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중국집·순대국밥 등 다양한 음식문화 한자리에 / 맛은 기본 후덕한 인심 '덤'…최근엔 한우음식점도 인기
김제시 금산면 원평시장은 세월을 비켜간 듯 했다.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식당과 마트, 여관, 약국, 농약사, 이발소, 방앗간, 미곡상회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2005년에 원평을 취재한 적이 있다. 10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2005년 여름, 국도 1호선에 접한 마을의 풍경을 취재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 원평이었다.
‘원평 주민들의 국도 1호선에 대해 갖는 애증은 각별하다. 정읍을 빠져나와 전주로 향하는 국도1호선 중간에 위치한 원평은 국도1호선에 웃고 울었다. 이곳 주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국도1호선과 애환을 함께 해왔고, 지금도 함께 숨쉬고 있다. 다른 면소재지와 마찬가지로 몇 해 전 면소재지 뒤편으로 우회도로가 생겼다. 국도1호선중 얼마 남지 않은 2차선 도로를 간직하고 있으나 정읍 옹동에서 4차선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이곳도 조만간 4차선 국도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원평시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편리한 교통 때문이었고, 원평시장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또 교통의 발달이라는 점이 아이러니 하다고 당시 기사는 적고 있다. 그러나 4차선 우회도로가 뚫리면서 더욱 쇠락할 것으로 예상했던 원평시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더라도 시장 곳곳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다른 읍면 단위의 정기시장과 마찬가지로 4일과 9일 열리는 5일장의 존재감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후덕한 인심은 그대로다. 그런 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음식점이다. 어느 음식점이든 푸짐하다. 원평에서는 ‘짬뽕 곱빼기’가 메뉴에 없다. 별도의 공기 1그릇 값도 메뉴판에 들어 있지 않다.
△외지인 유입으로 음식문화 발달
원평장은 한 때 전북에서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융성했다. 70~80대 어르신들만 해도 장날이면 사람들로 북적댔던 원평장을 기억한다. 완주 구이를 비롯해 정읍 산외·산내·옹동, 김제 금구·봉남 등지에서 원평장을 이용했다. 조선후기에 주막만 60개에 이르렀으며, 양복점만 8개인 적도 있었다는 게 원평장의 번성을 대변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원평의 향토사학자 최순식 선생은 생전에 원평장이 융성했던 이유로 평야지대와 산간지대 물건이 만나는 지정학적 위치를 꼽았다. 원평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물산과 사람이 집결하는 원평시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도로가 사통오달로 뚫리고, 시내버스·자가용이 생기면서 원평장이 ‘반짝 장’으로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은 오간데 없지만 오늘날 원평시장을 지탱하는 게 음식점이다. 원평터미널을 중심으로 옛 길을 따라 음식점이 즐비하다. 고만고만한 음식점이 줄잡아 30여개에 이른다. 농촌의 면 소재지에 이리 많은 음식점을 보유한 곳도 드물다.
작은 면 소재지에서 도시 못지않게 음식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원평에서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하는 최고원씨(김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외지인들과의 많은 교류에서 답을 찾는다. 일제강점기 때는 금(사금)을 좇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고, 천주교·기독교·불교·증산도 등 종교 관련 성지를 품고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 원평이란다. 관광지로도 각광받는 금산사를 끼고 있고, 전주 인근의 지리적 여건도 원평에서 맛집이 발달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외지인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지역의 고유 음식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음식문화도 자연스럽게 유입됐다. 같은 재료를 갖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음식을 만든다거나, ‘방하잎’처럼 경상도에서 주로 이용하는 식재료를 맛볼 수 있는 것이 그 예다.
△가정식 백반 ‘부길회관’
원평의 맛집 대부분은 서민적인 음식들이다. 백반과 중국음식, 국수, 순대국밥 등이 대표적이다. 장꾼이나 물건을 사기 위해 장을 찾는 사람들이 가볍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음식들이다.
최고원씨가 단골로 찾는 가정식 백반집이 있다. 복원을 거쳐 지난 7월 전북도기념물로 지정된 원평집강소 바로 앞에 위치한 ‘부길회관’이다. 최씨는 집강소를 찾는 탐방객들을 이곳으로 곧잘 안내한다. SNS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맛집도 많지만 최씨가 부길회관을 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집 같은 건강한 밥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깻잎, 호박, 꽈리고추, 가지, 파, 오이, 시금치 등 기본 재료들이 모두 텃밭에서 나온다. 된장 고추장 간장도 주인 박옥순씨(60)가 직접 담근다. 단호박찜 하나만 보더라도 손님의 건강을 생각하는 주인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엿을 바르지만, 이곳에서는 아카시아꿀을 바른다. 땅콩도 국산이다. 콩나물도 제 색깔 그대로다. 조미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 재료 본래의 맛을 느끼도록 차린 밥상이다.
이 집의 메뉴는 정형화되지 않았다. 텃밭에서 재료를 조달하기 때문에 제철 음식으로 식단이 짜이면서다. 모처럼 식당을 찾는 손님들에게는 그야말로 ‘복불복’이 되는 셈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미리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줄포의 50대 부부는 매주 수요일 이 집을 찾는 단골이다. 이 단골이 오는 날이면 더 많은 메뉴를 맛볼 수 있어 횡재를 한다는 최씨의 농도 이런 배경에서다. ‘음식 치장이 과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정갈하다. 음식은 정직한 것이다. 편안한 음식이 최고다.’ 이 음식점에 대한 최씨의 평가다. 이런 밥집이 꼭 지켜져야지 않겠냐는 생각을 곁들여서다.
△중화요리로도 유명
최씨가 추천한 또 다른 음식점은 ‘인정식당’이다. 상호로 백반집 같지만 실은 중국음식점이다. 바로 옆 신풍각의 원 주인이다. 경력 40년 베테랑의 이 집 주인 고광태씨(63)가 운영하던 옛 신풍각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전주에서도 많은 고객들이 찾을 만큼 유명한 맛집이었다. 교통사고로 음식점을 접은 고씨는 백반집으로 재기에 나섰고, 다시 전공인 중국음식점으로 바꿨다. 배달이 없고, 저녁 장사를 안 하는 게 이 집 특징이다. 음식점 주인이자 주방장인 고씨의 건강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인정식당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뉴는 해물국밥이다. 홍합과 바지락, 오징어, 대새우 등이 들어가는 국밥의 생명은 재료의 신선함이다. 탕수육 역시 좋은 고기를 쓴다.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좁은 공간이지만, 주방과 환풍기에 먼지 하나 걸치지 않을 만큼 청결한 점에서 주인의 음식 다루는 자세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짜장면 가격이 4000원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인정식당 바로 인근의 현 신풍각(주인 김용길·66)도 원평의 중국음식을 살찌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굴짬뽕과 물짜장이 이 집의 별미다. 쟁반짬뽕과 쟁반짜장, 탕수육도 신풍각의 잘 나가는 메뉴다.
△소고기 전문 음식점 새롭게 부상
원평순대는 순대의 대명사가 될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전주만 하더라도 ‘원조’까지 붙인 원평 이름을 단 순대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경기도 용인과 기흥 등 타 지역의 순대집에서도 ‘원평’의 상호를 단 곳이 있다. 그러나 정작 원평에는 순대 전문 음식점이 그리 많지 않다. ‘시골집’과 ‘원평 시골장터순대’가 그 명성을 잇고 있다. 원평 순대가 이름을 얻게 된 것과 관련, 최고원씨는 원평에서 가축시장이 발달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원평장이 번성했을 때는 ‘썩어빠진 동태눈깔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소·돼지의 내장 역시 원평에서 좋은 식재료였을 거라는 이야기다.
요즘 원평에서 잘 나가는 맛집은 단연 한우고기 음식점들이다. 김제시가 10년 전 재정경제부로부터 한우산업특구로 지정받은 후 청보리를 먹인 ‘지평선 한우’를 집중 육성하면서다.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워서 ‘입에 살살 녹는다’는 말이 절로 나온단다. 이런 한우 전문점들이 구 시장 외곽에 여러 곳 자리하고 있다. 지평선청보리한우촌, 청기와가든, 모악산한우마를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지평선청보리한우촌의 에는 주말이면 금산사 관광객들과 전주 등에서 찾아온 고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고기와 함께 육회 비빔밥이 이 집의 자랑이다. 원평은 이렇게 시장 주변의 서민 음식과 함께 대형 음식점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원용 선임기자
△부길회관(543-0802)=백반 6,000원 △우정식당(545-5990)=해물국밥 7,000원 △신풍각(542-3717)=굴짬뽕 8,000원 △지평선청보리한우촌(543-0076)=육회비빔밥(특)=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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