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고개 한가운데서 배고픈 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리는 곡식이 아니라 풍경이요 낭만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었다고 하면 두 눈 크게 뜨고 쳐다보는 그들에게 보리는 생명줄이 아니라 한 폭의 수채화요 추억이다. 그들은 앉은뱅이도 일어서고 곱사등이도 펴진다는 보리누름의 풍요로움을 모른다. 그들에게 보리는 오직 놀이의 대상이다. 어서 빨리 여물어 풋바심이나 해먹을 날을 기다리던 농부들의 청보리밭이 도회지에서 찾아와 낭만과 추억을 담아가는 축제의 놀이마당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에 물경 52만명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이들이 떨어뜨리고 간 돈도 무려 62억원이나 됐다니 축제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한 쪽 옆구리가 허전한 건 웬 일일까. 꼭 학교 선생님이 장사를 해서 돈을 번 것 같기도 하고, 농부가 오락실에서 돈을 따온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축제가 잘못됐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곡식이 곡식 대접을 받지 못하고 엉뚱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에 하는 말이다.
보리가 곡식 취급을 받지 못하니 청보리밭 축제라도 하지 않으면 영 보리 구경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겟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보리농사 짓기가 가뜩이나 어려운 판국에 59년 보리 수매사상 처음으로 보리 수매가격을 전년 대비 4%나 깎아버렸으니, 무슨 재미로 보리농사를 짓겠는가. 더군다나 정부가 보리 수매가격을 올 해부터 점차 낮추기 시작하여 오는 2012년부터 보리 수매제도를 전면 폐지하겠다고 예고를 하고 나섰으니, 정말 청보리밭 축제에나 가야 보리 꼴좀 구경하게 생겼다.
지질이도 가난하고 고단했던 시절 우리 민족의 생명의 끈을 이어주던 보리가 우리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웬지 마음이 허전해진다. 반만년 동안 우리네 어버이들의 애환을 묻어온 보리밭에서 도종환 시인의 ‘보리 팰 무렵’의 시가 들려온다. 장다리꽃밭에 서서 재 너머를 바라봅니다/자갈밭에 앉아서 강 건너 빈 배를 바라봅니다/올 해도 그리운 이 아니오는 보리 팰 무렵/어쩌면 영영 못 만날 사람을 그리다가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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