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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클린턴과 한국정치

 

 

 

클린턴은 1978년 32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미국 아칸소주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지난 40년간의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주지사라는 기록도 남겼다.

 

 

재선에 실패한 후 다시 도전하여 다섯 번째 주지사임기를 마친 클린턴은 1992년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침체에 빠진 미국경제를 되살린 업적으로 무난히 재선을 한 후 2000년 퇴임하였다.

 

 

만약 클린턴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그와같은 눈부신 정치적성공을 거두었을까? 워낙 정치적집념이 강하고 정치적네트워크연결에 탁월한 클린턴인지라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풍토에 적응하려고 접근방식을 180도 달리 하였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좌절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클린턴의 정치적 성공은 미국의 예비선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겨우 18살의 촉망받는 젊은이로 바깥 세상에 뛰어들었던 클린턴은 9년이 지난 27살에 고향 아칸소주에 돌아왔다. 조지타운대학, 옥스퍼드대학, 예일대학등에서 학업을 마친 그가 1973년 가을 아칸소주 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클린턴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4명이 경쟁에 나선 민주당하원의원 예비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쉽게 압승하켰다. 압승의 이유는 클린턴의 조직관리 능력과 정열이 다른 후보자들의 지역적 기반을 능가한 데 있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공하당 출신 하원의원인 햄머슈미트가 1966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후 한번도 민주당으로부터 도전다운 도전을 받지 않은 만큼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어 민주당에서는 강력한 입지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예상밖의 선전을 하여 강적 햄머슈미트에 맞서 2퍼센트의 차이까지 따라잡았다. 그 결과는 햄머슈미터에 대한 그때까지 민주당의 도전중 최고성적이었고 클린턴은 아칸소 민주당의 가장 촉망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후 승승장구한 클린턴은 1976년 민주당 검찰총장예비선거에서 압승하고 공화당이 후보를 내지 않아 쉽게 검찰총장에 당선되었고 2년후인 1978년에는 민주당주지사 예비선거와 주지사 본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하였다.

 

 

그러나 정당이 1인지배체제하에 있고 지역주의투표행태가 횡행하는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은 이야기이다. 자질이 뛰어난 정치신인이라 하더라도 공청권을 장악한 총재나 그 대리인과 선이 닿지 않은 한 당의 공천을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천상 천하 1인인 공천권자와의 줄이 혈연이나 지연, 학연 아니면 막대한 공천헌금일턴데 성실함과 진지함이 유일한 연줄인 정치신인들에게는 애당초 가능성이 없는 얘기다. 그렇다고 불의한 정치현실을 바꾸겠다고 무소속으로 출마해다가는 지역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풍차에 돌진하는 돈기호테 취급받기 쉽상이다.

 

 

다행히 집권여당이 올해 대선후보선거는 국민경선제라는 사실상의 예비선거제를 도입하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종 공직후보자는 당원대회에서 선출하겠다는 결정을 하였다.

 

 

선거때마다 당을 바꾸고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던 정당이라 액면 그대로 믿어지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국에서도 클린턴같은 정치인이 나올 수 풍토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 진봉헌 (전주지방변호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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