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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그럴지라도 내 형제 내 이웃인 것을…

 

-북한 탐방기-  

아직 북한과 미수교 상태이라 중국에서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행 비행기에 오르니 만감이 교차됐다.  

이튿날 북경을 떠나 1시간 30분만에 평양 순안 비행장에 도착하니 규모며 간단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85년 북경과 너무 비슷했고 시내에 들어오는 편도 2차선 도로며 차량통행이 뜸한 것 조차 매우 비슷했다. 

우리 일행은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창광 거리에 있는 고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첫 일정이 8일 10시 평양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봉수교회(`88건립)에서 예배를 보는 일이었다. 200석이 거의 다 찼으나 난방이 되지 않아 추웠다(날씨 영하 14℃). 

생필품-전력난 심해

예배 후 그 유명한 옥류관(일시에 만 명 식사 가능)에서 냉면을 먹었는데 정말 일품이었다. 평양은 메밀이 많이 생산되어 메밀 물냉면이 유명하고 함흥은 감자가 많이 나 감자가루가 들어간 회냉면이 유명하다고 하며, 모든 생활에서 정량적 사고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기본은 200g, 추가시 100g 단위였으며 300g은 고기가 들어간다. 

오후에는 굿네이버스가 젖염소 200마리를 지원한 강동군 구빈리에 들려 젖산균을 배양하여 요구르트를 생산하는 과정과 저장고를 확인하였다. 귀한 손님이 왔다고 대접하는 군고구마, 군밤, 대추 등은 우리의 전통 종자가 북한에 남아 있음을 확인케 하였다. 

청년 영웅 고속 도로(청소년들이 등짐으로 건설한 도로라 하여 붙여진 이름)를 타고 남포에 도착하였다. 남포에는 3층 아동병원이 12월 준공 예정으로 추진되어 왔으나 자재 운반에 어려움이 있어 이제야 괭이와 삽 등으로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린이 변기와 심지어는 도배지까지 남한에서 보내주어 다 도착되어 있었다. 

북한에는 14개소 애육원(고아원)에 5000명이 보호 되고 있는데 요즈음은 4000여명으로 줄었다고 하였다. 집 짓는 동안 200명의 아이들이 우선 다른 곳에 보호되고 있다고 하였으나 만나지는 못하였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 제 2 인민병원(700베드)을 방문 아동병원을 시찰하였는데 날씨가 영하 14℃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 역시 난방이 되지 않고 있었으며, 1959년 건립한 병원이라 지붕을 슬레이트로 교체해 준 상태였고 어린이 병원 창문을 알루미늄 샷시에 유리까지 끼워줘 방한에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민간 컨소시엄으로 내시경 검사기를 비롯 필수 장비들을 굿네이버스(한국)에서 지원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정성 제약을 방문하였는데 지금 북한에 약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절감하였다. 

교육시설로는 김성주(김일성 주석의 아명) 소학교를 방문하였는데 1948년 건립하였고 1956년부터 지대 명을 따라 대동문 인민학교 였으나 1997년부터는 소학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평양의 교통 수단은 지하철, 전차, 연결버스(2대가 연결된), 2층 버스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교통 체증이란 용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한산하고 교통 신호등은 있으나 전력을 아껴 쓰기 위하여 가동하지 않아 전부 수신호였다. 

도시간 이동은 버스로 하겠지만 보다 자주 보이는 것은 트럭에 가득 타고 오가는 모습이었다. 또한 저녁이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지 않을 정도로 전력난이 심각한 것 같았다. 주일이면 모든 교통 수단이 중단되고 특수 차량만 움직인다고 하였다. 

물론 엄연히 통치 철학이 다른 외국에 간 것인데 왜 외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일까? 

대북지원 계속되길 바라며

우리는 흔히 미국 문제나 북한 문제에 있어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반미냐? 우호냐? 북한을 돕자! 돕지 말자!’ 등. 그러나 사안에 따라 풀어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국가간의 문제는 정부에서 정책을 정하겠지만 최소한 인도주의적 지원은 민간 차원에서라도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코소보라든지 아프가니스탄 등의 난민은 거처와 기구와 옷과 마실 물에 이르기까지 그 지원이 엄청난 것이지만 북한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그들 난민에 비하면 십분의 일 정도의 비용이면 족하다는 어느 전문가의 말을 기억해 내면서 그래도 내 형제, 내 이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85년 당시 북경이나 아프리카에 갔을 때 ‘한 끼 밥을 실컷 먹어 봤으면, 신발 한 번 신어 봤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란 말을 듣고 내 것이라도 낭비 하는 것은 인류 앞에 죄짓는 것이란 생각에 음식도 남기지 않으려 애쓰고 검소하게 살아 보리라 하고 노력해 왔지만 어느새 아스라히 잊고 살았던 것을 이번 출장 길의 충격으로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김명숙(전북여성발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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