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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경기도 용인현·진위현 관련 성책 4건

용인현갑오년청인일병각영병정과거시공궤소입전급전망병정담군고가전성책(龍仁縣甲午年淸人日兵各營兵丁過去時供饋所入錢及戰亡兵丁擔軍雇價錢成冊)
용인현일병경군마병과거공궤소입전성책(龍仁縣日兵京軍馬兵過去供饋所入錢成冊)
진위현거륙월삭일본병전하래시소용곡물성책(振威縣去六月朔日本兵陣下來時所用穀物成冊)
진위현상하내병진공궤도성책(振威縣上下來兵陣供饋都成冊)

왼쪽부터 용인현갑오년청인일병각영병정과거시공궤소입전급전망병정담군고가전성책(龍仁縣甲午年淸人日兵各營兵丁過去時供饋所入錢及戰亡兵丁擔軍雇價錢成冊), 용인현일병경군마병과거공궤소입전성책(龍仁縣日兵京軍馬兵過去供饋所入錢成冊), 진위현거륙월삭일본병전하래시소용곡물성책(振威縣去六月朔日本兵陣下來時所用穀物成冊), 진위현상하내병진공궤도성책(振威縣上下來兵陣供饋都成冊)  /서울대 규장각 제공

△동학농민군의 가을봉기와 경기도 군현

일본군이 6월 21일 경복궁을 침범해서 국왕이 인질로 된 사건은 즉시 널리 알려졌다. 가장 먼저 전해진 지역이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 군현이었다. 양반 유생들은 즉각 대항하지 못했고, 동학 조직이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경기도 동부의 지평과 양근, 동남부의 광주와 여주 그리고 이천과 죽산, 남서부에는 안성과 용인, 그리고 진위 등지의 동학에 농민들이 대거 합세했다.

경기도 남부의 동학농민군은 가을봉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지방관아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막을 힘이 없었다. 일본의 내정 간섭 아래 있던 조선정부도 즉각 경군 병대를 파견하지 못했다. 그 시기에 지평에서 맹영재의 민보군이 결성되어 인근의 동학 근거지를 기습했다. 소모관이 된 명영재는 9월 24일 여주의 동학 근거지로 직행했다. 그러자 여주 동학의 거두인 임학선은 도계를 넘어 충청도 충주의 황산으로 몰려갔다.

동학농민군에게 관아의 무기를 빼앗긴 안성과 인근 죽산의 지방관에 경군 지휘관이 임명되었다. 경군 병대를 이끌고 가서 동학농민군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경기도 남부의 동학농민군이 대거 황산으로 가서 합류했다. 기포령 직후 황산집결지의 동학농민군은 보은으로 몰려갔다. 이 세력이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에서 전봉준 군과 함께 공주 우금치전투를 전개하게 된다.

 

△ 일본군과 경군이 지나간 경기도 군현의 혼란상

9월 중순 전라도에서 전봉준 장군이 재봉기를 결정하고, 9월 18일 충청도 청산에서 동학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렸다. 정부도 9월 22일 청일전쟁 와중에 동학농민군 진압기구로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고 경군 병대를 속속 파견했다. 일본군은 청과의 전쟁 목적으로 세운 부산과 서울 간 병참망과 군용전신선을 위협하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증파한 후비보병 제19대대가 서울로 들어왔다.

경군 장위영 통위영 경리청 병대의 행군로에서 처음 거치는 군현이 경기도 남부 군현이었다. 이들 경군 병대의 지휘권까지 장악한 일본군의 남하 행군로도 겹쳐 있었다. 수시로 오가는 진압군 뒷바라지에 경기도 남부 군현이 시달렸다.

양성현감이 경군 병대에 돈과 곡식을 보내는 운량감 직책을 겸했으나 때 없이 닥치는 진압군의 길 안내를 비롯 양식과 말먹이 등을 즉시 제공해야 했다. 도순무영은 “경유하는 모든 도로에서 각별히 호송하고, 제공하는 음식과 말먹이 등을 미리 대령”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과천과 수원을 비롯해서 여러 군현의 관아가 긴급 상태로 들어갔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돈을 제공했기 때문에 회계 장부도 갖춰야 했다.

 

△ 용인현의 경비 장부 내용

모든 관아는 공적으로 쓴 곡식과 비용 등을 장부에 기재한다. 여러 군현에서 당시 작성한 장부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다행히 규장각에 용인과 진위에서 만든 장부가 소장되어 있다. 이 장부는 날짜별로 기재해서 여러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용인현갑오년청인일병각영병정과거시공궤소입전급전망병정담군고가전성책」은 제목대로 갑오년에 청국인과 일본군 그리고 각 병영 병정이 지나갔을 때 제공한 경비와 들어온 돈, 그리고 사망한 병정의 시신을 운구한 가마꾼의 품삯을 기록한 본문 4쪽의 장부이다.

6월 24일은 일본군 3백명과 통역 5명의 경비를 기재했다. 이 일본군은 경복궁 기습 직후 성환의 청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가던 혼성제9여단 소속 병정이었다. 이때 곡식 알곡을 담는 멱서리 10쌍을 9량 5전으로 매입했다. 그리고 백미 100말과 콩 10말을 가져갔다.

6월 28일에는 양근에 있던 청국인 4명이 아산의 청국 진영으로 내려갔고, 7월 2일에는 청국인 5명이 광주에서 천안으로 내려갔다. 이날 반대로 청국어 통역 3명과 하인 2명이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 성환전투 이후 통역은 청국군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다. 9월 8일과 10일에는 평양 병정 33명과 장위영 총위영 경리청 병정 등 28명이 아산에서 올라왔다. 모두 청국군 지원병으로 보인다.

을미년 1월 5일의 기록은 병정 김창운(金昌雲)의 시신을 충청도 청산에서부터 운구하는 사실이 나와 있다. 가마꾼 12명이 호상 병정 2명과 함께 왔다. 그런데 영동 용산전투에서 죽은 관군은 경리청 참모관 이윤철(李潤徹)과 병정 김창운(金昌云), 그리고 청주병영 병정 1명이었다. 청주 병정을 제외하면 2구의 시신을 운구했을 터인데 참모관 이윤철의 이름은 쓰지 않고 1구만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용인현일병경군마병과거공궤소입전성책」은 1895년 1월 동학농민군 진압 후 서울로 올라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본문 7쪽의 장부이다. 이 장부에서 2월 3일에 우선봉이 거느린 장위영 병대와 일본군이 서울로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7일에는 일본군 송파병참부에서 온 일병 3명이 동학농민군 조사를 위해 와서 2일 간 머물고 있다. 12일에는 군무아문이란 바뀐 명칭으로 북상하는 병대의 기록이 있다.

 

△ 진위현의 경비 장부 내용

「진위현거육월삭일본병진하래시소용곡물성책」은 본문 4쪽의 장부이다. 1894년 12월에 기록한 장부로서 6월에 일본군이 가져간 곡물 등의 수효와 값을 기록했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이 성환의 청국군을 공격할 때 서울에서 인부 2,000명과 짐말 77두로 군량 등을 가져가려고 했으나 인부가 모두 도피해서 먹을 양식이 없었다. 그래서 수원 등 거치는 군현마다 강제로 세곡을 탈취하였다. 다음 표는 진위현 관아에서 탈취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진위현상하내병진공궤도성책」은 9월 23일 경리청 병대가 왔을 때를 시작으로 선봉진인 통위영 병대가 지났을 때 등 여러 차례 경군이 진위현을 왔던 상황을 알려주는 본문 24쪽의 장부이다. 여기에 경리청의 영관 등 3명과 일본군 4명이 있는 것이 나온다. 이를 보면 일본군이 경군 활동에 간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 각 소대별로 인원과 짐말 및 마부를 기록해서 경군 병대의 규모를 전해준다.

통위영 병대의 밥상은 상청 8상, 중청 66상, 하청 936상, 89필 말의 죽통 178통을 기재하였다. 모두 1,010명의 큰 부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당시 대진(大陣)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 자료는 12월에 이르기까지 각종 명색의 군사 관련 인원이 진위를 거쳐간 것을 보여준다.

용인 관련 자료의 내표지에는 5년 보존과 명치 48년 12월 만기라고 쓴 것이 나온다. 1915년에 폐기하라는 표시이다. 다행히 예정된 인멸에서 살아남아 우리가 지금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자료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신영우(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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