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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작은 충무공을 기다리다 - 유혜숙

유혜숙(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요 며칠 전, 여고 동창모임에서 오랜만에 모악산에 오르기로 했다. 중인리 주차장에 먼저 도착한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수다를 떨며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주차장은 빈 칸 없이 빼곡해진다. 승용차 한 대에서 내려서는 등산객이 대부분 한 명. 많아야 둘. 유가 상승이 불러온 각종 원자재 값 상승에 경제대통령을 자임한 정권마저 치솟는 물가를 어쩌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는 시국이다. 있는 자가용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이 보통의 결단으로는 아니 되는 일이란 것을, 나 역시 자가 운전자의 한 사람으로서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산에 오르느라 슬슬 숨이 찰 무렵, 이제 막 나무 티가 나려는 작은 나무들에서 사정없이 새순을 뜯어내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보았다. '살짝 데쳐서 무쳐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면서 옆에 선 딸아이에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신다. 그 옆에 선 또 다른 이는 돋아나는 새 생명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신 채로. 여린 새잎의 인고가 소멸되는 순간. 그 어린 나무를 보며 또 한 번 안타까워했다.

 

산 중턱을 지나 정상에 다다를 무렵, 배낭 속에 챙겨 온 시원한 생수를 한 모금씩 나누고 머물러 앉아 하늘빛과 봄 햇살에 잠시 취했다. 이 취중에 발견한 휴지 더미가 따스하고 넉넉한 취기를 화들짝 깨웠다. 급한 용무들을 보고 난 그 흔적들은 눈살을 보통 찌푸리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족히 3~4시간이 걸리는 산행에 화장실 하나가 없는 것도 난감한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이 산 중에 화장실을 만드는 것도 문제이니... 어쩌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하간 정상에 올라 멋진 풍광을 눈과 마음에 담고 한참을 내려오니 맑은 계곡이 보였다. 더불어 그 맑디맑은 물에 발을 씻으며 피로를 시원하게 풀고 있는 무슨 무슨 산악회원들도 보였다. 계곡 옆에는 '취수원'이라는 팻말이 떡 버티고 있었지만 그 많은 일행 중 한사람도 말리지 않았다. 비누를 쓰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인지... 안타까움을 넘어 선 암담함. 하산하는 길은 건강한 산행에서 말미암은 뿌듯함이 아닌 안타까움과 암담함이 동행해 준 길이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일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 것처럼, 왜의 침략으로 국운이 쇠하던 때, 정치적 권력보다는 무신으로서의 의무에, 일신의 안녕보다는 백성을 지켜야 할 장수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던 충무공의 올곧음이 나라를 구했고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되었다. 4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왜의 침략 위험이나 남북 전쟁의 우려는 체감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은 난세가 아니다. - 라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인가. 미안하게도 지금 우리는 아주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 훨씬 위험하고 그 후유증이 상상을 초월할 전쟁. 한편에선 환경을 파괴하는 전쟁, 한편에선 환경을 지키기 위한 전쟁. 바로 그것이다. 짧은 산행에서 목격한 여러 장면들은 이 처참한 전쟁의 아주 작고도 사소한 국지전에 불과할 뿐, 대체할 에너지가 묘연함에도 펑펑 써대는 석유하며 이미 부족함이 표면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더욱 펑펑 써대는 물과 이상 기온에 꽃이 몽땅 피고 진다는 뉴스에 지구 온난화보다는 상춘곡을 먼저 떠올리는 우리들. 결국 우리가 침략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돈'을 향한 전진의 대포 앞에서 인권, 생명, 정신적 가치를 무참히 상실하고 만 가련한 백성이다.

 

충무공이 다시 필요한 때다. 이순신과 같은 큰 영웅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충무공이 여기저기서 탄생해야 한다. 돈의 권력에 빌붙기 보다는 자연의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소소한 의무들에, 일신의 이해와 타산에 매여 부화뇌동하기 보다는 후대의 안녕에 대한 작은 사명들에 충실한 올곧음을 가진 충무공.

 

주변을 둘러보라. 난세가 분명하지 아니한가. 작은 충무공들을 기다려본다.

 

/유혜숙(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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