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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품격

한성덕 근래에, 기독교를 개독교라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기독교를 폄훼하고 조롱하는 언어의 폭거다. 한편으로는 따끔한 질책인 성싶어 몸이 후들거리고,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점에서는 목사 된 게 부끄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참에 기독교를 정리하고, 개독교라는 말의 실체를 살펴보련다. 예수그리스도의 선교와 가르침, 그 분의 생애를 통해서 비롯된 종교가 기독교다. 개독교란? 개(Dog)와 기독교를 합성시켜서 부르는 비속어다. 기독교라는 명사를, 개 같은이라는 형용사와 조합하고, 그걸 다시 줄여서 개독교라 부른다. 결국은 개 같은 기독교라 비아냥거리며 욕을 하는 것이다. 최근, 교회의 불미스러운 사태나 모 단체대표의 막말은 치가 떨린다. 그래서 기독교가 상스러운 소리를 더 듣는다. 넌더리가 나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얼마든지 고운 말과 신사적인 매너로,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 힘 있게 말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막말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격한 분개심이 솟구치며, 욕이라도 해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지인들이 소리친다. 그러면서 어떻게 못하냐고, 한 목사와 급이 다르냐고, 진짜 목사가 맞느냐고, 설교는 어떻게 하느냐고 목사인 나를 공박한다. 나는 원래 작은 사람에 불과한데 어떤 말이 먹히겠는가? 나 역시 난감하고 답답할 뿐이다. 일반인들도 조심스럽게 여기고 꺼려하는 말을 한다면, 언어폭력이 아닐까? 그토록 격한 말이 소위 성직자 입에서 쏟아지니 말이다. 한 언론사의 돋을새김란에 수록된 글 일부를 소개한다. 국민들이 총격을 가해서 죽인다니까. 다른 나라 같으면 누가 저런 대통령을 살려주겠나? 문재인은 심장마비로 죽는다. 문재인의 목을 따야한다. 문재인 저0 쳐내면 가정, 직장, 교회의 앞날이 열린다. 문재인 저0을 끌어내려 주시옵소서. 문재인은 하나님이 폐기처분했다. 독일 히틀러를 교훈 삼아 빨갱이 국회의원들 다 쳐내버려야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온라인 뉴스부장, 2020. 1. 7일. 27면 oo일보)라고 했다. 저속한 언어는 품격이 떨어진다. 제아무리 너른 마음으로 백번을 양보한다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국민의 대표로, 국민이 뽑은, 국민의 어른을, 저토록 난도질 해도 되는 건가? 엄연한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그 나라님을 저잣거리에서조차 사라진 비속어(卑俗語)로 마구 해댄다. 말의 자유함은 끝도 밑도 없나보다. 참으로 해괴망측한 막된 말이다. 더욱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은, 사이비 교주에게서나 들을 법한 소리지 정통교단에서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세계인들 앞에서 망신 주는 처사요, 국격을 훼손하는 일이다. 물론, 잘 못하는 경우의 쓴 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때에도 예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보다 품격 있는 말로 하는 게 상식 아니겠는가? 아무튼, 새천년을 기대해 본다. 막된 말은 사라지고, 순화된 말에서 오는 감동과 품격 있는 언어로 단장돼, 칭찬과 격려가 풍성한 경자년을 말이다. * 한성덕 수필가는 은혜림교회 목사를 은퇴하고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신아문예대학에서 수강 중이며 신(信).망(望),애(愛)로 버무려진 성직자 수필집 <단, 하루만이라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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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3 15:41

유년시절은 청정제

임숙례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까지는 힘의 뿌리를 내릴 시기에 있다. 그 시기 중에서 근원의 힘이 되고 밑바탕이 되는 시기는 유년시절이 아닐까? 하얀 종이에 무지개를 그리고 꿈을 심던 유년시절은 세월을 살아가는 데 청정제 역할을 했다. 나는 요즘도 가끔 심신이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상실될 때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꿈을 꾸듯, 영화를 보듯 투영해보면 바닷물 위로 상승하는 고기비늘의 반짝임처럼, 무기력한 내 마음도 반짝이는 탄력이 생긴다. 그런 내 유년의 고향은 남해바닷물과 섬진강물이 만나는 하동군의 작은 포구 용포마을이다. 썰물이 지면 아이들은 바다호미를 들고 갱조개(재첩)와 백합을 캐러 모래 숨구멍을 찾으러 다녔다. 어둑한 새벽, 김을 다지는 통나무도마 소리에 추운 새벽이 열리던 곳. 쇠죽 아궁이에 솔가지가 활활 타오르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긴 부지깽이로 다독다독 눕혀가며 태우던 불꽃이 내 가슴속 온기로 퍼져가곤 했다. 그런 고향을 떠나 우리 가족은 여수로 이주를 했다. 처음에는 여수가 낯설어서 우리 형제는 방학만 하면 고향인 용포로 내달음질치기도 했다.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하동노량에 도착하여 다시 작은 기선을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야 용포 어구가 나타난다. 선창가를 돌아 논두렁길에 들어서면 큰어머니는 어느새 우리를 보고 이름을 번갈아 부르시며 달려 오셨다. 아이고 내 새끼들 오나. 큰어머니의 찌렁한 목소리는 고향 포구를 감아 돌았고 두 팔로 감싸 안은 가슴은 고향의 아랫묵처럼 포근하고 넓었다. 큰엄마! 우리 오는 줄 어찌 알았노? 하메 느그가 올랑가 싶어 늘 선창가를 안 쳐다 봤나. 먼 데서 봐도 그냥 알것데이. 하시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하셨다. 언젠가, 큰집에 갔었을 때 큰아버지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걷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면서 발가락이 벌겋게 부어 욱신거리더니 곪아버렸다. 읍내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약을 구할 수가 없자 큰어머니는 양잿물에 발을 담궈 부기를 가라앉힌 후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 내셨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큰어머니는 바쁘셨다. 가마솥에 올벼쌀을 쪄서 덕석에 말려 절구에 찧으시랴, 마당에 가마솥 뚜껑을 걸고 호박, 방앗잎 전 부치랴, 이것저것 만들어 싸 주시느라 등줄기의 땀이 적삼을 적셨다. 큰어머니의 눈물도 뒤로하고 여객선에 올라 빵빵한 가방을 풀어서 갓 찧은 쫄깃하고 달짝지근한 올벼쌀을 씹으며 여수항까지 왔다. 가까이 다가 왔다가 멀어지는 섬처럼 세월도 많이 흘렀다. 우리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시던 큰어머니, 큰아버지, 부모님, 모두 고향 용포마을 선산에 계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요즘은 디지털 시대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더니 고향도 참 많이 변했다. 바다호미를 들고 나가던 모래밭도 없어지고, 아스라이 꿈처럼 바라보던 섬들도 육지로 변해 코앞에 앉아 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엔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던 용포가 꿈틀거린다. 김을 떠 말리던 김 막도 온데간데없고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던 용포 어구도 사라졌다. 산을 깎아 바다를 채워서 바다도 저 멀리 밀려 났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어릴 적사랑은 여전히 내 삶의 힘이다. 세월의 나이테가 감겨 갈수록 큰어머니의 입속 온기가 엄지발가락을 타고 가슴을 활활 태운다. 솔가지 불꽃을 피우던 고향, 큰어머니의 따뜻한 온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싶다. * 임숙례는 <시와 산문> 수필. <소년문학>동시로 등단했으며, 제6회 녹색 수필상을 수상했다.산문집 <가끔씩 뒤돌아보며 산다>외 2권과 동시집 <꿈을 꾸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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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6 16:45

심중사(心中寺)의 겨울

정성수 입동이 지나자 심중사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사하 마을까지 들려온다. 경내 앞마당에는 버섯을 비롯해서 무청이 수북이 널려 있다. 스님들이 뚫어진 문풍지를 바르고 폭설에 대비해 눈을 치울 싸리비를 만든다. 텃밭에 심은 채소들이 다소곳이 겨울채비를 한다. 심중사의 겨울채비는 소욕지족小慾知足으로 절약과 알뜰한 살림살이다. 그중에서도 시간과 노력이 가장 많이 드는 게 땔감이다. 겨울 추위와 맞서야 하는 심중사는 난방이 걱정이다. 젊은 스님들은 인근 산 속 고사목을 모으는 일로 땔감 준비를 시작한다. 그렇게 모은 땔감은 지게나 몸짐으로 심중사로 옮긴다. 옮긴 나무들을 도끼로 패서 장작이 되면 돌담 옆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객승이나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보살 ? 거사들이 거처해야 할 방마다 불을 지펴야 하기 때문에 땔감을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심중사의 겨울은 먹거리 마련도 중요한 일이다. 김장을 할 때는 날자 선택에 신경을 쓴다. 기온이 올라간 날에 김장을 하면 금세 시어지거나 색이 변해 보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중사에는 소금이나 젓갈류를 과량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손발이 시리도록 추운 날을 택해 김장을 한다. 그 외에도 장류 준비 역시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다. 수십여 개의 장독에 담겨 있는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일일이 살핀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된장은 겨울 한 철을 이겨내는 보약이나 다름없어 각별하다. 겨울 반찬을 위해서 시래기를 엮어 처마 밑이나 담벼락에 걸어두고 상하지 않도록 바람을 치게 한다. 겨울 심중사는 특별한 반찬거리가 없기 때문에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하기 싫다거나 조금도 지겹지 않다고 큰스님 껄껄 웃으신다. 심중사 뒤꼍에 있는 샘이 얼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샘가에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거둬내고 물바가지가 깨지지는 안했는지 살핀다.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한 바가지 고이는 물의 양이지만 물이 고이는 시간만이라고 잡스런 생각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다. 심중사의 스님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사분율四分律의 춥고 눈이 많은 나라에서는 옷을 덧입는 것을 허락한다는 부처님의 말씀 따라 겨울철 누비 승복과 회색 털모자들을 꺼내 놓고 손질하는 일도 해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겨울 심중사의 백미는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다. 고즈넉하면서도 청아한 풍경소리는 잠들어가는 겨울을 깨운다. 댕그랑 댕그랑 울음을 가슴에 담으면 이름 모를 산새와 청솔가지를 덮은 눈이 심안心眼으로 다가온다. 심중사의 겨울은 산 짐승들에게도 시련의 계절이다. 눈이 온통 산을 덮으면 먹이를 찾아 멧돼지와 고라니 심지어 살쾡이까지 심중사 주위를 맴돈다. 그러나 한겨울은 스님들이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텃밭을 가꾸거나 잡초를 멜 일도 없고 모기와 싸울 일도 없어 동안거에 들어가 오로지 수행에만 집념할 수 있다. 눈 내리는 심중사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천상에서 날아 내리는 수많은 흰나비들이 심중사를 포근히 감싸주는 모습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넘쳐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마음속의 절 심중사는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목에 겨울이 되어 다소곳이 엎디어 있었다. * 정성수 시인은 40여 년 간 초등학교에서 40여년간 봉직하면서 시와 수필을 써왔다. 향촌문학회장을 맡고있으며 시집동시집시곡집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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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30 15:57

[금요수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김춘자 그때가 봄이었을까. 봄은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다시 움트는 철이기도 하지만 연약한 생명들이 꺾이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의 종잡을 수 없는 기온이 온몸의 순환을 흩트려 병고에 시달리던 노인이나 어린 생명들이 움츠렸다 피어날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때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어느 봄날 동생이 음식에 체(滯)해서 하얀 광목옷 하나 걸치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셨던지 없었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동생을 묻고 돌아온 어머니는 넋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팽나무 밑에 가서 내려놓더니 논두렁 아래 누렇게 뭉그러진 풀들을 우둑우둑 뜯어 불을 피웠다. 그리고 동생이 먹다만 약봉지와 몇 가지 물건 그리고 아픔들을 태우셨다. 니 동생이 영영 가는구나. 예쁜 내 손자가 참말로, 아주 떠나는구나. 강 건너 골짜기로 사라져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치마폭이 젖도록 얼굴을 부비며 흐느껴 우셨다. 엄마는 강 건너 앞산에 어린 것의 주검은 묻고 왔지만 그 동생을 내내 가슴에 묻고 살았다. 나는 다 크도록 동생이 묻혀있는 그 산이 무서웠다. 하지만 엄마는 자주자주 앞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가거나 그 자식이 보고플 때면 앞산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내 동생이 죽어 새가 되었다고 했다. 가끔 새 한 마리가 마당에 와 놀고 있으면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울음을 참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확독에 보리쌀을 갈다가도 마당가의 새를 향해 보리 몇 알을 던져 주곤 했다. 새가 울타리 너머로 날아가면 그때서야 토방에 털썩 주저앉아 길게 숨을 뱉으며 눈가를 훔쳤다. 나도 덩달아 옆에서 아가, 가지마라. 동생아, 내일 또 와.하며 새가 날아 갈까봐 숨을 죽이곤 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떠난 뒤 내리 딸만 넷을 낳았으니 얼마나 가슴을 후볐을까.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다가 아들 둘을 더 낳고 난 뒤에야 말씀하셨다. 네가 터 판 그놈이 살았으면 장정이 다 되었겄지야? 그 말이 하도 간절하여 응.이라는 짧은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너도 생각 나냐? 니 동생? 그 말에도 응.이라는 말 밖에는 더 못 했다. 나와 세 살 터울이었는데 이름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을 지금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생각해본다. 행여 어머니의 아픔이 도질까봐 이름도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지내온 긴 세월, 잊은 적이 더 많았지만 내내 잊지 못하고 살았던 내 동생. 어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앞산 아장사리로 간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동생을 기억하는 할머니도 작은아버지도 세상을 뜨셨고 아버지는 아기가 가는 걸 보지 못하셨으니 그 아이 마지막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와 나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그 아이가 살았더라면 벌써 60이 지났을 텐데, 오늘 따라 뜬금없이 어머니 살아계실 때 그 아이 이야기를 살짝 꺼내보고 싶다. 몹시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엔 소중한 인연과 그리움들을 속속들이 쟁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모습, 음성, 몸짓, 추억, 시간들이 그리움이 된다. 그 그리움은 때때로 찾아와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되새기게도 한다. 슬픔도 삭아 그리움이 되고 미움도 잦아 그리움이 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들 삶의 아름다움이다. * 김춘자는 임실 운암 출신으로 전북문협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전북문학상과 사임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 《꿈꾸는 달항아리》외 2권과 《겨울을 날다》 등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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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6 17:05

[금요수필] 야외 수업하는 날

박동희 오늘은 수필반 야외 수업을 하는 날이다. 반복적이던 교실을 벗어나면 왠지 자유스럽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함께 한다. 등굣길 아침 찬 갈바람이 뺨을 스친다. 오늘 수업장소인 국립무형유산원이 눈 가까이 들어온다. 전주천이 빛바랜 억새와 함께 어느덧 가을이 문턱을 넘는다. 억새꽃 뒤 가로수도 갈 빛으로 옷을 훌훌 벗어버릴 채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 온다는 신호다. 우리 고장 전주에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소속 국립무형유산원이 있다는 것은 큰 자랑이다. 2013년에 건립을 했으며 무형 문화유산의 보존전승연구조사기록 관리 보급 및 진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곳으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건물에 깜짝 놀랐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방대한 면적에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조성된 조경도 훌륭한 도심 속 공원으로 익어가는 가을 카메라 앵글을 어디에 대봐도 한 폭의 그림이다. 벌써 싸늘해진 바람에 등이 구부정해져가는 노령학생들의 어깨 폭을 좁힌다. 어디 훈훈한 곳이라도 없나? 기웃거리다가 사랑채 북 카페에서 따스한 커피 한 잔에 움츠려진 허리를 편다. 학창 시절에나 더러 찾았던 도서관 분위기에서 마셔보는 차 한 잔의 여유와 낭만도 오랜만이다. 유산원의 사랑채에서 수업이 시작됐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소재로 한 시, 수필 강의가 만학의 수강생들 혼을 앗아갔다. 수업을 마치고 찾은 남양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도 천변의 물소리와 함께 무르익으며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초등학교시절 일찍 수업을 마친 학생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전주 천 따라 귀가를 하니 바람에 하늘거리는 하얀 억새들이 가을의 마지막 손짓이 애련하다. 하얀 백로가 사뿐사뿐 거닐다가 물고기를 낚아채려 주시하는 맑은 시냇물도, 자전거 타고 잽싸게 달리는 사람, 묵묵히 홀로 걷는 사람, 핸드폰을 들고 셀프로 멋지게 포즈를 취해보는 관광객인가? 전주천 가을 모습도 다양하다. 전주 천 너머 목가적인 한옥마을도 스산한 가을을 타나? 혹시 관광객이 줄어 조용타 못해 쓸쓸해 외로운가? 호기심은 징검다리를 건넌다. 한옥마을 입구 천변 둑이다. 한때 설렁했던 전주 천변 둑 위의 도로가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거리가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야외 공연장에선 인형극에 간간히 어린이들의 웃음소리도 쏟아지고, 길 따라 한벽문화관과 완판본 문화관, 향교 문화관, 강암 서예관등 각종 문화관도 즐비하다. 그간 참 많이 변했다. 한옥마을의 랜드마크가 된 남천교 위 청연루와 연결된 은행로에 들어서자, 어릴 적 골목길의 당산 나무처럼 여겼던 꽤 오래된 은행나무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전화도 별로 없고 카페 같은 곳도 없었던 시절 젊은 연인들이나 학생들이 만남의 장소로 즐겨 찾았던 은행나무다. 어느새 발길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한옥마을로 귀가 길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전주의 명물이 된 한옥마을 거리가 볼 때마다 새롭게 변신한다. 주말엔 발 디딜 틈도 없었던 거리가 주중이라서 일까? 간간히 한복을 입은 사람들 빼고는 오늘따라 한산한 것 같다. 고즈넉한 한옥이 밀집한 차분한 거리라기보다 지붕만 기와를 얹은 거리에 생소한 이름의 먹거리 좌판이 깔린 상가가 즐비하다. 간혹 개량 한복 입은 단체 외국 관광객들이 군데군데서 서성인다. 인생도 하교 길, 이미 녹음되어 지워지지는 않는 인생테이프이지만 다시 새롭게 녹음하며 신선함과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짐짓 흘러간 청춘의 아쉽고 애틋한 숲을 거꾸로 걸어 보고 싶다. 만학의 즐거움에 마냥 빙긋이 미소 짓는 하루였다. * 박동희 씨는 정읍제일고 등 중등교장을 역임했다. 여행과 사진을 취미삼아 하고 있으며 전북교육문화관 에서 시, 수필을 공부하는 만학도로 건전하고 활기찬 여생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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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9 16:15

[금요수필] 금년 한해는 정말 후회 없이 살자 -

안도 우리고장 출신 송대관의 <새 출발>이라는 노래다. <새 출발이야, 저 하늘도 손뼉 치며 나를 축복할거야. 운명아 비켜라. 내가 지나간다. 힘들고 지친 몸 붙잡지 마라.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서럽고 괴로운 지난 날 가슴에 묻고 뛰고 또 뛴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오늘을 놓치면 나는 낙오자, 희망을 잃지 않고 달려 가면은 저 하늘도 손뼉 치며 나를 축복할거야> 우리는 해마다 희망과 기대 가운데 새해를 맞이한다. 새해를 맞아들이는 길들이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연말연시 즈음이면 누구나 다 마음을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한 번 흘러가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깨달음과 그 시간 안에서 촌음을 아끼고 시행착오를 줄여 진선미의 삶을 살려는 마음 스스로의 울림인 듯하다. 새로운 결심으로 새해를 시작하며 꼭 지녔으면 하는 마음은 곧 새 마음이다.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에서 새해아침에 찬물로 세수 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그때가 언제인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고 했다. 새해를 맞이하며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늘 새 마음, 첫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조선조 정조 임금 때 항상 실학을 강조했던 성재(性齋) 허전이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집에 歳時來拜人 歳時來拜人 半是鬍眉皓 不知己年高 還驚少年老라는 5언 절구를 남겼다. 해석을 하면 새해에 세배하러 찾아오는 사람/ 절반은 수염 허연 사람들이네/ 내 나이 많아짐을 알지 못하고/ 소년들 늙었음에 도리어 놀라네. 라는 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해를 어떻게 맞이했을까? 어렸을 때는 세뱃돈이 생겨서 좋았고, 새 옷이 하나 더 생겨서 좋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어 좋았다. 또 무언가 새로운 듯 한 분위기 속에서 막연히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만 같았고, 거창한 신년 계획을 세워 놓고 계획표만으로도 한 뼘 더 성장한 듯 의기양양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달력의 빨간 날이 되었고, 그저 어제의 다음날이 되지 않았나싶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로 본 우리는 위의 시에서처럼 나이를 먹었다. 위의 시는 노시인이 새해를 맞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평이하며 아주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새해에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점점 줄고, 찾아와 인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게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찾아오는 이들 중 머리와 수염이 하얀 사람이 절반이나 된다고 하였다. 평소 자신의 나이를 크게 인식하지 못하다가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보고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시인은 깜짝 놀라고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새해지만, 결코 누구나 똑같지는 않다.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 어떤 이에게는 그냥 휴일이, 어떤 이에게는 서글픔이 될 지도 모른다. 새로움은 언제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우리의 짧은 삶이지만 잘 살면 한 번으로도 족한 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잘'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새로 맞은 한 해를 잘 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다짐은 줄이고, 행동을 늘리는 한 해를 살자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다시 이렇게 다짐을 한다. 금년 한해는 정말 후회 없이 살자. * 안도 시인은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문학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전라북도 국어진흥위원회 위원장과 전북교육문화회관 시. 수필 전담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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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2 17:40

[금요수필] 반성하며 사는 삶

정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그땐 왜 그랬을까? 그게 뭐 대단한 것이라고. 남보다 먼저 가면 어떻고 뒤에 가면 무엇이 돋보이고 달랐을까? 괜한 욕심을 부리며 왜 그렇게 뛰어 다녔을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항상 바쁘게 살며 왜 그렇게 답답해했을까? 지난날을 생각해보면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냥 끄집어 내놓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래도 늘 가까이에서 내 마음을 잡아준 든든한 친구들, 목소리만 들어도 따뜻했던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그들과 만나면 언제라도 다정히 손잡고 강변을 걷고 싶고, 허름한 목로주점을 차아서 밤이 새도록 실컷 술 한 잔 마시고 싶다.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주에 가면 아잔타(ajanta)라고 하는 석굴이 있다. 이 석굴은 산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굴이다. 석굴은 시원하여 더운 여름에도 기거하기 편리하고, 조용히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수양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석굴의 용도는 승려들이 기거하고 공양할 때 사용하는 발우와 승려의 법의를 넣어두기 위해 만들었다. 그래서 석굴을 파고 들어갈 때 필요한 것은 도구뿐이었다. 다만 석굴은 인력으로 바위를 파서 들어가면 넙적한 사원이 있고 파면 팔수록 더 깊어만 갔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다. 삶이 깊어감에 따라 나의 새로운 모습을 거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외부에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들의 마음을 가로 막고 있는 거친 바위가 존재한다면 이를 제거하고 다듬으면 그곳에 내가 있다. 멕시코 만류에는 혼자서 조그만 돛단배로 고기를 잡으며 사는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85일째 되던 날 먼 바다에서 청새치 한 마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그의 조각배보다 크고 힘센 청새치를 잡기 위해 3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상어의 공격을 받아 노인은 결국 뼈만 남은 고기를 가지고 소년이 기다리는 항구로 돌아온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이야기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을 얻지 못했더라도 노인이 보여준 도전과 사투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고 아름답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여러 조건이 있어야겠지만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를 이기는 묵직한 극기 때문에 이 소설을 애독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에서 가난하고 끈질긴 집념이 가슴을 뜨겁게 억누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참되게 살기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수와 실패를 밥 먹듯 반복한다할지라도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 가던 길을 묵묵히 걷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는 길이다. 기득권과 가진 자에게 짓눌린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가던 길을 묵묵히 가다보면 비로소 참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만일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다하더라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때는 만족하지 못하여 나를 아프게도 한다. 하지만 산티아고 노인은 매일이 새로운 날이고 그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운을 잡기 위해서는 늘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와 잘못된 삶을 씻어 내고 새로운 참모습을 보이며 반성하는 자세로 새로운 날을 살고 싶다. * 정곤 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하여 작촌예술문학상을 수상했다. 덕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펜 전북지부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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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6 16:43

[금요수필] 숲길의 무인 판매대

박광안 마음이 어수선 할 때면 나는 어수선한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뒷동산을 오른다. 숲길을 따라 가다보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에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복숭아꽃이 활짝 웃으며 반기는 봄에는 따스한 봄볕에 희망의 속삭임을 들으며 걷는데 오늘은 벌써 복숭아 수확이 한창이다. 오송제를 한 바퀴 돌다 보면 길가 언덕 밑으로 20여 평쯤 되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철따라 여러 농작물이 재배되는 것을 보면 만물상을 보는 듯하다. 어찌나 알뜰하고 탐스럽게 가꾸는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재배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는 얼마쯤인지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보고 싶은 얼굴이다. 농작물 재배뿐만 아니라 PET병으로 여러 모양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세워 오가는 사람들의 눈요기도 해준다. 병해충들을 막기 위해 터널을 만들고,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비닐도 씌우는 손재주도 대단하다. 농작물들은 땀 흘려 일한 보람으로 심은 대로 보기 좋게 잘 자라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새삼 음미해 본다. 몸은 피곤할지라도 성취감을 느낄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진다. 오늘은 탐스런 애호박과 가지, 풋고추 등이 밭 길가에 진열되어 있었다. 써 붙인 가격표를 보고 판매되는 무인판매점이다. 수확한 농작물들을 시장에 내다 팔기에는 양이 적고 혼자 먹기는 조금 많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것이었다. 돈 벌자는 것이 아니며 취미생활인 것이다. 그런데 돈은 보이지 않았다. 양심적으로 돈을 놓고 물건을 가져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물건만 가져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곳을 지나면서 물건이 하나도 팔리지 않았는지, 돈만 가져갔는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것이 바로 선진 일등국민으로 가는 교육현장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견물생심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냥 가져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젓한 산길에 농작물을 내놓은 주인은 서로 믿으며 사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가끔 농촌에서 일 년 동안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들을 차를 대놓고 가져갔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몹시 한탄스러웠다. 어려운 농촌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1년을 어떻게 살라고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국토는 아주 좁은데 아직도 인구가 많다. 그러나 이 농작물 주인같이 국토를 활용한다면 아직도 많은 땅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농촌을 보면 젊은 사람이 없어 어린이들도 볼 수 없고 적막함마저 들게 한다. 다행히 요즈음 귀농 귀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전 교육이 부족하여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포기를 해 성공하는 사람은 적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새로운 영농기술을 개발하여 과학적이고 현대화 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례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는 도전으로 사과와인을 개발하여 연간 20억 원 이상의 매출을 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성공으로 가는 열쇠가 된 것이었다. 뜨거운 7월의 햇볕으로 무성한 소나무들이 반기는 숲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궁리해 보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일들이 조화를 이루어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월을 끌고 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나는 농작물이 아닌 어린 새싹들의 푸른 꿈이 피어나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며 반세기를 보냈다. 가끔 제자들을 만나면 나를 만났던 제자들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얼굴로 떠오를까?를 생각해 본다. * 박광안 수필가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했으며 인간과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아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덕진문학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연못가 새 노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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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9 17:35

[금요수필] 눈 내리던 날

황복숙 아버지! 아버지를 떠 올릴 때마다 나는 함박눈 펑펑 내리던 날이 생각난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내린 하얀 눈길을 혼자 걸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여 마음이 아프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메말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에 녹은 그리움은 빛바랜 사진이 되고, 가슴속 아픔도 저절로 굳은살이 되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언 3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친정동네 성황당을 지나노라면 아려오는 옛 생각에 눈물이 난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가 떠나간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한 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헤어짐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아서였다. 어릴 때 기억으로 아버지는 무서운 호랑이셨다. 집이 쩡쩡 울리도록 불호령이 떨어지면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개고 무릎을 꿇고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었다.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면 누구하나 말대꾸 하는 법이 없이 그대로 했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항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아버지, 그래서 내 유년은 무섭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던 추운 겨울로 남아있다. 어느 해 여름 이었다. 도둑질을 하다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아저씨가 아버지 없는 날만 알고 찾아와 안방까지 신을 신은 채 들어와 물건을 부수며 괴롭히고 협박을 했다. 내가 왜 2년이나 감옥살이를 혔는디?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으면 우리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이 아저씨는 동네의 닭, 개, 곡식을 훔쳐가고 폭행을 일삼으며 특히 혼자 사는 과부들을 괴롭혀 수없이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왔단다. 그래서 수차례 타이르고 경고를 했지만 덩치가 크고 인상이 무섭게 생겨 바라보기만 해도 사지가 떨렸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붙잡아 경찰서에 끌고 가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살고 출소했다. 그 뒤부터 거의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와 협박과 갈취를 일삼았다. 여름이라 마루에서 식사를 하는 우리에게 밥 맛있냐? 하며 밥상에 흙을 뿌리고 나뭇가지로 얼굴을 훑어대면 어머니와 우리 5남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소리도 못하고 행패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다. 주변의 누구도 무서워서 나서지 못했다. 때로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를 보면 태도가 돌변하여 내가 형님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지라고 핑계를 대다가 슬슬 사라졌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쯤 종적을 감추었는데 다시 찾아오면 어쩌지? 길에서 만나면 어쩌지? 하고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가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매일 술 마시고 폭력을 일삼다가 술독에 빠져 이름 모를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렀다. 지금도 아중호수 산책길을 걸을 때 아중산장 있는 마을 산 밑에 살았다는 무서운 그 아저씨가 왜 생각이 나는 걸까?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내리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출근을 하셨다. 텅 빈 새벽거리에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에 아버지 발자국만 쭉 이어졌다.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깨의 무거운 무게를 보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셨고, 흔들림 없이 살고자 했던 엄격함 뒤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사랑을,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걸어가던 눈길을 생각하면 사박사박 내리던 눈길을 혼자 걷던 그 뒷모습은 두고두고 내게 뜨거움과 연민을 준다. * 황복숙은 성심여고 시절부터 꾸준히 수필을 써왔으며 온글문학 회원이다. 현재전북교육문화회관 시 수필반 총무를 맡고 있으며 수필가의 꿈을 안고 습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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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2 17:52

[금요수필] 실고추

최상섭 우리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다. 맛있는 음식은 어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는 말도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자랑거리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교육목표는 결국 올바른 인간형성에 있다. 전통 가정에서 교육목표는 입신행도(立身行道, 훌륭한 사람이 되어 바른 길을 행함)라고 보았으며, 현대 가정에서의 교육목표는 자아실현(自我實現, 자기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충실하게 발전시켜 완벽하게 이루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 가정교육 중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의 음식요리 전통을 으뜸으로 여겼다. 특별히 전주음식이 유명한 것도 이런 가정교육의 전통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음식을 맛있게 잘 요리하는 것은 그 여성의 품격을 나타내는 지름길이다. 요즈음처럼 식도락을 즐기는 세상에 음식문화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국가에서도 기간산업으로 장려하여 김치가 세계인의 밥상에 올라 한국의 음식문화가 세계적임은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돈만 벌면 된다는 중국산 김치며 일본산 기무치가 세계인의 밥상에 오르는 게 현실이다. 새삼 김치가 뛰어난 발효음식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욕망 중에서 다섯 가지의 욕망을 오욕(五慾)이라 한다. 그 오욕(五慾)이라 함은 첫째가 식욕이요, 둘째는 성욕이며, 셋째가 물욕이다. 넷째는 수면욕이고, 다섯째는 명예욕이다. 그중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근원적 욕심이라 하여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욕망으로 여겼다.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 살고, 자손을 낳아야 후대를 이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아프리카에서 뛰어노는 동물들을 보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먹이를 구하는 일과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동물들과 달리 지식과 문화를 창출하여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 중에서 음식문화는 우리생활의 중요한 한 영역이 되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여성들은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어 그릇에 담고 그 위에 꼭 실고추를 뿌려 두었다. 이는 시각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음식 조리과정의 마지막 수단이다. 실고추는 붉은 고추를 잘 드는 갈로 실처럼 가늘게 썬 것을 말한다. 조리된 음식 위에 참깨와 몇 가닥 실고추를 뿌리면 훨씬 조화롭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요즈음 참깨와 검정깨를 혼합하여 뿌리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요리에서 실고추가 사라진지 오래다. 인스턴트 문화가 범람하는 세태가 가져다 준 영향이 아닐까 싶다. 반찬의 직접적인 맛 보다는 품격과 멋을 내는 일종의 소품이었던 빨간 실고추는 어머니가 밥상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을 때까지는 존재했다. 도마 위에 놓인 빨간 태양초를 부엌칼로 정성스럽게 실만한 두께로 썰어서 찌개나 반찬 위에 살짝 뿌려놓아야 음식이든 요리든 완성품이 되었던 것이다. 실고추를 많이 뿌리는 것은 멋도 맛도 아니다. 음식의 중심 부분에 빨간 실고추 서너 줄 뿌리면 시각적 효과에서부터 식감을 불러 오기에 충분하다. 어머니가 도마 위에서 써는 실고추에서 우리 전통음식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 시절 음식이 더 먹고 싶은 심정은 무엇 때문일까? * 최상섭은 수필가이자 시인이다. 김제 출생으로 한국시와 에세이스트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등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까치는 징검다리에 수(繡)를 놓고〉 등 7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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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5 17:17

[금요수필] 연말의 단상(斷想)

곽창선 기해년 출발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캐롤송을 들으니 마음이 바빠진다. 책상머리 카렌다도 이제 달랑 한 장 남았다. 다사다난했던 이제 며칠이 지나면 2019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 되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한해의 시작이 씨앗이었다면 한해의 마지막은 결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자연의 순리겠지만 인생이란 대개 그 반대다. 한해의 시작은 마냥 부푼 마음으로 오색찬란한 꿈과 소망 속에 멋진 미래를 설계해 보지만 정작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대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의 벽에 부딪혀 낙담하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거려 년 초에 세웠던 다짐들을 더듬어 보았다. 틈틈이 빛바랜 추억들을 정리하며 주기적으로 체력도 기르고 싶은 작은 소망들 이었다. 실패한 경험이 떠올라 두려웠지만 꾸준히 일기도 써가며, 걷고 뛰며 다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차츰 익숙해지며 평소 사물을 쉽게만 보아 오던 습관이, 조금은 깊이 숙고하는 버릇이 생겨, 내 자신의 철학과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행적을 엮어 보려는 욕심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노력한 보람으로 등단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건강도 한결 좋아 졌다. 그동안 써온 한편 한 편의 글들은, 미숙하지만 겪어 온 사연들을 압축한 내 속 마음들이다. 따라서 평정심 잃지 않고 쓴 생활 속의 이야기들이 독자의 마음에 바로 전달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글 속에서 잉태한 사연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다면 하는 기대도 품어 보았다. 어찌 보면 나에 내면은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 찬, 속물에 불과 한지도 모른다. 인간은 서로 개성과 사고가 다르기에 조금은 고개 숙일 줄 아는 아량에서 인간적 캐미 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반성도 해본다. 조금 무른 듯 양보하며 살지 하는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는가? 후회스럽다. 눈물과 슬픔이 있고 미움이 있는 게 세상이다. 또한 웃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기려 말고 세상사와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 삶을 즐기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아직 우리에게 웃을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고행이라지만, 서로 어우렁더우렁 뒤엉켜지면 인간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물위에 떠 있는 나뭇잎에서, 해탈의 지혜도 배우고, 산길에 누군가 달아 놓은 길안내 리본과, 등대가 반짝여 주는 의미도 삭여 가며, 노후의 삶을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써 나 온 글들을 반추 해보니 횡설 수설 늘어놓기에 급급했지만, 모처럼 결실을 맺은 소중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써 나온 결과지만, 나에게는 값진 기록이기에 뿌듯하다.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겠다는 각오가 남다른 이유다. 나만이 옳다는 가치가 더 이상 진실이 아니고 반대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독선적 주장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세계를 섭렵할 수 있는 혜안을 품어도 보며 경자 신년을 맞이하고 싶다. 새해를 맞으면 매년 그랬듯이 무의미하게 보낸 지난해의 못 다한 마음을 새롭게 다짐을 한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에게 신선함과 기대감을 안겨 준다. 2020년에는 둥근 해가 떠오를 때마다 희망이 샘솟고 행복의 꽃이 곱게 곱게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 곽창선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을 역임했으며 <표현 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현재 표현문학회, 신아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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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8 17:19

[금요수필] 금평저수지 수변로

정석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결혼식은 거의 휴일에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목요일에 결혼을 했었다. 그런데 결혼식 날과 요일이 몇 년마다 일치하는지는 모르지만, 올해는 마침 목요일이다. 그래서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망설이다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란 고사성어가 생각나서 오늘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물을 택했다. 정오가 넘어서야 금평저수지로 향했다. 가다가 중간에 맛집 청원골을 들러 검은콩과 검은깨로 만든 수제비를 겸상으로 받으니 오붓했던 옛 추억이 새롭다. 평소 저수지 곁을 차로 몇 번 지나가며 둘러보았으나 그냥 금산사 아래 저수지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에야 TV 뉴스에서 금평저수지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이 김제시에서 시민을 비롯한 탐방객들의 여가문화와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정한 수변(水邊) 산책로라는 것도 알았다. 저수지에 도착하자마자 수변산책로에 새롭게 눈길이 멈춰졌다. 탐방객은 적었으나 그래도 가족, 친구, 연인, 신혼부터 나이 지긋한 부부 들이 저수지 수변산책로를 걷는 모습들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길섶에는 민들레가 즐비하게 피어 있었다. 노란, 하얀 꽃들이 오므라들고 꽃대는 둥그런 은빛 털모자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모자의 털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강소천의 동요 종소리에 나온 가사처럼 꽃씨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멀리 흩날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바람 따라 결혼 45돌을 맞은 우리의 삶을 표현한 것 같아 보고 또 보았다. 목재 데크 수변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연분홍 웃음을 띤 꽃 잔디가 돌 축대 틈 예서제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웃 개나리도 활짝 웃었다. 철쭉도 잎을 단 빨간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었다. 줄서있는 벚나무는 바람에 꽃비를 실어 맞은 편 버드나무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꽃비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하염없이 축복을 내려주었다. 산자락 산책길에 들어서니 노란 갈대가 물 가운데서 인사를 했다. 키와 몸집이 큰 나무들이 물에 담긴 채 연녹색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쭉쭉 자란 산죽들도 두 손을 흔들었다. 모진 세월을 지내온 소나무 숲 사이 산책길은 햇볕도 머물러 있어 장관이라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숨어 결혼기념 축하 노래를 불러준 것 같아 더 신이 났다. 조금 경사진 계단을 올라가 멈췄다 내려가니 저수지의 둑과 취수문(取水門)이 나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저수지는 신평마을을 바라보며 긴 둑을 자랑하고 있었다. 둑에는 튼튼한 난간을 만들어서 누구나 마음 놓고 산책하며 사방에 펼쳐진 정경을 감상하기 좋은 관람석이었다. 봄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파란 물결은 저수지라기보다는 호수라 불러야 할 성싶었다. 멀리 연녹색으로 뒤덮인 크고 작은 산은 하얀 벚꽃으로 수를 놓고 있었다. 마치 하얀 양떼들이 산 능선으로 흩어져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수변산책로를 갈 때 우리는 우측 산자락 쉼터까지만 다녀오려 했다. 그러나 젊은 부부가 싱글벙글하며 오는 모습을 보고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았다. 결혼기념일의 세월이 많이도 쌓였다. 그럴수록 매사에 거기까지만 하자.고 선을 긋는 것도 많아진다. 저수지 수변산책로를 일주한 것도 그랬다. 사계절 각기 다른 모습으로 찾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금평저수지, 그 근교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력에 흠뻑 젖곤 한다. 낭만과 추억을 선물하고 꽃과 향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금평저수지 그곳에 하나의 꽃으로 머물다 가면 어떨까. *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하여 <대한문학>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교원문학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외 1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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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1 17:43

[금요수필] 꽃잎에 데다

이정숙 허겁지겁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주춤거리다 작년에 매실을 딴 뒤 시커멓게 기미처럼 티끌이 생겨서요. 사위질빵 꽃잎이 특효가 있다 해서 붙였더니 이렇게. 자초지종 장황설을 듣더니 그 꽃이 뭔데 팔에 붙여 화상을 입어요. 알 만한 사람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느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측은하게 상처를 바라본다. 그 뒤에도 상처를 보고 묻는 사람마다 똑같은 설명을 해야 하는 일이 곤혹스러워 나중에는 그냥 데었어요. 하고 대답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꽃으로 인하여 나는 생뚱맞게 폭염에 생고생 중이다. 작년 가을 K시인으로부터 기미나 검버섯 빼는 데는 사위질빵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들은 데서부터 소동이 연유한다. 봄이 되자 집 옆 건지산을 오 가며 사위질빵이 있는 두 곳을 알아냈다. 대지마을을 지나 오송지 쪽으로 동산처럼 쌓아 놓은 거름더미에 환삼덩쿨과 얼키설키?뒤엉켜 있고, 또 한 곳은 단풍산 진입로에 탱자나무 우듬지까지 타고 올라 바람에 그네를 타는 듯 머리를 늘어뜨리며 넌출져 있다. 어느 쪽이 먼저 피든 아무 데서나 빨리 꽃잎을 따려고 내내 눈독을 들였다. 7월 초순이 되자 하얀 성냥골 같은 꽃술을 보이더니 중순경에 이르자 이내 꽃망울을 터트렸다. 잎겨드랑이에서 나오는 취산꽃차례로 옅은 상앗빛 꽃이 무리 지어 핀다. 이때다 싶어 꽃이 피자마자 댓바람에 한 움큼 따왔다. 그리고 양념용 절구통에 넣고 쾅쾅 찧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듯 팔의 꺼뭇한 자리에 두둑하게 얹어 비닐로 야무지게 덮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묶었다. 처음부터 화끈거렸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싸두어야 한다기에 참고 버텼다. 그런데 풀어보니 꽃을 얹은 곳은 물론 물기가 번진 곳 10센티가량이 뜨거운 물에 덴 듯 발갛게 달아오른 게 아닌가. 임시방편으로 찬물에 담그고 바셀린거즈를 붙여보았지만, 통증은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보니 상처 부위가 퉁퉁 붓고 수포가 생기기 시작한다. 주사, 연고 등 할 수 있는 처방은 총동원했지만 물집은 성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가뭄에 땅 갈라지듯 수포의 면적이 넓어지고 있는데 의사는 감염의 우려가 있으니 터트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촛불에 바늘을 소독하고 마술사처럼 콧김을 쐬어 넓은 부위 몇 개를 터트렸다. 수포가 터진 자리에 진물이 계속 흐른다. 그러면서 피부가 밀리어 속살이 드러나고 통증에 가려움증까지 겹치니 신경이 곤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꽃들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간밤에 내린 비로 더욱 생기를 발하며 곳곳에서 키득댔다. 그러고 보니 탱자가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 영역을 확보한 사위질빵 녀석의 악착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꽃이란 생김보다 그 마음씨가 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던가. 사위질빵 꽃은 모양새나 색깔이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시골 아낙처럼 소박하다. 은근히 정이 가고 측은지심마저 드는 꽃이다. 그런데 겉보기와는 달리 무서운 독기를 품고 있다니? 순하게 생긴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된통 당한 느낌이다. 얕은 앎을 가지고 함부로 행동했다가 볼썽사나운 흉터에, 쭈글쭈글한 주름에, 거무튀튀한 곰팡이까지 핀 훈장을 팔에 새겼다. 괜스레 이르집어서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이고 만 격이다. 여름내내 피부과를 서너 군데나 전전했다. 고생 실컷 하고 옷 몇 벌 값을 날려버렸다. 찬찬하지 못하고 덤벙대며 사는 나를 다시 한 번 본다. * 이정숙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전북펜 부회장, 수필과비평작가회 회장을 역임 했으며 온글문학상과 작촌예술상 한글날 도지사 공로상을 수상했고 꽃잎에 데다 등 수필집 다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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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4 17:39

[금요수필] 거리의 유감

이광정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아파트 단지의 복잡한 네거리에 나와서 아이들 교통 지도를 하는 여자 교장 선생님이 계신다. 교통 지도뿐만 아니라, 손들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품에 꼭 안아 주고, 손잡고 한쪽 길로 잘 인도해 준다.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어깨띠를 매고 호루라기를 손에 든 그분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도 그 교장 선생님 맞은편에서 가끔 교통 지도를 하고 있었지만 교장이라는 권위를 버린 인격의 최상의 가치인 겸손한 태도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바빠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달리는 차들이 많다. 그런데 그 여교장 선생님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반드시 양쪽을 보고 차들이 완전히 정지한 다음에 건너도록 지도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준다. 어린이들은 아직도 조심성이 부족함으로 지켜 서서 잘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송이 꽃도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피고 지는 것처럼 우리의 교통 문화도 꼭 질서를 지켜야 한다. 아울러 교통질서 뿐만 길거리 공중도덕도 중요하다, 차창 밖으로 담배꽁초도 버리면 안 된다. 정말 보기 싫다. 혹시라도 외국 관광객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제발 부끄러움을 아는 상식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즈음은 일기예보에서 미세먼지 까지도 예보가 된다. 온갖 굴뚝과 자동차가 내뱉는 가스와 자동차가 달릴 때 타이어가 마모되어 흩어지는 해로운 분진 때문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 독약은 사람의 생명을 바로 앗아 가지만 미세 먼지는 서서히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에 미리서 예방을 해야 한다. 앞으로 공기가 더 심하게 오염된다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길거리에는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나 오염의 원인이 되는 유해 물질들이 많다. 피티병이 그렇고 일회용 컵 또는 담배꽁초 플라스틱 용기 등이 많이 버려진다. 이런 속에서 유해 폐기물을 준는 노인들을 보면서 치솟는 연민으로 발걸음이 무겁다. 편히 쉬어야 할 노인들이 얼마나 살기가 힘들면 국가와 사회와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폐기물을 주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길거리 문화와 오염 방지의 주범인 폐품들을 주우면서 복지 사회의 실현일꾼으로 이바지 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노란 조끼를 입고 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서 교통 지도를 했다. 그저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도 주번 교사가 되면 어깨띠를 두르고 교문 밖에 나가서 아이들 교통 지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어 행복하고 더 젊어진 것 같다. 길가에 무심히 떨어진 은행잎을 보면서 가을 시인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노인들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데, 친절과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노인들에게 일자리도 찾아주고 마치 부모님처럼 섬기고 챙겨주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이 전주 효자 시니어 클럽이다. 그 많은 사람에게 가끔 음식도 대접해주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넣은 선물 봉다리도 나누어 주기까지 한다. 이처럼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서 항상 수고하시는 관장님과 직원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전주 금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기 마련이지만 늙어가는 사람만큼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살아가기 보다는 좀 더 계획하고 준비하기에 따라서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수 있다, * 이광정 씨는 초등학교 교사 재직시절인 1980년대 <전북문학>을 통해 수필 활동을 했다. 현재 전주 효자시니어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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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7 17:41

별 향기 - 박동수

박동수 수필가 법성포 갯벌에 저녁노을이 황홀하게 내려앉는다. 조금 전까지 갯벌은 저녁노을로 황홀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데 밀물이 밀려들어 파란 바닷물로 덮이고 밤이 시작된다. 밤이 시작되면서 별들이 밤하늘에서 선명하게 빛난다. 저 별 중 하나는 분명 마라난타의 별일 것이다. 성인이 불법을 전한 곳이라고 해서 법성포(法聖浦)라 부르는데 법성포 밤하늘에 마라난타의 별이 빛나지 않을 리 없다. 소년 마라난타는 별을 좋아했다. 밤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별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늘 그것이 아쉬웠다. 마라난타는 사라진 별들을 항상 찾아 나서고 싶었다. 마라난타는 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브라만 계급으로 태어나 모든 것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자랐다. 차별받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천민 계급이 노예로 팔려가고 차별을 심하게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출가를 한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별을 찾아 나선 것이다. 부처님 불법을 배워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출가한 마라난타는 불법을 열심히 터득한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중생의 번뇌를 도멸(道滅)해 주고, 깊은 경륜을 쌓고, 학식과 덕행을 쌓아 존자가 된다. 마라난타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별을 보며 사색했고, 별을 보며 깨달았다. 산사에 머물 때는 온갖 자연의 소리와 염불 소리까지 다 빨아들이는 별을 보며 깊은 밤 사색에 젖었고, 고비사막을 건널 때는 적막하기까지 한 사막에서 에메랄드빛 하늘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경외에 젖어 숨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 경외의 순간 인간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잊어버릴 것이다. 별은 우리에게 한없는 마음의 정화를 가져다준다. 마라난타는 별이 되고 싶었다. 별이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에 별을 심어주어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라난타는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별을 심어주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 백제 침류왕 원년 동진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넌다. 몇 날을 풍랑에 시달리면서 항해를 계속한다. 그는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며 길을 잃지 않는다.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별-신형주). 마라난타는 별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다. 그랬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다. 마라난타는 부처님 닮은 별이 되어서 불경과 아미타불 불상을 가지고 거친 바다를 무사히 건너 법성포에 닿는다. 법성포는 그래서 백제불교의 최초의 도래지가 된다. 백제불교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곳이 법성포다. 마라난타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아미타불이 머무는 서방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정토 신앙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모두가 대승 보살이 되도록 모든 사람의 가슴에 별을 심어 주었다. 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모든 마음의 찌꺼기가 다 사라지는 것 같다. 나는 오늘 마라난타가 들어온 법성포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한없는 마음의 정화를 느낀다. 법성포에 마라난타의 별 향기가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박동수 수필가는 전주대 부총장과 전북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수염을 깎지 않아서 좋은 날> 등 6권의 수필집을 냈다. 전북문화상 등을 수상 했으며, 한국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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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31 15:18

[금요수필] 호박꽃은 아름답다

김학철 예로부터 얼굴이 예쁘지 않거나 뚱뚱한 체격의 여인을 일컬어 흔히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비아냥댔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당사자들은 매우 서운해 했고 성깔 있는 여자들은 버럭 화를 냈다. 여인만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고 만약 호박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결국 호박꽃은 예쁘지 않아 꽃 축에도 못 낀다는 말이다. 나 역시 호박꽃은 어딘가 모르게 천박스럽게 여겨왔다. 그런데 그동안의 이런 고정관념을 일순간 바꿔놓는 계기가 있었다. 1년 전 어느 갤러리에서 유명화가의 <꽃>을 소재로 한 개인전을 관람한 일이 있었다. 호박꽃, 가지 꽃, 참외 꽃, 도라지꽃, 들국화꽃 등 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을 그린 6호~10호정도의 비교적 작은 작품들이었다. 평소 하찮은 것으로만 여겨왔던 꽃들을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예전엔 미처 몰랐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며 어느 한 작품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이 있었다. 잎사귀와 줄기, 그리고 활짝 만개한 꽃, 피어나려는 꽃, 이미 만개했다가 지려고 축 늘어진 꽃잎 등이 어우러진 호박꽃 그림이었다. 한참 보고 있노라니 새빨간 장미가 화장을 짙게 한 서양여인상이라면, 호박꽃은 마치 노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온아우미(溫雅優美)한 기품(氣品)이 서린 전형적인 한국여인상이었다. 호박꽃이 이처럼 예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보면 볼수록 내 마음을 사로잡는 이것이 예술의 힘이려니 싶었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호박하면 생각나는 것이 많다. 해마다 4월초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잘 숙성된 퇴비를 넣고 흙을 덮은 뒤 씨앗 또는 모종을 심는다. 그러면 초여름부터 애호박이 열린다. 겉이 녹색의 윤기가 잘잘 흐르며 촉촉하고도 예쁘장한 애호박은 내가 가장 즐겨 찾는 채소류의 하나다. 애호박을 썰어 넣고 뚝배기에서 팔팔 끓는 토종된장찌개는 생각만으로도 구미가 당긴다. 애호박나물무침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여름이 되면 연한 호박잎을 쪄서 강된장과 함께 쌈을 싸먹는데 이때 보리밥과 함께 먹으면 단연 여름철 별미다. 여름철 보양식이 따로 없다. 추석 때는 애호박을 썰어 전을 부치기도 한다. 늦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 연한 호박잎과 까칠까칠한 껍질을 벗겨낸 줄기, 그리고 호박순 끝부분과 엄지손가락만하거나 조금 더 큰 애호박을 으깨어 된장국을 끓이면 맛이 그만이다. 애호박을 썰어 말린 호박고지로 만든 정월보름날 아침의 나물무침은 취, 고사리와 더불어 우리 고유의 반찬이 아니던가! 어디 이것뿐이랴. 늙은 호박은 눈이라도 오는 겨울날, 호박죽 또는 호박떡을 만들어 먹으면 간식으로는 최고다. 호박엿과 호박 차를 만드는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호박의 주성분은 당질이지만 카로틴의 형태로 들어있는 풍부한 비타민, 칼슘, 철분, 인 등 미네랄이 균형 있게 들어있고, 특히 감기저항력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성분, 위장강화 등으로 회복기에 있는 환자나 산후부기를 빼는데도 좋다. 전국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호박밭이다. 밭 가장자리나 울타리, 담장, 언덕배기 등 장소나 토질을 가리지 않는 덕성도 지녔다. 6월초부터 여기저기서 웃음을 짓는 노란 호박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호박꽃은 더 이상 미운 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니 이젠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은 빈말이라도 삼가야 할 일이다. △수필가 김학철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이사영호남수필문학회, 한국미술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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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4 16:52

[금요수필] 사촌 누나

송일섭 사촌 누나는 살림이 녹록치 못하여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날 살던 집을 돌아보던 누나는 눈이 붉어지도록 엉엉 울었다. 마당 앞 빨랫줄에서 참새들도 따라 울었지만 대문 밖에서는 누구 하나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유난히도 포근한 봄날 누나가 서울로 떠나는 길에는 어린 동생이 동구 밖까지 배웅하였다. 누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고향에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작정 낯선 서울로 떠나는 누나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려있었다. 서러운 길이었다. 아버지는 동경유학까지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려운 가정을 꾸리던 어머니마저도 일찍 돌아가시자 고아 가장이 된 것이다. 유일한 남동생을 친척 집에 맡겨두고 작별하는 길이니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나의 표정은 달궈진 용광로의 무쇠보다 강렬했다. 아직 철부지인 어린 동생은 누나를 어떻게 위로할 줄을 몰랐다. 심포에서 하루에 고작 한두 번 왕래하는 버스에 몸들 싣고 홀로 김제역으로 갔다. 이것이 누나와 마지막이다. 누나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고립무원의 서울로 떠났다.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웠을까? 서울에 도착하여 얼마나 길을 헤매었을까? 밥은 제대로 먹었을까? 그러나 떠나는 누나를 보고 누구 하나 붙잡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서울로 떠난 누나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전화도 귀한 시절이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간호장교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그 소식을 듣고는 예쁘장한 얼굴에 영리한 누나가 장교복을 입고 서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기어코 성공했구나!하고 뛸 듯이 기뻤다. 그동안 서울 생활의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지만 누나의 굳은 의지로 보아 간호장교 생활도 충실히 하였을 것이다. 누나는 장교 시절 약대를 졸업한 군인과 만나 몇 년의 열애 끝에 혼인하는 데 성공을 했다. 결혼식은 친척에게 알리지 않아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청년 매형은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결혼 후 서울에서 약국을 개업했다. 당시 약국이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날로 번창했다. 그러자 누나는 장교를 그만두고 약국에서 함께 일을 하며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누나의 유일한 남동생이 물어물어 매형을 찾았는데 그때 누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였단다. 이후 또 다시 오랫동안 소식이 두절 되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누나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누나는 그렇게도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떠날 때 다시 오지 않겠다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 후 동생은 조카를 보고 싶어 찾았으나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매형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게다. 동생도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서울로 떠났다. 산꼭대기 허름한 방에서 살며 기술을 익혀 모진 고난을 극복하고 돈을 모았다. 지금은 강남에 터를 잡고 남부럽지 않게 잘살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제 수십 년이 흘러 조카들도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조카에게 어머니의 불행했던 과거를 상기시켜주지 않으려고 한 번도 찾지 않았단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누나의 유일한 피붙이를 그리기만 하는 심정, 이것이 드라마일까? 나에게는 사촌이지만 누나의 과거를 찾아 그가 살던 옛집을 찾으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송일섭 씨는 전주평화초등학교에서 퇴직했다.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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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7 17:40

지켜보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 추인환

추인환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나이든 사람들을 가리켜 꼰대라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가 그렇다. 바꾸자고 해도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속내가 뻔 한 데도 이들은 그 속내를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본인들의 속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함인가? 국가를 위함인가? 국민을 위함인가? 아니면 정당을 위함인가? 아리송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개국 이래 모순된 정치권력과 제도에 대하여 많은 민초들이 피와 땀을 흘려 민주화를 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방식에 있어 민초들이 했던 민주화를 정부가 한다고 나서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정권에서 그저 공염불에 끝난 일들이 많다. 그 공염불을 실현하고자 현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그저 민초들은 고마운 일이다. 무엇이든 정부가 민초들을 위해 바꾸자고 한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 동안 못해본 일을 해보자는 것이다. 입법, 행정, 사법, 교육 등과 부동산, 통일 정책 등 현 정부가 출범해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는 지켜봐야 한다. 현 정부가 단행하는 것들 모두 잘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다수가 뽑아놓은 국민의 대표가 국민을 위해 그 뜻을 다하려 한다면 지켜봐야 한다. 지금 정부는 최선을 다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결과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춧가루를 뿌려가면서 훼방을 놓는다면 나중에 훼방꾼들이 책임을 짓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결과도 나오지 않은 과정 중에서 훼방꾼들 때문에 아무 일 못했다고 한다면 그 들은 무엇이라 답을 할 것인가? 그 피해는 오로지 민초들의 몫이다. 실컷 훼방 해놓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말고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무슨 노림수를 던져 놓고 문제가 꼬이면 아니면 말고라며 고개를 더 쳐든다. 좀 비열하다. 한번 지켜봐야 한다. 우리는 일단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고 그 다음에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과정들을 많이 지켜보지 않았는가? 차분히 지켜보면서 현 정부의 의지가 우리에게 어떤 삶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켜 주는지 봐야 한다. 요즘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많다. 그 동안 과거의 집권당들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일했는지? 나는 현 정부에 대하여 기대하고 싶다. 그리고 기다리고 싶다. 우리의 염원인 통일에 한 발자국 더 가는 것과 모든 권력과 제도가 새롭게 조금이라도 민초들을 위해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우리의 후손과 그들을 위해 만들어 가자는데 동의하고 싶다. 우리는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주장을 악용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는 지켜보고 그리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는 내가 신중을 기해 선택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나의 상황이 바뀌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국가나 사회의 지도자들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그들의 선택을 부화뇌동하지 말고 잘 지켜보고 판단하자는 말이다. * 추인환은 <개불알풀꽃>과 <섬> 2권의 시집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고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현재 전주 한옥마을에서 숙박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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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0 15:15

[금요수필] 나의 골동품

구연식 나는 대학시절 고학생이었다. 하숙집 주인댁 자녀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가끔 주는 용돈은 금 쪽같이 아끼며 모았다. 아무리 모아도 학비는 턱없고 겨우 교재 사는데 조금 보탤 정도의 병아리 눈물만 한 돈이었다. 이렇게 적은 돈이었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사용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고향 집에 갈 때 아버지의 담배를 사다 드리는 일이다. 봉초 담배만 피우시다가 궐련을 받고 웃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기쁨과 뿌듯함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가 있으랴. 한번은 집에 갔다가 집에 시계가 없던 탓으로 기차를 놓쳐 낭패 본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대략 배꼽시계로 때를 맞췄다. 그래서 차라도 한번 타려면 너무 일찍 서둘러 오기 때문에 아주 오래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의 황사나 미세먼지보다 더 독한 길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시면서 오던 어느 날 익산역 부근에 있는 시계포를 지나다가 괘종시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동안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꽤 오래 모은 용돈으로 그 시계를 사다가 부모님께 안방에 선물로 걸어드렸다. 그간 눈에 띄게 줄거나 건너뛰기 일쑤인 담배 선물에 아닌척하면서도 많이 서운하셨던 아버지가 우리도 부자가 되었다며 아주 좋아하셨다. 그런데 괘종시계는 한 달에 두세 번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 그 시계 밥 주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어쩌다 밥 주는 때를 놓치면 시계는 허기져서 추의 진자 움직임을 멈췄다. 아버지는 시계 밥줄 때가 넘었다 싶으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하시던 농사일도 멈추고 집으로 달렸다. 그렇게 밥을 얻어먹은 시계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났다. 그동안 괘종시계는 죽다 살기를 반복하면서 나 대신 안방에서 50년 이상 부모님을 모시고 담배 연기와 된장찌개 냄새에 찌들며 세월을 보냈다. 어느 때는 텅 빈 집을 혼자서, 어느 때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 추위에 떨면서도 집과 부모님을 지켰던 효자(?)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시골집은 비어 있어 어쩌다 한 번씩 가서 부모님이 생전에 쓰시던 작은 농기구나 가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쓰시던 살림 도구들은 나의 콧날을 시큰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중에 몇 가지는 아파트로 옮겨 놓고 가끔 먼지를 닦아주며 부모님 생각에 한참동안 멍청하게 앉아있기도 하며 애지중지 관리한다. 괘종시계는 대학 시절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는 나의 다짐이며 초심이었다. 부모님께는 멀리 객지에서 공부 중인 큰아들 대신 지키는 초병이며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계가 시골집 안방에서 내 아파트 거실로 옮겨졌다. 신기하게도 시계는 지금도 잘 움직인다. 몇 백 년 세월 값을 하며 보관 가치가 큰 유물만 골동품은 아니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와 역사성이 있고 나름의 상징성이 깃들어있는 물건이 더 귀한 골동품이 아닐까. 나는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때가 묻은 물건을 잘 관리하고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집에 올 때마다 은근히 세뇌 시킨다. 율아. 네가 다 커서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 것 모두 너 줄 거야. 이 괘종시계도 네 것이니까 잘 보존해야 해. 그 덕인지 괘종시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밥도 제가 준다며 아직 다 풀어지지도 않은 태엽을 감아준다. 저 괘종시계가 나의 골동품이 아니라 손자의 골동품으로, 손자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보존됐으면 좋겠다. 먼 훗날 진품명품 프로에 밥만 주면 살아서 열심히 움직이는 괘종시계가 출품되는 꿈을 꿔본다. * 구연식은 무궁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교육자로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했으며 현재 신아문예와 전북수필문학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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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3 16:43

[금요수필] 곁을 주지 않는 독도

윤철 북위 37도 14분 22초, 동경 131도 52분 08초.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섬, 삼국시대부터 우리 땅이었던 독도는 그곳에 있다. 마침내 독도가 눈에 보이더니 점점 또렷이 다가왔다. 출발할 때부터 흐렸던 날씨가 기어코 비를 뿌렸다. 다행이 세찬 비는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바람은 갈수록 심해졌다. 뱃길이 얼마나 험한지 매끄러운 물길이 아니라 돌 튀는 소리가 요란한 자갈길이었다. 평소 같으면 울릉도에서 한 시간 반의 뱃길을 무려 세 시간에 걸쳐왔다. 승객 여러 명이 바닥에 드러누워 멀미를 하고 있었다. 구토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도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일행 중 K는 계단 벽에 기대앉아 만사가 귀찮은 모습으로 연신 식은땀만 훔쳐내고 있었다. 나는 다음에야 어찌 됐건 멀미는 피하고 보자는 마음으로 멀미약을 두 병이나 마신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배 멀미를 하지 않았다. 선장이 선내 방송을 했다. 최대한 접안을 해보겠지만 만약 안 되면 독도 주변만 한 바퀴 돌 아 오는 관광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떻게 온 길인데. 이렇게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접안을 시도 중인지 배가 좌우로 더 심하게 흔들렸다. 독도는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하늘을 찌르던 기대는 실망에서 포기로 이어질 무렵 선장이 접안을 했다 다시 안내방송을 했다. 독도는 187,554㎡ 면적에 불과한 작은 돌섬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런데 왜 일본은 이렇게 작은 섬에 집착할까? 독도는 해양 자원과 미래의 해저 자원이 풍부한 보물창고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심나서 1905년에 시마네현 고시로 대나무 한그루 없는 돌섬에 다께시마竹島라는 이름을 붙여서 자기네 국토에 편입시켰다. 처음엔 해저 자원에 대한 욕심뿐이었겠지만 이제는 군국주의 식민통치시대의 야욕을 재현해보고 싶어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있다. 나는 국정농단사태 때 가을부터 겨우내 벌였던 촛불집회에 어깨가 아프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이번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일본산 불매운동에는 모든 것을 작파하고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서 잠시 돌아보니 정연한 논리도 없이 단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큰소리만 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래서 무조건 독도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참여한 것이다. 드디어 독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독도가 막상 눈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두 팔을 벌리고 품을 열어주니 가슴이 쿵쿵거리며 콧날이 찡해졌다. 온몸이 고압 전류가 흐르듯 짜르르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바다까지 잿빛 하늘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인 탓인지 하늘도, 바다도, 섬도 모두 재색이다. 저물녘의 독도는 잿빛이라서 더 독도다웠다. 독도는 아무에게나 곁을 주지 않는 위엄이 있다. 우리 국민이라도 독도를 사랑하고 아끼며 지키려는 사람에게만 품을 내어준다. 하물며 독도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이용만 하려는 욕심쟁이 일본인에게 곁을 내주겠는가. 일본사람은 여권 없어서 올 수 없는 곳에 나는 달랑 배표 한 장 들고 얼마든지 올 수 있으니 독도는 우리가 실제 지배하고 있는 우리 땅이 분명하다. 비에 젖은 독도에서 따스한 입김이 피어오른다. 독도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독도에 뿌려진 의용수비대의 뜨거운 피가 골마다 스며들어 아직도 식지 않고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땅을 한 치라도 내어주기 보다는 차라리 죽자.고 죽음으로 사수한 그들의 절규가 오늘도 살아서 심장을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오는 길은 뱃길도 편안했다. * 윤철 수필가는 김제 출생으로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수필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현재 수필가로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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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2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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