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극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 총감독 이병천 소설가
흔하디흔한 철쭉이, 그나마 드문드문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 꽃잎이 유난히 붉어 보이는 5월 18일 토요일. 오후 네 시의 마당가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부채문화관. 마당에는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그는 붉은 꽃잎 점점이 떨어진 화단 턱에 앉아 마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표정이나 몸짓이 어찌나 태연하고 느긋한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뒤태를 구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낮술로 노곤해진 몸을 봄볕에 말리고 있는 듯도 하다. 공연을 보러온 그의 지인들이 간간이 알은체를 하지만 않는다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배우들과 관람객의 배경으로 가만히 놓여 있을 것 같았다. 앉은 자리가 어디 건 간에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이곳에 나타나는 이 수상한(?) 남자. 거리극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의 총감독이자 소설가인 이병천 씨이다.
지난달 27일 토요일에 공연을 시작한 후로 이번이 네 번 째 공연. 전봉준이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 되는 길에 전주에 들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거리극은 전봉준이 이인교에 올라 있는 사진이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한 장의 사진이 1시간 20분 공연의 주춧돌이 되었고 매주 토요일마다 공연을 하게 된 이유는 동상 하나 때문이란다. 무슨 뜻일까.
"오래 전부터 전주에 녹두장군의 동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에 무혈 입성한 그의 활동이 역사에 남아있기도 하고요.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긴 했지만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됐어요. 그 정신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고요."
우리 역사에서 전봉준은 체게바라에 뒤지지 않는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한 인물이라고 여긴다는 이병천 씨. 그는 늘 '어떤 방식으로 전봉준을 기릴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것인가'를 계속 궁리를 해왔다. 그의 오랜 생각은 의외의 순간 의외의 장소에서 꽃을 피웠다.
"2011년 겨울에 소설 '90000리'를 출간했는데 가까이 지내던 선배 한분께서 그동안 고생했으니 술값은 얼마든지 대줄테니까 좋아하는 사람들 불러서 술 한잔 마시라고 권하시더라고요. 그 때 생각했죠.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마음 속으로 그런 조건을 걸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출판기념회를 하게 된 거죠."
소설 집필의 노고를 위로하고 책 발간을 축하하는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때 아닌 전봉준 동상 건립이라는 '폭탄발언'을 하게 된 것. 허나 가재는 게 편이요,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유휴열 화백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이 그의 말에 마음을 모아주었다. 기금 모금을 통해서 동상 건립을 추진하자는 방법까지 논의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전주 한옥마을로 장소로 정했다. 하지만 바로 행동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모금 방법 문제였고 두 번째는 동상 건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만 그 의미가 살아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고민에 빠진 이병천 씨. 하지만 그는 안 풀리고 꼬인 이야기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전문인 소설가 아니던가. 함께 활동하는 '얘기보따리' 회원들이 짐을 나누어 져주었다.
"한 5년 전쯤 희곡 쓰는 곽병창과 최기우, 시 쓰는 문신, 영화평론하는 신귀백 등 몇몇이 모여서 얘기보따리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전주의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한 짧은 창작판소리를 만들어서 '짧은 판소리 전주'라는 책을 내기도 하고 CD로 제작을 하기도 했죠. 그 때 제가 '전주비빔밥뎐'이라는 걸 썼는데 전봉준이 남부시장의 비빔밥집에 자주 들렀다는 설정에서 시작했어요. 갖은 채소가 비벼지는 비빔밥이 임금과 신하, 백성이 한데 섞여 대동세상을 만들자는 동학의 정신과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거죠."
'한양으로 압송될 당시 전봉준이 전주에 들르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전주 사람들은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런 애틋한 마음에서 출발한 작가적 상상력이 버무려져 결국 한 그릇의 전주비빔밥 같은 거리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 해 5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전주 한옥마을에 다녀간다는데 그들에게 전주의 역사, 그 속에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이고 전주의 살아있는 역사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동상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이번 공연은 결국 이 얘기를 전하고 싶어서예요."
한옥마을에는 경기전, 전동성당 같은 아름답고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공간들이 있지만 우리의 민족의식, 전주의 살아있는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소박한 공간 하나 만들어 보자며 시작한 일. '얘기보따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여러 극단에서 따로 활동하던 배우들도 이 공연을 위해서 한자리에 뭉쳤다. 그리고 팔순의 노모도 팔을 걷어부쳤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볼 수 있도록 무료로 공연을 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기금을 모금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기금을 낸 이들에게 이병천 씨의 어머니가 직접 빚은 '녹두꽃술'을 대접하기로 한 것.
"얼마가 됐든 기금을 내주는 사람들한테 녹두로 빚은 술을 대접을 하기로 했어요. 원래는 '녹두꽃술'이 아닌 '녹두장군주'라고 하려고 했는데 정읍에서 이미 상표등록을 해놓아서 이름을 바꿨지요. 해열과 해독의 효능이 뛰어난 녹두는 술에 들어가면 술을 물처럼 묽게 만드는 성질이 있어요. 술의 재료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거죠.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세요."
여든 살의 전복래 씨는 아들을 위해, 아니 전주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아니 일찍이 모두가 평등하다고 온몸으로 외친 한 사내를 위해 술을 빚는다. 그리고 매주 공연 때마다 아들은 그 술을 사람들에게 내놓는다.
"숱한 백성들이 참여해서 동학농민혁명이 이루어졌듯이 어느 날 동상 하나 달랑 세우는 것보다 십시일반으로 오천 원 만 원,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조금씩 다 같이 모아서 만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토요일만 되면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는 아들을 위해 여든 살의 전복래 씨는 오늘도 술 항아리 앞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러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그 맛과 향이 기가 막히다는 '녹두꽃술'과 체구가 작아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전봉준. 그리고 그를 다시 사람들 속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역시 작은 체구를 가진 한 남자.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봄볕 같지 않게 뜨거운 오월의 햇살이 빚어낸 착각일까.
/김정경 문화전문시민(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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