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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느림의 미덕

  어느 순간 '속도'는 이 시대의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버렸다. 속도, 그 중에서도 '빠름'만을 신봉하는 현대사회는 '1초라도 빨리'를 외쳐대며 사람들을 몰아간다. 현기증 나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에 여유를 갖고 천천히 생각하는 사람은 자칫 게으른 사람으로 생각되기 쉽다. 이 시대의 유일한 미덕은 '빠름'이며, 따라서 '느림'은 곧 악덕이다.

  비록 한국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인의 빠름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것,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듯 빠른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모습, 앞지르고 끼어들고 차선을 바꾸지 못해 안달하는 운전자들, 5초를 기다리지 못해 '닫힘' 버튼을 눌러대는 엘리베이터 안의 풍경...'빠름'의 가치에 지배당하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빨리빨리'는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한국이 지난 수십년 간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짓눌러온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남보다 빨리 가야하고, 행여 머뭇거리다 남보다 늦어지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기묘한 압박감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어쨌든, 빠름에 대한 한국인의 신앙은 결국 빠른 성장을 이룩했으며, 빨리 성장하고 싶은 나라들의 모범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우리는 빠른 성장에 우쭐해 했으며, '빠름'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빠름의 가치만을 신봉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생각과 생활에서 '느림'을 몰아내면서 무엇을 잃었을까? 조기완공을 자축하던 건물들이 힘없이 무너지고, 역사에 남을만한 '빠른성장'은 그것이 과연 '성장'이었는가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뒤돌아보며 생각해보는 여유를 잃고 있다. 느림의 미덕을 잃고 있는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느림은 게으름도 무능력도 아니다. 시간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느림은 그저 '조롱'받아야 할 악덕이 아니라 일상이 뒤죽박죽 되지 않도록 하는 지혜이며 능력이다.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능력, 서두르는 사람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비록 느리더라도 차분히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후회하지 않을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느림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느림, 느긋함 그리고 여유가 무조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속한 처방이 요구되는 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처럼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해야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빨리 해야할 것과 천천히 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빨리빨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의 앞엔 빨리 풀어야 할 과제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빨리 풀지 않으면 위기가 올 것이라는 우려가 우리의 조바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빨리빨리'에만 집착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똑같은 문제에 다시 부닥쳐야 할 지도 모른다.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중요한 문제라면, 오히려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서두르면 안된다.

  빠름보다는 오히려 느림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 조급함을 누르고,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서 차분하게 풀어나가려는 마음가짐,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할 '느림의 미덕'이다.

 

 

/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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