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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봄, 그리고 '보릿고개' 지나온 사람들 - 신흥수

신흥수(재경 남원향우회장)

며칠 전, 십대의 젊은이들과 나이든 어른들의 언어가 다른 점에 착안한 모방송국의 오락프로그램을 보았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십대 청소년이 ‘보릿고개’라는 말을 모른다던 내용이었다. ‘보릿고개’란 보리 수확이 이루어지는 4월에서 5월 초봄까지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던 옛 사람들의 삶을 표현한 말로, 흔히 춘궁기라는 말로 불린다. 그런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단어에 대한 뜻을 모르는 십대들 때문이 아니었다. 보릿고개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람과 그것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단순한 세대차이가 아닌, 시대적 삶의 차이라는 것을 실감하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 고향의 봄은 참으로 처절했다. 아마 6?25 전쟁 이전이나 그 무렵 태생이라면 1970년대 산업부흥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보릿고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봄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황량하기 그지없던 산에 들어가 나무껍질을 벗겨 와 끓여 먹거나, 이름모를 뿌리들을 캐다 먹기도 하였다. 저녁 때가 되어서 남의 집 아궁이 굴뚝에서 연기가 돋는 것만 보아도 부럽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의, 음식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로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웠던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모친께서도 보릿고개가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들 배를 곯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무엇으로든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비록 당신께서는 허기져 더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있었지만. 그야말로 봄은 배고픔이 시작되는 지옥과 함께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배고픔을 왜 ‘고개’로 표현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그것은 고개를 넘는 것처럼 너무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한 고개 넘고 나면 다시 봄이 오듯, 인생이 그처럼 다시 좋아지리라는 희망 같은 것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비록 절대적인 배고픔 앞에서 당치도 않는 것이었다고 해도,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것이라고 하는 희망은 분명 수많은 좌절을 극복해온 우리 민족의 정신의 밑바탕이었다고 필자는 자신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경제가 발달한 지금, 우리 주변에는 배를 곯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예전 보릿고개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이다. 보릿고개가 절대빈곤이 그 원인이었다면, 요즘은 그 원인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한다. 한쪽에서는 사회의 방치 속에서 밥을 굶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밥을 굶는다. 어떤이는 밥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무료급식소 앞에서 긴 줄을 서 있는가 하면, 또 다른이들은 영양 과잉으로 음식을 멀리 한다. 그래서 보릿고개는 사라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필자는 요즘의 이 모든 배고픔이 정신적 허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으로도 쉽게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빈 곳. 그것은 보릿고개를 넘어가며 우리가 살아남고자 하였던 어떤 절박한 의지와 희망을 상실한 ‘허기’이기에 더 무섭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 ‘빈 마음’을 찾아 나누고 배부르게 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사명이었다면, 이제는 주린 마음들을 채워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봄이 오고 있는 길목에서, 겨울의 언 땅을 뚫고 돌아오는 봄의 참뜻을, 그 옛날 보릿고개의 아픔과 희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신흥수(재경 남원향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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