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숙(전 전북여성농민연합 회장)
작년 10월, 전북도청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일환이었던 방북일정에 한 일원이 되어 평양과 황해남도 신천군을 잠깐 다녀왔었다. 그 이후 내 기억 속에는 아리랑 축전이나 평양시내의 모습보다 더 뚜렷이 자리 잡은 풍경들이 있다.
평양시내를 빠져나와 1시간여 달려 도착한 사리원시, 70년 전 아버지의 어릴 적 담박질 자욱이 저 어디메쯤 파묻혀있을까?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군이 고향으로 사리원 중학에 잠깐 다니신 적이 있다) 중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을 찾아 헤매던 눈초리가 금방이라도 버스 밖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버스는 쏜살같이 시가지를 빠져나갔고 동승한 북측 안내원들이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몰래 셔터만 더듬다가 아쉽게 놓쳐버린 시가지 모습, 순간 파도처럼 출렁이는 가슴 속 흐느낌을 잠재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었다. 그날 이후 회색빛 사리원시가지와 미루나무, 코스모스길 따라 펼쳐진 재령평야의 모습은 가슴속 뜨거운 통증과 함께 내게도 그리움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지나쳐버린 아버지의 고향 언저리 모습을 부모님께 전해드릴 때도 등줄기는 덜덜 떨려왔고 아버지의 표정조차 살피기 어려웠었다. 후에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는 막내딸이라도 당신의 고향 가는 길목을 다녀온 것이 너무도 기뻐 며칠 밤을 잠 못 이루셨다고 한다.
얼마 전 서울에 갔을 때, 40년 전 내 초등학교가 도시재개발로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찾은 나는 오래도록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발아래 깊은 곳에서 서로를 알아보며 부둥키듯 한 이상한 기운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까닭이다. 해주 바다 가까이 아버지의 고향마을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사라져버린 학교를 금세 찾아내었듯 아버지도 고향마을의 골목과 집들을 바로 찾아내실 것이다. 더구나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들이 그곳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계실 터이니.
모두가 고향을 찾는 추석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가슴에 비단구두 한 켤레씩 품고 고향으로 달려가고픈 꿈을 하염없이 짓누르며,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눈물 젖은 차례상을 지켜오셨을 고령의 실향노인들, 그들에게 살아생전 단 한번만이라도 고향방문의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염원한다. 때마다 가보아도 뒤돌아서면 다시 그리운 것이 고향일진대 북녘땅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의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야 어찌 짐작인들 하겠는가?
국민들 모두 월드컵축구에 몰두해있던 지난 초여름, 서울의 단 한관에서 외롭게 개봉된 여균동 감독의 ‘비단구두 사가지고’, 그 영화 역시 국민들과 현재의 통일정책에 호소하고 싶었나보다. 이제 더이상 그 어떤 조건과 명분 따위 들먹이지 말고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하듯 따뜻한 마음 하나로 고령의 실향민들에게 고향 한번 보여드리자고. 북한의 미사일발사로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던 시기에도 동포의 생존을 걱정해주는 인도주의적 식량지원의 길이 다시 이어졌듯 부모님께 하는 마지막 효도 또한 인도주의라 이름 붙여도 마땅하질 않겠는가?
북녘땅을 밟아야 할 가장 절실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지체 있는 그 어떤 분이 아니라 바로 내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다. 서둘러야한다. 아버지에게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박찬숙(전 전북여성농민연합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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