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여년동안 호남 다스렸던 곳
터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집안의 대사 때마다 접하는 문제이다. 전문가가 평생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읽고, 스승을 찾아 평생을 헤매어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이른바 과학적인 답안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렇듯 수 천 년 동안 집요하게 터에 매달려 왔던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전라감영을 통하여 터에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른바 관련 책자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형기적(形氣的), 이기적(理氣的)인 용어는 가급적 지양하고 감지할 수 있는 것을 사실대로 정리하기로 한다. 한편 읽는 분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은 필요시마다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이 되겠다.
조선 500여 년 동안 호남지방을 다스렸던 터이다. 실제 구 도청 주차장 윗편 지점에 약200㎡(약 60평)내외의 양택터가 동서로 길게 맺혀있다. 음·양택을 막론하고 쓸 만한 터는 반드시 주 용맥을 제외하고 세 개 정도의 용맥이 반드시 들어온다. 전라 감영터의 주 용맥선은 북쪽에서(정확하게는 壬方)들어오고, 보조 용맥은 남쪽은 전주 고덕산 정상부(해발603m)에서 시작하여 능선을 타고 학봉과 흑석골, 싸전다리, 풍남문 중심주를 지나 감영터까지 곧장 들어온다. 총연장길이는 약 6.3㎞거리이다. 동편은 보조용맥이 동고산성 중심부(해발220m)에서 발원하여 기린로를 횡으로 관통하여 약 3.2㎞를 달려와 감영터까지 곧장 들어온다. 서편의 용맥은 화산 정상부에서 발원하여 1.4㎞를 달려와 이곳 감영터에 이른다. 건물의 좌(坐)가 되는 주 용맥의 발원은 충남 청양군 앵봉산 정상(해발350m)에서 시작된다. 금강의 바로 옆이다. 주 용맥은 백제 문화단지를 지나, 부여 장암리에서 금강을 1차 관통하고, 성흥산성 서편인 금성산, 임천에서 또다시 금강을 건넌다. 미륵산 남서편인 백제 무왕릉의 바로 앞을 지나 삼례, 전북대 중앙도서관을 기점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곳부터는 곧장 감영터에 이른다. 장장80여㎞인 200餘里를 달려와 자리를 만들었다.
얼마 전 전주시에서 구 전북도청 터에 전라감영을 복원한다고 발표했다. 터다지기 행사를 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주는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고 그 뿌리가 자못 깊다. 나라일이나 개인일이나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얕으면 번성하기 쉽지 않다. 번성한다 해도 오래가지 못하거나 수준에 미치기 어렵다. 터의 중요성은 수천 년 전부터 증명된 것이다. 전주가 뿌리와 문화를 하나씩 찾을 때마다 그만큼 발전과 안전과 끈기와 편안함과 포용과 베품과 마음의 소통이 그만큼 열릴 것이다. 이는 곧 터의 힘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선조들 지혜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제 터에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 들어서야 한다. 그래야 힘을 받는다. 주 출입문 역시 남쪽의 보조 용맥에 맞추어 문을 내야 한다. 그래야 오가는 사람들이 기분 좋게 기운을 받으면서 출입한다. 풍남문은 제 터에 제대로 들어섰다. 이는 당시 터의 정수를 아는 우리 선조의 배려덕분이다. 이제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부끄럽지 않도록 힘을 모으고, 하나씩 바르게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이제 우리 전북이 크게 도약하는 시기가 올려나 보다.
△최맹식 원장은 단국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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