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서부 신시가지내 문학대(文學臺·지방기념물 24호)가 이전한다. 도시개발로 인근에 아파트와 단독주택지가 들어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전북도청과 전북지방경찰청사가 빤히 들여다 보이는 낮으막한 산 위에 자리잡은 문학대는 고려 공민왕때 황강(黃岡) 이문정(李文挺)이 낙향하여 만년을 보낸 곳이다. 효자동 3가인 이곳은 얼마전까지 완주군 마전(馬田)마을이었다.
문학대는 그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관직을 지낸데서 연유한 것. 이 벼슬은 고려와 조선시대 국가 행정을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고려 때는 종2품, 조선 시대는 정2품으로 여말 선초 정몽주와 권근 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문정은 경사(經史)에 박통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정주학(程朱學)에 밝은 학자였다. 또 고려말 조정이 숭불억유(崇佛抑儒)정책으로 학교를 폐하고 윤리와 기강이 문란하게 되자 상소를 올려 이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문학대는 임진왜란때 훼손되어 집터만 남아 있던 것을 순조때인 1824년 후손들이 중건했다.
바로 인근에는 그를 모시는 황강서원이 남아 있다. 원래 이 서원은 곤지산 아래 있었다. 1869년 고종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던 것을 1898년 황방산 아래 유허지에 옮겨 지었다. 황강서원에는 이문정 뿐 아니라 그의 손자로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이백유와 그의 종손인 이경동, 그리고 이목 이덕린 유인홍 강해우 등을 배향하고 있다. 조선 성종때 대사헌과 예조참판을 지낸 추탄(楸灘) 이경동은 문장이 뛰어 났으며 퇴직후 전주에 내려와 추천(楸川)에 낚시를 드리우며 만년을 보냈다. 추천대(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8호)는 1947년 그의 후손들이 그를 기려 세운 정자다. 전주시는 이같은 역사를 드리운 문학대를 황방산 아래 근린공원으로 이전 복원키로 했다.
이와 함께 이전 논란에 휩싸인 것이 문학대 바로 아래서 발굴된 삼국시대 유물. 신축중인 현대와 호반아파트 중간지점 도로부지에서 발굴된 5기의 고분과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와 철기, 옥류를 어디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다. 이 고분은 전주에서 발굴된 유일한 삼국시대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전주시와 중앙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정자에 올라 시를 짓고, 낚시를 드리우던 곳이 도심이 되어 버렸다. 상전벽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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