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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한철골(寒徹骨)과 박비향(撲鼻香) - 정운천

정운천(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

 

봄의 전령이라고 했던가? 제주도에서부터 피기 시작한 매화가 남도에 상륙해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올 겨울이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아 개화가 늦어질 것이란 예상도 있었지만, 입춘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지금쯤 구례에서 화개장터를 거쳐 안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길에는 새색시처럼 수줍게 피어난 매화가 때 이른 상춘객들을 맞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별빛이 부서지는 매화꽃 사이를 거닐며 진한 매화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나는 특히 매화를 좋아한다. 작고 어여쁜 꽃송이와 코를 찌르는 향기도 일품이지만, 한겨울의 추위를 딛고 눈 속에서 피어난 꽃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코끝이 찡한 감동이 느껴진다. 지난해 봄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마주한 토종매화는 감동과 함께 인생의 깊은 깨달음까지 남겨 주었다. 매화와 함께 만난 한편의 한시(漢詩) 덕분이었다.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뼈를 깎는 추위를 한번 만나지 않았던들,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두번의 아픔은 겪게 마련이다. 또한 사람은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만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싯귀를 보며 뜻을 되새긴 순간 나는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당시의 내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싯귀의 표현처럼 그 당시 나는 '뼈를 깎는 추위'를 겪었다. 예기치 못한 촛불정국으로 인해 농정의 최고 책임자에서 하루 아침에 국민건강을 팔아먹은 매국노로 매도되었다.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과 저주를 받았고, 결국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장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전국을 순례하던 중이었다.

 

뼈를 깎는 추위를 겪어야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는다…… 그 범상치 않은 싯귀는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전국의 농촌 현장을 순회하면서 농업인들과 만나고 농업을 살리는 강연을 시작했다. 촛불정국이란 사상 초유의 국가적 혼란을 겪으며 터득한 소통과 화합. 그 희망의 향기를 국민들에게 전파했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았다. 인원의 많고 적음도 구분하지 않았다. 나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밀물농업을 전파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희망의 향기를 전했다.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120 여곳을 순회했으니 일주일에 두 곳 이상을 방문한 셈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썼다. 휴일에는 하루 종일 매달렸다. 그렇게 몇 달에 걸친 노력 끝에 지난해 9월 <박비향> 이란 책을 발간했다. 재임시와 퇴임 후에 터득한 희망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았다. 100일에 걸친 전국순례 끝에 만난 한편의 시(詩),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뿜는 매화에게서 터득한 깨달음 덕분이었다.

 

경제는 어렵고, 청년실업 등 고용상황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내면을 다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뼈를 깎는 추위' 속에서 '코를 찌르는 향기'를 응축하는 매화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뚜벅뚜벅 자기 일을 찾아 갈고 닦으면 반드시 희망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운천(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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