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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나의 골동품

구연식
구연식

나는 대학시절 고학생이었다. 하숙집 주인댁 자녀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가끔 주는 용돈은 금 쪽같이 아끼며 모았다. 아무리 모아도 학비는 턱없고 겨우 교재 사는데 조금 보탤 정도의 병아리 눈물만 한 돈이었다. 이렇게 적은 돈이었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사용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고향 집에 갈 때 아버지의 담배를 사다 드리는 일이다. 봉초 담배만 피우시다가 궐련을 받고 웃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기쁨과 뿌듯함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가 있으랴.

한번은 집에 갔다가 집에 시계가 없던 탓으로 기차를 놓쳐 낭패 본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대략 배꼽시계로 때를 맞췄다. 그래서 차라도 한번 타려면 너무 일찍 서둘러 오기 때문에 아주 오래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의 황사나 미세먼지보다 더 독한 길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시면서 오던 어느 날 익산역 부근에 있는 시계포를 지나다가 괘종시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동안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꽤 오래 모은 용돈으로 그 시계를 사다가 부모님께 안방에 선물로 걸어드렸다. 그간 눈에 띄게 줄거나 건너뛰기 일쑤인 담배 선물에 아닌척하면서도 많이 서운하셨던 아버지가 “우리도 부자가 되었다”며 아주 좋아하셨다.

그런데 괘종시계는 한 달에 두세 번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 그 시계 밥 주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어쩌다 밥 주는 때를 놓치면 시계는 허기져서 추의 진자 움직임을 멈췄다. 아버지는 시계 밥줄 때가 넘었다 싶으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하시던 농사일도 멈추고 집으로 달렸다. 그렇게 밥을 얻어먹은 시계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났다.

그동안 괘종시계는 죽다 살기를 반복하면서 나 대신 안방에서 50년 이상 부모님을 모시고 담배 연기와 된장찌개 냄새에 찌들며 세월을 보냈다. 어느 때는 텅 빈 집을 혼자서, 어느 때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 추위에 떨면서도 집과 부모님을 지켰던 효자(?)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시골집은 비어 있어 어쩌다 한 번씩 가서 부모님이 생전에 쓰시던 작은 농기구나 가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쓰시던 살림 도구들은 나의 콧날을 시큰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중에 몇 가지는 아파트로 옮겨 놓고 가끔 먼지를 닦아주며 부모님 생각에 한참동안 멍청하게 앉아있기도 하며 애지중지 관리한다.

괘종시계는 대학 시절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는 나의 다짐이며 초심이었다. 부모님께는 멀리 객지에서 공부 중인 큰아들 대신 지키는 초병이며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계가 시골집 안방에서 내 아파트 거실로 옮겨졌다. 신기하게도 시계는 지금도 잘 움직인다. 몇 백 년 세월 값을 하며 보관 가치가 큰 유물만 골동품은 아니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와 역사성이 있고 나름의 상징성이 깃들어있는 물건이 더 귀한 골동품이 아닐까.

나는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때가 묻은 물건을 잘 관리하고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집에 올 때마다 은근히 세뇌 시킨다. “율아. 네가 다 커서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 것 모두 너 줄 거야. 이 괘종시계도 네 것이니까 잘 보존해야 해.” 그 덕인지 괘종시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밥도 제가 준다며 아직 다 풀어지지도 않은 태엽을 감아준다. 저 괘종시계가 나의 골동품이 아니라 손자의 골동품으로, 손자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보존됐으면 좋겠다. 먼 훗날 “진품명품” 프로에 밥만 주면 살아서 열심히 움직이는 괘종시계가 출품되는 꿈을 꿔본다.

 

* 구연식은 무궁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교육자로 <수필시대> 를 통해 등단했으며 현재 신아문예와 전북수필문학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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