡는다. 산언저리 과수원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정원에 도열한 나무들도 기지개를 켠다. 엊그제는 개나리와 매화가 모습을 보이더니 오늘은 산당화가 고개를 내민다. 이곳저곳 물감으로 찍어놓은 듯 환하게 피어오른 건지산의 꽃 무리가 시선을 강탈한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나. 여기저기 툭툭 터지는 하얀, 빨강, 노랑 불꽃들의 아우성쳐 혼자서는 결코 감당하기 어렵다. 4월,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누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꽃에 홀리고 바람에 취하고 대지의 용틀임에 정신이 몽롱해지기 때문인지. 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래, 나가자! 발길 닳는 곳이 봄이고, 꽃이고, 인연이 아니겠는가. 차를 몰고 고산천을 들러 삼례쪽으로 가니 봄내음이 향기롭다. 햇빛도 물빛도 하늘빛도 상큼하다. 코로나로 지친 요즘 내 영혼에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차가 멈춘 곳은 비비정마을 전망 좋은 언덕, 이곳은 평범하던 시골마을이 새로운 이색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언덕배기에는 야외공연장과 사방으로 뻥 뚫린 통유리집 카페가 이색적이다. 베란다 아래쪽으로 어느덧 땅심을 받은 애쑥이 포르스름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슴이 탁 트인다. 고산천과 전주천이 흐르는 만경강과 호남벌이 품안으로 들어온다. 강둑을 따라 전주 팔복동에서 목천포까지 이어지는 연분홍 벚꽃길이 마치 행군하는 병사들 같다. 때마침 새로 난 전라선 철교를 따라 여수행 열차가 유유히 빠져나간다. 남쪽으로 가는 나들이객들이 차량 가득 몸을 맡기고 있는가 보다. 비비정을 나와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갔다. 이곳은 암흑의 역사가 예술 볕을 받은 곳이다.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생산하는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지은 창고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7개의 낡은 창고들이 제각각 창의적으로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낡은 창고건물에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에 홀린 듯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삼례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다. 터미널 근처에 있는 허름한 국밥집, 잔인한 4월의 잔영은 여기에도 있다. 낮술에 젖은 여인들, 이들도 분명 봄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리다. 60대 초반쯤 보이는 두 여인, 옆 사람은 의식하지 않은 채 말끝마다 이년 저년 욕설을 퍼붓더니 갑자기 노래를 한다. ♪마음 주고 정을 준 게 바보였구나. 사랑을 한 내가 바보였구나~♪ 아픈 상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애절하고 감정이 깊다. 앞뒤 좌우로 흔들다가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다. 그래 아픔만큼 흔들려라. 맺힌 한 다 풀어라. 소 키우는 걱정은 하지 말고, 마시고 퍼붓고 실컷 가슴 두드려라. 봄이 당신을 다 용서하리다. 나도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서야 내 짧은 봄나들이에 쉼표를 찍는다. /백봉기 수필가 △백봉기 수필가는 <한국산문>으로 등단해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 팔짱녀 해도 되나요를 발간했다. 현재는 전북문협 부회장과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4.08 17:50

우리집 보물

고정완 작가 우리 집에는 1달에 1번 밥만 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군소리 없이 일을 히는 50살 된 살아있는 보물이 있다. 아침이면 나를 깨우고 밤이면 재워주는 충실한 심복이다. 몸통은 네모요, 동그랗게 생긴 얼굴 양쪽 볼에 입이 있고, 하복부엔 여름철 축 늘어진 늙은 소 낭심(囊心) 같은 진자(振子)가 왔다 갔다 바쁘게 움직인다. 이것은 내가 1970년, 모교에서 졸업 기념으로 받은 벽시계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아내 다음 가장 오래된 식구로 정이 듬뿍 들었다. 식구들이 게으름을 부릴 때면 똑딱똑딱 채찍도 하고 땡~ 땡 경고도 울려준다. 내가 국민학교 때만 해도 시계 있는 집은 23명 중 2명 밖에 없었다. 농촌에서는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일을 끝냈다. 해가 없는 밤에는 초저녁 닭 우는 소리에 잠을 자고 새벽에 첫닭이 울면 일어나는 등 때를 맞추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초저녁에 수탉 한 마리가 울면 온 동네 닭이 따라 울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닭의 울음은 이튿날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바로 그 이튿날 잡아 없앴기 때문이다. 옛날 골목을 떠돌았던 이야기인데 과부댁 머슴들이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일을 시켜서 그 닭이 얄미워 닭만 없으면 늦잠도 잘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아 잡아먹었다. 그리고 이제 편히 잘 수 있다 싶어 좋아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과부댁이 잠도 오지 않아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일찍 깨워서 닭 잡아먹은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골에서는 이처럼 길을 물으면 담배 한 참이면 가요,라고 해서 가까운 줄 알고 갔는데 아주 먼 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시간관념이 희박해서 한 때는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코리안 타임이라 했다. 기차나 버스도 기다리는 시간이 30분은 보통이었다. 그랬던 지금 우리나라는 시간이 정확하고 약속 시간도 잘 지켜 선진국이 되었다. 우리는 시간을 먹고 살고 시간을 먹고 죽는다. 이처럼 시간은 우리에게 아주 값진 것이다. 평생 시계를 만들던 사람이 아들의 성인식 날 시침은 동, 분침은 은, 초침은 금으로 된 시계를 선물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 시침이 가장 크니까 금으로 초침은 동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다, 초침이야 말로 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초를 잃는 것이야 말로 금을 잃는 것과 마찬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계를 채워 주며 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시간과 분을 아낄 수 있겠니? 세상의 흐름은 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성인이 되었으니 너의 초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고 당부를 했다. 어느 목사가 설교 중 여러분에게 거금 86,400달러가 생긴다면 저축이나 주식투자는 안 되고 하루에 다 써야 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하자 여러 답변들이 쏟아졌다. 한참 듣고 있던 목사가 나중에 돌려받을 수 없는 오늘 하루에 쓰십시오.라 했다. 하루를 시간으로 나누면 24시간, 분으로 나누면 1,440, 다시 초로 나누면 86,400초가 된다. 86,400달러는 하루라는 시간의 돈이다. 따라서 내게 주어진 것은 오늘 뿐이니 오늘에 충실하라는 말이라 했다. 지금도 아침부터 똑딱똑딱 쉬지 않고 50년을 즉 15억7천6백8십만 초를 우리 집에서 일했는데 그 품삯은 얼마나 될까? 이 귀한 보물을 허투루 함부로 대하고 대접도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원망하고 서운했을까? 우리 모두는 큰 죄인이다. 오늘은 나의 남은 날, 첫날이니 새롭게 알차게 사는 것이 보물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며 항상 고맙고 감사하며 살겠다. △고정완은 초등교장으로 정년하여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서예가협회 초대 작가이며 전북수필문학회 이사로 있다. 수필집 <백두산 천지에 손을 담그고>를 펴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4.01 17:49

눈썰미

하광호 수필가 아내는 하는 일마다 척척 잘도 해낸다. 눈썰미도 좋고 기억력이나 생각하는 머리 자체가 뛰어나다 보니 우리 집에서 컨트롤타워 같은 존재다. 그러니 지금 까지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않는가? 그런데 요즈음은 몸이 피곤하고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한다. 젊은 시절에는 억력이 좋아 척척 외기도 잘했는데 머리가 잘 안 따라 준다는 푸념이 귓전에 스친다. 얼마 전 일에는 미장원을 다녀온 뒤 어떤 남자를 칭찬했다. 그 사람은 집안일에 관심이 많아서 고쳐야 할 것이 보이면 곧 바로 수리를 한다며 부러워 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수리할 것이 많은데도 밖으로만 돌아다니느라 관심이 없다며 은근히 나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고칠 것이 보였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으니 오죽했을까? 직장을 다니는 아내는 토요일이면 TV 앞에서 고단했던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원망과 상처들을 삭이며 가벼운 안식을 취한다. 그런데 오늘은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불만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프로가 있는데 TV가 안 켜진다는 것이다. TV에 관해서 문외한인 나는 어찌할지 몰라서 서비스를 받아야 하나 고민하며 리모컨을 달라고 했다. 아무리 작동을 해도 끔쩍을 안 했다. 모니터 앞뒤를 보았지만 열지도 못해서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곳만 깨끗이 닦아내고 리모컨을 켜보니 켜지지 않는가? 아내는 어떻게 고쳤냐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속으로 먼지만 제거했는데 하면서도 나름 자부심을 가졌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반환점을 돌고 있는 나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체험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급여만 통장에 꼬박꼬박 넣어주면 최고의 남편인 줄로 착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일인다역으로 살며 직장까지 다니고 있었으니 이제야 알 것만 같다. 그런데 퇴직 뒤에는 내가 집에 머문 날이 많아져서 아내와 역할이 바뀌었다. 아내의 하던 일을 도맡아 한다. 세탁기 활용법을 몰라 아내에게 배웠고, 세탁 뒤에는 저녁이면 빨래를 걷어서 개었다. 그리고 어설펐지만 설거지도 했다. 기름진 그릇들은 주방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를 활용하여 제거하는 것도 배웠다. 군대 생활 시절 1년쯤 되었을까? 초년병들이 6개월 동안 식기 당번을 했다. 그때는 플라스틱 그릇으로 기름기 있는 식사 뒤에는 찬물에 그냥 씻으면 절대 닦이지 않아 반드시 물을 데워 씻었다. 엄동설한 겨울철에 야외에서 그릇을 세척하여 관리를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며칠 전에는 싱크대 밑으로 물이 샌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싱크대 아랫부분을 교체하려고 막상 부딪쳐보니 나름 애로가 많았다. 관련 업자를 부르면 출장비까지 주어야 한다는 말에 해당 부품만 구입하여 교체했다. 요즈음 아내가 나를 대하는 눈이 달라졌다. 그동안에는 부정적으로 여기며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남편이었으리라. 그런데 아내의 눈썰미 닮아 나도 가정생활의 세세한 일들을 척척 해결하니 남편이란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다. 말 한마디만 해도 척척 알아서 서로를 토닥이며 살아가니 아제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나 보다. △ 하광호 수필가는 진안 출생으로 진안군청에서 퇴직했으며 「표현」에서 등단을 했다. 전주시민문학제에 수상을 하였으며 현재 진안문인협회 회장, 신아문예대학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3.25 17:58

꽃이 외롭다

박동수 수필가 꽃이 외롭다. 맞지 않는 말이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한다. 꽃이 피면 사람들이 모인다. 축제도 열린다. 꽃이 피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홍매화, 흰 매화, 산수유, 진달래, 목련, 벚꽃이 각기 색깔을 뽐내며 피어나면 겨우내 잠자던 대지도 깨어나고, 우리 몸도 생기가 솟는다. 이런 꽃의 계절, 봄인데도 환호할 수 없다. 예년의 봄은 꽃이 피면 즐거웠다. 꽃을 따라 많은 사람이 나들이했다. 꽃을 보면서 감탄하고, 사진도 찍고 꽃 곁에서 담소했다. 꽃 축제로 왁자지껄했다. 사람들이 모였다. 꽃이 외롭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조용히 개인적으로 꽃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있어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지 않는다. 지금 꽃이 외롭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꽃들이 지금은 찾아주는 이가 드물어서 외롭다. 이런 속에서 우리 정서도 자꾸 메말라 간다. 우리 생활에서 꽃과의 교감, 사람 간의 교류가 자꾸 사라져간다. 꽃도 외롭고, 사람도 외롭다. 카뮈는 오랑이라는 도시를 중성적이라고 했다. 소설 페스트에서 오랑을 특징 없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도시라고 했다. 지금 우리의 봄이 너무나 중성적인 것은 아닌지? 활력이 없는 봄은 특징 없는 봄이다. 우리는 지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봄을 맞고 있다. 아니, 오히려 정신적으로 불안한 봄을 맞고 있다. 봄이 되어서 꽃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꽃소식이 먼 나라 얘기 같이 낯설다. 지난해 비가 뿌리는 봄날, 하얀 목련이 바람에 떨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창백하고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진달래, 개나리는 이미 다지고 풍성한 목련이 피어있었지만,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해 2월 중순에 시작된 1차 유행으로 사람들은 꽃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꽃에 관심을 두지 않는 동안 봄꽃은 외롭게 다 떨어져 갔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이 다 떨어졌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떨어지는 목련은 슬프기만 했다. 올해는 괜찮을 줄 알았다. 꽃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맘 놓고 꽃을 즐길 수 없다. 꽃이 외로운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꽃이 외롭지 않은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한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여름에는 여름꽃이 핀다. 가을에는 가을꽃이 핀다. 심지어 겨울에도 피는 꽃은 있다. 올해는 꽃이 외롭지 않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한다. 올봄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여름에 여름꽃을 즐길 수 있으면 한다. 아니면 가을이 되어서라도 가을꽃을 즐길 수 있으면 한다. 그것도 아니면 정말 올해가 가기 전 겨울에 피는 꽃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한다. 꽃은 어느 계절에 피든지 외롭지 않아야 한다. 유독, 이 봄, 꽃을 찾아 나서기 조심스럽다. 꽃을 맘대로 찾아 나서지 못하니 상실감이 크다. 지난해 목련이 질 때, 이맘때면 꽃이 외롭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봄이 되어서도 꽃이 외롭다. 이제, 제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한다. 그래야 우리도 외롭지 않고, 다시는 꽃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 박동수 수필가는 전주대 부총장을 역입했고 전북일보 비상근논설위원, 한국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염을 깎지 않아서 좋은 날> 등 6권의 수필집을 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3.18 17:55

고통은 하늘이 준 선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쁨과 행복도 많았지만 고통과 불행도 많이 겪었다. 항상 행복만 있으면 좋으련만 가끔씩 찾아오는 고통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하늘이 준 소중한 선물이라 생각하자. 작년에는 70년 만의 일기 변화로 정든 집이 무너졌다. 공들여 가꾸었던 비닐하우스의 수박, 참외, 오이, 토마토, 멜론 등도 재해로 사라졌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땅을 쳤지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괴로운 나날들이 지나갔다. 때로는 고통으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주는 것일까? 하며 하늘을 성토하기도 하고 원망도 한다. 그러면서도 정든 집 보금자리에 상처로 수북이 쌓인 가구와 살림살이들을 새로 바꾸고, 막혀서 불편했던 자동차, 열차 길도 다시 열리며 우리네 인생살이를 추스렸다. 이제 우리들의 하늘에는 밝은 해가 열기를 품는다. 푸른 하늘이 보인다. 강과 계곡들은 푸른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내가 할 일 앞에서 오늘도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래야 오늘보다 편안한 내일을 맞을 수 있다. 이것이 인생살이다. 이 길목에서 우리는 교육문화 회관에서 시, 수필을 공부와 함께 만났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런 저런 인생이야기를 쓰며 지난날을 돌이켜 보고 새로운 내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불초 본인이 회장직을 맡아 <글 채움터>라는 문집을 내고 코로나 때문에 아직 개강은 하지 목했지만 새학기를 맞으니 감회가 새롭다. 요즈음 코로나19 여파로 우여곡절이 많다. 하지만 일단은 우리 건강이 먼저다.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펴고 어느새 봄을 맞으며 아름다운 꽃도 핀다. 진한 봄 향기가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세월 따라 다시 더위가 오고 긴 장마도 올 것이다. 그간의 인생 경험을 뒤돌아보면서 아쉬운 지난 일들이 뇌리에 추억으로 남아 우리들의 문학 수업에 족적으로 남아 좋은 글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간 심혈을 기울여 가꾸어 온 우리들의 인생 수업이 헛되지 않도록 금년에도 모든 힘을 기울이겠다. 시골 농부들은 극심한 가뭄과 기나긴 장마, 재해를 안기고 간 태풍도 슬기롭게 대처한 후에 들판에서 조각난 황금 물결을 바라보면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사는 동안 희로애락을 접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인생의 허무와 보람을 맞는다. 나도 이제 노력한 결실을 갈무리하기 위하여 수확을 할 나이다. 우리네 수확은 무엇일까? 우리의 정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다. 나의 진솔한 작품들이 많은 독자들로 부터 공감받고 격려의 박수를 받는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열매인가? 우리 모두 결실을 서로 격려하면서 인생의 열매 족적을 기리겠다. 삶의 고통과 시련은 인간에게 새로운 마음의 성숙과 영적인 도약을 이루어 가는데에 가장 큰 장애물로 보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고통의 순간들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고통도 우리 삶의 일부다.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의 시간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꼭 필요한 시간들이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코로나 병란을 잘 극복하고 다시 희망의 미래를 열어가며 살아가자. △ 박홍배는 전주 mbc에서 정년을 하고 사서삼경을 배우다가 <문학창작반>에 입문하여 시와 수핑을 공부하고 있는 만학도로서 현재 글채움터 회장을 맡으며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3.11 18:20

교단 유감(敎壇遺憾)

나는 사범대학을 나와 교편생활을 41년을 하고 얼마 전 정년퇴임을 했다. 우리나라 중등 교육계에서 나만큼 오랜 동안 교직 생활을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학교 다닐 때 학교를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고 재수는 필수라는 말이 있는데 재수도 안 해봤으며, 6.25세대라 호적이 2년이나 늦게 된 데다가 군대도 신체검사에서 징집면제를 받아 군인 생활도 본의 아니게 않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지금까지 교단에 서 왔으니 말이다. 그것도 오로지 평교사로만. 오래 해서 자랑이 아니고 평생 보람을 느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왔기 때문에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난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는 5,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영향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중등 교사가 되고 싶었으며 대학 때는 꿈이 점점 커지다 보니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다. 비록 교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교사인 것을 늘 자랑해 왔고 긍지를 지니며 살아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듯이 우리 교단의 현실도 너무 많이 변했다. 옛날에는 스승이라면 그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했는데, 요즘 학생들의 선생님에 대한 인식은 너무도 많이 변해버렸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라면 하늘처럼 여겼고 신성시까지 했었다. 하나 지금 학생들의 선생님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에 내가 직접 겪은 한 예를 들어본다. 늦은 봄이었다. 점심시간에 도교육청 장학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며칠 전 교실에서 수업 중에 학생이 물 마셨는데 못 마시게 한 적이 있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랬다고 했다. 왜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했더니 학생으로부터 민원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한 학생이 수업 중 하얀 커다란 페티병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에 야 이놈아! 물은 쉬는 시간에 마셔야지 왜 수업 중에 마시느냐? 얼른 치워!이렇게 주의를 주었었다. 교육이라는 게 뭔가. 학생들 비위나 맞추고 학생들 뜻만 받아주는 것이 교육인가? 학교에서 무었을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이런 지당한 교사의 행동을 가지고 민원을 한 학생도 잘못이고, 그런 학생들을 보고도 외면하는 교사들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 아니라고 애들이야 어떻게 하든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건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다. 또 그런 걸 민원으로 받아주는 교육청도 문제가 있다. 민원이 들어 왔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그러는데, 받아줄 걸 받아 줘야지 요즘 학생들의 학교에서 생활 태도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이 태반이다. 체벌은 언감생심이다. 민원뿐만이 아니고 곧바로 112에 신고해버린다. 복도에 종이컵이나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누구 하나 줍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수업 시간에 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일은 다반사인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모른 척 해 버린다. 옛날 같으면 체육대회나 소풍 때 학생들이 선생님 드시라고 음료수 같은 걸 사오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오히려 선생님이 안 사주면 나쁜 사람 취급을 한다. 체육대회 때면 담임은 당연히 학급 전체 학생들에게 빵이나 음료수를 대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하고 인심 사나운 선생님으로 전락한다. 실로 교단의 황폐화라 하겠다. △ 수필가 겸 시인인 이남규 씨는 전주여고와 상산고 국어교사를 역임했다. 문집 <송사청담>과 시집<갈대의 노래> <백제가요>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3.04 18:27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옛날 사진들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확대경을 가지고 밝은 곳에서 비춰 보아야 겨우 분별할 수가 있다. 나의 유년 시절의 사진을 보면 운동회 날에 어머니가 달리기를 하는 사진이 있는데 한복에 다가 고무신을 신고 맨 뒤에서 뒤뚱뒤뚱 달리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왠지 목이 메게도 한다. 어렸을 적 이야기라서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어머니는 한복을 만들어 딸들에게 입히셨는지 묵은 사진첩에는 온통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내가 어머니와 떨어져 서울에서 학교 다닐 무렵 어머니는 한 달이면 어김없이 상경하시어 내가 지내는 모습도 보시고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곤 했는데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동대문 시장이었다. 장날처럼 사람이 많아 구경거리도 좋다는 이유였다.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는 동안은 강의가 끝나면 고장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어머니는 서울에 오시면 빠르면 사나흘, 때로는 일주일은 족히 계시다 가시곤 했다. 그 기간에 외출은 생각지도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보내야 했는데 나는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집으로 내려가시길 은근히 기다리곤 하였다. 그런 딸 마음도 모른 채 어머니는 미도파백화점에 구경을 가서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며 예쁜 옷을 사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옷을 입은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왜 나는 어머니의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이 터질 듯 아프기만 하다. 다음 날, 어머니와 창경원에 벚꽃 구경을 갔는데 일요일이라서 사람들이 붐볐고 날씨마저 몹시 무더웠다. 어머니는 갈증이 나셨는지 사이다 두 병을 사오라고 하셨다. 그 시절 나는 친구들과 생맥주를 자주 마셨던 터라 사이다 두 병 값이면 맥주 한 병 값하고 같으니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그러자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시던 어머니의 그 슬픈 눈빛을 잊지 않고 있다. 어머니가 내려가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고쟁이에서 꺼낸 돈을 쥐어주시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으라는 당부도 하신다. 섭섭한 생각은 잠시뿐, 나는 새장 속에서 튕겨 나온 새처럼 훨휠 날개를 폈다. 이런 철없는 생활은 내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계속 되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주는 눈치도 모르고 그저 보따리 속에 자식 먹일 것만 챙겨 오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집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언짢게 일어나면 언제나 자기 탓이라고 가슴을 쓸어안고 사셨던 우리 어머니. 내가 어머니가 되고 딸을 출가시키고 난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가슴이 보이는 너무도 철이 더디 든 딸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려고 멋도 부려 보았지만 나 또한 어머니를 닮 서인지 맵시도 나지 않아 아예 편하게 지내편이 익숙하다.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멋 좀 부리라며 핀잔이던 남편도 이젠 포기했는지 무덤덤하다. 새삼스레 어머니가 더욱더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멋도 부리고 예쁘게 하고 다녀라. 라고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가 우리 딸들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 박지연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 월간잡지 기자, 교사로 퇴직하여 우석대평생교육원에서 문예창작강의를 했다. 전북여류문학회장 역임. 풍남문학상, 전라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2.18 17:18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