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언론인)
읽다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열심히 신문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니 전북일보와 얽힌 기억이 아직도 새롭고 그 신문이 자극하는 옛 생각으로 범상치 않은 귀향의 느낌을 갖는 듯하다.
이번에 느끼는 귀향의 감정이 남다르다 하지만,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도 고향 사람들과 많이 지내게 된다. 주로 학교 동창들인데, 물론 고향 친구들이 정다워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지역주의 탓이 크다. 내 스스로는 일부러 동창만을 챙기고 고향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왔으나, 살다 보니 나도 그 범주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지역의 구별이 드세고 타 지역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현실에서, 그런 현상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나는 고향을 떠나 살면서 지역주의와 관련해 많은 경험을 했다. 생활 속에서 상처를 받은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사실 이제껏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은 지식인들이 지역주의에 대해 갖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버젓이 지역주의를 내세우는 일도 허다하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역주의가 지식인 사회에서 더 기승을 부린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타당할 것이다. 그들은 지역주의로 생활의 이해관계에서 큰 도움을 받는 현실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갖는 태도이다.
지역주의가 온통 나라의 정치를 혼돈으로 몰아가던 시절, 진보적 지식인들이 갖는 태도는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역주의 본질이 호남차별에 있는 것이라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것에 맞서 비판하고 싸워야 마땅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보는 진보이고 지역은 지역이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그들대로 마음 속에 단단한 지역주의를 품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난 뒤의 절망감은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거듭 생각해 보았다. 차별을 눈감고 그 차별에 동참하는 진보가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내 의문의 핵심이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다는 이념이나 신념,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싸우고, 불이익 받고, 심지어는 감옥까지도 마다 하지 않은 것인데, 그렇게 한 그들이 정작 지역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거기에 맞서 길게 싸웠으나 지금 남은 것은 허무하다. 여전히 지역차별은 계속되고, 그것으로 정치는 왜곡되고 인간정신은 그 한계를 시험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그들이 소속된 시민사회도 지역주의에 관한 한 하나도 바뀐 게 없다.나는 진보세력이 지역주의에 맞서 단단히 진영을 꾸려 새로운 싸움에 나서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예컨대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은 치욕에 해당한다. 물론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는 인종차별이 일상화 되어 있지만, 지식인 사회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극우 정치세력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결국은 지식인과 언론의 힘이 민주주의를 키우고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지역주의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지식인 사회로는 당분간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꿈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처럼 고향에 돌아 오면서 집 나가 얻은 상처를 굳이 헤집어 다시 핥는 꼴이 되었다.
/김근(언론인)
▲ 언론인 김은씨는
전주 출신으로,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국제언론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를 열임했으며 연합뉴스 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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