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곤(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엊그제 6일은 현충일이었다. 날씨도 쾌청하고, 휴일의 도시는 참으로 조용하고 한가하였다.
아침에 태극기를 꺼내어 반기(半旗)를 달다가 문득 몇 년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떠올랐다.
전쟁의 원인과 책임문제를 떠나서, 같은 민족끼리, 같은 형제끼리 그리도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전쟁의 그 숨막히는 상황과 참혹함, 그리고 그 속에서 너무나 허약하기만한 인간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그려진
영화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국기를 달고 베란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롭고 번창한 도시를 내다보노라니 영화 속에 나오던 서울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영화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 외에도 가난했던 우리 삶의 터전 조차 얼마나 처참한 폐허가 되고, 그 속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쳐야 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주었었다.
6.25직후, 우리나라는 지구상 모든 나라 중에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심지어 기근으로 매일 수많은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의 최빈국 에티오피아보다도 가난한 나라였다.
서울수복 후에 서울에 온 맥아더 원수는 이 나라를 다시 재건하는데는 적어도 10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했던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11위의 무역대국, 세계최고의 IT강국, 세계조선1위국이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먹기보다 체중 줄이는 걱정을 하며 살고 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저 평화와 풍요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름모를 산하에서 아까운 목숨을 바쳐야 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가족과 헤어져서 낯선 거리를 헤매고 가슴저미며 살아야 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흘려 일해 왔던가.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당장의 풍요와 평화에 취해 있을 뿐, 지금까지 이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공을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닐까.
북한에서는 핵실험에, 연이은 미사일 발사에, 심지어 휴전협정의 무효화까지 선언하고, 군사적 위협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6.25의 참상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공적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심지어 호국보훈의 달, 현충일에서 조차 우리는 이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6.25전쟁결과 한반도 전체가 적화(赤化)되었었다면 어찌되었을지 상상은 해 보았는가?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만약 그리 되었다면 지금 휴전선 이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참담한 현실이 한반도 전체로 확대되어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결과에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휴일의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런 상념에 잠겨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까?
/박철곤(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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