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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걷노라면

옛날에는 출 퇴근 때 주로 하이힐을 많이 신었다. 높은 구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주고 아랫배에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여 간강을 도모하고 경쾌한 걸음을 만든다. 나는 빵 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비만 일으키기 딱 좋은 초콜릿 식성이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의 유전자를 닮은 마른 체형은 굳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직장생활과 아이 넷의 뒷바라지는 잠시도 몸을 둘 수 없는 일상이어서 살이 찔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은퇴 후 사정이 달라졌다. 퇴직 후 허리디스크 시술을 받고 운동화를 고집하면서 걸음은 해삼 풀어지듯 힘을 잃었고 밤늦도록 TV와 달콤한 군것질을 즐기는 동안 편안한 옷차림 속 뱃살은 멋대로 살집을 키웠다. 마른 비만, 전형적인 노인 체형으로 변해간 것이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이대로 근력마저 떨어지면 아예 걷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요양원 신세 지게 될 것이고 겁을 주었다. 내가 설거지, 빨래, 청소 등 집안일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냐며 볼멘소리를 하니, 의지가 중요하다며 날씨가 더우니 새벽 운동을 시작하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만 꾸준히 하면 보너스를 주겠다는 미끼까지 던진다. 그때쯤이면 운동의 자율성 원리에 따라 나 스스로 멈추지 않고 잘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렇다고 내가 전혀 운동을 안 하고 지낸 것도 아니다. 라인댄스, 요가 등 한동안 운동도 열심히 했고 몇 가지 취미 활동도 즐겁게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모든 것이 시들해진 것이다. 젊은 날 정신없이 지낸 것도 지겨운데 다시 나를 얽어매는 시간의 구속이 싫었다. 이젠 화장하고 차려입고 외출하는 일들도 귀찮아졌다. 그래서 맘 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는 생각 속에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모든 활동이 소극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은 너무 편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이 갉아먹어 생긴 늙음이라는 증세였다. 남편의 제의는 꿩 먹고 알 먹는 일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힐스장을 기웃거릴 때 코로나가 또 말렸다.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컴퓨터와 TV 앞에서 자정이 넘도록 혼자 시간 보내기다. 그리고 쫓길 일 없는 늦은 아침까지 느긋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롯이 반납해야 하려니 괴롭다. 천변 산책길의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복면 수준의 마스크는 코로나 염려만은 아닌듯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 밑까지 깊게 쓴 마스크는 나를 알아볼 수 없다는 은닉성이 좋은 것이다. 요즈음 내가 누리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컴퓨터나 TV 앞에서 자정이 넘도록 혼자 시간을 보내다 쫓길 일 없는 늦은 아침까지 느긋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롯이 반납해야 할 것이 괴롭다. 아침 산책길은 꽃들이 어우러져 마치 나를 환영하는 사열대처럼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나는 두 손을 들며 미소로 답례한다. 시골 밭에서 성가시게 뿌리를 넓히던 개망초가 기생초를 만나 제 키까지 낮춰가며 안개꽃처럼 변신하니 참 아름답다. 내가 걸을 수 있는 동안은 모두 내 인생 황금기다. 드러난 파란 하늘 조각으로 아침 해가 한 뼘쯤 올라왔다. 와사주생(臥死走生-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이라 했던가? 잃었던 근력과 활력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나는 만보(萬步)를 확인한다. △ 김덕남 수필가는 대한문학, 에세이스트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교원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여섯 교우의 문향> 등이 있다. 그는 한국수자원공사 전국 물사랑 공모전 은상, 향촌문학상. 전주 기령당 충효앙양 글짓기 공모전 대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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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8 17:56

[금요수필]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방송국에 처음 입사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일이 노래곡을 고르는 일이었다. 라디오방송에서 가요는 사람의 신경과 같은 것인데, 아는 노래가 없었다. 사실 대학 다닐 때는 남성4중창 합창단과 관현악단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지만 대중가요와는 거리가 멀었었다. 겨우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목포의 눈물’뿐이었다. 그것도 아내가 부르는 것을 듣고 참으로 구슬프고 사연있는 노래인 듯해서 따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가요 공부를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음악실을 찾았다. 또 노트를 옆에 두고 모니터한 노래의 제목과 템포,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내용의 노래인지를 하나하나 적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고생한 덕분에 아침 프로그램에 적합한 노래와 낮과 밤에 어울리는 노래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이나 특별한 기념일, 또는 계절 따라 꼭 선곡해야 할 노래들을 알게 되었다. 전주(前奏) 길이는 얼마나 되고, 같은 노래라도 몇 번째 순서에 넣으면 더 좋겠다는 것까지도 나름대로 메모해두었다. 노래는 때와 장소, 분위기에 따라 다르고 선곡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곡 때문에 크게 실수한 일이 있었다. 1980년대 초,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전화나 문자 대신 엽서로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했다. 그러면 엽서에 사연을 소개하면서 희망곡을 들려주었다. 엽서가 많을 때는 7~8장을 한꺼번에 소개하고 대표로 노래한 곡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방송 전 PD가 직접 엽서를 내용별로 분류해 진행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신랑이 신부를 위해 마음먹고 신청한 곡이 엽서 분류를 잘못해서 최진희가 부른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라는 노래와 함께 엽서가 소개되고 말았다.‘ ‘떠나가버린 그대 때문에 내 모습이 야위어가요.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남모르게 가슴 아파요~’ 당시 이 노래는 인기가 좋아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방송이 끝난 뒤 신랑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몹시 화가 나 있었고 금방이라도 방송국으로 쫓아올 기세였다. 담당 PD를 찾는다고 하기에 전화를 받았더니 ‘야~ 이 자식들아, 우리 이혼하게 생겼다. 언제 내가 그 노래 신청했냐. 개XX들아!’ 알고 보니 노래를 같이 듣던 신부가 화가 나서 ‘그 여자와 헤어진 것이 마음 아파서 이 노래를 신청했냐?’며 대판 싸우고 이혼하자며 친정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노래 한 곡이 이런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면 훗날, 대중가요라면 백지였던 내가 가요 프로그램을 맡았고 어느 해는 18번이나 야외 공개방송을 한 일도 있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있을 때는 참가자들에게 반드시 강조하는 말이 선곡의 중요성이었다.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노래의 느낌이 다르니 선곡을 잘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실 선곡의 중요성은 일상생활에서도 필요하다. 70 잔치에는 흥을 돋우는 민요가 좋고, 술자리에선 상다리를 두드리며 부르는 풍각이 제격이다. 신나게 노는 노래방에서는 댄스곡이 좋고, 연인끼리 사랑을 나누는 자리에서는 감미로운 발라드가 어울린다. 가끔 모임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들이 있다. 박수로 기분 좋게 노는 자리에서 갑자기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땐 노래가 끝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술을 마셔야 한다. 여러 사람들의 자리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선곡하는 것이 좋다.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맞는 노래가 가장 좋은 음악이다. △백봉기 수필가는 온글문학회 회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이며 현재 전북문인협회 회장이다.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팔짱녀>, <해도 되나요> 외 <전북문학상> 외 다수를 출간했다. 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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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1 19:08

[금요수필] 아, 옛날이여!

하늘 높은 가을에는 내 가슴속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는 작은 그리움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선산이 바로 뒤에 있는 우리 집은 누가 ‘산직이’ 집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지는 안했지만, 자연스러운 산직이 집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살아 계실 때는 하루아침도 거르지 않으시고 산을 돌아보고 오시는 모습이 참으로 정성스러워 보였다. 시아버님(신석정)이 가시고 난 뒤부터 그 일이 우리 몫으로 넘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우리 내외는 그 정성이 반절도 안 되지만 아버님의 유지를 받드는 마음으로 산 돌보는 일을 열심히 했다. 야트막한 산오름은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조상님들의 묘를 둘러보고 부모님 묘 앞에서는 기쁘고 슬픈 사소한 얘기들까지도 낮은 소로 아뢸 수 있었다. 선산 밑에서 살고 있는 것이 나름의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우리 집을 지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면 오며 가며 꼭 우리 집을 들르게 되어 있었다. 추석날 때면 우리 집은 귀성객이 붐비는 대합실처럼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그 시절은 제대로 갖춘 식당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객지에서 오신 분들은 대부분 점심을 우리 집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살아생전 아버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은 ‘손님을 잘 대접해 보내지 않으면 가고 난 뒤에 후회한다.’고 하셨다. 그 가르침에 산을 찾는 일가분들은 꼭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가시도록 했다. 특히 추석에는 조상숭배 정신에 따라서 멀리 도회지에 사는 조카들과 질부들 그리고 그 아이들까지 삼대가 한데 묘소를 찾았다. 그러므로 넓은 마당은 금세 축구장도 되고 잔디밭 위는 씨름판도 되었다. 그렇게 모이다보니 거의 30여명이었다. 산에 성묘를 다녀오는 동안까지 식사 준비가 미처 안 되었을 때는 내가 총지배인이 되고, 손님들까지 합세하여 바쁘게 준비해야 했다.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나르다 보니 안 쓰던 그릇까지 총동원되었다. 거기에 곁들여 웃음꽃도 함께 피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반짝 열리는 도깨비 시장 같았다. 거실은 물론 방마다 상을 펴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의 힘들었던 얼굴들에 웃은 꽃들이 피었다. 그리고 맛있다며 자꾸만 추가 주문을 받으며 마치 잘 되는 식당 같은 분위기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마음에 얘기는 꽃을 피우고 얽히고설킨 핏줄들은 하나의 혈맥이 되어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물처럼 아름다웠다. 진한 가족애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뜨거운 피가 내 온몸을 타고 도는 듯하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식사를 하고 가야만 내 마음도 편안했던 그 시절이었다. 식사 후식으로 텃밭 울타리 과일들을 깎아 대접하고 나면 질부들은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하면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로 접시가 뒤집어졌다.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진한 가족애는 테두리를 만들어 주었다. 추석이라는 명절은 함께 모여 조상들도 숭배하고 자손들의 우애도 돈독히 다질 수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풍속인가? 우리 집 텃밭은 사계절 무공해 먹거리 보급장 역할을 한다. 앞으로도 우리 후손들이 조상님들 잘 모시고 번창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 김호심 수필가는 <한국문인>으로 등단했다. 현재 행촌수필이사, 석정문학과 운영위원, 부안문화원 시낭송 지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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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4 19:09

[금요수필] 바람 앞의 꽃잎처럼

심란한 마음은 언제나 어딘가를 향하게 한다. 무엇이 날 흔들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무던하게 넘기고 감당하기엔 내가 너무 날카로워져 있었다. 조용히 길을 나섰다. 아무 계획 없이, 다만 걷고 싶어서. 발길이 닿은 곳은 소양의 송광사. 문득 떠오른 그곳의 벚꽃길이 나를 이끌었다. 천천히 걸었다. 어깨를 스치는 바람, 머리 위로 내려앉는 꽃잎들. 그건 꽃비였다. 나에겐 그저 조용한 위안일지 몰라도, 꽃잎에는 삶의 끝자락을 맡긴 바람일 것이다. 바람 한 자락에 운명을 실은 그들의 떨어짐은, 찬란한 죽음이자 마지막 눈물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으며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 꽃잎은 저마다의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흩어진다. 누구는 바람 속을 유영하듯 길게 선회하고 누군가는 솟구쳐 빙빙 맴돌다 사라지고 또 어떤 이는 힘없이 그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 흩날림 속에서 수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교단을 지키던 동료들, 언제나 이름만 부르면 돌아보던 제자들, 그리고 가끔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선한 인연들. 그들은 어떤 바람 속에 있을까. 때로는 짧은 인연이 깊이 박히고, 정작 오래도록 곁에 있었어도 애써 떠올리려니 희미한 잔상만 아련한 이도 있다. 잊고 지낸 이름들을 꽃잎 하나하나에 담는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저린다. 스무 해 넘게 지켜온 교육자로서 신념이 학부모의 몰이해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제도가 너무 슬프다. 교감이라는 자리가 항상 부담스럽기도 하다. 교감이라는 자리는 늘 어정쩡하다. 교사이되 교사가 아니고, 행정가이되 행정가도 아니다. 교사의 언어를 알면서도, 때로는 관리자다운 단호함도 가져야 한다. 교장, 수십 명의 동료 교사들, 수백 명의 학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어느 땐 충실한 중재자가 되어야 하고, 때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완충역이 되어야 한다. 제일 어려운 것은, 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나는 이 자리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존재일까?” 생각해 보면, 꽃을 피운 것도, 흔들어 흩트리는 것도 결국 바람이다. 시련처럼 느껴졌던 학부모 민원, 억울했던 오해, 설명되지 못한 내 진심도 어쩌면 나를 더 단단히 빚어내려는 바람일지 모른다. 인생의 바람은 혹독하기도, 따뜻하기도 하지만, 멈추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 바람이 있었기에 나는 멈추지 않고 늘 교단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벚꽃은 떨어지며 완성된다는 말이 있다. 피어나는 순간의 화려함도 아름답지만, 진정한 감동은, 꽃잎이 허공에 자신을 맡기는 그 순간에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찬란한 성공보다, 흔들리고 부딪히면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그 과정이 진짜 삶의 모습 아닐까. 바람에 흔들린 시간은 무의미하거나 헛되지 않다. 그 흔들림 속에서 삶의 뿌리는 더 깊어진다. 바람은 경륜인 것이다. 오늘, 이 길 위에서 나는 그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벚꽃길을 걸으며 많은 얼굴이 스쳐 갔고, 많은 일이 떠올랐다. 아픈 기억도, 그리운 순간도, 이제는 놓아야 할 것들도. 그 모든 흔들림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내일은 또 다른 바람이 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을 맞으며 자신을 지탱하고 있으리라. △ 윤가원 수필가는 현재 전주 중앙여고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는 교육자이다. 올해 전북특별자치도문인협회의 《전북문단》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문단의 기대와 촉망을 받는 신진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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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9 18:02

[금요수필] 걷고싶다

인류는 질병과 공존해 왔다. 바이러스는 소멸과 변종을 반복한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은 지구촌을 극도의 비상사태에 빠뜨렸고, 생활의 전반이 통제되었다. 전면적인 역병의 대유행에, 대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이제는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올여름 무더위는 유별났다. 절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굴러간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고들고들한 '선들바람에 생의 의욕이 샘솟는다. 수확을 미룬 논에는 팬 벼 이삭이 눌눌하고, 대추나무는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풍년이다. 내 것이 아니어도 사방으로 넉넉한 들 풍경이다. 동생처럼 예뻐해 주는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 언제나 소녀처럼 해사 한 얼굴로 다정하게 곁을 내주는 이 작가의 작품에 유난히 붉은빛이 많이 보인다. 태양을 가슴에 담고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는 모습과 일관성이 있어 보였다. 전시회장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전해오는 작가의 숨결,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뜨거운 마음을 읽는다. 도회적이고 저항적인 전율이 느껴지는 유화가 인상적이다. 황토색 '토우'는 친밀감을 더한다. 섬세한 표정과 움직일 듯 적나라한 동작에 손잡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수채화 '가을이 오는 소리'는 화폭 가득 가을이 풍성하게 들앉았다. 수채화가 주는 담백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작가들은 언제나 느껍게 작업을 할까? 만족한 작업을 하면, 그의 혼이 녹아든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감동할 것이다. 작가들은 제각각 의 빛깔과 모양과 품성으로 작품이라는 그릇을 통해 의미를 발산한다. 행복과 슬픔을 채색하고 고통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자기의 작품 이 결국은 그를 고뇌에서 구제해 더 높은 경지로 승화시키리라. 가을 정취가 유유하다. 일상을 쪼개 다른 이의 예술 세계를 엿보는 것도 창작하는 이의 모습일 테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지지부진한 자신의 열의를 일깨워 보는 것도 좋으리라. 신록만 아름다운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 알록달록한 가을이다. 주고 되돌려 받지 않는 나무의 일방적 사랑, 사방이 온통 빨강과 노랑의 계절이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기억들. 석조전의 가을 전시회, 계절이 충만한 국립중앙박물관 뜰의 구석구석, 행위예술과 거리 음악회가 끊이지 않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즐비하던 소극장들, 경복궁 앞길로 즐겨 오가던 정독도서관, 우후죽순처럼 뻗어 오른 대형 건물들 사이에서도 꽃가게의 꽃들은 다채롭고 생생했다. 이 가을이 행복하다. 열정 가득한 예술가의 붉은 가슴을, 작업 이면에 흐르는 땀과 수고를, 고뇌하고 성취하는 아름다운 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며 아직도 감동하는 고운 정서를 간직하고 있구나 싶다. 바람 부는 거리, 샛노란 은행잎이 꽃비처럼 내리는 축복을 머리에 어깨에도 받고 싶다. 이 거리를 훌훌훌 걷고 또 걷고 싶다. 작품 소개를 찾아 런던 시내를 자꾸만 걸었다는 찰스 디킨스처럼 걷고 싶다. △ 이해숙 수필가는 '수필시대'로 등단 했다. 행촌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전북문협, 영호남수필 전북수필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수필집 <진달래 꽃술이 있다>를 출간했다. 시흥문학상과 완산벌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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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8 18:19

[금요수필] 산행하던 날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시간 되겠어? 드림빌리지 주차장에서 만날 까?" 정다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흔쾌히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서 둘러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려고 하니 버스가 오지 않았다. 미안한 마 음이 들어 30분쯤 늦을 거 같아 숲속에서 편히 쉬고 있으라고 문자를 보냈다. 숲 입구에서 기다린다고 답장이 왔다. 편백 숲길 정류장에서 내려 막 입구를 들어서자 친구가 입구에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친구가 공매사이트를 통해 사 놓았다는 드림빌리지가 있는 상관 편 백 숲이었다. 만학도로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친구는 등산을 매우 즐 겼다. 호젓하여 혼자는 등산이 어렵다는 길, 인적이 드문 길로 나를 안내한다. 자주 오는 등산객들도 모를 법한 길이었다. 그날도 등산객 이 단 둘이었다. 길 위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갈이나 돌이 없이 푹신푹신한 흙이 넉넉히 깔려 있었다. 흙길이라서 산행이 무척 편했다. 또 조용하여 자연과 대화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등산객 이 낸 길이 아니고 산주가 낸 임도인가 싶었다.사방이 온통 진한 녹색으로 뒤덮인 나무가 우거져 있어 공기도 무척 신선하였다.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기분도 상큼했다. 제 절로 우리는 자연과 동화되어 한 몸이 되었다. 바람결을 따라 은은히 풍겨오는 풀 냄새, 꽃향기가 후각을 흠뻑 적셔 주었다.어디선가 산 더덕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친구는 어딘가 더덕이 많이 있나 보다고 말했다. 100년 넘은 산삼을 캤다는 기사가 인터넷 에 떴어. 감정가가 1억 8천만 원이라고 했더니, 우리도 산삼을 캐러 다닐까 했다. 늙어서 과욕을 부리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했다. "나이 들어 이렇게 여유롭고 편안하게 사는데 더 욕심내면 안 돼."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어.”우리는 서로 맞장구를 치며 또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바로 여기가 비 가 몹시 오던 날 이 길로 차를 몰고 내려오는데 바퀴가 빠져 산속에 차를 3일이나 숙박시켰다가 나중에 가서 운전을 시도했더니 빠졌다며 비가 오니 흙이 질퍽하여 자동차 바퀴가 빠졌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숲속에 여기저기 고운 자주색의 꽃을 피운 오동나무가 보인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다는 옛말이 있다. 귀여운 딸이 커서 시집갈 때 오동나무로 장롱을 짜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오동나무가 각광을 받지 못한다.우리는 자연인이 되었다. 산에 나무와 풀이 싱그럽고 꽃이 아름다워 이 산을 자주 찾는다는 친구다. 친구는 야생화에 관심이 많아 산을 오 르면서 연신 꽃 이름을 가르쳐 준다. 꽃 빛깔이 곱다고 하면서 감탄하 기도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낮은 자세로 쭈그려 앉아 사진도 찍는다.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자연을 즐기면서 산행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다리 아파서 걸을 수 없는 노인이 얼마나 많은가? 걸어 다닐 수 있으니 아직도 가슴이 뛰고 설레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걸을 수만 있다면 걸어야 한다. 힘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매일매 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리라. △전원길 수필가는 2015년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은빛수필문학회 회원이며 전주시 봉사활동수기공모전 꽃심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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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1 18:46

[금요수필] 앵두나무의 추억

친구가 청실배꽃 사진을 여러 장 보내 왔다. 반가움에 보고 또 보기를 여러 번 했다. 푸른 빛의 처연함을 보여주는 배꽃과는 달리 앵두꽃은 그저 돌쟁이의 뽀얀 피부로 배시시 웃는 것 같은 모습이 다르다. 우리 집 앵두나무는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다. 익는 구분이 애매한 흰 앵두지만 같이 살며 지켜본 세월에 윤기가 날 정도로 금방 알 수 있던 앵두의 추억이 40년을 훌쩍 뛰어넘어 바로 엊그제 일 같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댁에 처음 인사를 갔던 날 시어머님은 앵두나무 곁에 서 있다가 "어서 오너라" 한 말씀만 하셨다. 그이와 시어머니, 그리고 일을 돌보는 애, 그 옆의 꼬마가 앵두꽃과 어울려 모두가 하얗게 보이는 봄날이었다. 매일 지치도록 보던 봄꽃이건만, 그 꽃들과는 다른 다소곳함이 배어있었다. 그 봄에 결혼 후 신방으로 꾸며질 방이었는데, 살던 아래채 사람들의 이사가 늦어져 임시로 머문 방 창을 열면 바로 눈앞에 앵두나무가 보였다. 창가에는 연둣빛 콩나물 콩만 한 앵두가 달려있었다. 피난 짐 같은 혼수 보따리가 거실에 가득 쌓여있었는데 주문해 놓은 가구점에서는 언제 가구를 들일 거냐고 매일 전화가 왔으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리 없이 대문만 드나들 뿐이었다. 메주콩만한 앵두가 우윳빛으로 변해 가는 무렵에야 신방이 꾸며졌다. 길지 않았지만, 신방에 들기까지 지루했던 그 기간, 앵두나무를 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어느새 초록 잎 사이에 빼곡히 박힌 앵두가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옆의 빨간 보리수 열매와 함께 따서 큰 유리 항아리에 술을 담아 광으로 옮겼다. 해마다 담근 술이 반쯤, 혹은 가득 담겨 있는 항아리들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오빠가 오신다는 연락이 왔다. 외출준비를 하던 꼼꼼한 시어머님은 기어이 당신 손으로 주전자에 술까지 담아놓고 가셨다. 아버지 같은 오빠들은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였는지 기분 좋은 모습으로 작은 주전자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금방 술이 바닥났다. 한 주전자, 두 주전자… 줄어든 술 항아리. 오빠들을 술꾼으로 알면 어쩌나? 헤픈 며느리로 알면 어쩌나? 나무라시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분명 어머니 몫인 광 열쇠, 끼니때마다 필요만큼의 쌀과 부식을 내주시고 문에는 항상 자물쇠를 잠그는 광에 몇 번을 드나들 것인가? 겁이 나서 큰 바가지에 물을 받아 설탕을 한 움큼 넣고 저어 술 항아리에 부었다. 진분홍에서 연분홍색 색깔 술이 되었다. 광 문을 자물쇠로 잠근 다음 열쇠는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한참 뒤, 술이 필요한 때에야 부패한 술 항아리를 발견하고 원인을 궁금해하셨지만, 얌전한 며느리로 자리매김 해가는 나를 의심하는 빛이 조금도 없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30년 가까이 지났다. 앵두나무가 있던 집도 떠나왔다. 당연히 해마다 거르지 않고 담던 앵두 술도 떨어진 지 오래다. 그때 어머님은 정말 술이 부패한 원인을 모르셨을까? 궁금해서 고개를 갸웃해 본다. 이젠 나도 며느리를 맞은 지 오래된 시어머니가 되었다. 우리 며느리라면 그 상황이 될 때 어떻게 했을까? 앵두꽃같이 소박하고 조용한 며느리가 생각나는 날이다. △이용미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했다. 저서로는 수필집 <그 사람> <창밖의 여자> <물 위에 쓴 편지> 등이 있다. 행촌수필 회장, 수필과비평 전북지부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진안문학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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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9 18:14

[금요수필] 금쪽같은 부모님

나는 종종 시내 나올 때면 대중들과의 소통과 운동 효과를 위해서 자가용보다는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그리고 옛 추억도 생각하며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도 있다. 오월의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던 어느 날, 버스 창을 통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도심의 한가운데서 문득 내 시선을 붙잡았다. 고개를 드는 순간, 잿빛 건물 외벽에 선명하게 쓰인 문구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하얀 바탕에 굵은 글씨로 또렷하게 새겨진 '금쪽같은 내 부모님'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녀를 향한 애틋함과 무한한 애정이 담긴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말에는 익숙하다. 그런데 금쪽같은 부모님'이라니? 어딘가 낯설면서도, 심장 깊은 곳을 툭 건드리는 따뜻함이 밀려왔다. 자식만 귀하다 여겼던 그 마음, 정작 우리를 있게 하고 평생을 헌신하신 부모님께 돌려주는 역발상이지만 당연해야 했을 마음이기에, 이제야 이런 문구를 보고 조금 부끄러워진다. 오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멀리 보이는 그 글귀를 보느라 버스 승강장이 지나치는 것도 모른 채 그 문구를 한참 되새겨보며 상념에 젖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금쪽같은 부모님'이 계셨기에 우리가 존재한 것이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지붕처럼, 흔들리는 삶의 고비마다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부모님, 젊은 날에는 그분들의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와 어리석은 고집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당연한 듯 받기만 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 와서 지난 삶의 굽이굽이를 돌아보니, 그분들이 나에게 베풀었던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금쪽'같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자식들을 위해 잠 못 이루던 밤들, 그리고 오로지 자식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샘에서 막 떠온 맑은 정한 수 한 사발 떠 놓고 두 손 비비며 애끓는 마음, 그 모든 것이 모여 오늘의 내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 가슴 한편이 시큰해진다. 때마침 5월,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달이다. 흔한 세파에 휩쓸리기 쉬운 시기지만, 건물 외벽의 문구는 나에게 '가정의 달' 의미를 조용히 일깨워주었다. 부모님을 향한 마음은 특별한 날에만 떠올릴 것이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늘 감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도리가 아닐까? 북적이는 도심 속에서 만난 '금쪽같은 내 부모님' 그 짧은 글귀가 준 울림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내 삶의 가장 빛나고 귀한 보물은 다름 아닌 부모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부모들의 '금쪽같음'을 마음 깊이 새기고, 감사한 마음을 되새기며 우리 자식들도 그 동안 삶을 반추(反芻)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효도는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부모를 편안하게 해드리는 행위다. 효도는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가족의 화합을 이루고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가치다. 부모는 자녀를 낳아 키우고 헌신하며, 자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는다. 효도는 이러한 부모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의 표현이다. 효도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감을 강화한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더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명심하자. △신백식 수필가는 전북대학교 겸임교수(공학박사) 한국전력 전북지사장 역임했다. 현재 은빛 수필 회원 전북 애향본부 이사와 전북 노인회 부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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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2 18:32

[금요수필] 거울 속의 거울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일단 눈으로 보면 확인이 된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고 확정할 수도 없다. 앎과 인식의 첫 단계가 바로 보는 것. 거울에 비춤과 거울이 다시 되비추는 것이다. 이를 '미러링'이라 한다. 몽골에서의 시간은 초원과 야생과 사람에 대한 미러링의 경험이었다. 단체생활을 가장 오래 해본 여행길, 열악한 환경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이 자고,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거울로 내가 대비되어 비쳤다. 그동안 무지로 차폐되었던 것들이 내 앞에서 파다닥 깨어나 거울처럼 나타났다. 여행은 대면의 시간, 타자를 만나고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길든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길트기 행위이다. 보고, 듣고, 즐기고, 사귀기 위하여 인간은 여행이란 채널을 가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민낯을 보는 데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접하면서 나를 객관화시켜 볼 기회이다. 타지에서의 삶은 일 상의 가면이 벗겨지기 쉽다. 지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낯익은 사람의 낯선 모습, 천사가 되기도 하고 비호감이기도 했다. 타자의 부 정성과 변모가 경험을 만들어 낸다. 먼발치에서 피상적으로 좋게만 보였던 사람이 그것이 아님을 보았고, 나름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 내 좁은 편견이었음도 알겠다. 선입견으로 오류를 범한다. 선입견은 안개의 눈이다. 적당히 포커 페이스 하는 일상의 사람들, 그건 진실을 숨긴 얼굴이다. 그러나 일상 의 바깥에서는 몸의 실체를 만나기 일쑤이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익숙한 것에서부터의 일탈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실험일 수 있다. 나는 노점상 앞에서나, 고위 간부 앞에서나 똑같은 인성과 태도를 지니는지? 그럴싸한 분장으로 내 본성을 감추지는 않았는지? 나는 내 관점에 규정지어 놓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만 보아도 얼마짜리인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름 까지 펼쳐보는 일이 아닐까? 아름다운 마네킹 뒷면에 수많은 핀이 꽂혀있듯이 뒷면의 숨겨져 있는 것까지 다 읽어내야 제대로 그 사람을 본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속성을 알게 되고 나는 성장해갈 수 있으리라.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듯 타인에 비친 나를 본다. 거울은 외면뿐 아니라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창이기도 하다. 거울을 단순히 사물 그러니까 물리적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리막 정도로 간주하면 그 사람은 거울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타인을 거울에 비추어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를 성찰하는 작업이다. 외출할 때 거울 앞에서 화장한다. 밖에서도 한두 번은 거울을 본다. 그 봄은 외관의 매무새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친다. 내면은 별로 점검하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하자. 내·외면 모두를 들여다 보는 거울 보기를 하자. 타인의 거울에 나의 단면을 속속들이 비추어 보자. 거울아, 거울아 나를 훤히 비춰다오. 몽골 여행을 통해 커다란 거울 하나 선물 받았다. △이정숙은 정읍에서 출생했다.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국제PEN한국본부 전북지역위원회장과 온글문학회, 가톨릭문우회, 문예가족, 한국미래문화연구원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 <꽃잎에 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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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0 18:49

산책길에서 기운을 받는다

유명한 황톳길을 걷기 위해 일찍 나서 오전 10시 30분쯤 강천산에 도착했다. 순창 '강천산 맨발 산책로'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요즈음 맨발 걷기가 화두다. 초저녁쯤 인근 산책로나 학교 운동장에서는 맨발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강천산 정취가 눈 부셨다. 나도 여러 사람 틈에 끼어 걸었다. 맨발로 황톳길을 처음 걸으니 발바닥이 깔깔했지만 접지 관절부분은 나름 시원했다. 계곡 옆으로 쭈욱 이어지는 길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서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숲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겨서 걷기는 아주 좋았다. 시원한 산들바람에 몸을 내맡기다 보니 어느덧 종점에 다다랐다. 구장군 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웅장한 풍경이라 사진으로 남겼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맨발 걷기를 마친 후 세족장에서 발을 씻었다. 맨발 걷기 효능을 알리는 게시판이 눈에 띄었다. 제2의 심장이라 불리는 발이 신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는 반드시 '매일 맨발 걷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동안 지척에 있으며 경사가 아주 완만한 건지산을 자주 올랐다. 나뭇잎 사이로 멀리 보이는 유난히 푸른 하늘을 보며 걸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트로트'를 듣는 사람, 둘이 또는 끼리끼리 도란도란거리며 걷는 사람들 모두가 의욕이 넘쳐 보인다. 한참을 걷다 맨발로 걷는 부부와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맨발로 걸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나는 인사를 건네며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요. 너무 좋아요. 한번 걸어 보세요". "어떤 점이 좋은데요?" 하고 재차 물었다. "잠이 잘와요. 혈액 순환도 잘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 부부는 살포시 웃었다. 송천동에 산다는 그 부부가 맨발 걷기를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 주변 사람들과 건강에 대한 얘기가 다반사였다. 아내는 허리를 위해 구기 운동은 그만하고 걷기만 하라고 신신당부다. 언젠가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맨발 걷기의 장점을 소개했는데, 이후 많은 사람이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건강은 다리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맨발 걷기 대중화의 중심에는 '맨발 걷기 전도사'로 알려진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가 있다. 박동창 회장은 불면증으로 몇 달간 잠을 설치다가 맨발 걷기 첫날에 꿀잠을 잤단다. 2시간 정도 맨발 걷기를 했을 뿐인데 놀라운 결과라고 했다. 이후 5년 동안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이 좋아진 것을 직접 체험하고 '맨발 걷기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감기도 걸리지 않게 되었고, 불면증과 어지럼증도 없어졌으며,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으로 회복됐다고 했다. 그는 맨발 걷기가 자기를 살렸다며 '맨발로 걷는 즐거움'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말초신경이 모인 발, 매일 걸으면 몸 곳곳이 좋아진다며 처음부터 무리하면 안 된다고 당부까지 했다. 시간도 처음에는 10분, 20분 정도에서 하다 30분, 40분, 50분 차차 늘려 가야 좋다고 했다. 걷는 자세도 바르게 유지하며, 접지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가만가만 걸었다. 발바닥이 가시에 찔릴까 노심초사하며 길바닥을 주시했다. 때로는 작은 배낭에다 물, 우의, 간단히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다. 학교 운동장도 걷기 장소로는 아주 좋다. 함께 걷는 친구는 계절과 관계없이 맨발 걷기 후에 반드시 찬물로 발을 씻었는데, 이는 겨울 동상을 방지하는 수단도 된다고 했다. 바른 자세로 산책길 맨발 걷기를 하며 자연의 기운을 받는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며, 계절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맨발 걷기는 나의 정신과 육체 건강에 특효약이다. △하광호 작가는 '한국신문'으로 등단한 수필작가이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이다. 수필집 <그리움은 놓지 않는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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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3 18:16

탑사와 어울린 봄날

스트레스가 쌓인 주말이다. 둘째 사위와 딸들을 데리고 서둘러 마이산을 갔다. 외손자 뒷바라지에 지친 몸을 풀어주고 싶었다. 산과 들은 온통 꽃들의 향연이다. 남 마이산 쪽으로 향하니 입구는 벌써 차량들이 주차 대기 중이었다. 벚꽃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하얀 지붕을 만들었다. 가게 앞엔 5색 등불을 켜고 오가는 길손을 유혹했다. 약초 파는 곳을 지나니 겨울철 참나무에 매달려 녹색을 띠고 덩굴처럼 기생하는 약초 겨우살이를 파란 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조금 위쪽으로 오르니 해물파전, 도토리묵, 산 더덕구이, 참나무 장작 돼지갈비구이 옆에 노릇노릇 구워진 메추리가 코를 자극한다. 옥수수 막걸리도 줄지어 서 있다. 숯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내저으며 도토리묵을 장에 찍어 먹는 모습들은 봄꽃 놀이의 일품이다. 길 오른쪽 낮은 물막이 댐에 고인 물이 물받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늘어진 벚나무 가지에 매달린 벚꽃들이 바람에 물결 속에서도 춤을 춘다. 전나무 푸른빛과 휘어진 허리의 물그림자가 출렁인다. 연못 가운데 금당사 5층 석탑도 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크게 파손된 것을 이 자리로 옮단다. 금당사 괘불탱화는 넓은 천 가운데 커다란 관세음보살을 두고 있다. 야외에서 큰 불교 행사가 있을 때면 걸고 예배했다. 가뭄 들 때는 탱화를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렸다고 한다. 넓은 저수지가 눈앞에 있다.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귀가 보이고 흰 벚꽃 터널과 파란색 지붕의 찻집에선 오리배가 헤엄치니 지난해 마른 갈대가 머리를 숙이고 끄덕인다. 오리배 탄 사람들은 열심히 스마트폰에 담으며 산과 벚나무 물이 어우러지고 오리배 속에 청춘 남녀노소 해맑은 모습들이 물에 비친다. 마이산 석탑은 1885년 입산하여 솔잎 등으로 생식하며 이갑룡 처사가 30년에 걸쳐 쌓았다고 한다. 탑을 쌓을 때는 주변을 천연석으로 쌓았지만, 천지탑 등 중요한 탑들은 팔도의 명산에서 수집한 돌들이 한 두개씩 같이 쌓아 심묘한 정기를 담고 있다.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이용하여 조형 양식으로 정성과 솜씨가 돋보인다. 탑군(塔群) 중에 천지탑 등은 바람에도 약간 흔들릴 뿐 무너지지 않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겨울철에 탑 꼭대기에 물 한 사발 떠 놓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고드름이 거꾸로 하늘을 향해 솟는 묘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최초에는 120기의 탑들이었는데 지금은 80여 기만 남아 있다고 하니 긴 세월 속에 변화를 맞이했음이 짐작된다. 대웅전 넘어 탑사 왼편으로 보이는 벚꽃이 미쳐 잎이 피지 못한 나무들을 바쁘게 재촉한다. 탑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탑사 경고문 옆에 작은 물레방아가 도는 사이로 약수가 흐르고 있다. 파란 바가지로 기암에 놓여있어 물을 삼키니 가슴의 냉기가 목부터 가슴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탑사 남쪽 마이산을 바라다보면 성인 키 네길 정도 웅덩이가 파인 홈이 있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에 두 무더기 돌탑이 안에 안치되어 있다. 저곳은 어떻게 올라가 쌓았을까 생각해보니 답 이 안 나오는데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꽃과 사람들이 탑사와 어울려 행복한 봄날의 하루였다. △김종윤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나브로 가는 길> 등이 있다. 현재 장수문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등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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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18:46

신발에 대한 애증

나와 동행하며 나를 호강시켜 준 신발을 기억한다. 아니 신발이 나를 기억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발자취라 한다. 신발은 내가 걸어온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 비밀을 아무에게도 실토하지 않는 착한 침묵으로 나를 지켜준다. 신발은 내 모습이며 나와 동행하는 유일한 친구다. 신발은 나의 아픈 곳을 미리 알고 내게 신호해 준다. 또 신발은 용케도 나의 옷을 돋보이도록 유혹도 한다. 초라해 보일 때는 굽이 높고 광채가 나는 금박이 하이힐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그뿐아니라 하루를 끌고 가는 그림자처럼 나를 버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지고 있을 때도 신발은 멀리 있지 않고 내가 퇴원할 때까지 내 옆에서 기다려 맨 먼저 위로해 주며 내 몸의 중심을 꼭 붙잡고 집으로 동행해 준다. 체중의 변화도 신속하게 감지하며 내가 편안하게 보행을 하도록 노력도 한다. 척추협착증 통증에 속도를 맞춰 내 집까지 기억하고 끌고 간다. 돌멩이나 움푹 파인 길도 용케 비켜 가는 마술사 같은 시력을 갖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신발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다. 가슴에 옷핀으로 손수건을 접어 달아주더니 벽장에서 꽃무늬 고무신을 꺼내 주었다. 내 발이 신발 속으로 쏙 들어가니 헐렁했던 기억이 난다. 신발이 벗겨지지 않으려면 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한다는 걸 일주일 지나서야 터득했다.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내 발과 고무신의 크기가 맞아 서로 사이좋게 놀았다. 고무줄놀이와 자치기, 숨바꼭질 때도 신발은 나를 벗어놓고 달아나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 흙 범벅이 된 신발은 지푸라기 서너 개 똘똘 말아 빨래비누로 닦으면 광채 나는 신발은 나를 기쁘게 한 유일한 나의 짝궁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추석이 다가오면 시장에 다녀오신 어머니 가방에서 '색동 코고무신'을 꺼내면서 공부를 잘해야 또 사준다는 강제적 명령도 잊지 않으셨다. 중학교 교복을 입을 때도 검정 운동화를 사주셨고, 앞에 끈이 있는 멋쟁이 운동화는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사주셨다. 현관 신발장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가 문을 열고 보니 수십 년 동안 내 흔적이 담긴 신발이 나를 반기듯 추억을 되살려 놓는다. 맨 꼭대기에 발목이 무릎까지 닿는 부츠가 흙 밟은 흔적도 없이 얌전하게 포개 앉아있다. 딸이 생일선물로 보낸 신발이다. 나이 들어 걷기도 힘든 엄마의 모습은 모른 채 딸 중심의 생각으로 보낸 선물이다. 딸에게는 잘 신고 있다고 늘 말한다. 가장 외로운 신발이다. 신발이 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신발을 떠받쳐 줄 미니스커트도 옷장에서 사 라진 지 오래다.부츠 옆에 흰 고무신이 빛바랜 시간을 안고 틈바구니에 끼어있다. 자녀들 결혼 때 한복차림을 해야 하는 부모는 구두 대신 고무신과 버 선을 신어야 했다. 신발에 매일 고맙다고 말한다. 신발장에 내 신발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사자(死者)의 신발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슬픈 신발의 운명이지만 신발은 반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발에게 "네가 있어야 내가 산다"고 눈인사를 잊지 않는다. 요즘 늘 나와 함께 함께하는 신발은 운동화다. 그래서 옷과 잘 어울리도록 운동화를 색깔별로 몇 벌 샀다. 편하게 노닐 때는 운동화가 나를 사드락, 사드락 끌고 다닌다. 이제는 내가 운동화의 눈치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몸이 되어 간다. 운동화와 친해졌으면 좋겠다. 신발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람으로 살 것이다. △이소애 시인은 한맥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샘문학동인, 전북시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보랏빛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감성시에세이' 외 다수가 있고, 한국문학비평가협회작가상과 전북예총하림예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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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3 18:58

[금요수필] 금고에 갇힌 신사임당

신사임당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려운 경제난으로 피해서 잠을 자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누군가 납치해 감금을 시켰는지 요즘 얼굴 보기가 어렵다. 신사임당 초상의 5만 원권 지폐가 2009년 6월 발행되었으니 벌써 16년째다.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돈의 최초 여성 모델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남자가 아닌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신사임당을 선정하는 데 일부 여성계 반발이 있었다. 나는 다음 3가지를 들어 찬성이었다. 아들 '율곡'을 훌륭하게 키워 역사적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 '사임당 자체'가 시서(詩書)에 능통한 문장가였다는 것, 자신이 서화에 능통하며 현모양처였다는 것 3가지만 해도 5만 원권 지폐에 올릴 조건은 중분하다고 본다. 요즘 들어 손주들에게 용돈이나 세뱃돈을 주려면 신경이 쓰인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5만 원권을 선호하고 있으니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다. 금년 설날이었다. 손주들이 훌쩍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할머니인 아내가 세뱃돈을 주면서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언니는 고등학생이니 5만 원, 너는 중학생이니 3만 원이면 어떻겠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둘째 손녀가 하는 말이 '세뱃돈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이왕이면 신사임당을 받았으면 좋겠어요."라고 은근히 큰돈을 기대했다. 요즘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도 세종대왕을 내밀면 입을 삐쭉거린다. 적어도 신사임당 지폐 한 장은 주어야 빙그레 웃어 보이는 세상이니 도대체 이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정부는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것들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 시장경제가 휘청거리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맞물려 있으니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거리다. 그런데 불안한 자산가들은 일단 '현금확보'라는 비법으로 5만 원권을 인출하여 안방 금고에 가둬놓고 있는 실정이니 이걸 어찌하랴. 전년도 상반기 대비 5만 원권 환수율이 71%에서 16%로 급강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을까? 시장경제가 빈혈 증세에 허우적대고 있음은 분명하다. 5만 원권을 긴급하게 풀어가며 극약처방에 나서는데도 도무지 차도가 없어 보인다. 서민들은 물론 중소기업들까지도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니 걱정된다. 어디를 뚫어야 돈줄이 원활하게 돌아갈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대책 마련에 고민을 해 볼 일이다. 하루빨리 나라도 탄핵 적국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경제도 살아나 신사임당이 금고 가득, 호주머니 가득 날개가 돋쳐 만발했으면 좋겠다. 어느 일간지에 나온 금년도 상위 소망 들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가족 건강하고 자녀들도 취업하여 행복한 매일 보낼 수 있고, 돈 많이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친구들 많이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여행 많이 가게 해주세요, 등이다. 집약하면 건강 + 행복 = 가족 모두 건강하고 웃음 속에서 행복하고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세요다. 이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반드시 이 소원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한다. △임두환은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회 부회장과 전북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이사를 역임했다. <뚝심대장 임장군> 등의 수필집을 출간했고 전북 수필문학상과 행촌수필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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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0 18:46

[금요수필] 눈 내리는 날 아침

눈 내리는 날이면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무슨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이다. 나이, 남녀, 태어나고 성장한 곳, 삶의 터전, 생활 방식과 취향에 따라 답이 다를 것이다. 난 펄펄 눈이 오는 날이면 몸과 맘이 포근해지는 고향 생각이 난다. 옛 가족과 작은 집, 친구와 마을 사람들, 산천과 들판이 내 가슴에 정情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 그럴 게다. 겨울밤이 깊어지려면 얼마나 남았을까? 골목, 집 앞 도로, 아파트 울타리 뒤 인도에 눈발이 흩날린다. 자동차 눈을 쓸고 앞 유리와 보닛(bonnet)을 골판지로 덮어 사방에서 밀어닥칠 센 눈바람을 막았다. 어릴 적 눈이 내리면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몇 번 현관문을 열어봤는지 모른다. 대낮같이 쌓인 환한 눈발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네 시 반, 눈은 내리다 잠을 잔 것 같은데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좀 기다리다 영상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눈이 기도회에 나온 교우들의 발길을 막았는지 찬양 소리가 작게 들렸다. 내 맘과 귀는 찬송과 말씀, 기도보다 눈이 쌓인 밖에 가 있었다. 앞집에 잠을 깨울까 봐 눈을 이층계단부터 부삽으로 조심조심 긁어내리고 비로 쓸어 대문 밖으로 퍼냈다. 먼저 앞집 대문까지 쓸어 며칠 전에 눈 내린 날 빚을 갚으리라 생각하며 대문 밖에 나와 굽은 허리를 폈다. 눈은 어느새 앞집 김 사장님도 새벽잠을 일찍 깨웠는지 눈을 쓸며 나온 게 아닌가? 인사를 나누며 함께 골목을 쓸었다. 운동경기 패자처럼 마음이 언짢았다. 집 앞 인도를 같이 쓸었다. 김 사장님은 아파트 뒤 인도까지 쓸어주었다. 옆집 박 과장님도 앞서 싸리비를 들고 나왔다. 자기 집 앞과 인도를 쓸었다. 소리 높여 이른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박 과장님 옆집에 사는 장 선생님도 인도를 쓴 뒤에 아들 출근차의 눈을 쓸며 인사를 했다. 도로 건너편 님도 집 앞이 도로지만 싸리비를 들고나오길 은근히 기다렸다. 느닷없이 삼십 년 넘게 이웃사촌의 정을 나누며 살다 이사 간 홍 선생님도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여덟 살 위면 벗을 하며 말을 놓았다. 홍 선생님은 더 나이 차이가 나지만 눈이 내렸다 하면 질세라 금세 싸리비 소리와 인人기척도 없이 쓸고 들어가 버리기가 일쑤였다. 새 이웃 김 사장님도 미안할 정도로 눈 내리는 날 아침이면 더 부지런하다. 우리는 이웃이 없어져 가는 도시 문화에 묻혀 살고 있다. 눈 내린 날 아침에 이웃 남정네가 넷이서 눈을 쓸며 인사를 나눈 건 이사 오고 처음이다. 서른세 해 만에 만난 정경이라 추억거리로 그려두고 싶다. 오늘 아침엔 어릴 적 눈 내린 고향, 아름다운 풍경인 겨울왕국이 세워졌다. 밤새 쌓인 눈이 내 맘에 고향처럼 포근한 정을 느끼게 했다. 남은 겨울도 들사평 마을에 두어 번 더 밤새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해 <대한문학> 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 등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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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3 18:28

[금요수필] 장군 멍군

장군멍군은 장기에서,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해서 승부를 가리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기려고 장을 치면 막아내고 멍을 부르니 승부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는 농사에 필수적이다. 농촌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에 절대로 중요하다. 바라던 비가 오면 좋고, 바라지 않던 비가 내리면 싫다. 일기 예보도 잘 맞지 않는 소낙비는 느닷없이 내리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소낙비는 두렵다. 소나기구름은 여름철 달궈진 지면의 따뜻한 공기 덩어리 아래 찬 공기 덩어리가 파고들면, 따뜻한 공기 덩어리로 상승할 때 만들어진다. 그 속에 숨어있던 작은 물방울이 점점 크게 응축되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소나기다. 갑자기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여행자나 나그넷길엔 곤욕을 준다. 소나기라는 말은 농작물이 타들어 가는 걸 애태우면서, 몰려오는 저 구름에 '비가 온다. 안 온다.' 하며 농부들이 '소 내기'를 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유머가 있다. 소낙비가 내릴 때면, 재담 좋았던 선배가 들려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장군, 멍군식 대화가 생각난다. 며느리가 이웃 마을 잔칫집에 입고 나가신 시아버지의 모시 적삼을 잘 빨아 말려서 풀 먹여 곱게 다려드렸는데 행여라도 비가 와서 비나 맞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토방에서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며느리가 소낙비를 흠뻑 맞고 대문을 들어서는 시아버지를 보고 '아버님! 어디서부터 비를 맞았어요?' 하며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비 맞은 장닭 신세가 된 시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서 '어디서부터 맞았겠냐? 상투 끝에서부터 맞았지.' 하시며 방으로 들어갔다. 스스럼없이 위로의 말을 올렸는 어이없게도 한 방 먹었다. 그 뒤로 마음이 개운치 않아 기회를 보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이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벼를 널어 말리는데 시아버지께서 외출하며 "새아가! 낮에 볕이 뜨거우면 벼를 뒤집어 널어라" 하고 일렀다. 기회라 생각한 며느리가 "내버려 두세요. 뜨거우면 자기들이 되돌아 누울 테죠." 하고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시아버지는 '장'을 쳤으니 '멍'으로 받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말없이 대문을 나갔단다. 실수를 인정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 이야기였다. 장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장기를 두었다. 얼마만큼 두고 나면 싫증도 날 텐데, 장기판을 떠나질 않는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장인, 장모였다. 둘 다 연세가 70을 넘어 특별한 소일거리도 없으니, 심심풀이로 장기를 두었다. 어쩌다 사위 내외가 서울 처가를 방문하면 아파트 현관까지 장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두 분이 어떻게 하고계신가? 하고,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갔다. 장인어른은 사위가 온 줄도 모르고 장모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소리 지르시는 대부분의 이유는 ‘한 수만 물러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모는 “아니, 사내대장부가 무슨 장기를 두면서 물러달라고 하느냐?”면서 물러주질 않았다. 그러면 장인 입에서 늘 나오는 말은 ‘치사하다’였다. 장기 실력은 두 분이 비슷비슷한데 장모는 총기가 좋아서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장인은 성격이 급해 서두르다 꼭 코너에 몰려 장모님이 ‘장군이오!’ 하고 나오는데, ‘멍군’으로 대응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늘 소리를 지르는 분은 장인어른이셨다. 사위는 두 분이 서로 알콩달콩하면서 장기를 두는 모습이 그렇게 정겹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늙으면 아내와 장기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절대로 물려주지 않아 오히려 싸움거리가 되었다. △신팔복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진안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 영호남수필문학회, 은빛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마이산 메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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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6 16:43

벚꽃 동네를 행화촌으로 바꾼 이야기

'행화촌'이란 말은 옛사람들이 주막집을 은유 한 말이다. 은유란 말은 암유(暗喩)란 말과 동의어인데, 그 '아름답게 숨겨짐'을 이미지로 씌운다. 이런 주막집이란 으레 길손 나그네가 가만가만 찾아들게 마련인, 적막한 시골길 외딴 길섶 어디쯤에 없는 듯이 자리한 칸막이 초막집이다. 외로움으로 마냥 눈시울 붉힌 주모 아낙 하나 덩그러니 뜰을 지키는 주막이다. 궁색한 나그네에게는 돈이 없어도 그냥 탁배기 한 잔 쯤은 넌즈시 정내미로 건네는 소박한 주막 말이다. 실바람으로 머릿결 살랑이는 청보리 이랑이 시야 가득 펼쳐지고, 언뜻 초막을 비껴 살구나무 한 그루 산뜻하게 서 있다. 느긋이 봄기운이 만창할 때 저녁노을 지피면 살구꽃 피고 이어서 막걸리 한 잔까지 연상되는 그런 정경이 우리네 추억으로 오버랩된다. 살구꽃에 얹히는 백야의 그림 한 폭으로 은은한 달빛 서리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때 보름달은 아니고 막 배불러 오는 상현달이 소슬한 초막에 어리비치면 더 좋을 성 싶다. 노을빛은 신선이 마신다는, 저 멀리 소동파의 적벽부에 언급되는 유하를 연상시킨다. 한국 고유의 서경이며 서정성 여문 한국 시골 동네의 정경은 그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 시인 셈이다. 이 때 이호우의 시조 <살구꽃 피는 마을>이 가슴 출렁이며 읊조려지는 것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내 고향은 남원 덕과 만도리다. 산 겹겹 휘휘 둘러 시냇물은 산자락 감아 돌고, 안에 감춰진 시골 동네이지만 지금은 앞길 신작로레 살구나무를 줄줄이 심어서 일컬어지기를 행화촌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몇십 년 전에 내가 주동하여 출향인들에게 모금해 벚나무를 심었었다. 벚꽃이 만발할 즈음 고향에 가면 너무 벅찬 환희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동구에 들어서면 우선 벌 소리 윙윙거리고 봄은 무르익어서 춘정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얼마 후 나의 조부가 왜정 치하에서 독립운동한 사실이 밝혀지고 나 또한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정부의 증서를 받은 이후에는 벚꽃 마을을 조성했던 사실이 부끄러워진 것이었다. 또한 동구에 호암시비공원湖巖詩碑公園을 축성한 뒤로는 그 부끄러움이 더했다. 꿈속에서도 부끄러움에 소스라쳤다. 벚꽃은 일본 국화가 아니던가. 시비공원은 임진, 정유왜란에 맞서 항 일 투쟁하던 선비들 시비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경명 장군을 비롯해 우리 선조 소산복 할아버지 등 항일 선비들 20여기 시비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뜻을 세워 벚나무는 모두 베어내고 역시 출향인 모금으로 살구나무 동네를 조성했던 것이다. 벚나무 원산지는 제주도라 했고 살구나무 원산지는 중국이라 알려졌기로 이 교차된 아이러니로 인해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제 그야말로 행화촌이 된 우리 동네는 이 전라도 땅에 자랑스런 마을이 된 셈이다. 살구꽃 핀 마을엔 배타도 아니고, 벽을 치고 지나는 동네가 결코 아니다. 술 익고 정 익는, 인간 정신이 샘솟는 동네다. 우리 동네에 산뜻한 주막집 하나 세우고 싶다. 오는 이, 가는 이 옷소매 잡고 술잔 나누고 싶다. 한국 고유의 인심을 모락모락 가꾸고 싶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럴 순 없고, 잘 아는 시인 묵객 몇이라도 불러 살구꽃 그늘에 멍석 펴 놓고 술잔치 거나하게 벌이고 싶다. 내 인생 마무리될 즈음 팔순 잔치를 이렇게 한 번 벌려봐? 상상만 해도 마냥 즐겁다. 이 삭막한 세상 한 귀퉁이라도 인정이 꽃 피는 그런 그림 하나 그리고 싶다. △소재호 시인은 <현대 시학> 시 천료했다. 전북예총회장, 전북문인협회장, 석장문학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녹색시인상과 성호문학상, 목정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 <압록강을 건너는 나비> <초승달 한 꼭지>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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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6 15:36

100세 타령

'9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오거든 사랑하는 마나님 때문에 못 간다고 전해라' 내 나이 벌써 망구(望九)가 되었다. 우리 부부가 사랑을 불태워 온 지도 어언 60년에 이른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이제 6번째 변하고 있다. 꽃피고 새우는 자연의 숨결 속에 덧없이 살아온 삶이었다. 빠른 세월의 무상을 느낀다. '인생은 역시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비록 지난날들이 무의미한 삶이요. 허무한 꿈이었고, 외로운 여행이라 할지라 알찬 생의 보람이라고 느낀다. '추억은 삶의 아름다운 꽃밭'이라고, 지나간 추억의 창문을 열면 고이 잠들고 있는 옛날 이야기가 꽃피어 오른다. 남쪽 나라 멀리 봄의 서곡이 울려오면 가슴 설레는 노오란 수선화가 고운 미소를 날릴 때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파도치는 바다 기슭에서 이상에 불타는 청춘의 꿈을 태우기도 했다. 황혼에 물든 노을빛에 영혼의 노래를 불러보고 붉게 타는 낙엽 사이 흩어지는 시혼을 느꼈다. 그 영혼의 노래가 나의 고독을 달래 파도에 밀려간 추억들이 나를 새롭게 탄생시켜 가는지 모른다. 지는 꽃잎들이 이야기와 정처 없이 사라져가는 낙엽들의 속삭임 들어본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자연의 숨결에 젖어본다. 학창 시절 일곱 빛갈 무지개를 잡으려던 욕망의 나래를 펴보았고 학문과 지혜를 넓혀오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갈 때 <까뮈의 시지프스>를 보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도 해보았다. 교단에서 제자들에게 정의를 외치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갈망하였다. 윤동주의 '서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세월에 참으로 무상과 하무를 느낀다. 2세들의 교육에 봉직해 온 부부교사였다. 그러나 외모나 성격과 달라 정말 엇박자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웅다웅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끈끈한 인연이었다 생각한다. 괴로운 일에도 번번이 맞지 않아 다툼이 따르기도 한다. 이제는 눈이 어두워져 청맹과니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하는 일마다 마땅치 않아 달달 볶아댄다. 정말 맹맹이와 달달이가 한 울타리에서 다투며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다. 당신이 아니면 어디다 스트레스를 풀겠느냐? 는 아내, 있으면 원수덩이 같은 당신이지만 나가면 근심덩이가 된다는 푸념으로 마음을 달래본다. 참으로 오랜 생활 속에 절로 피어나는 사랑의 노래다. 기나긴 세월 사랑이 머물다 간 혼적들이 곱게 여울져 온다. 내 나이가 어때! 우리는 영원한 동반자! 인생은 꿈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한다. 저물어가는 황혼의 노을빛 에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겨가며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에 사랑의 노래 를 띄우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이란 눈 뜨고 있는 꿈'이라 했다. 판도라에 마지막 남은 희망은 우리 인간에게 내려 준 신의 선물이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 하지 않았던가? 희망은 인생의 어둠을 밝혀준다고 했다. 저물어가는 인생의 뒤안길에 서성이다 '문학예술'이라는 정원에 시詩와 수필이라는 꽃나무를 가꾸면서 텅 빈 가슴에 새로운 의지의 날개를 펼쳐보려고 한다. 해 저문 언덕에 누워 노욕을 버리지 못한 채 아직도 못다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쉬지 않고 희망의 노를 저어 가리라! '10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사랑하는 마누라와 함께 간다고 전해라!' △서상옥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백두산문학> 시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와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한국시 전주시지회장 역임했다. 수필집 <사랑과 그리움이 메아리 쳐올 때>와 시집 <꽃무릇 연정>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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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9 18:35

[금요수필] 손톱

손톱이 부러졌다. 아니 손톱이 찢어졌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어디에 걸려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갗을 파고든 손톱은 절반가량 찢어져 사선으로 비스듬히 덜렁거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손끝이 쏙쏙아렸다. 옷을 입을 때, 머리를 감을 때도 날 선 면도날처럼 찢어진 손톱이 신경에 거슬렸다. 무엇이든 그 절실함을 모를 때는 그것의 존재와 고마움을 잊고 살아간다. 손톱이 그랬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푸대접받은 게 억울했던지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다. 손가락 중 쓰임이 제일 많은 집게 손가락이라 더 까다롭다. 시간이 가면 났겠지, 하고 임시방편으로 일회용 밴드로 감아 두었다. 그러나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는 집안일 때문에 일회용은 오래 배겨내지 못했다. 물에 젖은 밴드를 풀어보니 피부가 퉁퉁 부풀어 올라 있었다.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이 청소며 잔심부름을 도와주었다. 오래전 남편을 도와 사업을 할 때다. 그때 아장아장 세상을 향해 발을 떼기 시작한 두 살배기 아들은 팍팍한 내 삶에 단비처럼 커다란 기쁨이 되어 주었다. 사무실 하나에 방 한 칸이 전부였던 작은 공장은 매일 같이 시끄러운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위험한 곳이었다. 기계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아들은 유치원에 간 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온종일 혼자서 놀아야만 했다. 착하고 유순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은 부모가 바쁜 것을 아는 듯 얌전하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손잡고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우두커니 혼자 노는 단칸 방문을 열어 보면 아들의 친구는 달랑 장난감 로봇 하나뿐이었다. 그해 여름, 공장의 후텁지근한 기계 열 때문에 환기를 시킬 요량으로 방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그때 공장 한쪽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아이 울음소리가 기계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황급히 뛰쳐나가 보니 아들이 공장 유리문 틈에 엄지손톱이 끼인 채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작고 여린 손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선홍색 피는 아들의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파랗게 질린 아이는 마침내 울음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아들의 작고 얇은 손톱은 바닥의 흥건한 피 위에서 종이배처럼 둥실 떠 있었다. 아이 손톱을 주워든 나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부러진 손톱은 영양분이 바튼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곤 하였다. 도무지 자라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손톱 때문에 심사가 뒤틀리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평소 이보다 더한 아픔도 참고 견뎌내던 때와는 달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손톱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를 더 경계하는 것 같았다. 떼어버리고 싶어도 뗄 수조차 없는 화근덩이는 점점 살갗을 파고 들더니 누런 고름이 잡혀갔다. '쇠갈퀴가 몸속 여기저기를 박박 긁어대는 것만 같다' 고중얼거리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천성이 부지런한 친정어머니는 손톱 두 개가 없다. 왼손의 새끼 손가락은 손톱이 비틀려 뭉뚝하고, 네 번째 약지는 아예 첫 마디가 잘려나 가고 없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내가 아주 어릴 때 공장 기계에 끼어 마쳤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반지를 잘 끼지 않으신다. 아니, 반지를 낀다 해도 손가락이 뭉뚝해 예쁘지 않다. 아버지가 해주신 보석 반지들도 간직하기만 할 뿐 끼지는 않으셨다. 얼마 전 친정에 갔을 때였다. 어머니는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 '파란색 보석이 행운을 안겨준다더라.'하며 몇 개 남은 반지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보라고 했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제법 알이 굵직한 반지를 선뜻 건네었다. 나는 평소 어머니가 아끼던 반지니 그냥 가지고 계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허연 손톱 하나가 이불 위에 덜렁 빠져 있다. 벽에 걸린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며칠 뒤면 친정어머니의 생신이다. △박경숙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수필 천료로 등단하였으며 전북 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전북수필문학상, 산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미용실에 가는 여자>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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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2 17:00

[금요수필] 우리어머니 이태순 권사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한 달이 지났다. 골반뼈가 부러져 요양병원에서 6개월 가량 치료받으시던 모친이 임종하시기 전날, 배가 아프시다길래 저녁식사 대신 소화제랑 요거트와 과일을 드렸다. 다음날 새벽 당직의사로부터 고열과 저혈압에 염증수치가 너무 높아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대학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서둘러 요양병원에 도착했다. 내 울부짖음에 어머니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이시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향년 9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신 것이다. 6·25동란과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7남매를 하나도 안 죽이고 길러내신 어머니는 필자가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으로 이어지는 바깥일을 마감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우신 교회를 지키며 독거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건강은 두말할 나위 없이 효성이 지극한 자식들의 보살핌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학업과 직장을 핑계로 타국과 외지를 떠돌았으므로 가장 불성실한 자식인 셈이다. 퇴임하자마자 아내의 허락을 구한 후 남매들에게 뒤늦게나마 못다한 내 몫을 다하겠노라고 선언하고 귀향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30년 전에 지어드린 고향집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내고향 순창 쌍치는 고도 300~400 m의 고지여서 겨울이면 유독 눈(雪)이 많고 춥다. 코와 발이 시릴 정도여서 단열을 위해 이십개가 넘는 크고작은 창문을 이중창으로 바꾸고 이제는 불필요한 작은 공간들을 합치는 공사였다. 고치다보니 욕심이 생겨 범위가 자꾸 커지고 그에 따라 비용은 계획의 배가 되고 말았다. 공사가 한창일 때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작은누나가 모셨다. 우여곡절 끝에 작년 말 공사를 마무리하고 딱 4개월 남짓 지날 무렵, 침대에서 주무시다가 화장실 가다 넘어져서 그만 골절상을 입고 말았다. 6개월간의 투약으로 치료할 수 있겠다는 대학병원의 진단에 따라 요양병원으로 옮겨 매일 주사약 처치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치료경과도 좋아서 일주일 후면 완치를 확인하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도수치료를 예약해둔 상태였고, 어머니로부터 용기를 내시겠다는 다짐을 재삼재사 받아 뒀는데... 나는 허망할 뿐만 아니라 남매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호언장담했던 백수(百壽)는커녕 불과 일년반 만에 돌아가시게 한 것 아닌가. 나는 그날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식욕이 없어서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고질인 역류성식도염은 더욱 심해졌다. 어머니랑 살던 고향집 가기도 싫었다. 그러나 사망 한 달 이내에 주민등록지에 사망을 신고해야 했으므로 며칠 전에야 쌍치면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마친 후 어머니 안부를 묻곤하시던 앞집 이웃을 찾아뵈었다. 나를 보자마자 대성통곡하시는 그 권사님 따라 함께 하염없이 울면서 문득 백수(百壽)가 내 욕심이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이 일었다. 우리부모는 60년 이상 해로하시면서 금슬이 참으로 좋으셨다. 두 분이 다투시는 걸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를 하실 적에는 늘 얼굴이 생기로 반짝이며 ‘네 아버지처럼 훌륭한 양반이 없다.’는 말을 빼놓지 않으시는 걸 즐거운 맘으로 지켜보곤 했었다. 그래그래 15년 동안 못 만난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이날 이후 내 식도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형식 시인은 전북대 화학공학부 교수와 부총장,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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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4.12.13 09:40

그리운 옛날

하늘 높은 가을, 내 가슴 속에는 오래도록 머물고 있는 작은 그리움 하나 자리하고 있다. 산이 바로 뒤에 있는 우리 집은 누가 산직이 집이라 이름을 붙여주지는 안 했지만, 자연스러운 산직이 집이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땐 하루아침도 거르지 않고 산을 돌아보고 오시던 모습 이 참 정성스러워 보였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그 일이 자연스럽게 우리 몫으로 넘겨졌다. 우리 내외는 그 정성의 반절도 안 되지만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했다. 야트막한 산 오름은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조상님들의 묘를 둘러보며 부모님 묘 앞에서는 기쁘고 슬픈 사소한 얘기들까지도 작은 소리로 말씀드릴 수 있었다. 선산 밑에 살고 있는 나름의 작은 행복을 스스로 누리는 것이라 만족하며 살았었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우리 집을 지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선산을 찾으려면 꼭 들러야 했다. 추석날 우리 집은 귀성객이 붐비는 대합실처럼 손님맞에 분주했다. 그 시절 식당은 지금 같지 않게 귀해서 객지에 사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우리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생전에 '손님을 잘 대접해 보내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항상 이르신 가르침에 꼭 식사를 우리 집에서 하고 가시도록 했다. 특히 추석에는 멀리 사는 조카들 그리고 자녀들 까지 삼대가 넓은 마당에 가득하여 금세 축구장도 되고 잔디밭은 씨름판도 된다. 그렇게 모이다 보면 삼십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산소를 다녀오는 동안 식사 준비가 미처 안 되었을 때는 내가 총지배인이 되어 손님들까지 합세해 안 쓰던 그릇까지 총동원되었다. 웃음꽃 까지 곁들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도깨비시장 같고 거실은 물론 방마다 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 얘기 꽃을 피우고 얽히고설킨 핏줄은 하나가 되어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듯 진한 가족의 뜨거운 핏줄이 온몸을 타고 도는 듯 했다. 어떻게라도 식사를 해서 보내야 마음도 편안했던 시절이었다. 식사 후식으로는 집안 과일나무의 과일들을 대접하고 나면 여자들은 모두 주방에 들어가 설겆이를 하면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로 접시 가 뒤집어졌다. 피붙이 들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보듬어 안는 진한 가족애로 무르 익었다. 이날이 지나면 언제 또 이렇게 동기간들이 모여 정을 나눌 수 있을까? 그듵이 떠나면 정거장 대합실처럼 붐비던 우리 집은 쓸쓸한 시골 간이역처럼 조용하다. 해마다 명절이면 온 집안에 가득하게 모여 정을 나누며 헤어짐이 아쉬워 손을 부여잡으며 작별을 서러워하던 따뜻한 손들이 그립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그릇을 치우며 깔깔거리던 여인들의 모습이 그 웃음소리와 함께 주방 안에서 맴돌고 있다. 언제 다시 그런 날들이 오려는지 그리움들을 가슴 한쪽에 곱게 묻어 두고 영원한 그리움인 것 같아 오늘도 나 혼자 산에 올라 신석정 당숙님의 유택 앞에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리고 시비에 새겨진 '소년을 위한 목가'를 낭송해 보고 그 붐비던 옛날을 생각하며 터벅터벅 내려온다. 당질부 김호심은 당숙인 석정 선생님 시구가 너무 좋아 부안문화원에서 시 낭송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노인들 시 낭송 동아리 ‘풍경소리’ 시 낭송 강좌에는 ‘부안모네 발달 장애인 주간 보호활동 센터’에서 온 장애인들도 참여한다. △ 김호심 수필가는 신석정 시인의 당질부다. <한국문인>으로 등단했으며 행촌수필 이사, 석정문학관 운영위원, 부안문화원 시낭송 지도 강사이며 부안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부안향토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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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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