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에 성산포에 갔었어, 형. 초행이었지. 성산포는 있는 그대로, 조금 과장하면 하나의 장엄한 ‘문화’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신이 빚어낸. 관광객 하나가 나한테 담뱃불을 빌려가면서 묻더만. 어디서 왔냐고. 자기는 서울에서 왔다면서. 전주라고 그랬더니 담배 한 모금 기분좋게 뿜어대고는 또 한마디 덧붙이는 거야. 아, 전주비빔밥. 거, 콩나물 해장국 맛도 그만입디다. 그 사람이 좀 만만해 보였으면 한 마디 하고 싶었어. 내 기분은 하나도 그만 아닌디요?
사실 말이지, 시내 어느 술자리든 젓가락 숟가락 장단에 판소리 단가 한 대목씩 불쑥불쑥, 구성지게스리 불러제껴서 좌중의 흥을 돋울 줄 아는 사람들, 어느 도시 가서 만날 수 있겠어? 해장국 맛 그만이더라던 그 사람, 아마 콩나물국밥집 어딜 가든 멋들어지게 쓰고 그린 시서화(詩書畵) 몇 점씩은 벽에 다 걸려 있다는 걸, 고속도로 톨게이트 천장에 기왓장 얹고 그 자체가 예술작품인 현판 새겨서 도시를 알리는 데가 전주 말고는 없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야. 그게 안 보였겠지.
그런데 그 사람만 탓할 일은 아니더라고. 가만 생각해 보니까 책임은 우리 모두한테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일상처럼 자동화돼서 그런지, 아니면 살기 바빠서 그런지 대부분의 우리 지역 사람들, 그런 데 별로 관심 없는 게 사실이잖아. 오죽하면 전통문화중심도시를 추진한다면서 예쁘장하게 생긴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은 댄스 가수들까지 초청해다가 홍보대사로 위촉했겠어.
형. 얼마 전에 우리 한벽루 근처 수퍼마켓에서 ‘가맥’ 마셨던 거 생각나? 그날 형은 서울 출장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어, 마누라한테 알릴 시간도 없이. 언론사 문화부 기자들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그랬어. 형의 차 뒷자리에는 소리축제 홍보물이 가득 실려 있대. 아마 모르는 사람이 들여다봤으면, 영락없이 인쇄소 직원 차인 줄 알았을 걸? 하긴 아무려면 어떻겠어.
한동안 형은 연극에다 밥 말아 먹고 사는 사람 같았어, 내가 보기에는. 자나깨나 그저 연극이었지.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그에 걸맞는 성과도 거두었고. 그러다가 어느날 보니까 소리판 만드는 데 가 있대? 하긴 둘 다 무대예술이니 기획하고 연출하는 건 한 줄기라 딱이겠구나 싶더라고. 더 딱인 이유를 말해줄까? 형은 이름까지도 병창(竝唱)이잖아. 가야금, 거문고 무릎에 눕혀놓고 뜯기만 하면 산조, 노래도 함께 부르면 그게 바로 형 이름 병창 아니우.
이번 전주세계소리축제는 9월 27일에 개막한다고 들었어. 전주시 전통문화중심도시 추진사업하고도 맞물려서 어느 때보다 그 중요성이 더할 것으로 생각돼. 개막일이 다가올수록 형은 밤잠을 설치고 있는 줄 알지만 나는 왠지, 우리 동네 말로 ‘겁도 안 나게’ 성공적인 대회가 될 것으로 확신해. 왜냐하면 형이 하는 일이고, 그 동안 머리칼 헤성헤성해지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왔잖아.
지난 여름에 우리 학과에서 고등학생들하고 문학캠프라는 걸 했었어. 캠프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전주역 앞을 지나는데 경남 진주에서 온 고3 여학생 하나가 역사(驛舍) 기와지붕을 가리키면서 그러대. “전주는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다르다 아니가.” 문학소녀의 눈에는 그게 보였나 봐. 바로 그거잖아. 그게 우리 색깔이잖아. 그걸 형이 만들어가고 있는 거야, 지금.
곧 죽어도 맛과 멋의 고장이라고, 우리 스스로들 말해 왔어. 자부심도 있었고. 그런데 이제라도 순서를 바꿔야 할 것 같아. ‘맛과 멋’이 아니라 ‘멋과 맛’으로 말이지. 그렇게 하면 성산포에서 만났던 그 사람 눈에도 우리 동네 멋이 보일지도 모르잖아. 우리 자신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번 소리축제 끝나면 그간 제법 헤성헤성해진 형 머리칼 안주삼아서 막걸리 한 잔 하기로 해. ‘그까이꺼’, 내가 쏠게.
/송준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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