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놓고 나선 길 그 길이 화답한다
건강을 위한 걷기 열풍속에 전국에서 최초로, 아직까지 유일하게 '아름다운 순례길'이 전주-완주-익산-김제 일원에 총연장 240㎞에 9개의 코스로 조성됐다.
순례길은 '순례(巡禮)'의 뜻 그대로 '종교의 발생지, 본산(本山)의 소재지,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하는 길'이다.
그래서 한국순례문화원(이사장 김수곤)이 주관하는 아름다운 순례길은 '마실길'·'구불길'등 자연과 풍경을 위주로 조성된 길 보다 멋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4대 종단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만큼 '순례'하다 보면 종교적인 의미에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건강해진다. 오히려 다른 예쁜 이름이 붙어있는'길'보다 아름다운 곳이 많아 일보(一步)를 권한다.
'여기서부터 걸어보자'
종교유적을 연결해놓은 만큼 전주·익산·김제·완주 주민들은 가까이에서 순례길을 만날 수 있다.
제1코스 총 28㎞구간중 전동성당에서부터 월암마을까지 9.2㎞를 마침 지난달 전주를 찾은 생명평화마을(대표 황대권) 회원들, 들꽃사랑 꽃다지 회원 등 20여명과 함께 걸었다. 한국순례문화연구원 박동진 사무국장, 신혜경 연구팀장이 스토리텔링으로 걷기의 영양분을 더했다.
1908년 지어진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동성당을 완공한 직후 임종한 보두네 신부의 상처투성이 발은 당시 드망즈 주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되뇌어 감동을 전했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이 숨을 거두고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곳이다. 하지만 당초 전주시가 보이는 언덕위에 전동성당이 지어지려 했으나 을사오적이 된 당시 이완용 전라도관찰사 때문에 순교지에 자리잡아야 했다는 것은 비사다.
실루엣이 좋아 연초에 한국에서 꼭 가봐야할 명승지중 한 곳에 당당히 뽑힌 전주 한옥마을의 자태를 보다가 성심여고에 이른다. 경기전길 134번지인 성심여고 정문옆에는 단독주택이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느라 이사를 할 수 없는 어느 할머니가 60년 가량 살고 있다는 설명에 고개가 숙연해진다.
원불교 교동교당의 행사 때는 앞에 천주교 신자의 집에서 마당을 빌려준다는 말에 종교의 공존을 생각케 했다.
▲박해 피해 모인 전라도
전주향교는 주말이면 전통혼례식이 치러져 볼거리를 선사한다.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잡귀를 물리친다'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중 3그루는 수백살로 짐작돼 수형과 크기가 볼 만하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그 옛날 전주천의 유일한 다리였다는 남천교가 으리번쩍하게 눈에 들어온다. 1791년에 35개 마을에서 건축비을 내고 7000명이 동원돼 남천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단다.
대원군 때 전라도관찰사는 누나가 사약을 받았다. 그 전라도관찰사는 중앙의 방침에 반하는 정책을 폈다. 중앙에서는 천주교를 박해 했지만 전라도는 박해하지 않았다.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전라도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닥나무를 많이 재배했다. 닥나무로 만드는 전주·완주의 한지 품질이 우수한 이유이다. 이를 증명하겠다는 듯이 '완판본 문화관'이라는 건물이 서있다.
일반인으로서는 잘 알기 어려운 풀들이 종류별로 심어져 있고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 있는 야생초 정원과 '전주자연생태박물관'은 어린이의 교육에 도움이 되고 있고 어른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을 주는 '덤'이다.
그 관찰사가 바뀌고 박해는 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심해졌다.
치명자산 성지가 '전주의 몽마르뜨'라고 불리고 암석에 표식이 새겨져 있음은 처음 알았다. 산 꼭대기에 많은 사람이 있는 듯 보여 '중(衆)바위', 승암사가 있는 '승암산'이라고도 불리는 치명자산은 교황이 순례를 검토했을 정도로 유서가 담겨 있다. 자세한 사항은 치명자산 홈페이지(http://www.kmm.or.kr/)를 참고하기 바란다.
중바위에는 유교의 대가 간재선생의 제자 석농 오진영선생이 '승암산 중석 간납대 풍연'이라고 쓴 바위가 있다. 치명자산 성지 천주교, 승암사·동고사 불교에 유교의 유적까지 여러 종교의 모습이 잘 어우러져 있다. 상생의 단표다.
▲길 없음을 즐거움으로
전주를 벗어나니 '전주천'뚝방길이다.
약간 이채롭다. 멀리 맨 왼쪽에 전주~광양간 고속도로가 보인다. 그다음 철도가 있다. 가끔 지나는 기차를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순례길이 있다. 인도다. 오른쪽으로는 4차선 국도가 있다. 전주~남원간 4차선 국도는 언제나 과속하는 차가 넘친다. 걷다보면 차소리가 익숙해지기까지 좀 시간이 걸린다.
13년2개월의 억울한 옥살이 동안 '야생초 편지'라는 심금을 울리는 스테디셀러를 쓴 황대권 대표는 "얼마나 좋은 뚝방길입니까. 언제 뚝방길을 걸어보겠습니까. 차소리가 들리지만 차는 멀리 떨어져 있어 괜찮고,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라고 말했다. 두충나무 군락지에서는 '안내판이 있었으면…'아쉬움을 표했다.
논밭이 있지만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은 아니다. 농촌 아닌 농촌의 모습이다. 편리하게 농사짓기 위해,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해 난개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어지러운 전주의 외곽이지만 황 대표처럼 '향수'를 느낀다면….
역시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처음으로 어려움을 만난다. 전주천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다.
돌을 듬성듬성 놓아 돌다리를 놓으면 물이 불어나 떠내려간다는 것이다. 바지를 걷어 부치고, 양말을 벗고, 신발을 들고, 깊지 않은 물을 건넌다. 길 없음을 즐거움으로 여기면서 웃으며 건넌다.
출발후 첫 휴식지 월암마을에 다다랐다.
월암마을에는 정여립 선생이 생가가 있다. 아, 우리 고장에는 유서깊은 곳이 많구나.
월암마을 송정옥 이장(65)은 "인심이 좋아 어려울 때 '동냥아치'들이 마을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마을에 '동냥아치 바위'가 있을 정도다. 순례길이 생긴 이후 수많은 사람이 다녀가는데 모두에게 푸근한 인심을 전하려 마을사람 모두가 애쓴다"고 말했다.
경상도의 교수에게 떡을 싸줘 인터넷에 고마운 인심의 주인공으로 뜬 주정애 할머니(85)는 "해준 것도 없는데 칭찬만 받는다"고 겸연쩍어 했다.
월암마을의 정겨운 인심을 기억하며 빠른 시간내에 숲속오솔길-호반산책길을 거쳐 송광사까지 이어지는 1코스를 걸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침내 9코스를 모두 걸은 날이 올 것이리라.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