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아픈 아내 위해 11년간 빠짐없이 녹화장 찾아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관음마을. 초행길이지만 마을 어귀에 내려 이병철씨 댁을 물으니 주저 없이 빨간 벽돌집을 가리킨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난 시골 마을의 적막함.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는 견공들의 경고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빨간 벽돌집에 가까이 갈수록 들리는 음악 소리. 가까이 가보니 라디오 소리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세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 라디오 소리는 들렸다.
"저기 계세요?" 더 크게 부르자 "뉘시오?"라는 답변이 들렸다.
오늘 만남의 주인공 'KBS 전국노래자랑'의 광팬. 이병철(75) 박정자(73) 부부. 평생 농사일에 새까만 얼굴, 깊게 패인 주름, 아담한 체구. 십 여년동안 전국노래자랑의 광팬이자, 전국 곳곳 축제, 행사에 단골인 노부부다.
'빠람~ 빠람 빰 빰빰~빰빰랴 빰빠 빠라~딩동댕 전국 노래자랑~'
매주 일요일 낮 12시 방송되는 '전국노래자랑'. 1980년부터 30년이 넘게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전국노래자랑'의 간판 스타는 역시 MC인 송해. 어느 해부터인가 송해만큼이나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방청석 맨 앞줄에 자리를 잡고 유명가수들이 나올 때마다 신나게 막춤을 추는 노부부.
이 국민 프로그램을 11년전부터 한주도 빠지지 않고 녹화장을 찾아 다니는 이들 부부는 현재까지 총 309회를 참관해왔다.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는 빨간색 티셔츠. KBS 전국노래자랑을 즐겨 시청하시는 분들은 이분의 뒷태가 낯설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다. 맨 앞줄에서 빨간티를 입고 막춤을 추는 열성팬 부부. 바로 그 분들이다. 전국노래자랑 제작진이 인정하는 공식 왕팬이다.
평범한 농부인 이씨 부부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래자랑 단골 손님'이 된 것은 2002년.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살살 다녀보라는 의사의 권유로 여행을 무리가 안가는 여행을 찾던 중 전국노래자랑 팬이 되어 전국 유람 길에 나서면서부터다.
이들 부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2시면 일어나 도시락을 싼다. 겨울 김밥, 여름 김치·몇가지 반찬. 겨울에 실내체육관에서 녹화를 하는 제작진들에게 도시락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 겨울에는 김밥을 고수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왕팬다운 성숙한 마음 씀씀이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자전거로 익산역까지 내달린다.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싼 차편을 알아보고 2~3번 갈아타며 녹화장에 도착하고, 녹화가 끝나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겨울철엔 빙판길에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내와 함께 방청할 것을 생각하면 즐거운 마음 뿐이다. 지금도 허리가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해, 남편은 손을 꼭 잡고 다닌다.
현장에 도착하면 이젠 제법 알아보고 반기는 일반인들도 많다. 물론 제작진과는 한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낸지 오래. 녹화 전 사회자 송해씨는 멀리서 와준 노부부에게 언제나 팬서비스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도 멀리 익산에서 새벽밥 해 드시고 오셨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시는 왕팬입니다. 두 부부가 손을 꼭 잡고 다녀서 내가 샘이 나잉~."
짧은 소개지만 송해씨의 안부 인사는 팬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 전국노래자랑의 홍보대사. 이제는 담당PD가 녹화 일정표를 미리 챙겨줄 정도다.
"한번은 아내가 함라산 둘레길을 다녀와서 몸이 아파서, 여수 녹화를 못갔지. 그 다음주에 갔더니 심사위원들이 왜 안왔냐? 아팠냐? 걱정을 해서 그 뒤로는 절대로 안빠지지 않아요. 내가 좀 아프더라도 팬으로서의 자세를 지켜야겠다 그래 생각했지"
"왜 힘들게 녹화장을 다니냐"는 질문에 그는 TV로 보는 것과는 "(감동의)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 일본출신 아내가 9남매를 데리고 나와 11명을 낳는 것이 목표'라며 큰 웃음을 줬던 일본인 아내, 불편한 장애의 몸을 이끌고 휠체어를 타고 노래를 불러 합격했던 여자 등등 녹화장에서 직접 느끼는 감동으로 에너지를 받는다고 한다.
매번 똑같은 녹화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매번 다른 장소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감동의 무대다.
지금은 이병철씨 부부의 뒤를 이어 팬층이 형성됐다. 4~5년 전부터 부산·목포·천안에서 후배 팬들이 오기 시작한다. 선배로서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산악회 활동을 했는디, 세상 천지에 안 가본 산이 없어. 정상을 밟아 본 사람은 또 산을 가거든. 그거랑 비슷혀. 전국노래자랑을 만나면서 대한민국 방방곳곳을 다니지. 직접 가서 보는 감동은 안 다녀본 사람은 말을 허덜 말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래자랑 녹화현장은 앞으로도 계속 갈 거여. 유일한 재미고만."
집안 곳곳 전국 여행을 다니며 모은 관광책자가 즐비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 두 부부의 추억 도서관처럼 느껴졌다.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내놓으며, 6월 8일날 인천 월미도 녹화를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하시는 부부.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는 이들 부부가 규정하는 노년의 키워드는 의지와 선택, 열정인 듯 싶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익산문화재단 경영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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