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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주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

▲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재위원장

1980년 5월 18일! 2013년 5월에 33년 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필자는 그때 국회에 근무하고 있었다. 10대 국회가 개원된 지 얼마 안 되었고, 70년대 보리고개를 막 넘긴 대한민국은 그리 넉넉지 않은 경제 현실과 피폐해있는 농어촌의 현실은 더 많은 풍요와 번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의 급서로 인한 민주화의 봄은 3김의 시대로(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대표되는 정치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의 국민적 관심과 열망이 펄펄 끓고 있는 때였다. 이때 신군부가 등장하며 제2의 5.16 구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꽃소식과 함께 피어난 1980년의 봄은 산산조각이 났고 당시 신민당 정책위원이었던 나는 30대 젊은 혈기와 의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지역구(임실 순창 남원) 농촌지역에 대한 부자농업 실현구상과 전북 지역개발전략, 농어촌개발 특별법 구상안의 꿈이 무너졌기에!

광주민주화운동은 그 억압을 뚫기 위한, 1980년의 봄을 되찾기 위한 위대한 민주화 복원운동인 것이었다. 5월 28일 진압이 되고 폭도들을 제압하고 불순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이었다는 일방적인 언론보도 외에는 광주의 진실은 알 수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김대중 선생의 비서실장이었던 권노갑 고문과 수배 받고 있던 심재권 의원, 문화방송의 최성근PD, 필자는 미국대사관, 일본대사관의 외교관등과 함께 광주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에 조사차 가기로 했다.

그러나 긴급수배된 권고문, 심의원, 최PD(MBC라디오국장 역임)는 약속장소에 못 나왔고 필자와 일본대사관 일등서기관 이께다씨 등과 함께 광주로 내려갔다. 홍남순 변호사의 자제, 사무장, 송기숙 교수, 시민군 관계자, 계림사진관 정운본 사장의 집에서 숙식하며 진상을 파악했다.

지나가는 시민을 무고히 대검으로 찌르고, 겁에 질려 피한 학생들을 무차별 검거 드들겨 패고, 도저히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었던 내용들을 적고, 또 적었다. 묻고 또 확인했다.

당시 외신들 마이니찌, 산케이, 요미우리등은 강제 퇴거되고 언론은 철저히 통제 검열되고 있었다. 이 진실은 미국과 일본등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대한민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전국에 긴급지명수배된 필자는 잠시 도피생활 후 합수부에 체포되어(중정 남산지하실) 1개월 여간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다. 잠 안 재우기, 고무호스에 의한 매질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당시 가족은 가택연금되었고 주변의 친지 일가 등은 미행, 협박, 연행 등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지금도 1980년 5월의 상처는 고문후유증으로 남아 치료를 계속 받고 있다.

30여년 불러온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말썽이 났다. 아마도 광주 망월동에 묻혀 계신 영령들이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작업(?)하신 것은 아닐까?

먼저 가신 영령들께 지금도 민주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씀드리며, 사랑도 명예도 /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 동지의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 깃발만 나부껴 / 그날이 올 때까지 / 흔들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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