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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20 시민기자가 뛴다] "국악의 꿈나무가 되어 주세요"

국악신동 유태평양(왼쪽)과 소리꾼 이윤아.
국악신동 유태평양(왼쪽)과 소리꾼 이윤아.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나는 어릴 때부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언제나 비디오 영화나 녹화해둔 지난 방송을 돌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시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던 가정은 모두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지나간 방송을 다시 보기 어렵던 시절, 보고 싶은 방송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두는 경험을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가 당시엔 일상이었으나 현재는 불법이 되어버린 추억이다.

내가 판소리에 관심을 갖던 시기도 이 시기와 맞물려 있다. 국악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당시에 다녔던 초등학교가 국악 특성화 학교라 전공을 하진 않았지만, 국악의 울타리 안에서 어린 시절을 지낸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남자 소리꾼이 판소리를 부르는 방송을 발견하고 긴급히 비디오 플레이어 녹화 버튼을 눌렀다. 비록 앞부분은 아쉽게 잘렸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분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곤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다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그 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외우기를 몇 날 이렇게 나는 ‘앞머리가 잘린 사철가’를 테이프 선생님을 통해 처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혼자만의 판소리 놀이는 몇 해를 더 이어 갔다. 비록 엉성했지만 이젠 제법 아는 소리도 많이 생겨나고 나름 어른들 앞에서 선보일 수 있는 장기자랑 수준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수없이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나는 14세에 판소리를 전공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의 첫 번째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판소리 신동 유태평양의 역할도 한몫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그가 최연소의 나이로 판소리 흥부가를 완창함으로써 전국적으로 국악의 붐이 일어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로 인해 피겨 꿈나무가 많이 생겨났듯이 당시엔 국악 꿈나무가 많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국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전공을 시작했던 그 시기가 국악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993년 한국 영화 최초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10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1994년 국악의 해를 맞이하면서 점차 국악의 대중화에 박차를 더하며 노력의 결실을 얻어 내고 있던 시기였다 생각된다. 물론 오래전부터의 국악을 지키고자 했던 선생님들의 숭고한 노력이 기반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당연히 잊지 않고 있다.

 

소리꾼 김준수(왼쪽)와 소리꾼 유태평양.
소리꾼 김준수(왼쪽)와 소리꾼 유태평양.

돌이켜 보면 당시 각 초·중·고등학교에 사물 놀이반이 없는 학교가 없었으며, 리코더보다는 단소를 더 많이 불던 학교생활의 기억이 생생하다. 또한 각 지역에 예술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국악과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학과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우리 지역의 대학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국악과 및 한국음악과의 간판이 하나둘씩 내려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국악을 포기하는 시점이었다.

결국 나도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국악을 포기했다. 어린 시절 국악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꿈나무는 결국 현재 다른 방향의 진로를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당시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골방 연습실에서 고독하게 지내야 할 날들이 몹시 두려웠던 것 같다. 결국 먹고사는 문제였고, 그렇게 타협하는 과정 속에 국악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자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큰 꿈을 품고 시작했던 나의 첫 번째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며, 나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순간이었고,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약속도 저버리는 순간이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국악 전공자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점차 대중에게는 멀어져만 가고 있는 느낌이다. 요즘 대세인 트로트처럼 열풍이 한번 불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국악 전공자들이 트로트 분야로 전향하는 시점이니 상황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거라 생각된다. 그들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도 국악을 알리기 위해 트로트 전선에 뛰어들어 국악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만큼 국악으로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굴복할 국악이 아니다. 그 와중 여러 스타급 국악인들이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러 시도를 통해 현대적 국악을 만들어 내어 선전하고 있으며, 무수히 많은 창작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심지어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소리꾼은 흥행에는 다소 성적이 부진했지만 판소리의 예술성을 알리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으며, 현재도 국악을 알리는데 고군분투 중이다. 마치 이러한 시도들이 1970년~90년대 국악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셨던 옛 선생님들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는 듯하여 앞으로의 국악의 미래도 또다시 기대해볼 만하다 생각하는 바이다.

지난날 국악을 시작했던 국악 꿈나무들은 지금쯤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직도 해당 분야에 남아서 전공을 넘어 생업을 이어나가고 있을지, 아니면 일찍이 진로를 변경해서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모두가 자신의 선택에 만족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이 선택의 기로에 서서 꿈꿔 왔던 꿈은 그 누구보다 찬란하고 희망찼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더라도 당시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이왕수 문화예술공작소 예술감독·전주문화재야행 기획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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