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4 23:30 (Tue)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교남수록

(윗줄 왼쪽부터)교남수록 표지, 1894년 8월 병방신태휴행군하기, 1894년 9월 병방박항래 영관최처규행군하기. (아랫줄 왼쪽부터)1894년 10월 초관 장교혁 김천유진하기, 1894년 11월 초관이완근 지례유진하기, 1894년 12월 초관 김태인 행군하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1894년 8월부터 12월까지 경상감영에서 전라도와 충청도에 인접한 군현으로 9차에 걸친 남영병 파견 경비를 기록한 문서가 『교남수록(嶠南隨錄)』이다. 교남은 새재의 남쪽인 영남을 의미하고, 수록은 어떠한 일을 기록했다는 말이다. 경비를 사용한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갑오년의 경상도 실상이 생생히 나타난다. △갑오년 여름 영남지역의 격동 사태 경상도의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재봉기 이전에 봉기해서 민보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봉기 목적은 경상도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요지마다 일본군이 병참부를 세우고 군용전신소를 연결했다. 북부에는 대구 – 선산 해평 – 상주 낙동 – 함창 태봉 – 문경으로 이어졌다. 이 노선을 따라 속속 일본군 제5사단 병력이 북상했다.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사단장도 7월 23일부터 28일까지 기마병의 호위를 받으며 대구에서 문경으로 올라갔다. 이해 여름 서울 도성은 격동했다. 일본군이 6월 21일 새벽에 사대문을 막고 경복궁을 기습 점령해서 고종이 인질로 된 것이다. 그 직후 일본군 해군과 육군이 아산만과 충청도 성환에서 청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개화파정권은 체제를 바꾸는 개혁안을 잇달아 공포했다. 7월 하순에 개국 기원 사용과 반상 차별의 폐지, 그리고 조혼 금지와 공사노비 폐지 등도 전해졌다. 판서를 대신으로 부르는 등 정부 체제의 전격 혁신도 결정되었다. 국난 사태가 흉흉한 소문과 함께 전국에 전파되었다. 전국에서 동학 조직은 의병 봉기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항일투쟁을 시작한 지역이 경상도 북서부 일대였다. 동학농민군의 목표는 일본군 군용전신소였다. 전신주를 쓰러뜨리고 전선을 절단하자 히로시마대본영이 두 방면에서 반격에 나섰다. 일본군을 경상도로 보내서 직접 진압하는 것과 조선 정부에 강요해서 진압군을 파견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상감영에서 남영병을 보낸 것이다. △경상감영의 남영군 파견 갑오년 당시 지방군 중 청주의 진남영과 전주의 무남영, 그리고 춘천의 진어영이 진압군을 보냈지만 출진 장졸의 수와 행군 일정 등을 전해주는 기록은 『교남수록』이 유일하다. 이 기록에 나타난 남영병의 9차례 출진 인원과 기간, 그리고 행군지와 주둔지는 다음과 같다. 병방 신태휴와 병정 200명의 예천 파견 시기가 8월 28일인 것이 주목된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재봉기를 결정하기 이전에 경상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것이다. 행군한 지역은 상주목과 용궁현, 그리고 예천군이었다. 이 일대에서 일어난 커다란 사건 때문에 남영병이 파견된 것이다. 그 사건은 8월 28일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예천 읍내를 공격해서 벌어진 공방전이었고, 또 태봉병참부의 일본군 대위가 정탐을 나왔다가 산양 집결지에서 피살된 것이었다. 9월 하순에는 더 큰 사건이 벌어졌다. 동학 교단의 기포령에 따라 상주성과 선산성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되었다. 그래서 다시 병방 박항래가 이끈 남영병 120명이 파견되었다. 그렇지만 상주와 선산성은 병참부 주둔 일본군이 반격해서 동학농민군이 물러났다. △남영병의 출진 상황 잇달아 출진한 남영병의 행군지역은 김산과 안의와 같은 전라도와 충청도 접경 군현이었다. 10월이 되면 일본군과 민보군, 그리고 남영병이 경상도 북서부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였다. 그 이후 출진한 것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도의 경계를 넘어서 침입할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12월 하순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 주력이 해산되자 남영병은 대구 감영으로 돌아가게 된다. 「교남수록」의 경비내역 기록이 전해주는 당시 상황은 상세하다. 잡다한 지출 항목과 물건값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요 항목이 밥값 노자돈 말먹이값 짚신값 술값 담배값 등이다. 이런 항목으로 구입한 분량도 적었다. 저녁밥 254상, 말 죽 7통, 술 5동이, 짚신 428부 등이다. 모든 경비는 2만 3,771량 1전 2푼으로 실제 사용한 액수는 2만 1,553량 1전 8푼으로 나온다. 대구판관 지석영도 토포사에 임명되어 하동과 진주 일대를 순회했지만 남영병을 이끌고 가지 못했다.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영으로 가서 통제영의 병력을 배속받아 경상도 남부 일대에서 부산에서 온 일본군과 함께 이 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있었다.

  • 기획
  • 기고
  • 2025.10.29 17: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2)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기록물 6건

이번에 소개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뒤 수습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로서 『충청도목천현전소모진적산실수성책』 등 6건이다. 작성시기는 1894년 12월에서 1895년 2월에 걸쳐 있으며, 6건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수습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특히 6건 가운데 3건이 1895년 1월에 나주에 있던 전라도 초토영 초토사 민종렬이 작성한 것으로, 나주에 머물며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일본군과 정부군이 서울로 올라간 뒤 나주 초토영에서 어떻게 잔여 동학농민군을 소탕하고 전라지역을 통제하였지를 알 수 있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 △『충청도목천현전소모진적산실수성책(忠淸道木川縣前召募陣籍産實數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2월에 목천현 전 소모진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물품의 내력을 정리한 자료이다. 크기는 21.9✕31cm이며 1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동학농민군 기포시 쌓아놓은 장소(복구정·작성산)에서 몰수한 물품목록, 처형된 동학농민군(22명)에게서 몰수한 물품목록, 석방하거나 도망한 동학농민군(13명)에게서 몰수한 물품목록으로 나누어 동학농민군 성명과 몰수한 물품을 정리해놓았다. 이렇게 몰수한 물품은 모두 벼 790석, 백미 121석 17두, 콩 1석, 소 11마리, 말 13필, 담배 1천파, 목화 70근이며 말미에 몰수한 물품의 사용내역을 기재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재지도 천안 목천 외에 진천, 충주, 음죽, 양성 등지에 걸쳐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기록물은 소모사 정기봉(鄭基鳳)이 소모진을 이끌고 활동하면서 동학농민군에게서 몰수한 물품과 그 사용처를 보고한 것이다. 자료 말미에 ‘관찰사겸순찰사 박’이란 문구로 보아, 1895년 2월에 충청도관찰사 박제순이 작성한 것이다. 이 기록물에서 말하는 소모진은 소모사 정기봉이다. 그는 9월 26일경 맹영재와 같이 기전소모관(畿甸召募官)으로 임명되어 민간의 포군을 모집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양성 포군 300명을 모집해 소모진을 꾸린 뒤 10월 19일 밤 천안 목천경계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10월 21일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이 먼저 세성산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10월 21일 세성산전투 이후 정기봉은 목천지역에서 무자비하게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11월 15일에는 목천현감도 겸직, 11월 19일 부임하였다. 호서소모관으로도 임명되어 11월 15일 전후 청주, 진천, 충주 등지에서도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간 침탈도 이어져 큰 원성을 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기봉은 동학농민군 진압 공로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411명이 수록된 『갑오군공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에 관한 기록은 『갑오군정실기』에 자세하므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소모관솔포군상경시양근군삼참공궤식상여소임전실수성책(召募官率砲軍上京時楊根郡三站供饋食床與所入錢實數成冊』 이 기록물은 1894년 12월에 경기도 양근군에서 상경하는 소모관이 이끄는 포군의 식비와 짚신, 담배 등을 마련하는데 소요된 비용을 각 참(站)별로 적어 놓은 자료이다. 자료 크기는 20✕24cm 1책이다. 양근군 읍참(邑站)에서는 소모관·중군·선봉과 포군 6백명의 두끼분 식사와 기타 비용을 지출하였다. 들어간 비용은 소모관 등의 술상 1상에 2냥 4전, 식비 1상에 6전, 포군 600명의 두끼 식사비 240냥 등 총 339냥 2전이었다. 그밖에 길을 가다 먹은 점심값, 두물머리에서 숙박할 때 식비, 담배, 짚신 등의 비용이 지출되었다. 양근군에서 총 지출된 비용은 엽전 768냥 2전이었다. 이 기록물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군인 등의 비용을 해당 지역의 군현에서 부담하였음을 알려줄 뿐 아니라, 군현에서 지원한 것들이 술상, 밥상, 담배, 짚신 등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당시 물가를 엿볼 수도 있다. 이러한 비용은 실질적으로 지역민에게 전가되어 주민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 『호연초토영각읍절의열행인성명성책(湖沿招討營各邑節義烈行人姓名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호연초토영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군에 대항해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절의와 열행한 이들을 기록한 자료이다. 크기는 26✕37cm이며 1책(3장)이다. 절의한 사람으로는 홍주 유학 유기석, 덕산 전 도사 황종원, 예산 아전 김명황 부자, 서산 이방 송봉훈, 해미 유학 김상엽 등 홍주, 예산, 서산 등지에서 활동한 11명과 열행한 여성 2명이다. 홍주 향교를 지키려다 희생된 교생 6명도 포함되어 있다. 호연초토영은 1894년 10월에 홍주성에 설치되었다. 정부는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세력이 확대되자 10월 8일 홍주목사 이승우를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임명,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수 있는 군사권을 부여하였다. 이 때부터 홍주성이 초연초토영으로 전환, 호연초토사 이승우는 관군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생 등으로 구성된 민보군을 조직적으로 활용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체포, 처형하였다. 이 자료는 그 과정에서 절의를 지킨 유생과 여성들의 명단과 활동상을 호연초토사 이승우가 1895년 2월에 정리하여 중앙에 보고한 것이다.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그에 대항한 유생·아전·여성들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 『전주부전전라도각읍상납중비류소탈전목미태구별성책(全州府前全羅道各邑上納中匪類所奪錢木米太區別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8월 전주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전라도내 각군에서 동학농민군들에게 빼앗긴 전세(田稅)를 비롯한 각종 상납의 내역이 군별로 파악 기재된 책이다. 크기는 19.5✕31cm이며 1책(12장)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20개 군별로 동학농민군에게 탈취당한 상납물과 해당 연도의 세목(稅目)이 적혀 있다. 빼앗긴 상납물은 전세미태(田稅米太), 대동미, 호포전, 각종 군목(軍木), 군전(軍錢) 등 여러 종류에 걸쳐 있다. 특히 이 세액을 반씩 나누어 「감(減)」, 「실(實)」로 표기하였는데, 「감」이란 중앙에서 탕감해준 액수였다. 실제 상납액은 원래 상납액의 반인데, 권말에 기재된 탈취액의 총계는 전(錢) 113,887냥, 목(木) 227동 2필, 쌀(米) 1,815석, 콩(太) 291석이다. 이들 탈취액은 대부분 농민군이 군수 조달을 위해 각 읍에 있는 상납물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전라도 20개 군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 『전라도각읍매사읍작통규모관사조약별록성책(全羅道各邑每四邑作統規模關辭條約別錄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1월에 호남초토영의 초토사 민종렬이 전라도 각 읍을 작통(作統)하면서 각 읍에 보낸 관사(關辭), 작통조약(作統條約), 작통 내용을 수록한 자료이다. 크기는 20✕34.5cm 1책(5장)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관사와 작통 조약, 작통질(作統秩)로 나뉜다. 관사에서는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하여 각 읍의 수비체제가 극도로 문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오가작통을 통하여 잔당의 토벌 및 긴밀한 협조체제를 강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가작통 조약은 4조로 되어 있는데, 4읍이 협조하여 작통하고 각 읍 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할 것, 수성군(守城軍)의 상호 협조와 고을 경계를 넘어 생기는 민간 폐해 엄금 및 적을 토벌할 방략을 세울 것 등이다. 각 읍의 작통질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제외한 52읍을 근접한 4읍 단위로 작통한 총 13통의 내용이 적혀 있다. 이 기록물은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의 잔당을 소탕하고 지방의 수비태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시 나주 호남초토영의 진압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나주에 머물던 일본군과 정부군이 서울로 떠난 뒤 나주 초토영이 어떻게 전라도지역을 통제하면서 생존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호남초토영참모관별군관천보성명성책(湖南招討營參謀官別軍官薦報姓名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1월에 호남 초토영 초토사 민종렬이 작성한 것으로, 민종렬이 참모관과 별군관을 추천·보고한 문서이다. 크기는 21.1✕35.9cm 1책이다. 참모관에는 전 현감 손응설과 전 전적 오학선을 추천하였고, 별군관에는 유학 현덕종과 부사과 전학권을 추천하였다. 민종렬이 이들을 참모관이나 별군관으로 추천한 것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 기획
  • 기고
  • 2025.10.15 19:0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1)  법부래문, 법부래거문, 내각법부래거문

이번에 소개할 법부래거문 등은 1894년이후 갑오개혁과 대한제국시기 정부의 법률 관계 공문 중에서 법부가 생산하고 각부서에 보낸 공문을 모아 놓은 것이다. 법부에서 기안한 공문을 기안(起案)이라고 하는데, 본 자료는 법부와 관련 타부서 사이에 오고 간 통첩이나 지령 등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법부래문(法部來文)’은 1894년(고종 31)~1902년(광무6) 사이에 법부가 자체내의 인사·봉급·후생 등과 기타 법률 문제를 내각(內閣) 혹은 의정부에 문의한 문건을 모은 것이다. 그 중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문건은 1895년 7월 26일자 문건으로 법부에서 작성한 죄인방질책(罪人放秩冊) 1책을 보내어 관보에 계속하여 게재해 달라는 통첩 제349호다. 이는 갑오개혁 1주년을 맞이하여 주요 유배형에 처해진 관료들과 죄질이 낮은 죄수들을 석방하는 조처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후속 문건으로 8월 1일자 관보 중에서 석방한 죄인들의 기록에서 온양에 유배한 김덕여(金德汝)는 덕현(德鉉)의 오기(誤記)라는 문건(통첩 제366호)도 있으며, 9월 12일 임천(林川)의 비적괴수 김재홍(金在洪)은 인명을 살해한 죄로 교형(絞刑)에 처하고, 문화(文化)의 비적괴수 이동엽(李東燁)은 여러 마을의 관사(官舍)를 모조리 불사르고 민인들의 전곡을 강탈한 죄로 역시 교형에 처한다는 내용(통첩 제14호)이 실려있다. 11월 8일은 지평(砥平) 살옥(殺獄) 죄인 안치홍(安致弘)을 모살죄(謀殺罪)로 교형에 처하고, 고덕인(高德仁)은 살인하고 재물을 빼앗은 죄로 교형에 처하며, 홍소사(洪召史)는 간부(姦夫)가 자신의 남편을 죽인 것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교형에 처한다는 내용(통첩 제46호)이다. 11월 12일에는 지난 6월 27일자 조칙에 따르면 동년 4월 1일 이전에 수감된 죄인들 중에서 모반, 살인, 절도, 강도, 통간(通奸), 편재(騙財) 등 죄를 저지른 자를 제외한 나머지 죄인들을 전원 석방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법부는 법부 도유안(徒流案) 중에서 이상의 6가지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들은 전부 석방하였다고 하면서, 각 부(府)에 도유안에서 누락된 죄인들과 본도 감영에서 유배만 보내고 미처 보고하지 못한 자의 죄안과 유배 월일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보고하라고 훈령을 내린다고 하면서 대구부, 평양부, 남원부, 나주부로부터 보고한 내용을 관보에 게재해 달라는 내용(통첩 633호) 등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법부 문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제4책에 수록된 동학교단의 지도자인 최시형, 황만기(黃萬己), 박윤대, 송일회 등에 대한 판결선고서이다. “최시형(강원도 원주군 거주, 평민, 72세), 황만기(경기 여주군 거주, 평민, 39세), 박윤대(충청북도 옥천군 거주, 53세), 송일회(충청북도 영동군, 33세) 등 안건을 검사 공소로 심리하였다고 하면서, 피고 최시형은 1866년(본문에서는 병인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1861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간성 거주 필묵상 박춘서(朴春瑞)라는 자에게서 소위 동학(東學)을 받아들이고, 선도(善道)로 병을 낫게 하고 축문으로 신(神)을 내린다며 열군 각도를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축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字) 강신문(降神文)과 동학 원문(原文)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을을지부(弓弓乙乙之符)로 인민을 선동하고 혹하여 도당을 체결하였다,”는 판결 선고서 전문을 수록하고 있다. 당시 관헌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점은 동학의 조직으로서 교장·교수·집강·도집(都執)·대정(大正)·중정(中正) 등의 6임과 집회 조직으로서 포(包)와 장(帳)의 회소(會所)를 설치였으며, 최시형의 죄목과 처형에 대한 사유로서 최시형이 교조신원운동을 위해 계사년에 대궐 상고와 보은장내에 집회를 소집했다는 점을 들면서도 갑오년에 전봉준과 손화중이 고부에서 봉기했을 때 화응(和應)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지만, 정부는 그의 혹세무민 행위에 주목했다. 이 선고서를 통하여 최시형의 원주에서의 체포 경위와 함께한 이들의 행동을 소상히 알 수 있다. 결국 최시형은 ‘대명률 제사편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를 들어 교형(絞刑)에 처하고 황만기 등 위종자(爲從者)들에 대한 처벌을 선고하였다(1898년 7월 18일자 판결선고, 7월 20일(음력 6월 2일) 형 집행). 이 자료는 법부에서 고등재판소에 지령하는 건(제73호, 74호)와 비교하여 연결된 문서이다(『(법부)기안』 규 17277의 2, 32책, 참조). 다음으로 ‘법부래거문(法部來去文)’은 1895년부터 1906년까지 외부(外部)에서 외국인의 형사·민사 관계의 적용사례를 법부에 문의한 조회와 그 조복을 모은 것이다. 1895년 4월 12일자 조복에서는 옥사(獄事)는 사법의 권한과 관계되어 비밀은 비록 각의에서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고 만국정부의 통례이므로 공문으로는 답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외국공사가 외부대신에게 사적으로 물어본다면 가능할 수도 있으나 공문으로 옥사를 탐색하고자 하는 것은 공법이 불허할 뿐만 아니라 법부대신의 권리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거절하는 내용이다. 특히 성형일관(省刑一款)은 법부대신이 혹형(酷刑)의 도구를 불허한다는 뜻으로 대군주의 재가를 받았으니 자신의 권한내에 있으며, 아직 특별법원이 개청하지 않았으니 외국인의 회심(會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는 당시 이종정경(李宗正卿-이준용)의 모반사건 재판에 관한 외국의 문의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추정된다. 그해 7월 5일자 조회의 경우, 한산군에 거주하고 있는 김선재(金善在)와 서가량(徐可良), 오응노(吳應老) 등이 원래 동학난류로서 활동하다가 무휼 귀화시키는 조령으로 면죄하였으나 이후 서학(西學)을 칭하면서 다시 작폐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공주지역의 경우 소요를 거치고 환산하여 흩어진 자가 과반이었으나 동도의 여비(餘匪)들이 서학에 다시 붙어 도당의 세를 늘리고 잔민을 구타하고 전재(錢財)를 침탈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은 당시 프랑스 전도사 남일량(南一良 : 본명 퀴를리에(Jean Jules Leon Curlier))에 의탁하여 서학을 칭탁하여 폐해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각국과 체결한 조약 약장에서 전도인을 보호할 뿐이므로 죄를 범한 것은 엄칙하여 금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조회 16,18,19 등 참조). 1901년 4월 4일 <조회>에는 동비 이후 양규태(梁奎泰), 안종학(安鍾學) 등이 길정당(貞吉堂), 안병태(安炳泰) 등과 부동하여 가칭 희랍교(그리스정교회)라 하면서 전도하여 내포와 완북지역에서 십자기를 들고 동비의 여당을 모아 방포하고 향리에 도육하고, 부인을 겁탈하고 인재를 빼앗으며 인총(人塚)을 이굴하고 사채를 늑봉하는 등 지역의 사대부와 부민에게 침학하고 있다는 사태를 고발하고 있다(조회 제5호, 법부거래문, 7권). 이들은 프랑스나 러시아와 연관된 종교의 포교를 빙자하여 내지의 침탈을 일삼는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1894년 이후에도 여러 지방에서 동학의 참여자들이 서학, 영학, 희랍교 등을 활용하여 여전히 민중들의 권익보호와 세력 신장을 도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내각법부래거문(內閣法部來去文)은 1906년이후 1909년까지 내각과 법부 사이에 오고간 지령과 조회 등 공문서를 모아놓은 자료이다. 이 중에서 1907년 7월 16일에는 법부에서 동학의 교주 최제우(崔濟愚)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제명을 없애는 효주(爻周)를 명하는 지령을 수록하고 있다(지령 제238호). 고종초기부터 혹세무민의 종교로서 탄압을 받아온 동학의 교주들이 사면됨으로써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동시에 획득하게 되어 동학 탄압의 전환을 이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렇지만 당시 관료 정치인으로서 김윤식의 특사, 안경수의 사면, 이준용의 사면 등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조칙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강화되어 준식민지로 들어가는 1907년 정미년의 국면에서 취해진 유화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일제에 항거하는 정미의병이 새롭게 재편되어 치열하게 고조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동학 교주에 대한 사면의 정치적 의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었다. 왕현종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9.17 18:2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0) 양호초토등록, 고종과 홍계훈 문답문서

이번에 소개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선 홍계훈 관련 기록물로써,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과 『고종과 홍계훈문답문서』 두 자료이다. 특히 이 두 기록물은 1차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만큼 흥미롭다. 홍계훈(洪啓薰, 1842-1895)은 초명이 홍재희(洪在羲)로, 1842년에 무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민비를 등에 업고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충북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을 때, 장위영 정령관으로 임명되어 경군 600명을 이끌고 청주로 출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홍계훈은 당시 민씨정권의 측근 무관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기에도 홍계훈의 역할이 컸다. 동학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전라지역을 장악하자 위기를 느낀 민씨정권은 홍계훈을 1894년 4월 2일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양호초토등록』과 『고종과 홍계훈문답문서』은 그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이다.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 이 기록물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장위영군(壯衛營軍)과 강화영군(江華營軍) 등 경군(京軍)을 인솔하고 서울을 출발한 4월 초 3일부터 전주성을 수복한 직후인 5월 16일까지의 관련 사실을 일기체로 수록한 것이다. 이 자료에는 1894년 3월 20일에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여 전주성을 향해서 진군하기 시작하자, 중앙정부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남하시켰을 때의 초토 활동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일록(日錄) 뿐만 아니라 양호초토사가 승정원 등 중앙정부에 보고한 장계와 전라관찰사에게 보낸 이문(移文), 각군에 보낸 감결(甘結), 산하 군대에게 보낸 전령(傳令), 도민에게 포고한 방문(榜文), 동학농민군의 귀순을 권고한 효유문 등이 정확한 날짜와 함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물은 비록 양호초토사 자신의 자기 변명이 충만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는 풍부한 사실을 담고 있어 사료비판을 하면서 활용하면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정부의 대책과 진압군의 초토 활동에 대한 여러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1894년 4월 3일부터 5월 28일까지 초토사 홍계훈과 각처 사이에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 순서로 수록한 『양호전기(兩湖電記)』와 함께 교차 분석할 경우, 당시 정부의 진압책과 동학농민혁명 전개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고종과 홍계훈문답문서』 이 기록물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초토사 홍계훈과 고종이 문답한 문서로, 폭 23cm, 길이 292cm이다. 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두 사람의 시국인식과 대처방안 등을 알 수 있다. 작성자와 작성시기는 불명이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4월 3일 서울에서 출정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4월 27일 점령한 전주성에서 5월 8일 철수하자, 전주성내로 들어간 뒤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것으로 중앙 각처에 보고하였다. 이를 접수한 정부에서는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는 일이 급선무인 만큼 동학농민군이 해산하였으니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함은 물론 홍계훈으로 하여금 서울로 귀경하도록 5월 16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홍계훈은 5월 16일 전주를 출발하여 공주를 거쳐 5월 26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친군 장위영(親軍壯衛營)에서는 ‘본영의 정령관(正領官) 홍계훈이 거느리고 호남에 가서 주둔하고 있던 장수와 군사들이 오늘 올라왔습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고종은 당일 초토사 홍계훈을 보현당으로 불러 궁금하였던 점을 홍계훈에게 직접 묻고 홍계훈이 답하였는데, 『홍계훈과 고종문답문서』는 바로 두 사람의 문답내용을 필사한 문서이다. 두 사람이 나눈 문답은 대략 11번 정도였다. 먼저 고종은 홍계훈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을 치하한 뒤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는 형식으로 문답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종은 호남으로 내려간 청군병을 어디서 만났는지 홍계훈에게 물었다. 홍계훈은 능지점에서 청국군 정탐병을 만나,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전말을 상세히 말해주고 갈 필요가 없다고 하자 그 역시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고 하였다. 고종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홍계훈에게 청국군 동정을 물은 것은 그만큼 청일 양국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심영병 가운데 병에 걸리고 부상한 병사가 없는지 물어본 뒤,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병정들이 큰 공을 세웠다고 하자, 홍계훈은 ‘우리 군은 불과 2000∼3000명임에도 물러남이 없이 저들 수만명을 무찔렀다’고 답하였다. 또 고종은 동학농민군이 불랑기(佛郞機) 대포를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홍계훈은 수십년전 강화에서 분실한 것으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반납한 뒤 귀화하였다고 답하였다. 실제 동학농민군은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하면서, 극로백 1좌, 회선포 1좌, 총과 창 1000자루, 불랑기 대포 24좌와 연환 10두 등을 반납하고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고종은 다시 지금 비류가 모두 흩어졌느냐고 물었다. 홍계훈은 태인에 70여 명이 모여 있으나, 그들의 진정에 따라 전주성내로 피신한 태인군수로 하여금 조속히 환관하여 각별히 안정시키도록 하였다고 답하였다. 또 고종이 호남 각읍이 난리를 겪은 뒤 주민들이 실업하고 이산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집시킬 것인지 물었다. 이에 대해 홍계훈은 감영에서 군사를 모으는 것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금구·태인·부안·정읍·흥덕·영광·장성·함평 등지의 수령은 각별히 임명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고종은 청국병이 호남을 향해 갔기 때문에 심영병(沁營兵)이 머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묻자, 홍계훈은 청국병이 내려온다는 소문에 백성들이 도피한다고 하면서 청국군보다 심영병이 머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답하였다. 실제 5월 19일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군대는 상경하였지만, 심영병은 청주병영군과 함께 계속 전주에 머물렀다. 이처럼 홍계훈은 고종에게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것으로 보고하였지만,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전주성에서 철수해서 각지로 흩어져 순행하면서 계속 활동하였다. 실제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이 없을 뿐 아니라,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보고하여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었지만, 동학농민군 진압 공이 인정되어 훈련대 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훈련대 연대장으로의 승진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1895년 음력 8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훈련대장으로서 광화문을 수비하다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 공으로 군부대신에 추증되었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도 받았다. 1898년 해월 최시형의 죽음에 이어 동학교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서장옥·손천민 등이 사형을 당한 190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시설인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

  • 기획
  • 기고
  • 2025.09.10 20:0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9) 전령(傳令)과 완문(完文)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 등재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전령(傳令) 3건과 완문(完文) 2건이다. 전령(傳令)은 국왕 및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의 관리에게 또는 지방관이 백성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문서이다. 하달하는 내용은 상부의 명령, 군직과 관직의 임명, 행정적인 고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전령이 향촌에서 사용될 경우, 지방관이 실무적인 명령이나 처분 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백성들을 대상으로 경계해야 할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한글로 번역하여 전달하기도 한다. 수신자는 군문의 하부관원과 지방의 향촌 실무담당자인 풍헌(風憲), 존동(尊洞), 두민(頭民), 약정(約定), 면임(面任), 동임(洞任), 양반, 천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다. 완문(完文)은 조선시대 관립기관이 향교, 서원, 결사(結社), 촌민(村民), 개인 등에게 어떠한 사실을 확인하거나 특전을 인정해 주기 위해 발급한 공문서이다. 완문의 발급자는 대부분 수령이지만 중앙의 상급관청에서부터 지방의 말단하급 관청 및 궁방, 서원, 문중과 같은 결사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존재하였다. 1894년 4월 4일 전령.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4월 4일 전령(傳令) 이 전령은 상주목사가 풍헌(風憲)과 각 리의 존동(尊洞), 두민(頭民)에게 1894년 4월 4일 보낸 것이다. 이 시기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고 백산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대규모 봉기를 한 직후이다. 이에 조선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전라도로 보내 중앙 정부 차원에서 진압을 진행하고, 의정부에서는 동비(東匪)의 철저한 토벌을 삼남의 수령들에게 지시하였다. 전령의 내용에 따르면 “이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각 면과 리에 신칙(申飭)해서 엄히 단속하고 각별히 탐문하여 만약 적발된 자가 있으면 군교(軍校)와 포졸(捕卒)을 많이 보내어 뒤쫓아 체포하고, 만약 저쪽의 머릿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으면 이웃 읍진(邑鎭)에 알려 관아의 포졸과 마을의 장정과 힘을 합쳐 남김없이 잡아들이기를 기약하되, 우두머리는 즉시 죽여 없애고 따르는 자는 낱낱이 엄하게 가두어야 한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고 우두머리는 즉시 죽여 없애라고 하는 등 동학농민군 토벌의 기준과 방향을 모든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수령들은 산하 행정구역 책임자들에게 동비(東匪)를 찾아내 잡아 올리고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전령 말미에 “본면의 각 리는 다섯 집을 통(統)으로 만들고 통수(統首) 1명씩을 두되, 만약 동학의 무리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있으면 모두 나가 힘을 합하여 결박하고 압송하여 올려보낼 것”이라고 하여 오가작통의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령에는, 마을의 책임자인 존동(尊洞)과 두민(頭民)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고을이름과 산하 행정지역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화북(化北)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해 놓았다. 또 여기 전령에 ‘지시를 거행함에 있어서 조금도 느슨해서는 안 되지만 양호(兩湖)에서 체포를 엄하게 시행하면 저 무리들이 영남으로 도망쳐 흩어지는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다. 더구나 본 고을의 경내에 이러한 무리들이 많이 숨어 있음은 일찍이 들은 것이기에 서로 호응하여 폐단을 일으킬 우려가 또한 없지 않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 표시된 ‘화북’은 경상도 상주의 행정단위 이름이고 또 ‘영남으로 도망쳐 온다’는 표현은 상주가 충청도와 접경지역이므로 실제 일어나고 있었던 현상이다. 따라서 이 전령은 겸관인 상주목사가 풍헌(風憲), 존동(尊洞), 두민(頭民)에게 보낸 전령임을 알 수 있다. 1894년 11월 14일 전령.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11월 4일 전령(傳令) 이 전령은 초토영에서 농민군 체포의 책임을 맡은 순포중군(巡捕中軍)이 하급 군졸인 집사(執事)에게 1894년 11월 14일 보낸 지시문이다. 이 시기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전한 이후의 시기로 한층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세차게 몰아칠 때이다. 이 전령에 따르면 “어떤 동이건 막론하고 그 동에 사는 접주(接主)를 즉시 압송하되, 우선 그 동의 존동(尊洞)에게 염탐하게 하여 만약 혹여 동장(洞長)과 동의 사람들이 명을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사적인 친분을 따라 일부러 놓아 준다면, 이는 바로 동도(東徒)의 남은 무리들이니 결박해 잡아 올리며 그 가산(家産)과 집물(什物)을 적몰(籍沒)하고 존동에게 압송하게 할 것”이라고 하여 접주는 무조건 잡아들이도록 하고 있으며, 동학농민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동도(東徒)’라고 규정하여 체포하도록 하고 있을뿐더러 그들에게까지도 가산과 집물을 적몰하도록 하여 동학농민군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조선정부에서 접주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접주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1894년 전령.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전령(傳令) 이 전령은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전령의 최종 수신자가 일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한글로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작성 시기는 1894년 말 또는 1895년 초로 추정된다. 작성자는 알 수 없으나 수신자는 ‘영솔관 개탁’이라 하여 영솔관으로 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접주를 반드시 잡아들이고 평민은 일절 작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접주를 숨겨준다면 마을 전체를 도륙할 것이라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접주의 가산집물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1894년 11월 완문(完文) 1894년 11월에 나주목에서 해남 백포의 윤씨에게 발급해 준 완문이다. 이 문서는 완문의 형태로 발급한 일종의 물침표(勿侵票)라고 할 수 있다. 이 완문으로 벼슬아치들이나 토벌군들이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이 완문에 따르면 “해남(海南) 백포(白浦)는 윤씨의 세거지로, 선비다운 기품과 훌륭한 법도가 있어 동학도에 물들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하다. 비록 난리로 어지러운 때이지만 특별히 안전하게 보호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여 해남 백포에 거주하는 해남윤씨들에 대해 동학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보호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를 보증해주는 증명서를 나주목사 이름으로 발급해주었다. △1894년 12월 완문(完文) 충청도 단양군 어상천면 면장과 연곡리 집강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1894년 12월에 발급한 완문이다. 시기적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때이다. 충청도 단양군 역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한 토벌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문의 내용은 충청도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중곡에 사는 이건재가 동학의 접주였으나 우금치 패전 이후 집을 버리고 도망하자, 그의 재산 중 전답(田畓) 여덟 마지기를 마을 사람들이 토의하여 동학으로 피해를 입은 정선비에게 주기로 하였다. 특히 정 선비에게 준 것은 평소 이건재가 정선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완문을 작성한 이유는 훗날 이렇게 이건재의 재산을 정선비에게 준 것이 마을 사람들의 논의를 거쳐 이루어졌고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목적이었다. 이 완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에 동학농민군의 재산에 대한 몰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처리하는 주체가 군현 단위뿐만 아니라 면 단위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 기획
  • 기고
  • 2025.08.27 19:0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8)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 1894년 10월 5일부터 10월 8일까지 3차에 걸친 이병휘(李秉輝)의 신문기록이다. 이병휘와 혐의자 허엽 및 주사 민규정 등과의 대질신문, 허엽 단독 신문도 첨부되어 있다. 서울 출신으로 북한산성 방어와 관리를 담당하던 정3품 무관직인 관성장(管城將)을 하고 있던 이병휘는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동학농민군에게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과 손을 잡고 여러 명의 밀사를 각처의 농민군들에게 파견하였다. 이 『이병휘공초』는 흥선대원군과 동학농민군과의 관계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의 동향과 농민군의 지향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병휘공초』에 따르면 호서에 있던 대원군의 부하 정인덕이 박동진ㆍ박세강 등에게 제안한 작전 구상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북접 계열 인사인 박동진은 공주에서 임기준ㆍ서장옥과, 남접 계열 박세강은 전봉준ㆍ송희옥과 함께 농민군 동원을 기획하였다. 당시 박동진은 이준용의 지휘를 받았고 박세강은 대원군의 분부를 따르고 있었다. 일본공사관에 의하면 박세강과 박동진은 원래 동학당의 수괴로서 경성감옥에 투옥되었는데 8월 하순 대원군은 두 사람의 죄를 사면하고 박세강을 내무아문 주사, 박동진을 의정부 주사로 임명하여 선유사 정경원과 함께 충청도에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충청도 농민군을 규합하여 갑오개화파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 탈취를 기도하였다. 일본 측에서도 특히 10월 7일 이병휘의 두 번째 신문을 주목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동학당 사건에 대한 회심(會審) 전말 상세 보고 : 이병휘가 제출한 시말서」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서울에 들여보낸 동학당은 종로에 모여 ‘만인소청(萬人疏廳)’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보내 각국 공관에 조회한다. 그리고 통위영ㆍ용호영ㆍ총어영ㆍ호분위 등을 파견하여 궁궐을 파수케 하고 대중을 지휘하여 궁궐에 들어가 주상을 상왕으로 받들고 중전과 왕세자를 폐하며 이준용을 맞이하여 보위에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개화당을 모두 살해하고 ‘자주지정(自主之政)’을 세우고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여 청국에 알려 후일의 시비를 방지토록 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출동한다면 청국군을 기다려 협공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일부 호서농민군 세력은 이준용ㆍ대원군과 연결하여 왕권을 뒤엎으려는 기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ㆍ동학농민군ㆍ조선 정부 모두 평양 전투의 승패 여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박세강의 체포로 대원군 측은 남접 주력인 전봉준과 접촉할 기회를 잃게 되었고 이후 주로 북접 호서농민군과 제휴하여 왕권을 뒤엎으려고 기도하였다. 또한 민영준과는 달리 사전에 청병 파병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청병 스스로 출병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때 대원군 측은 허엽이 추천한 청주의 이용구를 만인소의 우두머리로 내세웠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저자이자 정치인인 정교(鄭喬)도 대원군 지시로 호서수재(湖西守宰)와 농민군은 합력 북상하여 청국군과 더불어 남북으로 협공하여 일본군을 타파코자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1895년 3월 25일부터 4월 14일까지 걸쳐 진행된 법부협판 김학우 피살 사건과 이준용 등의 ‘모반사건’ 관련 피의자들의 신문기록이다. 이준용(李埈鎔)은 국왕 고종의 형 이재면의 큰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종손자이다. 그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의 힘을 빌려 잠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대원군의 후견으로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의 힘을 빌려 평양에 주둔한 청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 전복을 꾀하였다. 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원군은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준용은 이후 군국기무처 의원인 김학우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파 세력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특별 석방되었다. 이 공초는 이준용 외에 관련 및 혐의자 서병선ㆍ임진수ㆍ정조원ㆍ윤진구ㆍ장덕현ㆍ전동석ㆍ김내오ㆍ손이용ㆍ박준양ㆍ이태용ㆍ고종주 등 12명을 총 26차례에 걸쳐 취조하고 그들이 진술한 내용이다. 먼저 법무아문에서는 김학우 피살 사건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을 지적하고 있다. 협판 이재정, 참의 장박 등의 심문에서 이준용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준용처럼 4차례에 걸친 경우, 박준양과 이태용처럼 3차례, 임진수ㆍ전동석ㆍ고종주처럼 2차례도 있었고, 서병선 등 나머지 사람들은 1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이준용공초』의 또 하나의 중요 포인트는 이준용과 동학농민군 관련 문제이다. 이 사건은 대원군 세력이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추동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갑오 개화파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추궁하고자 한 재판으로 이 공초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와 관련하여 대원군과의 관련성 등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임진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에게 각국 공관과 각국 공사에게 급히 해야 할 일을 함께 토론하게 하고 서양 나라의 통용되는 관례에 의하여 별도로 상하의원(上下議院)의 설치를 구상하고 이를 글로 작성하여 동학농민군에게 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정인덕도 일본과 더불어 상하의원을 만들어 공동의 정치를 이룬다면, 동양의 형세도 구미와 균형을 다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또 다른 공모자 고종주는 1차 진술에서 ‘유신설(維新說)’을 주장하면서 이는 갑오년 6월 21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은밀히 국왕의 형인 이재면에게 통지하였다. 여기서 6월 21일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일로 일본과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대원군을 정점으로 하는 운현궁 세력은 경복궁 점령 후 일본군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를 기도하는 방안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국권을 모두 운현궁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결국 흥선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이준용ㆍ이재면 등 대원군 세력의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 기도로 이해된다. 이준용은 전라ㆍ충청ㆍ경상도 등 삼남의 농민군을 모두 동원하고 이들과 합세해서 쿠데타를 진행할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고종주는 ‘동비(東匪; 동학농민군)’와 의논한 일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반면 3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말하고 청국군과 연합전선을 통한 일본군 격퇴를 주장하는 등 그간의 입장과는 다소 상반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기획
  • 기고
  • 2025.08.22 16:4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7) 홍우전물침첩, 이정돈물침첩, 삼향면물침첩, 최운용표, 한학모표, 오세용임명장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낱장의 문서들이다. 그중에서 1894년에 작성된 물침첩, 표, 그리고 임명장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홍우전 물침첩(洪祐銓勿侵帖)은 1894년 11월 나주목사가 능주(綾州) 부춘면(富春面) 상우봉(上牛峰)에 사는 홍우전(洪祐銓)에게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수령들과 수성소와 유회군에서는 농민군으로 관에 협조를 했거나 뇌물을 썼거나 또 농민군을 배반하고 정보를 제공한 경우, 이를 보호하는 물침첩(勿侵帖)를 주었다. 이 물침첩을 지니고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토벌군들이 보호해 주어 일종의 특혜를 입었다. 물침첩도 하나의 이권으로 팔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물침첩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발급자가 나주목사인데 발급대상은 나주관할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능주 부춘면에 사는 홍우전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관할을 넘어서는 문서가 발행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당시 전라도 남부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을 책임지는 초토영이 바로 나주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자가 바로 나주목사 민종렬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나주목사 이름으로 능주에까지 물침표를 작성해 준 것이다. 발급한 시점은 1894년 11월로 우금치 패전 이후 본격적으로 농민군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물침첩이 발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정돈물침첩(李廷燉勿侵帖)은 1894년 12월 29일 남평현감이 남평(南平) 어천면(魚川面) 야산(夜山)에 거주하는 이정돈(李廷燉)에게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이정돈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몰고 다녔는데, 특히 이 소를 침탈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정돈물침첩은 1894년 12월 29일에 전라도 남평현에서 발급된 것으로 역시 시기적으로 우금치 패전 이후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돈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대단히 변화가 극심한 시기에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소를 지키기 위해 소를 직접 몰고 피신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를 지켜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소가 가장 소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정돈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치밀한 면도 있어 보인다. 그는 소를 지키기 위해 남평현감에게 물침첩 발급을 요청하고 이를 발급받아 피신하는 과정에서 직접 소지하고 있다가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제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삼향면(三鄕面) 물침첩(勿侵帖)은 1894년 12월 무안현에서 발급한 17장의 물침첩 묶음이다. 이 물침첩에는 전라도 무안현 삼향면 극배(克培)·죽림(竹林)·와동(蛙洞)·이동(鯉洞)·송산(松山)에 사는 이이겸(李二兼), 노기화(魯奇化), 손명언(孫明彦), 이태련(李泰連), 박이만(朴二萬 ), 김행순(金行順), 손가마구(孫可馬九), 김단중(金段中) 등 17명에 대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침탈하지 말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1894년 12월 무안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 활동이 있었다. 『순무사정보첩』에 따르면 양호도순무영의 선봉장 이규태가 1894년 12월 11일 유시(17시∼19시)에 무안에 도착하여 수성군을 조직하여 각 면의 민간 장정들과 협동하여 접주 70여명을 잡아 가두었다. 또 민원에 따라 30명을 처단하고 40여명을 가두었으며, 무안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규찬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9명을 총살하였다. 또 『일본사관함등(日本士官函謄』에 따르면 12월 24일 무안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는 무안현민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물침첩 발급을 요청하였고 이를 무안현에서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17장의 물침첩의 발급대상 지역인 무안현 삼향면 극배(克培)·죽림(竹林)·송산(松山)·와동(蛙洞)·이동(鯉洞)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극배, 죽림, 송산)와 용포리(와동, 이동)에 속하여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물침첩에서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발급시기가 대체로 1894년 11월과 12월이라는 점이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한 이후 남하하게 되고 조선정부와 일본군의 토벌이 가혹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까지도 체포되거나 재산을 약탈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해소해달라는 민원이 빈번하게 되자, 관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이러한 물침첩을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발급된 물침첩이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에 동학농민군 주력이 남부로 몰리면서 농민군 토벌이 이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특히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침첩 발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운용 표(崔雲龍 表)는 1894년 9월 능성 상서면(上西面) 하황리(下黃里)에 거주하는 유학 최운용(崔雲龍)에게 발급된 표(標)이다. 발급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능주목사로 추정된다. 최운용이 미도인(未道人) 즉 동학농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 표를 소지하고 있으면 동학농민군으로 체포되지 않으며 재산을 침탈당하지 않는다. 당시 최운용은 나이가 15세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한학모 표(表)는 1894년 12월 7일 전라 관찰사겸위무사(觀察使兼慰撫使)가 남원 오지(梧支) 일리(一里) 가동(佳洞)에 사는 한학모(韓學模)에게 발급한 문서이다. 곧 물침표(勿侵標)와 같은 것으로 이 표를 제시하면 동학농민군이라는 이유로 체포하거나 재산을 강탈하지 못하였다. 오세용부참모장 임명장(吳世鎔副參謀長任命狀)은 1894년 12월 유학(幼學) 오세용(吳世鎔)을 수성부참모장(守城副參謀長)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작성자와 임명 주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1894년 12월이라는 점과 수성군이라는 점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민간 조직이 구성된 상황에서 유학 오세용을 부참모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 기획
  • 기고
  • 2025.08.13 19:3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6)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과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은 1894년 10월 1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양호도순영(兩湖都巡撫營) 휘하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동학농민군을 진압 토벌하는 과정에서 순무사(巡撫使) 신정희(申正熙)에게 보낸 첩보(牒報)를 수록한 것으로, 모두 104종의 첩보가 포함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2×30cm이다.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은 1894년 10월 14일부터 12월 26일까지 또한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장 이규태가 직접 지휘하였던 통위영(統衛營), 그리고 그의 지휘하에 두었었던 장위영(壯衛營)·경리청(經理廳) 등의 각 부대와 휘하 각 영관·대관·별무사 등, 그리고 각지의 수령과 의병소, 수성군 등에게 내린 전령(傳令)을 모은 책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1×31cm이다. 위 두 자료는 모두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장 이규태가 상급 부대인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려보낸 첩보(牒報), 그리고 양호도순무영 휘하 각 부대 및 각지 수령 등에게 내려보낸 전령(傳令)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봉장 이규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급 부대로의 보고 문건이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이고 예하 및 기타 부대로의 명령 문건이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진 이규태의 지위 및 상급 부대가 되는 양호도순무영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규태(1841~1895)는 186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 주부, 초관, 첨정을 맡고 도총부 도사, 경력 등을 역임한 무관이었다. 청주 영장과 내금위장 등을 지낸 다음 경리청과 장위영에서 참영관, 정영관을 지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전 친군영 체제 하에서 정영관으로 자리 잡은 고급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 뚜렷한 일본과의 관계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양호도순무영은 1894년 9월 22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 1833~1895)를 순무사로 임명하여 편성된 부대다. 여기서 순무영은 조선시대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응하거나 진압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군영을 뜻한다. 순무영이 설치되면 해당 전쟁이나 반란을 대응하는 모든 부대 및 각지 수령은 순무사의 절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19세기 들어서도 순무영이 세 번 설치되었는데 첫째,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순무영이 있었고, 둘째, 1866년 프랑스의 침략, 즉 병인양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치된 순무영이 있었고, 신정희의 양호도수문영이 바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세 번째 순무영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모든 관군은 순무사 신정희의 양호도순무영의 절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서울에서 남하한 진압군 대부분은 사실상 일본군 지휘관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래 기존 친군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중앙군은 해체당한 뒤 일본군에 의하여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호도순무영은 명칭상으로는 양호(兩湖), 즉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절대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휘하 부대들이 대부분 일본군에 의하여 조직된 부대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된 지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는 1894년 9월 24일 통위영(統衛營) 영관 이규태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임명하여 선발부대를 이끌고 출진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규태는 교도병(敎導兵) 200명과 통위병(統衛兵) 200명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經理廳) 등 다른 부대도 선봉장의 지휘를 받도록 전령이 떨어졌다. 여기서 통위영은 기존 친군영 체제 하에 있던 친군 통위영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재조직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명칭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전의 체제를 어느 정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장위영과 경리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교도병은 곧 교도중대(敎導中隊)의 병력을 일컫는데, 이는 일본군이 새롭게 조직한 부대였다. 교도중대장(敎導中隊長) 이진호(李軫鎬)는 일본군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따라서 교도병 200명은 사실상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병력들이었다. 더욱이 10월 12일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가 선봉장 이규태에게 일본군과 의논하여 노정을 정하도록 하는 전령을 내리면서 이규태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대한 숙소 및 음식 공급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학농민군 진압에 대한 주도권은 일본군이 쥐게 되었다. 실제로 선봉장 이규태는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병력과 함께 공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11월 벌어진 공주 전투때도 서로분진대를 지휘한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와 함께 남하하였는데 전투의 주도권은 그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이규태는 불만을 품고 순무사 신정희에게 사신(私信)을 보내어 일본군과 관련한 문제들을 토로하였다. 일본군 또한 이규태에게 불만을 품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의 지휘를 받지 않은 선봉장 이규태를 두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를 향하여 “열렬히 동학당에 가담한 사람이며 모든 처사가 애매모호하고 지휘관의 명령을 왜곡, 이제까지 한 번도 전투 일선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이에 따라 이노우에 공사는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이규태의 소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장위영(壯衛營)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을 선호하였다. 그는 청군과의 평양 전투에도 일본군을 따라가 복무한 경험이 있는 친일 군인이었다. 일본군과 함께 남하한 다음에는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보은 장내리와 목천 세성산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11월 26일 이두황이 우선봉(右先鋒)으로 임명됨으로써 기존의 선봉장 이규태는 좌선봉(左先鋒)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장위영 병력은 이두황과 원세록이 지휘하고 경리청 병력은 홍운섭과 성하영이 지휘함으로써 이들 병력에 대한 이규태의 지휘권도 불분명해졌다. 교도중대는 이미 이진호가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 양호도순무영은 12월 23일 순무사 신정희가 강화유수로 임명되면서 혁파되었다. 좌선봉 이규태의 활동도 여기에서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태 또한 동학농민군 진압을 충실히 벌인 것으로 보인다. 『순무사정보첩』에 따르면 그는 효포, 판치, 유구, 우금치 등지에서 공주 전투를 수행하였고, 노성, 논산, 강경 등지까지 가서 동학농민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우금치 전투 당시에는 각급 부대 지휘관들에게 “일본 병사와 합세하고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순무사정보첩』에는 전라도 지역까지도 내려가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규태는 전라도 무안 등지로 내려가 무안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을 토벌하기까지도 하였다. 이를테면 12월 14일 “동학(東學)의 거괴(巨魁)인 배규인(裴奎仁)이 도망하여 해남(海南) 등에 있다고 하니, 너희들은 기필코 쫓아가 붙잡아 바치면 마땅히 상을 후하게 줄 것이다.”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규태가 일본군의 고을 수령에 대한 감금 및 심문, 그리고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탈취에 대한 불만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일본군이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을 빼앗아가자 “우리의 신민(臣民)이 국법에 의해 처결되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직속상관인 순무사 신정희도 「순무사 방시문」을 통하여 귀순한 동학농민군을 생업에 안정시킬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규태의 직책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편성된 부대의 선봉장이었고 역할 또한 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및 우선봉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에 저지른 잔혹성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역시 동학농민군 진압을 맡은 지휘관임은 분명하였다. 다만 이규태는 이두황과 달리 친일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고 동학농민군 진압 직후인 1895년 6월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8.06 19:0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5)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將領姓名並錄成冊)

1895년 1월 나주초토사 민종렬(閔種烈, 1831~1899)이 작성한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 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 及將領姓名並錄成冊)」은 전라도 각 군현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수와 공을 세운 장령의 성명을 적어 정부에 보고한 문서이다. 1894년 12월에는 「전라도 각읍에서 잡은 동도 수효와 빼앗은 물건을 기록한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 급소획즙물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 及所獲汁物幷錄成冊)」을 작성했는데, 두 문서 모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 1 광양 무장 부안.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 민종렬은 1870년대에서 18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삼남의 주요 고을을 다스린 뛰어난 지방관이었다. 의금부 도사와 형조정랑을 거친 그는 중앙 정계의 배경도 든든하였다.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한성판윤을 역임한 민종묵(閔種默, 1835~1916)이 동생이었다. 그는 충청도 노성과 현풍현감, 경상도 양산군수와 밀양부사를 거쳐 상주목사를 지낸 다음 전라도 남원부사에 이어서 나주목사를 지낼 때 동학농민혁명을 맞는다. 전봉준 장군이 1차봉기시 전주성에서 물러나 나주목사 민종렬을 찾아가서 담판했지만 결국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일화가 널리 알려졌다.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 동학농민군의 압력을 받아 민종렬을 나주목사에서 이직시키려고 했으나 나주의 여론이 강력히 반발해서 실패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자 나주성을 지켜낸 민종렬은 9월 29일에 호남소모사를 겸임했고, 10월 28일에는 전라도 서부 고을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책임지는 호남초토사를 겸임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가 남하해서 나주성에 본부를 두고 있을 때 전라도 일대에서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1942~1921) 소좌의 지시를 받았다. 경군 파견부대와 지방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미나미 소좌는 “장흥 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소관(小官)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이노우에 가오루)공사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남 250명, 강진 320명, 장흥 300명, 나주 230명이 살육되었다. 그리고 함평 무안 영암 광주 능주 담양 순창 운봉 장성 영광 무장에서는 각각 30명에서 50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희생자 수를 대략만 기록할 만큼 마구 학살한 것이다. △전라도 각 군현의 잔여 학살과 체포 기록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 급소획즙물병록성책」과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 급장령성명병록성책」은 일본군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여러 군현과 역(驛) 및 진(鎭)에서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체포해서 처분한 내용을 각각 1894년 12월과 1895년 1월에 보고받은 기록이다. 보고한 군현과 역진은 광양 무장 부안 금구 장성 능주 남평 만경 동복 함평 보성 무주 법성진 벽사역 경양역 임자진이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경군에 밀려서 흩어진 후에 사방의 피신지를 찾아 숨었다. 이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붙잡은 동학농민군을 압송해 가거나 경군 좌선봉 이규태와 우선봉 이두황이 넘겨받아서 처형한 사실이 나온다. 또 활동 근거지로 압송한 사례가 나온다. 부안에서 잡은 곽덕언은 고부로 보냈고, 무주에서 잡은 송석준 등 3명은 금산으로 보냈다. 거점이었던 군현으로 압송한 것이다. 기세가 꺾인 각 고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해당 군현의 관아와 민보군이 체포하고 있다. 이른바 거괴나 비괴를 지목해서 붙잡아 들인 것이다. 호남토포사 민종렬은 이들을 엄중히 조사해서 실상을 파악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1894년 12월 기록은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광주 담양 동복 창평 화순 함평 무안 능주 영광 옥과 무장 남평 고창 나주 등에서 보고한 체포와 처형 보고는 전율할 내용이 나온다. 동복에서만 220명을 체포해서 157명이 포살했다는 것이다. 각 고을의 보고에는 죽은 원인이 장살(杖殺) 포살 효수 옥중자살 압송중사망 등이라고 했다.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이고, 목 잘라 죽이고, 감옥에서 참지 못해 스스로 죽고, 압송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각 고을에서 옥에 가둔 사람이 여러 명에서 수십 명이라고 하는데 이 중 많은 수가 처형되었으나 기록조차 없다. 일본군이 나주에서 떠난 이후의 보고 문서이기 때문에 미나미 소좌나 경군이 보고한 학살자 수에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남긴 문서들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을 최대로 추적한 인물이 김학진 이후 내려온 신임감사 이도재였다. 그러나 이도재가 남긴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에 보고하거나 감영에 보관된 문서는 인멸되었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생산한 문서도 대부분 없어졌으나 서목 9건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4년 11월 29일 나주 수성군 몇천 명에 대한 보고 △1895년 1월 13일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장령 보고 △1895년 1월 24일 호남 각읍에서 동학도 체포의 공로자들에 대한 포상 △1895년 1월 24일 전순무영 별군관 김윤창의 공로 보고 △1895년 2월 14일 나주 우영장이 10개월 동안 수성군을 지휘해서 공로에 대한 포상 △1895년 2월 14일 장흥 최신동 문공진 이득춘 이인환, 광주 백정 치성, 함평 장공삼 김달매, 능주 한달문 등 처형 보고 △1895년 2월 14일 각읍에서 동학농민군 체포에 공을 세운 명단 보고 △1895년 2월 15일 부안 진사 이병로가 군수미 200석을 원납한 성의 보고 △1895년 4월 15일 전현감 손웅설과 양반 현덕종에 대한 공로 포상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30 19:2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4)법부청의서, 한성부재판소이수록, 개성재판소형명부, 한성재판소형명부

1894년 갑오개혁은 조선왕조의 낡은 재판제도와 법률을 개정하려고 하였다. 6월 28일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서로 법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은 7월 8일에는 “모든 죄인은 사법관이 재판 명정(明定)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죄벌을 줄 수 없게 하여”라는 원칙을 내세워 사법권의 독립 원칙을 천명하였다. 근대적 사법제도와 그에 걸맞는 판사·검사 등 법률 소양을 갖춘 사법관이 부족했으므로 사법 개혁은 곧바로 실시되기 어려웠다. 이어 1895년 4월 개칭된 법부는 사법사무를 전담하고 각급 재판소의 민사·형사 재판에 일정한 지령을 내리면서 근대적인 재판소 제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당시 법부가 시행한 사법제도 개혁에 관한 제법령의 청의서를 모아놓은 자료가 《법부청의서(法部請議書 )》다. 1895년(고종 32) 4월부터 1896(건양 1) 9월까지 법부에서 내각회의에 제출한 청의서로 주로 법률개혁에 관한 안건에 대한 결재, 집행한 일에 대한 보고서철로 되어 있다. 문건 편철은 건별로 일련번호가 붙어있는데, 제1책은 1895년도분 56호(11월 15일까지), 이어 1896년에 제기된 47호(1월~4월)까지 수록되어 있고, 제2책에는 114호(1896년 4월 4일~9월 23일)가 실려 있다. 법부는 재판 운영에 관한 법률들이 제정하고 민사 및 형사에 관한 소송법이나 각종 처벌에 대한 규례 등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청의하는 문서들을 만들었다. 1895년 4월부터는 법률 1호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여 사법권 독립을 제도화하였다. 이중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재판에 관련된 안건으로는 법률 7호 <징역처단례>를 통해 유형을 그대로 두고, 도형을 징역으로 바뀌었다. 또 지방재판소에서 불복한 건을 고등재판소에서 수리하게 하면서 1895년 윤 5월 개항장과 22부 단위의 지방재판소를 설치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에서 1896년 법률 2호로 공포된 <적도처단례>는 제8조 범죄에 따라 교형, 태형 후 역형(役刑), 역형, 태형 등으로 세분화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제7조 ‘인가(人家)의 남녀를 약취(略取)하여 자취(自取)하거나 전매(轉賣)하여 고용(雇傭)을 작(作)하는 자(者)’등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인신의 약취를 통하여 노비, 혹은 고공으로 삼는 관행을 일거에 근절시키는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적 조치였다. 다음은 《한성부재판소이수록(漢城裁判所移囚錄)》이다. 1895년 5월 초부터 하순까지 한성재판소에서 각 기관이나 각군에서 죄수들을 이관해온 상황을 기록한 자료이다. 1895년 4월 15일자로 한성재판소가 설치됨에 따라, 이전까지 각도 감영(監營)이나 군부·경무청 등 기관에 수감 중인 죄수들을 한성재판소로 이관하게 되었다. 속표지에는 “개국 504년 5월 1일 시(始) 고등재판소 한성재판소 각영장계이송기(各營狀啓移送記) 이수록(移囚錄)”으로 되어 있어 당초에는 고등재판소로 이관한 죄수에 관한 사항도 포함하여 기재하려 했던 것 같다. 첫머리에는 서흥군의 첩보로 이송된 갈희천(葛希千)·고윤수(高允秀)가 1895년 4월 28일에 군부에서 이송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두 사람은 동도(東徒) 혐의로 붙잡힌 죄수였다. 이어 다음날 법부는 좌감옥서에 갇혀 있는 이들을 한성재판소로 이송하여 자세히 심판하도록 하였다(《기안(起案)》 1책). 동도 이중칠(李仲七)은 4월 28일 군부에서 이송하여 5월 1일자로 이송되었으며, 이사원, 정기철, 김학룡 등의 진술을 열거한 공초 등과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이사원, 정기철, 김학룡, 원용성, 민성구, 이문복, 이흥옥, 윤완, 김충신 등을 한성재판소에 이송하도록 하였다[공이(公移) 28호 기안]. 이 자료는 군부, 경무청, 전국 각군에서 죄수를 이송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죄수의 공초 유무와 이관된 일자를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다만 1895년 5월 한 달 동안 상황만 기록되어 있는 간단한 자료에 그쳤다. 다음은 개성부 재판소에서 기록한 《개성재판소형명부(開城裁判所刑名簿)》이다. 표지가 없어 편자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성재판소 형명부’라고 인쇄된 용지에 내용을 기록하고, 첫 장 오른편 하단에 ‘대조선국 법부 문서과방’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개성재판소에서 법부에 재판 선고 사항을 보고한 문서로 보인다. 내용으로는 각 수인(囚人)별로 주소·신분·성명·나이를 기록하고 범죄 종류·형명 및 형기·선고년 월일·형기 만한·초범(初犯) 혹 재범(再犯)·집행경과 년월일·사고(事故) 등의 항목을 두어 정리하였다. 수인들의 죄목을 보면 구타치사(毆打致死)‚ 간범매합(姦犯媒合)‚ 무고관장(誣告官長)‚ 타인묘굴이(他人墓掘移)‚ 난민수종(亂民隨從)‚ 누설옥정(漏泄獄情) 등 다양하였다. 장단군 평민 신주경(申周景, 34세)에게 구타하여 죽인 죄로 ‘종신 징역’을 선고한 것(<선고 1호>)을 비롯하여 9호(7월 13일)까지 9건의 선고문이 편철되어 있다. 신계군 율탄방 반식리 삼미동에 사는 황문신(黃文信, 33세)은 ‘난민수종죄(亂民首從罪)로 수감되었다. 그는 대명률에 의하여 5품이상 장관을 상하게 한 자는 장 100, 유 2천리로 처하는 규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었지만, 법률 7호 <징역처단례>(1895.4.29. 반포)에 의해 감 1등, 태 100대, 징역 3년으로 선고받았다(1896년 6월 28일 선고). 이는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전국 각지 민란 가담자에 대한 처벌이 지속하고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음으로 《한성재판소형명부(漢城裁判所刑名簿)》는 한성부 재판소가 1896년 7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무려 11년 동안 각종 판결과 선고가 이루어진 죄수들의 형명부이다. 1895년 3월 25일 제정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에 의하여 근대적 재판기관으로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순회재판소‚ 지방재판소‚ 한성재판소 및 개항장재판소 등이 출범하였다. 이어 법부령 제1호 <한성재판소 설치에 관한 건>(1895.4.15.)에 의하여 한성재판소가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한성재판소의 독립적 사법 기구로 운영되었으나 이후 칙령 제5호 <한성부재판소 관제·규정>(1898.2.9.)로 개편되었다. 1897년 9월 12일자로 경기재판소가 설치되기까지 경기도 지역의 민사·형사 사건을 모두 한성재판소가 관할하여 판결 내용을 해당 군에 훈령으로 하달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한성 오서(五署) 내의 민사·형사 사건을 담당하였다. 형명부에는 판결선고 일자나 번호순으로 편철되어 있기도 하고, 선고된 형이 집행된 일자순으로 편철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재판소 민형사 기결·미결 성책>(1898.1.31.) 등도 첨부되어 있다. 1898년 제1호 선고문에는 한성부 어의동 평민 정기호(鄭基好, 53세)로 죄목은 비도(匪徒)의 수괴자로 운량관을 칭하여 쌀과 전을 약탈한 혐의로 대전회통 추단조(태 1백대, 징역 종신형)으로 처벌되었다는 사실이 실려있다(《형명부》규 20168, 1898년 2월 21일 선고). 또한 경기도 여주군 평민 김흥산(金興山, 25세)은 1896년 봄 여주군 비도 창궐시에 참여했다는‘작변관문수종’의 죄목으로 같은 처벌을 받았다(《형명부》규 21112, 1897년 4월 6일 선고).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추가로 잡혀온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수형자로서 형명부에 수록되었다. 1900년 9월 형명부에는 충북 청주군에 거주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서장옥(徐章玉, 49세)이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술(術)로 우두머리가 된 자’라는 죄명으로 교형(絞刑)에 선고되었고, 이틀 후 이를 집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1895년 이후 한성재판소의 재판 수형 기록은 모두 83책으로 다년간에 걸쳐 많은 분량으로 남아 있어, 당시 민중들의 사회적 처지와 다양한 범죄 행위와 관련하여 범죄의 유형과 그에 대한 판결과 집행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형명부에 기록된 제반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는 《사법품보(司法稟報)》와 《관보》에 실린 상세한 기록과 비교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진 각종 법률 관계 기록물 속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참여자에 대한 사법 재판과 처벌의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왕현종 연세대 교수 왕현종 연세대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23 19:4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3) 창의인명록, 서산 화변면 간월도 유회 성책, 서산 영풍창면 우길리 유회 성명성책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창의인명록』과 충남 서산 간월도와 우길리에서 작성한 『유회 성책』이다. 세 자료 모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민보군 관련 기록물이다. 생산시기는 10-11월경이고 생산지역은 충남 아산과 서산지역으로, 이들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인 보수층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응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창의인명록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충청도 아산, 온양, 천안의 민보군 관련 내용으로 창의통문과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들의 인명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창의통문에는 “음사한 무리들이 동도라고 부르면서 팔도에서 소요를 일으켜 임금이 근심을 하고 평민을 위협하여 재물과 곡식을 약탈하고 관장이 능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하면서, 각자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을 분발하면 백성들이 본받을 것이니 진실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창의소에 모이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창의통문을 받고 창의소에 모인 유회군, 즉, 민보군 명단이 바로 ‘창의인명록’이다. 이에 의하면, 의병통령은 윤치소(尹致昭)이고 모화(謀畵) 조중석, 선진영솔 조두영·임의영, 중군영솔 류상후, 후군영솔 홍남수, 참모 남정섭 외 8명, 운량 김두식 외 3명, 경찰 조상희·이범석 외 3명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민보군은 아산·천안·온양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천안에서는 신리 14명, 당후리 20명, 문성리 5명, 시포 16명, 항각동 6명, 장재동 8명, 관대 5명, 송산 16명, 산직촌 20명, 죽계 6명 등 116명이다. 아산에서는 냉정리 2명, 중리 13명, 남창 19명, 신리 22명, 신동 17명, 백치 8명, 창정 2명, 삼거리 5명, 곡교 2명, 공수동 9명, 명포 11명, 철봉 5명 등이다. 아산의 경우 화포군(火砲軍)으로 14명도 참여하였다. 총 129명이 참여하였다. 온양에서는 운산 12명, 여사동 15명, 갈산 2명 등 29명이다. 그밖에 부상 의병소 별군관 진사 이주상, 유학 조두영 등도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천안·아산·온양 가운데 아산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은 창의를 주도한 인물이 아산 윤웅렬·윤치소 부자였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윤보선이 윤치소의 아들로, 아산 둔포에 뿌리를 둔 명문세족이었다. 그 때문에 윤치소 등이 발한 창의통문을 받고 참여한 유생들이 아산 둔포면을 비롯한 주변지역에서 참여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지역은 5월 아산 백석포에 주둔한 청국군의 피해를 몸소 겪었던 곳이다. 청국군들은 군율이 엄격하지 않아 군사들이 마을을 마구 돌아다녀서 작폐가 매우 심하였던 곳이다. 청국군이 물러간 뒤 민족적 위기에 이 지역 유생층은 숨죽였지만, 동학농민군들은 들고일어났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범석(1862~?)의 『확재집(確齋集)』에 수록된 「경난록」에 의하면, 아산지역 일반인 대다수가 동학에 가입하여, 양반가의 묘소를 파헤치고 전에 원한이 있는 경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포박하여 형벌을 가하였다고 한다. 노비들도 해방되어 자유롭게 활동하자, 이를 지켜 본 이범석은 노비문서를 스스로 불태우고 면천시켜주었을 뿐 스스로 물을 길고 장작을 패어 밥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 1894년 10월에 들어와 정부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하자, 아산지역 유생들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정부군 지원에 나섰다. 아산지역에서 선봉에 나선 인물이 바로 윤웅렬·윤치소 부자와 조중석 등이다. 이들은 10월 21일경 이규태가 이끄는 선봉진부대가 아산에 오자 마중하였을 뿐 아니라, 윤웅렬·윤치소와 조중석은 선봉진의 별군관으로 임명되었다. 윤치소가 이끄는 민보군은 현지 사정에 밝은 만큼 길 안내나 정탐 등 정부군을 지원하거나 직접 동학농민군을 수색해 정부군에게 넘기거나 때로는 직접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목천 세성산전투 이후 천안 목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두황부대가 세성산전투에서 노획한 군수물자 가운데 백미 169석과 정조 206석을 청주병영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맡는 등 정부군을 적극 지원하는 동시에 동학농민군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천안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11월 1일 예산·신창 등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천안에서 아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11월 5일 8명의 동학농민군을 체포하여 신창현에 압송하였는데, 이들은 다시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에게 인계되어 11월 6일 예산 역촌 앞길에서 목이 잘리는 극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천안·아산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을 선 민보군은 「창의인명록」에서 의병통령이 윤치소로 되어 있지만, 그 위에는 윤치소의 아버지 윤영렬이 있었다. 단적인 증거가 10월 21일에는 윤영렬과 조중석이 300명의 의병을 불러와 선봉진 주력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또 선봉진 별군관 겸 의병소 통령 윤영렬은 10월 24일 천안 남쪽 소거리에 사는 전 도사 김화성 등 4명을 체포하여 취조한 사실을 10월 27일 선봉장 이규태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다. 이들 민보군은 11월 7일 천안군수의 지시에 따라 장위영군을 지원하기 위해 아산 곡교에서 홍주 등지로 전진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창의인명록」에 의병통령이 비록 윤치소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민보군을 총지휘한 통령은 그의 아버지 윤영렬이었다. 그럼에도 「창의인명록」에 의병통령으로 당시 24살이었던 윤치소가 기재되어 있는 것은 동학농민군 토벌 공로를 아들에게 돌려 포상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영렬이 조중석과 함께 창의통문을 돌려 민보군을 조직한 시기는 선봉진이 아산지역으로 내려오자, 10월 11일 윤영렬과 조중석이 의병을 일으켜 선봉진에게 호궤 물품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무렵으로 보인다. 10월 11일경 민보군 조직은 전국에서도 매우 앞선 시기이다. 서산 화변면 간월도 유회 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서산 화변면 간월도 유회 성책(瑞山禾邊面看月島儒會成冊) 서산 화변면 간월도의 유회 참여 명단이다. 작성시기는 1894년 11월 24일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록물은 서산 간월도 유생들이 동학농민군 토벌시 공로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자 이름을 책자로 남긴 것이다. 수록 명단에는 최양여부터 김성필까지 도합 25명의 명단과 면(面) 회장 이만직, 이(里) 회장 김윤화, 동장 김한집, 공원 노문오, 문서 하산길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간월도에서의 민보군 조직은 면리조직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산 영풍창면 우길리 유회 성명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서산 영풍창면 우길리 유회 성명성책(瑞山永豐倉面牛吉里儒會姓名成冊) 서산 청풍창면 우길리의 유회 참여 명단이다. 1894년 11월에 작성된 문서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록물 역시 간월도 유회 성책처럼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유생들의 이름을 책자로 남긴 것이다. ‘유학 류병렬 자 성구’부터 ‘한량 길일서 솔제(率弟) 순서’까지 모두 16호가 기재되어 있다. 각각의 직함은 유학, 한량, 고생 등이다. 문서 제일 끝에는 ‘이회장 김광태 자 청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유회 성책은 ‘우길리’ 차원에서 동원된 명단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작성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호(戶)단위였다. 그래서 참여한 호 구성원을 보면, 동생, 아들, 사위 등이 함께 참여하였고 앞의 간월도 경우보다 더 조직적으로 민보군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산 간원도와 우길리에서 작성된 『유회 성책』은 1894년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참패한 이후 보수층의 반동적인 움직임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면리조직을 동원하여 민보군을 모집하였을 뿐 아니라, 친인척 혈연관계를 통해서도 민보군으로 편입하였을 정도로 촘촘히 움직였다. 이들 기록물 외에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정산군 청면의 『유회성책』도 비슷한 시기 내포지역에서 생산된 같은 성격의 민보군 관련 기록물이다. 이렇게 조직된 서산 등 충남 내포지역 민보군은 길목마다 유막(儒幕)을 설치하여 통행자를 검문하여 동학농민군을 색출하거나, 마을마다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조직적으로 생존 동학농민군을 단속하고 주민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일본군이나 관군을 지원하고 길 아내를 맡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은 어느 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가 동학 활동을 하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고 가장 많은 피해를 받았다. 이러한 내포지역 민보군의 활동과 폐해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예산군 북하면장의 『북하면보』에 잘 나타나 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

  • 기획
  • 기고
  • 2025.07.16 17: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2) 『순천부포착동도성명성책(順天府捕捉東徒姓名成冊)』·『광양현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縣捕捉東徒姓名成冊)』·『광양섬계역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蟾溪驛捕捉東徒姓名成冊)』

△지리산권 동학농민군 활동 관련 주요 자료 『순천부포착동도성명성책(順天府捕捉東徒姓名成冊)』은 1894년 12월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성명 및 날짜 처리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로 1책 3쪽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쌍암면(雙巖面)의 영호도집강(嶺湖都執綱) 정우형(鄭虞炯)을 비롯하여 동촌면(東村面)·서면(西面)·별양면(別陽面) 등의 접주와 성찰·마부와 광주 성찰 박현동, 운봉 서기 오준기, 경상도 양산 접주 황두화 등 18명에 대한 총살·효수(梟首)·장방(長房) 수감 등의 처리 사항을 적고 있다. 영호도집강은 영호대접주 아래 직위인 도집강으로 집강소 시기 주로 순천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이해 12월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 공격에 나섰다가 살해되었다. 장방은 각 관아에서 서리가 쓰던 방을 말한다. 그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94명을 때려죽인 사실을 적고 있다. 전라도 순천부 등지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층 및 참가층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광양현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縣捕捉東徒姓名成冊)』은 1894년 12월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성명, 날짜 및 처리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로 1책 8쪽으로 되어 있다. 내용에서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금구의 김인배(金仁培), 영호수접주(嶺湖首接主) 순천의 유하덕(劉夏德)을 비롯하여, 광양현 봉강·인덕·사곡 등지의 접주 및 순천·구례, 경상도 진주의 김학수, 삼가의 고백준, 곤양의 장학용과 임재석 등 외지에서 온 89명의 농민군에 대한 처리 사항을 적고 있다. 영호대접주와 수접주는 효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총살되었다. 전라도 광양현 등지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층 및 참가층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광양섬계역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蟾溪驛捕捉東徒姓名成冊)』은 1894년 12월 10일 전라도 광양현 섬계역(蟾溪驛) 상동(上洞)의 주민들이 동학농민군을 잡아 이들의 성명 및 처리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로 1책 3쪽으로 되어 있다. 참수된 도접주(都接主) 전갑이(全甲伊), 도집강(都執綱) 정홍섭(丁洪燮) 외에 김석준(金石俊)부터 동몽(童蒙) 조백원(趙伯元)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군 27명을 총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섬계역은 광양에 속한 섬거역(蟾居驛)으로 섬진강 연안의 교통 요지였는데 섬진강을 넘나드는 농민군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후 12월 22에는 관군 일본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다. 이상 세 자료는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잡책철(雜冊綴)』에 포함되어 있다. △영호대접주 김인배와 지리산권 동학농민군의 활동 김인배는 1870년 6월 전북 금구면 하서면 봉서마을 출신으로 그의 집은 100여 석을 수확하고 상당수의 머슴을 거느리는 부농에 속했다. 그러던 중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전라도 일대에서 시작되자 김인배는 농민군에 들어가 전주성 점령에 참여하였다. 그는 원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다가 전주성 공방전 이후부터 김개남 측근의 대접주로 활약하게 된다. 김인배는 김개남이 남원서 집강소 활동을 할 무렵인 6월 순천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순천 성내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농민군의 군수(軍需)를 위해 무기와 전곡(錢穀)을 징발하였다. 당시 영호대도소는 김인배를 대접주로, 순천 출신 유하덕을 수접주로, 순천부 수령 정우형을 도집강으로, 권병택을 성찰로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아래 순천 광양의 11개 면을 단위로 한 접주들이 있었다. 영호대도소는 현재의 전남 동부지역 지리산권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조직이었다. 김인배는 순천에서 활동하다가 8월부터 경상도 하동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어 9월 1일 전투에 김인배와 유하덕이 이끄는 농민군 1만여 명이 출전하였다. 결과는 농민군의 대승리로 민보군과 향병은 달아났고 농민군은 9월 2일 하동부 관아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집강소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동 집강소는 약 2개월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때 농민군들은 민보군 거점인 화개동 500여 채에 불을 질렀고, 김인배는 처음 며칠간 이곳에 머물렀다. 김인배는 하동전투 승리 이후 진주로 갔다. 영호대도소의 농민군과 현지의 농민군은 9월 14일 진주성에 입성하여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9월 17일에는 남원과 구례ㆍ익산 등지의 농민군도 이 지역 농민군 대열에 합류했다. 김인배는 농민군 1천여 명을 이끌고 18일 진주로 들어와 대도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10월 18일 하동에 들어온 일본군과 진주병영의 군사, 토포사가 이끄는 중앙군들은 22일 광양 섬거역에서 농민군과 접전을 펼쳐 10여 명 이상 살해하였고, 당일 광양의 농민군 1천여 명은 섬진강을 건너 하동부를 공격했다. 이때 김인배는 섬진나루로 진격하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화기 공격으로 농민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고, 김인배 또한 산골에 숨어있다가 후퇴하였다. 진주 퇴각 후 하동과 광양전투에서 패한 김인배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10월 말 이후 유하덕과 함께 순천과 광양의 농민군을 다시 규합하여 여수의 좌수영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양 출신 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황현(黃玹)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김인배가 좌수영을 공격하려는 것은 뱃길을 끊어 세금 상납과 상거래를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한 것이라 한다. 11월 10일 첫 번째 공격에서 좌수영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양측이 별다른 피해 없이 일단 순천으로 후퇴하였다, 11월 16일 다시 습격하여 감영병과 성 밖에서 접전 후 후퇴하였다. 그러나 좌수영 수사 김철규는 통영의 일본 해군 측량선 쓰쿠바호(筑波號) 함장 구로오카 다테와키(黑岡帶刀)에게 서한을 보내 동학농민군 섬멸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군 100여 명이 진남관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11월 22일 농민군 수만 명은 덕양역 전투를 시작으로 최후의 결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농민군들은 일방적 수세에 몰렸고, 그날 밤 좌수영 격전에서 이풍영이 이끄는 좌수영 군사의 습격으로 또다시 패주하였다. 김인배는 이후 순천을 거점으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2월 초 순천·광양·구례 등지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어 숨어있던 농민군들을 체포 처형하는 등 잔인한 보복을 개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인배와 유하덕은 1천여 명을 이끌고 순천에서 광양으로 옮겼는데, 12월 7일 광양의 민보군 김석하 등은 아전들과 함께 농민군 대 토벌전을 펼쳐 김인배를 비롯한 농민군 40여 명을, 며칠 후에는 다시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구로오카가 히로시마 대본영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전라도 안의 53개 지역 중 50곳은 동학도가 점유하는 바이고 좌수영, 나주 및 운봉만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동학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자는 1백만 여 명에 이르는데, 이들에 대해 귀순반정(歸順反正)의 방법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기간 제4중대장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대위는 전라도 남부에서 총살과 효수 등으로 살해한 농민군 명단을 제시하였다. 이 자료에서 영호대접주 김인배 외에 최초로 확인되는 농민군 이름이 많이 보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94명도 타살되었다. 김인배는 봉강접주 박흥서 등 부하 23명과 함께 참수 처형된 후 광양객사 문 앞에 효수되었는데 당시 나이는 약관 25세였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09 16:15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1) 죄인군물성책과 물금첩기

△죄인군물성책(罪人軍物成冊) 「죄인군물성책(罪人軍物成冊)」은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토벌 과정에서 확인한 동학농민군 명단과 물자를 기록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5×27cm이다. 이 자료는 「친군경리청장졸성책(親軍經理廳將卒成冊)」, 「선봉대장진배행장관좌목(先鋒大將陣陪行將官座目)」,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교도소출주장병성책(敎導所出駐將兵成冊)」, 「본진별군관차출기(本陣別軍官差出記)」,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죄인록(罪人錄)」 등과 함께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으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자료에는 1894년 11월 16부터 11월 26일 사이에 물리친 동학농민군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백정복(白正福), 고영만(高永萬), 이복만(李福萬), 최도수(崔道水), 김자근봉(金者斤奉), 김순천(金順川), 이정천(李正川), 민성심(閔成心), 호한성(扈漢成) 총 9명이다. 이들은 모두 2004~2009년 사이에 활동한 국무총리소속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다음으로 관군이 이들을 격파한 후에 획득한 군물(軍物)이 기록되어 있다. 총 35자루, 창 80자루, 철환(鐵丸) 3두(斗), 화약 100근, "대선생신원기(大先生伸冤旗)"라고 적혀 있는 거소위대장기(渠所謂大將旗) 2기(旗), 영기(令旗) 1쌍, 반낭(飯囊) 18건, 대장석(大將席) 1건, 환도 5자루,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탔던 백마 1필, 소 1쌍, 장이(長耳) 1필, 엽전 100냥, 홍의장삼(紅衣長衫) 1건, 뇌장(雷杖) 하나 등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이들은 적어도 100여 명 이상의 동학농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적지 않은 무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선생신원기(大先生伸冤旗)라고 적혀 있는 대장기를 지닌 것으로 보아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활동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 개별 부대의 무장 상태 및 지향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물금첩기(勿禁帖記) 「물금첩기」는 1894년 관군 측이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체포하거나 침탈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을 정리해 놓은 명단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5×28cm이다. 이 자료는 「친군경리청장졸성책(親軍經理廳將卒成冊)」, 「선봉대장진배행장관좌목(先鋒大將陣陪行將官座目)」,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교도소출주장병성책(敎導所出駐將兵成冊)」, 「본진별군관차출기(本陣別軍官差出記)」,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죄인록(罪人錄)」 등과 함께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으로 합본되어 1996년『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물금첩기(勿禁帖記)는 다른 관사 혹은 외부로부터의 침탈을 방지하기 위해 발급해 주는 이른바 “물금첩(勿禁帖)”의 발급 내역을 기록해 놓은 문서인데 “물금첩(勿禁帖)”은 동학농민군과 관군 양쪽에서 모두 발행하였다고 한다. 일명 “물침표(勿侵標)”라고도 한다. 여기에서의 「물금첩기(勿禁帖記)」에는 관군에서 발급한 내역이 수록되어 있다. 종이에 고을의 이름, 면(面)의 이름, 동(洞)의 이름, 마을의 이름, 해당자의 이름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를테면 “무안(務安) 일로면(一老面) 인의산(仁義山) 이치옥(李致玉) 이치순(李致純) 수성장(守城將) 정규섭(丁圭燮)”, “공주(公州) 노성소삼면(魯城少三面) 가절리(佳節里) 윤참봉(尹參奉) 형제(兄弟)”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각 고을별, 면별, 마을별 침탈되어서는 안될 사람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은 관군에 의하여 동학농민군으로 지목되지 않고 보호를 받아야 할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주(公州) 요당면(要堂面) 신성리(新城里)”라고 기재된 경우 경우는 마을 전체가 침탈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는 충청도 공주, 노성, 임천, 유성, 온양, 아산, 진천, 청안, 부여, 진잠, 천안, 연기, 문의, 면천, 보령, 전의, 정산, 청주, 서천, 한산, 충주, 전라도 익산, 여산, 무안, 해남, 진도, 영암 등에 발급한 물금첩의 내역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해당 지역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남하한 관군이 끼친 영향력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군과 구별되거나 동학농민군에 대척점에 서 있었던 인물 내지 마을들의 내역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성장(守城將)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동학농민군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중에는 이 「물금첩기(勿禁帖記)」 말고도 1894년 11월 나주목에서 발급한 「홍우전물침접(洪祐銓勿侵帖)」, 1894년 12월 무안군에서 발급한 「물침첩(勿侵帖)」, 남평현감이 발급한 「이정돈물침첩(李廷燉勿侵帖)」 등도 있다. 이와 같은 각종 “물침첩(勿侵帖)” 및 「물침첩기(勿禁帖記)」는 동학농민군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인물 및 마을들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향촌 사회의 동향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 유바다 고려대학교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03 14:2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0) 김성규(金星圭)의 『초정집(草亭集』)과 김병휘(金炳輝)의 『연파집(蓮坡集)』

『초정집』(草亭集) 충청도 연풍 출신의 학자이자 관료 김성규(金星圭)의 시문집이다. 김성규는 동학농민혁명 발발 직후인 1894년 4월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金鶴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재임하였다. 『초정집』에는 재임하는 동안 전라감사의 이름으로 내놓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효유문 4종, 전라도 53개 군현에 내린 감결(甘結) 2종 등 7종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공문이 실려 있다. 이 자료들은 1894년 5월 전주화약이 이루어지기 직전 농민군과 김학진 및 관군 측과의 관계와 교섭 상황, 전주화약 이후 농민군의 폐정개혁 활동에 대응하는 전라감사의 입장과 ‘관민협치’가 이루어지는 과정, 이를 기반으로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가 설치되는 경위 등을 매우 소상하게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 가운데 4종의 효유문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두기로 한다. 먼저 「효유도내난민문(曉諭道內亂民文)」이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너희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② 너희들이 호소하려는 억울함은 이미 잘 알고 있다. ③ 호소하려 해도 살펴주는 자가 없고 도망하려 해도 살아날 길이 없게 되었는데 평소에 화심(禍心)을 품고 있던 흉괴(凶魁)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선동하여 이와 같은 망측(罔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④ 흉괴 이외에는 살 길이 있다. 흉괴 외에는 징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왕의 교시이다. 병기를 반납하고 성문을 열고 흉괴를 포박하여 항복하라. 이 효유문은 한편으로 농민군에게 빨리 해산할 것을 겁박하면서 촉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군 지도부와 대중 사이를 이간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글이다. 효유문 앞머리에 전라감사 김학진이 1894년 4월에 내린 것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김학진은 이 글에서 전라감사로 부임하던 중 금강에 이르렀을 때 전주 함락 소식을 접하였다는 점, 그리고 바로 이어서 농민군이 자기에게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5월 4, 5일경 농민군 측이 김학진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며,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가 파괴된 것은 초토사 탓임을 주장하면서 빨리 입성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살펴줄 것을 요청한 <고급문장(告急文狀)>을 보낸 다음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순변사 이원회가 심영병(沁營兵)을 이끌고 5월 18일, 초토사 홍계훈은 장위영(壯衛營) 을 이끌고 5월 19일 전주를 떠나 서울로 향한 직후인 5월 20일 전후 농민군에 대한 선무(宣撫)와 안집(安集)을 홀로 감당하게 된 김학진은 농민군측에 재차 효유문을 보내 무장을 해제할 것과 조속한 해산을 촉구하며 6개항의 수습방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국왕의 뜻을 받들어 폐정(廢政)을 일체 개혁하기로 하였으며, 작은 폐단은 감영에서 개혁하고 큰 폐단은 중앙에 보고하여 혁파하도록 할 것이라는 점, 각 면리마다 집강을 두어 만일 원통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집강이 사유를 적어 감영에 소송하여 공정한 심판을 기다리라는 점, 병기는 모두 각자 거주하는 군현에 반납하라는 점, 금년도의 부세는 모두 면제한다는 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김학진의 제안이 농민군에게 그대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관민상화(官民相和)에 의한 집강소 시기 농민군의 폐정개혁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김학진의 수습방안에 대한 농민군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비웃을 따름’이었다고 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외세의 개입이라는 정세변화에 따라 경군이 서둘러 철수함으로써 전라도 일대에 관군의 군사력이 매우 취약해지자 이 무렵부터 전라도 곳곳에서 농민군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번 효유문을 내려 신칙했는데도 농민군들의 활동이 곳곳에서 재개되자 김학진은 농민군에게 세 번째의 효유문을 내려 병기를 반납하고 귀가안업(歸家安業)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6월 7일에도 네 번째의 효유문을 내렸다. 5월 20일경의 두 번째 효유문에서는 “원통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강이 사유를 적어 감영에 소송하여 공정한 심판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고 하여 집강의 기능 가운데 민원 처리 부분이 강조되었으나, 후자에서는 “근신(謹愼)하고 의(義)로운 사람으로 집강을 삼고 부랑배를 보는 대로 포박해 해당 지방관에게 넘겨 처벌하도록 하라”고 하여 무뢰배들이나 사적인 설분(雪憤) 행위를 일삼는 농민군들을 금단하는 치안유지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연파집』(蓮坡集) 『蓮坡集』은 강진 유생 김병휘(金炳輝, 1842~1903)의 문집으로 모두 4권 2책이다. 김병휘는 1842년 강진 용두리에서 노택(魯澤)의 아들로 출생하였며, 자(字)는 민오(玟五)이며 연파(蓮坡)는 그의 호이다. 향리에서 가학을 통해 학문을 익히고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김한섭(金漢燮), 정의림(鄭義林) 등과 교유하였다. 갑오년에 즈음하여 향리에 용강서숙(龍岡書塾)을 개설하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전도정(前都正) 박창현(朴昌鉉), 진사 김병윤(金柄潤) 등과 모의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민보군을 결성하였으며, 갑오 12월 7일과 10일 강진성과 강진 병영성 전투에 참여하여 농민군의 공격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3년 1월 23일에 타계하였다. 『연파집』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시,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하다 전사한 오남(吾南) 김한섭에 대한 기사(記事), 민보군을 결성하며 발포한 창의동맹문(倡義同盟文) 등이 실려 있고, 1894년 12월 장흥과 강진성 및 강진 병영성 전투와 관련된 사실들이 담겨 있다. 또 말미에 실린 그의 행장에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보군 결성을 모의하고 준비하던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의동맹문(倡義同盟文)」에 따르면 김병휘 등은 ‘동도(東徒)’를 중국 한나라의 장각(長角)이나 진(晉)나라의 손은(孫恩)과 같은 무리들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창의동맹을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에 비유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인(仁)과 의(義)라는 유교적 덕목에 입각하여 죽음으로써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치를 씻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림(儒林)의 도(道)를 지키고자 하였다. 「김오남기사(金吾南記事)」는 장흥의 농민군 접주 이방언(李芳彦)과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던 오남 김한섭의 민보군 활동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김한섭은 이방언에게 <경시적도문(警示賊徒文)>을 지어 보냈으나, 이방언이 끝내 농민군 지도자의 길을 나서자 민보군을 규합하여 반농민군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오남기사」에 따르면 당시 강진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그의 의기를 높이 사서 1개 면(面)의 병사를 그에게 통솔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때 김한섭 휘하의 병사들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김한섭을 따른 것도 그가 보여준 의(義)를 추구하는 정신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2월 7일 농민군이 강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김한섭은 제자들과 민보군 및 관군을 이끌고 분전하였지만, 강진현은 농민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김한섭은 전사하였다. 김병휘의 「행장(行狀)」에는 강진성 함락 이후 농민군이 다시 진격하여 강진 병영성을 포위하자(12월 10일), 병사(兵使) 서병무는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나, 군기관(軍器官) 김극경(金克敬)은 화약고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자폭하였으며, 민보군 박창현은 앞장서서 농민군 수십 명과 대적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해두고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6.27 17:4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9)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편지 4통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85건 중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작성된 4통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편지는 원본은 아니고 필자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작성자가 누구인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편지 내용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지명과 등장인물을 살펴볼 때 충청도 옥천지역에서 살았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지를 조금 더 꼼꼼히 읽어보면 이 편지의 작성자는 1894년 당시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를 역임한 황영수(黃潁秀)의 큰형으로 짐작된다. 편지 말미에 백형(伯兄)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황영수는 1889년 부사용(副司勇)으로 임명되고 이후 사과(司果)를 거쳐 1894년 4월에는 사사(司事), 1894년 5월에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인 1894년 5월 22일 황영수가 병을 칭하여 전생서 주부의 직을 거두어 줄것을 요청하자, 국왕은 빙고주부(氷庫主簿) 박주동(朴注東)과 황영수를 교체하라고 명하였고, 이것은 실행되었다. 전생서는 조선시대 나라의 제향에 쓸 양ㆍ돼지 따위를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황영수의 큰형이 보낸 편지에 따르면 “지난 인편에 부친 편지를 큰 아우가 받아 보았다니 위로가 되네. 또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로 옮겨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으니 이미 숙직에 나아갔으리라 생각하네”라고 하여 황영수가 전생서 주부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편지에서 확인된다. 이 편지들은 모두 충청도 옥천지역에 거주하는 큰형이 중앙에 진출하여 서울에서 관직에 재직하고 있는 동생 황영수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1894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충청도 옥천과 인근지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이와함께 양반 지식인들이 어떻게 동학농민혁명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1894년 4월 2일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학의 소요가 난세보다 심해 바늘방석에 앉은 듯하네. 매일 아랫마을의 행랑에 와서 모이는데 양반들은 숨죽인 채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한다네. 이들이 말하기를 ‘비록 재상이라도 추궁할 일이 있으면 어려워할 것 없이 체포하여 결박하라’ 하면서 영읍(營邑)의 명령을 아이들 장난처럼 보고 있네. 그가 워엄과 복을 스스로 만들어 발이 도리어 위를 차지한 격이라 기강과 명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네. 묘당(廟堂)은 어찌 영칙(令飭)이 없는 것인가? 이미 한달 남짓이 지나는 동안 온갖 변고가 있는데도 아직도 움직일 기미가 없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장차 농사(農事)를 폐할 것이고, 비록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장차 그것을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네” 즉 황영수 큰형이 보기에 1894년 4월 당시 충청도 옥천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의 세력이 매우 강력했으며 이에 대해 양반들이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아랫마을의 행랑에 동학농민군들이 모임을 가졌고 이에 대해 양반들이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동학농민군들이 활동이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조선이라는 체제에 반하는 것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하고 있다. 1894년 4월 20일 보낸 편지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동학의 무리들의 소요는 모두 수포(搜捕:색출해 체포함)에 겁먹어 배도(背道)하고 귀화한다고 하였네. 그리하여 그 수괴만 주벌하고 그 아랫사람들은 풀어 주었는데, 군기(軍器)를 탈취하는 변고를 일으킨 박운(薄雲)의 세 수괴(강채서, 최명기, 이일선)는 아직 잡지 못하였다네. 순사(巡使)의 뜻은 무마(撫摩)를 위주로 하지만 지금 만약 엄히 다스리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봉기할 우려가 있네. 만약 다시 봉기한다면 전보다 심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우려가 되는 부분이라네. 고부(古阜)의 적세(賊勢)가 매우 성대하다고 하는데, 뒤이어 전보(電報)가 있었는가? 이는 마을 낭정(廊丁)이 수성군(守城軍)으로서 자세히 조사하여 보내준 것으로 난리 가운데의 일 아님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지금 듣자니 공주(公州)의 군대가 들어가고 단지 청주(淸州)의 군대만 있다고 하며, 부상(負商)은 지패(紙牌)로 일을 행한다고 하네.” 즉 편지를 보낸 시점은 1894년 4월 20일인데, 충청도 옥천과 인근지역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전개되었음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1차 봉기 과정에서 충청도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또는 자체적으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기를 탈취한 박운(薄雲)의 세 수괴인 강채서(姜采西)ㆍ최명기(崔明基)ㆍ이일선(李一善)을 아직 잡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이들이 이미 1894년 4월경에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충청도 옥천과 인근지역에서 군기를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1차 봉기에서는 충청도에서 호응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제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강채서, 최명기, 이일선은 충청도 옥천, 유성을 기반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강채서는 전봉준이 공주를 공격할 때 함께 했으며, 최명기는 동학농민혁명 이후에까지 천도교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5월 9일 보낸 편지에서는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완산부(完山府)의 성이 함락되었으니 참으로 큰 변고일세. 도백(道伯)과 반자(半刺)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것을 다른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데, 이로부터 절개를 세워 의리에 죽는 사람은 말단의 직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네. 최근의 전보(電報)는 어떠한가? 신임 도백은 이미 임지에 부임하였다고 하는가? 동학의 무리들은 기운을 기르고 있을 뿐이지 조금도 징계하여 고칠 뜻이 없으니 통탄스럽네” 이 편지에서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고 감사와 판관이 도망하였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러한 사실이 다른나라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오히려 말단 관리들이 의리를 지키고 있음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생에게 중앙에서 알수 있는 전개과정이나 전투상황 또는 관찰사가 임명되었는지 등의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즉 당시 지식인들이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면서도 전개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1894년 5월말경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서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읍의 군기(軍器)를 탈취당한 후에 공주와 청주 두 영(營)의 병사가 잡아간 도당(徒黨)들을 내보낸 것은 두 영에서 곤장을 한 대도 때리지 않고 모두 풀어준 것이니, 이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지만 악행을 징벌하는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무리들이 처음에는 비록 위축되어 굴복하였지만, 지금은 의기양양하고, 처음에는 배도(背道) 하겠다고 말했던 자들이 지금은 예전으로 돌아갔다네. 또한 입도(入道)하는 자가 많이 있고 또 몰래 사통(私通)을 돌리는 자가 있다고 하니 통탄스럽고 패악스럽다 할 만하네. 사람들이 모두들 다시 봉기할 것이라고 하는데,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반드시 살육이 있게 될 것이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되는데 무릉도원을 아스라이 생각하고 내 신세 곤궁함을 스스로 탄식할 뿐이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 편지에서는 1894년 5월 충청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처벌이 매우 미약하였다고 지적하였고, 반면에 동학농민군들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질 것을 우려하면서 본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는 이와 함께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 입성 이후 전개된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한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완산부(完山府)의 도적들이 나가고 초토사(招討使)의 관문(關文)을 보니, 우두머리인 김순명(金順明)과 14세 소년 장사 이복롱(李福弄)을 체포하여 죽였으며, 또 적병 500여명을 죽이고 총과 창 300여 자루를 확득하였으며 장차 머지 않아 성을 수복할 것이라고 하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네. 이 근처의 도당들이 이 관문을 보고 크게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니, 그 뜻이 매우 음흉하네. 그들의 도(道)를 그들만이 행하여 다른 사람들을 유혹함이 없고 협박함이 없으며 입도함에 작당(作黨) 함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해함이 없이 한쪽에 거처하면서 행한다면, 이단의 무리로 구별하여 서로 상관하지 않을 뿐이니 그렇다면 어찌 오늘날의 변고가 있겠는가?”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이후 완산을 비롯한 전주성 인근에서 관군과 동학농민군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고, 여기에서 농민군이 많은 타격을 입었는데 이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그 상황을 파악하여 기술하고 있다. 특히 그는 동학농민군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기의 생각을 서울에서 관리로 있는 동생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으며 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동생에게도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의도로 계속적으로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편지를 쓴 황영수의 큰형은 당시 조선에 있는 양반 지식인의 가장 표준적인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 기획
  • 기고
  • 2025.06.18 18:5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8) 교도소출주장병성책, 선봉진출정장졸성명급기복마실수성책, 본진별군관차출기,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

1894년 9월에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이후 정부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는 통위영·장위영·경리청과 일본군에게 훈련받은 교도중대가 소속되었다. 양호도순무영은 양호도순무사 신정희, 좌선봉 이규태, 우선봉 이두황 등이 지휘하였고 동원 병력은 총 2,500여 명에 이르렀다. 친군 장위영 정영관이었던 이규태는 양호도순무영 별군관 겸 순무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교도대와 통위영 각 부대를 이끌고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양호도순무영은 선봉장이 정부군과 지방 관군 등 진압 병력 전체를 통제하는 총지휘관이었다. 이 때문에 선봉장 이규태가 순무영과 군무아문 등에 각종 보고서를 올렸고, 휘하 병영의 병력 및 전투보고서가 선봉진에 전해졌다. 또한 각급 관아와 주고받은 공문 등 선봉 이규태와 관련한 문서가 매우 많이 작성되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세계기록유산 기록물 역시 그 과정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교도소출주장병성책(敎導所出駐將兵成冊)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종사한 교도소 장병의 직책과 성명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도소는 1중대 3소대, 1좌익 3소대로 구성하였다. 교도소를 이끈 지휘관은 정령관 이00, 중대장 이진호, 1소대장 이민굉, 2소대장 이겸제, 3소대장 최영학 등이다. 그밖에 좌익장 이승규, 1소대 교장 이태황·유성원, 2소대 교장 김장욱·조인순, 3소대 교장 김금석과 서기 송정순·엄주환, 군조 김동욱·이동근, 별군관(別軍官) 이병효·임경준·이건원 등 18명으로, 이들에게는 매일 1냥 5전씩 지급, 30일에 총 810냥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1-3소대와 산하 1-5분대의 규칙, 십장, 병정, 기타 곡호수, 후병, 장부, 사후, 화병, 마부 등 도합 328명의 직급과 이름을 수록하였다. 이들에게는 매일 1냥 5전 합 514냥 5전을 지급하였다. 말 46필에는 매일 1냥 8전 합 92냥 8전, 도합 매일 607냥 3전, 10일 2,074냥, 30일 1만 8,219냥을 지급하였다. 특이한 점은 군인 1명보다 말 1필에 지급된 급료가 더 많았다. 이를 통해 동학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교도소 중대의 병력 편제와 인원, 명단을 파악할 수 있다. △선봉진출정장졸성명급기복마실수성책(先鋒陣出征將卒姓名及騎卜馬實數成冊)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종사한 선봉진의 출정 장졸의 직책과 성명, 그에 필요한 마필의 수효를 기록하여 책자로 만든 기록물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선봉진 장졸은 참모군관 4명, 별군관 8명, 별무사 안성관·김태형과 종인 1명, 서자지 2명, 뇌자 4명, 순영수 4명, 아병군 2명, 등롱군 2명, 장막군 2명, 장부 3명, 복직 1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좌마 1필과 마주와 마부, 기마주부, 복마군 명단도 기록되어 있는데, 군인은 모두 총 59명이었고 말은 기마 17필, 복마 6필이 있었다.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한 선봉진의 병력 편제와 인원, 물자 규모를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뇌자 4명이 있는데, 뇌자(牢子)는 죄인을 문초하거나 구금하는 등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친군영은 처음부터 동학농민군 진압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을 체포하여 심문하는 임무를 가지고 출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진별군관차출기(本陣別軍官差出記) 1894년 10월 이후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별군관 차출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신분 밑에 별군관 차출 대상 성명을 기록하였다. 신분은 출신, 유학, 부사용, 사과, 전 감찰, 전 학관, 전 군수, 전 오위장, 부호군, 진사, 한량 등 다양하였다. 주로 전현직 관리들로서, 의병 지원 및 차출 대상자와 면제자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차출 지역은 순창, 영광, 해남, 영암, 흥양 등 전라도 지역과 연기, 문의, 진천, 서천, 홍산, 서산, 온양, 홍주, 보령 등 충청도 지역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주로 활동한 전라도와 충청도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차출 별군관 가운데에는 영광 흥농면의 이현숙(李賢淑)이 나온다. 그는 법성포 첨사를 하다가 1894년 봄에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겨울에 전향하여 영광 대접주 오시영(吳時泳)을 정부군에게 넘겼고, 민보군을 소집하여 무장 대접주 송문수를 잡아 관군에 바친 자이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 명단인 「갑오군공록」에 “영광민 이현숙은 의기를 떨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거괴를 붙잡아 바쳤다”라고 되어 있다. 그가 동학농민군을 배반한 뒤 공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반동학농민군 활동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 기록물 말미에는 온양 역촌에 사는 부장 이민식은 동학에 의탁하였으니, 만약 침학하면 금단 처리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이 별군관은 지역 출신으로 현지 사정에 밝고 어느 정도 지위도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 체포에 유리하였다. 특히 별군관들은 공을 세워 출세할 요량으로 더 적극적으로 동학농민군 체포에 앞장을 섰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한 친군 장위영 장졸 명단이다. 장위영은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군에 의해 새롭게 조직된 부대이다. 양호도순무영은 죽산부사 이두황을 순무영 예하의 친군장위영 부영관으로 임명하여 우선봉장으로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1894년 10월에 작성된 기록물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먼저 선봉진 장관 좌목을 보면, 참모관에는 전 부정자(前 副正字) 이규백, 전 도사 권종석, 전 학관(學官) 이구영, 유학 이승욱·정도영, 별군관에는 전 수문장 유석용, 출신 이달영·송흠국(훈련대 장관) 등 19명의 신분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별군관 신분은 기사장, 전 감찰, 전 부장(部將), 전 오위장, 전 중군, 전 만호(萬戶), 상리국 공원(公員), 기교(譏校) 등 다양하였다. 이를 통해 다양한 계층이 동학농민군 진압의 공을 세워 출세하고자 하였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다음 친군 장위영 장졸 명단에는 부령관 이두황, 참령관 원세록을 비롯하여, 별군관 이겸래·조편·윤지영·김광수로 되어 있고 그 밑에 제1대부터 제4대 등의 직책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각 부대는 대관, 교장, 규칙, 십장, 병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대는 67명, 49명, 65명, 제2대는 25명, 29명, 44명, 제3대는 45명, 62명, 65명, 제4대는 74명, 62명, 44명으로 편제되었다. 이하 참령관 직속으로 규칙, 십장, 병정, 화병, 장부, 후병 총 14명을 두고, 곡호대는 십장과 병정, 화병 17명으로 총 692명이었다. 그밖에 서기 5명, 통인 2명, 기찰포교 22명, 졸 3명, 관기 3명, 보부상 4명, 마부 51명으로 도합 850명이고 우마는 96필을 두었다. 위 기록물들은 원래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에 들어 있는 자료들이다. 『각진장졸성책』에는 이들 자료 외에도,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종사한 선봉진 휘하 경리청, 장위영, 통위영, 교도소 등 각 부대의 장병 성명과 직위를 기록한 각 부대의 비용 명세서인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물금첩기(勿禁帖記)」, 「죄인록」 등 각종 성책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를 통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동원하였을 뿐 아니라, 민간의 인력과 물자 역시 동원하여 총력전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

  • 기획
  • 기고
  • 2025.06.11 16:1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7)하동 방수장서목, 여산 차호규 등 첩정, 강계 외귀방 풍헌 첩정, 강계 고산방 풍헌 첩정

1894년 봄에 시작해서 가을에 전국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겨울이 되면 급속히 축소된다. 일본군이 주력인 진압군에게 충청도의 공주 우금치전투를 비롯한 세성산전투, 홍주성전투, 청주성전투, 옥천 증약전투, 연산전투, 논산전투 등에서 패배한 후 전라도의 원평전투, 태인전투에서 밀린 다음에는 해산 지경에 이르렀다. 경군 지휘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전라도 남단까지 들어가서 흩어진 동학농민군을 수색해서 학살하였다. 황해도에도 파견해서 순회하도록 했다. 추운 겨울철에 떠돌던 동학농민군 참여자들은 마을을 떠나 사방으로 피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1895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각 관아에 동학농민군 참여자를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도순무영은 해체되었지만 삼남을 비롯해서 전국에 내려진 체포 명령은 그대로였다. 각지에서 작성한 고문서를 보면 이때의 실상을 알 수 있다. △ 경상도 하동의 적량면 방수장 서목(防守將 書目) 경상도 하동은 6월부터 동학농민군이 읍내에 들어간 이후 순천과 광양의 동학농민군이 수시로 들어오며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그러자 민보군을 조직해서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호대한 동학농민군에게 제압되면서 민가 수백 채가 불에 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에서는 재난이 심각한 지역으로 금산 괴산 성주와 함께 하동을 거론할 정도였다. 진주와 하동은 남해에서 올라온 여러 명의 동학 지도자들이 동학농민군을 이끌었고, 대접주 김인배 휘하의 순천 동학농민군이 섬진강을 넘어와서 활동하였다. 남해와 순천의 동학 조직은 강성해서 인근을 휩쓸었다. 이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가 기습해서 밀려나게 된다. 그 이후 섬진강 인근의 요지에는 전라도에서 넘어오는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해 방수장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요지를 지키면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수색해서 체포하였다. 그 실상을 보여주는 문서가 적량면 방수장의 서목이다. 1895년 정월 3일 적량면 방수장이 하동 수성관에게 보낸 서목의 내용은 간단하다. 적량면 동산에 살던 이근동(李近洞)을 진주 사동에서 체포하여 하동관아로 호송한다는 것이다. 적량면 동산은 지금 경남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 지역이다. △ 전라도 여산 북삼면의 풍헌과 차호규 등 첩정(車昊奎 等 牒呈) 신임 전라감사 이도재는 금산 민보군을 이끌다가 죽은 소모관을 포상하고, 동학농민군에게 동조한 임실현감 민충식을 파출시켰으며, 금산과 용담에서 수백 채씩 전소한 민가의 복구비를 마련하는 등 긴급한 조치를 해나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참여자들은 엄혹하게 처벌하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착오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산 북삼면의 풍헌과 차호규 등이 올린 첩정에 그 구체적인 사례가 나온다. 이 첩정은 이 시기의 문서로는 드물게 신분이 명확한 면내의 여러 명이 연명으로 올린 것이다. 이름을 밝힌 사람은 유사 황씨, 풍헌 김씨와 내촌 차호규, 미동 김봉수, 중발 고태진, 대정 김내문, 후상발 김동완 방공신, 어량 소휘백 남정홍 등 10명이다. 이들은 북삼면 야정에 거주하는 이지전(李之瀍)은 동학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동학의 접주라고 잘못 알려져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지전은 접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면민 모두가 알고 있으니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즉 착오로 잡혀갔으니 풀어달라는 말이었다. 이 첩정을 보면 당시 격변기에 무관한 사실로 처벌받는 일이 종종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군 잔여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련 혐의를 받고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우려를 나타내는 표현이 여러 사료에 나오고 있다. △ 평안도 강계 외귀방(外貴坊) 풍헌 첩정 이 첩정은 1895년 2월 16일 평안도 강계 외귀방의 풍헌이 평양 감영의 전령에 의거해서 동학도를 금지했다는 내용을 강계부사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강계의 외귀방(外貴坊)은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외귀면으로 명칭을 바꾸는 곳으로 모두 4개의 동을 관장하고 있다. 강계는 험준한 산골이라서 면적은 넓으나 마을은 드물게 형성되었다. 이 고문서의 내용에는 강계의 산골까지 동학이 전파된 새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방금 도착한 순영문(巡營門) 감결 내의 전령에 의거하여 동학을 하는 사람들을 각 리에서 타이르고 금단하였으며, 바로잡고 조사하여 성명을 기록한 성책(成冊)을 수정하여 올렸으며, 오가작통 성책을 이어서 속히 올렸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이를 보면, 동학도들은 평안도 강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외귀방의 풍헌이 이들을 파악해서 명단을 기록하여 강계부에 올렸고, 동시에 동학도들을 효유하고 활동을 금지했다고 하였다. 또한 동학도를 금지하는 방안으로 전래의 오가작통을 활용하고 있었다. 도순무영에서는 오가작통이 번거롭기 때문에 10호를 함께 묶는 십가작통(十家作統)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실제로 각 군현에서 이를 시행했다는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 평안도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지 않았다. 혹 봉기를 계획했던 동학 조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청국군과 일본군이 쌍방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평안도의 수부인 평양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던 당시에는 봉기를 시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동학농민군이 해주까지 점거한 황해도는 물론 평안도의 북쪽까지 동학이 퍼져있었다. 이 문서는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 평안도 강계 고산방(高山坊) 풍헌 첩정 이 첩정은 1895년 4월 19일 평안도 강계 고산방의 풍헌이 정부에서 보낸 효유문을 민간에 알린 사실을 강계부사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고산방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고산면으로 명칭을 바꾸는 곳으로 모두 6개의 동을 관장하였다. 첩정을 올렸던 이 시기는 전국에서 동학농민군의 조직적인 활동이 종식되어 관치질서가 회복된 때였다. 그렇지만 갑오년 전국을 뒤흔들던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청일전쟁의 여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민심 안정과 생업 종사를 위한 국왕의 효유문을 각지에 보내서 알리도록 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고산방 풍헌이 지방관에게 올린 문서가 이 첩정이다. 평안도 강계는 만포에 가까운 지역으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지 않았고, 청일전쟁의 피해도 일어나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군 간의 치열한 전투는 이 일대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였고,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항쟁 실상도 전해져 민심을 격동시켰다. 고산방 풍헌의 첩정에는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던 을미년 봄의 지방 행정을 일부나마 알려주고 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 기획
  • 기고
  • 2025.06.04 16:2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6) 각 지방 동학농민군에 대한 뒤처리, 법부에 보고된 첩보류

이번에 소개할 첩보류는 모두 3종류이다. 먼저 『첩보(牒報) ①』(구분하기 위해 임시로 부여한 번호, 규장각 소장도서 26300)은 1895년 4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전국 각도에서 법부로 보내온 첩보들을 철한 것이다. 전국 각지방에서 범죄 혐의자를 체포하거나 범행 내용을 상세히 조사하라는 법부의 관문(關文)에 대한 보고서다. 첩보에는 <1호> 충청도 충주목사(忠淸道忠州牧使) 이종원(李鍾元)의 보고서(1895.4.25.)를 비롯하여 모두 15건의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1호> 첩보인데, 충주군 금목면(金目面) 오룡리(五龍里) 정택진(鄭宅鎭)이 동도라는 이유로 이규백의 조카를 타살했다는 누명을 쓴 일과 관련된 복잡다단한 사건의 전말을 담고 있다. 충주 상민(常民) 노백용(盧白用)이 농민군에 참여한 후, 자기 돈을 오랜기간 동안 갚지 않던 양반 이규백(李圭白)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조카를 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진사 정영진(鄭榮鎭)은 자신의 동생 정택진이 노한(盧漢)을 몰래 도와 이반(李班)을 죽였다 하고 살옥(殺獄)의 혐의로 붙잡혀 죽었으니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이규백이 노에게서 빌린 돈이 기천금(幾千金)이었는데, 매번 갚지 않아서 서로 힐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작년 가을 동도(東徒)가 창궐할 때 노가 동도에 가입하여 동민을 늑탈하였다. 이후 동민들이 노의 집을 파괴하여 동중에서 축출한 사건이 있었고 이에 다시 노한(盧漢)이 그의 처남 전만철과 함께 이규백의 조카를 잡아 타살하고 난 후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이때 마침 이규백이 참모사가 되어 호남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금영에 도착, 자신의 형 명원(明遠)으로 하여금 전만철 등을 관련자를 붙잡아 심문하였다. 이후 법부의 제사에 따라 이규백과 이명원, 도룡리 마을 사람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두민 정배영(鄭配永)의 말에 따르면, “작년 9월 14일 노백용이 동민을 함부로 가르칠 때 한 동이 그 협박을 견딜 수 없어 모두 동학에 참여하였다. 정진사의 동생도 또한 그 중에 참여한 후 9월 17일에 가까운 동네에 있는 민보(民堡)가 일어나 노한을 폐하고 축출하였다”고 한다. 이어 9월 28일 노한은 처남 전만철을 거느리고 이반을 잡아 이내 타살한 것이라 말했다. 사건 전말에 대해서는 서로 배치하는 증언을 하였고, 특히 몰래 도운 정택진의 혐의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노한의 독채와 공료는 모두 정택진의 시킨 바이지만, 그 금액은 이미 3석락 답을 팔아서 갚은 것이고 미진한 천여 량도 또한 작년 가을 노한이 동도를 빙자하여 와서 독촉할 때 마저 준 것이니 지금은 더 이상 추론할 것이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송사의 논란은 이규백이 소위 수범(首犯)인 노가가 전가와 함께 정반을 사주한 것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도주하였고, 억울하게 죽은 이반의 조카, 전만철과 정택진 등에 대해 명확하게 조사하지도 않고 바로 포살(砲殺)한 상태였다. 이렇게 충분한 증거가 없이 정택진의 음조(陰助) 여부를 밝혀 단안(斷案)을 내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법부에서 각인의 공초를 검토하여 처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내용은 다시 『첩보②』(규장각 소장 26287)의 자료에서 재론되고 있었다. <8호>에서는 충주 주민 이규백(李圭白)과 노백용(盧白用)의 관계 및 이규백의 조카에 관한 살인사건을 재조사한 보고다. 이규백은 참모관으로 호남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공주감영에 돌아와 포교를 거느리고 전만철을 붙잡아서 공초하여 이를 도와준 정택진을 포살(砲殺)하였던 전말을 자세히 적었다. 이 문건은 앞 서의 첩보에 비해 9일 정도 늦어 1895년 윤 5월 4일에 보고되었다. 그렇지만 이전의 첩보와 같이 거의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 정택진의 포살에 관한 사유를 둘러싸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건은 충청도 가도사 공주목 판관 한택이(韓澤履)가 법부에 요청한 첩보였다. 앞서 『첩보(牒報) ①』에 두 번째로 수록된 <2호>는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위무사 이도재의 첩보(1895.5.7.)이다. 손화중 부대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고창군 농민군 홍낙관(洪樂觀)이 재인(才人) 출신으로 자칭 수접주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 맹철(孟哲)과 아우 응관(應觀), 계관(季觀) 및 종제 한관(汗觀) 등이 각기 접주로 참여한 사실 등이 나타나 있다. 이들은 1894년 3월 이후 무장, 신촌 등지를 지나 백산, 황용, 완성(完城) 등지에서 싸워서 고부, 고창, 무장, 남평 등 읍의 무기를 빼앗고, 세력이 커진 후에 사류(士類)와 평민을 강제로 들어오게 하여 1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손화중이 광주, 남평 등지에 있을 때 대군이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쳤다가 붙잡혀 조사하여 진술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이렇게 첩보류의 내용에는 각 지방에서 체포된 농민군 참여자에 대한 조사와 처리방향을 알 수 있으며, 그밖에 각종 비리 혐의를 받은 부패 관료들의 사후 처리 상황도 더불어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첩보 ②』는 1895년 5월 말부터 윤5월 말까지 전국 각 지방관들이 법부로 보낸 첩보를 철한 것이다. 『첩보 ①』에 연속된 기록으로서 묶여진 것으로 보인다. <7호>는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의 보고(1895. 5.29.)로 전라도 남학당(南學黨) 거괴 김광화(金光化) 등 14인을 체포한 사실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박학운, 윤봉수, 안화봉, 원경명 등 4명은 전라도 병영에서 도내 각도에 정배(定配)한 뒤에 개과천선의 여부를 확인하겠고, 최방춘(崔芳春), 동성월(董成月), 손관오(孫觀五), 안관옥(安觀玉), 고란봉(高蘭峯), 이관수(李觀水) 등은 나주진영에 이수(移囚)하여 다시 조사하도록 하겠고, 김운발(金雲發), 김명봉(金明峯) 등은 탈옥하여서 추적하고 있고, 원시중(元始中)은 과오를 반성하고 있어 징계 후 방송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에 대해 경중을 나누어 올려 보내니 법부에서 처분을 내려달라는 내용이다. <10호>는 충청도 임천군수의 첩보(1895.윤 5.12.)로 본군에 거주하는 김재홍(金在洪)이 동비에 투탁하여 옛 동학의 명으로 대접주를 참칭하여 행패를 부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민인 대회를 열어 포살하려고 했으나 멋대로 할 수 없어 김재홍의 죄안을 갖춰 보고한다는 내용이다. 이 첩보 자료에는 모두 13건이 첨부되어 있다. 다음으로 <첩보 ③>(규장각 소장 26290)은 각 지방관리들이 1895년 7월과 8월에 법부에 올린 보고서 4편을 모아 수록한 것이다. <1호> 1895년 8월 해주부 은율군수 이현학(李鉉鶴)의 보고서로 해당 지역의 동학도를 포착하기 위해 병정을 자칭하며 동학농민군을 처형했다는 것이다. 당초 접주, 접사라고 칭하면서 행패를 부린 김계문(金啓文), 정택근(鄭宅根), 정관선(鄭寬善), 김이섭(金以燮) 등을 우선 포살하였고, 이경환(李京煥), 이근달(李根達) 등과 조승찬(趙昇贊), 사명철(史明喆), 김명학(金明學) 등의 죄상을 상세히 조사한 후 포살하였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2호> 청양군 보고서에는 강심은(姜心隱), 강군장(姜君章) 부자가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여 지역에서 행패를 부리고 난 이후 프랑스 천주교도로 숨어들어간 사실을 적발하여 처분을 기다린다는 첩보다. 또한 <4호> 청주군수의 보고(1895.8.7.)에서는 을미 7월 18일 황동준(黃東俊, 36세), 김봉원(金奉元, 23세), 이봉의(李奉宜, 25세), 정천만(鄭千萬, 38세) 등은 승려로서 도적행위 혐의가 있어 붙잡아서 취조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이상의 첩보류에서는 1894년 전후 지방의 사회상과 동학농민군 및 적도들의 범죄 사실과 조치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895년에도 각지방의 분규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동학에 가담한 협의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첩보 자료는 모두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5.28 18:4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6)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 갑오십월일경리청

△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親軍統衛營甲午十月日出駐將卒成冊) 친군(親軍) 통위영(統衛營)은 1888년 4월 고종의 전교로 기존 우영·후영 및 해방영을 합쳐 신설한 부대이자 장위영・통어영과 함께 3개 군영의 하나로 북한산성・강창(江倉) 등 종래 해방영 관할 지역과 돈의문·창의문·숙정문 등의 도성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가 시작되자 조선 정부는 진압을 위해 통위영을 양호 좌선봉장 이규태에 부속시켜 교도중대와 통위영 부대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親軍統衛營甲午十月日出駐將卒成冊)>은 출발 당일인 10월 12일 자 기록으로 동학농민군 진압군의 병력 편제와 인원・명단을 알 수 있다. 먼저 양호 도순무영이 보낸 양찬(粮饌) 및 마태초가(馬太草價) 실수분배기(實數分排記)에는 선봉진 장졸 89명, 통위영 장졸 357명, 교도소 장졸 326명, 전 27,480냥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돈은 영솔 장졸 20일 분량의 식량 가격이었다. 이어 친군 통위영 간부급 지휘관으로 영관 장용진, 대관 오창성・신창희, 교장 박상길・고학석・김상운・황수옥, 서기 정도한・김원석 등을 기록하였다. 이 문서는 제3소대부터 시작하는데 제1소대와 제2소대의 기록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부 편제는 규칙・십장・병정・치중병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외에 장막군, 장부, 후병, 통위영 기마, 순무영평(坪) 기마, 복마 등 도합 401명의 직책과 이름을 기입하였다. 서울 숭례문 밖에 주둔하던 통위영 병사들은 10월 13일 수원부에 도착하였고 이후 충청도 여러 지역을 거쳐 선봉진 부대와 일본군과 합세하여 공주 이인전투와 우금치전투에 참여하였다. 11월 8일 이인에서 통위영 대관 백낙완ㆍ윤영성 등이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다가 회군하여 우금치로 물러나 밤을 지냈다. 다음날인 9일 부대를 나누어 양쪽에서 사격하고 일본 병사들과 합세하여 격파하자 농민군들은 대포와 총과 창・깃발 등을 버리고 퇴각하였다. 이때 통위영 대관 조병완ㆍ이상덕, 참모관 이상덕ㆍ이윤철 등이 이들을 10여 리나 추격하였다. 양호 좌선봉장 이규태는 통위영 대관 장용진・신창희・오창성, 교장 박상길・김상운 등이 “자기 몸도 잊은 채 힘을 내어 세 갈래 길로 나누어 적들과 접전을 벌이며 쫓아가 섬멸하여 적의 기세를 꺾고 대포를 빼앗았다”라고 도순무영에 보고한 바 있다. 우금치전투 이후에도 고종은 순무 선봉진에게 통위영·경리영·교도대의 장관과 병정들을 거느리고 담당할 방면을 나누고 날짜를 정해 적을 섬멸하라고 전령하였다. 이에 통위영의 지휘관과 병졸들은 전라도 방면으로 진군하여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 주력을 토벌하였다. 이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甲午十月日親軍經理廳將卒成冊)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甲午十月日親軍經理廳將卒成冊)>은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진한 친군(親軍) 경리청(經理廳) 소속 장수와 병졸 명단이다. 친군 경리청은 원래 1891년 2월 서울의 방비에 중요한 북한산성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통위영에 속해 있던 총융청 군을 분리하여 다시 설치한 수도 방위부대였다. 경리청 부대 중 출진 명단이 확인되는 부대로 좌1소대는 영관 구상조, 대관 이상덕, 교장 이봉춘・이장혁, 규칙(糾飭) 김흥윤 외, 병정 김복선 등 156명, 좌2소대는 대관 백낙완, 교장 김명환・정재원, 규칙 박인준 외, 십장 김덕순 외, 병정 남창오 등 156명, 중2소대는 서산군수 성하영, 대관 윤영성, 교장 장대규・정인갑, 규칙 고진용 외, 십장 안창석 외, 병정 박기춘 등 150명, 우1소대는 영관 홍운섭, 대관 조병완, 교장 김홍엽・우기준, 규칙 최순갑 외, 십장 서흥돌 외, 병정 이창갑 등 162명 등 총 4개 소대였다. 각 소대는 영관・대관・교장・십장・병정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참모관 3명, 서기 2명, 화병(火兵) 32명, 복마군(卜馬軍) 27명 등을 포함한 병력은 총 703명이었다.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 박제순은 이를 막을 수 있는 대비책으로 순무영 부대와 청주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과 경리청 군대의 지원을 요구하였고 이에 고종은 전교를 내려 승인하였다. 이미 안성과 죽산에 파견되어 있던 친군 경리청과 장위영 부대는 10월 충청도 지역에서 통위영 부대와 합류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경리청 출진 장졸은 영관 안성군수 홍운섭과 서산군수 성하영이 지휘하였다. 이들이 인솔한 병대는 청주를 거쳐 공주에 도착하여 11월 이인전투와 우금치전투에 가세하였다. 이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와 선봉장 이규태가 이끄는 통위영 부대, 홍운섭이 이끈 경리청 우1소대, 영관 구상조가 이끈 경리청 좌1소대, 대관 백낙완이 이끄는 경리청 좌2소대, 성하영이 이끄는 경리청 중2소대였다. 이후에도 경리청 부대는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주력하였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갑오십월일경리청(甲午十月日經理廳)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다시 총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10월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 진압에 나섰다. <갑오십월일경리청(甲午十月日經理廳)>은 당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한 경리청 소속 좌1소대・좌2소대・중1소대・우1소대・우2소대 사병들의 명단이다. 좌1소대는 병정 김화경 등 22명이었다. 좌2소대는 십장 김점동 외, 교습(敎習) 남창오 외, 병정 김준영 등 27명이었다. 중1소대는 교습 연경장 등 14명이었다. 우1소대는 십장 유상오 등 20명으로 대포 1문을 구비하고 있었다. 우2소대는 병정 서세웅 등 14명으로 대환구(大環口) 1문을 구비하고 있었다. 각 소대 병력은 14~27명의 소규모였는데 이 책에는 십장・교습・병정・규칙 등의 명단 외에 지휘관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기획
  • 전북일보
  • 2025.05.22 10:3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5) 이용목(李容穆)의 「백석서독(白石書牘)」과 이범석(李範奭)의 『확재집(確齋集)』

△「백석서독(白石書牘)」 이 자료는 이용목(李容穆, 1826~?)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이다. 이용목은 서울 출생으로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건명(李健命)의 후손이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일찍이 경상도 삼가(三嘉)에서 살다가 만년에 충청도 영동, 보은지방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1894년 당시에는 상주 장암(壯岩)으로 피난하였다. 그 자신은 출사하지 않았으나 사촌형 이용원(李容元)은 경상도 감사를 지냈고, 아들 중익(李重益, 重弼)은 보은군수와 무안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또 장흥부사로 재직 중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고부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수많은 불법 탐학를 저질러 전봉준 등 고부 일대의 민중을 자극한 이용태(李容泰)가 그의 삼종제(三從弟)이다. 「백석서독」에는 이처럼 관직에 진출해 있던 아들이나 친인척이나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실려 있다. 특히 아들 중익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1893년 3월의 보은집회이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다수 들어있다. 아들 중익은 1892년 1월부터 충청도 보은 군수에 재직하였으며, 재직 중 보은집회를 겪었다. 1894년 1월 무안 현감으로 전보되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전라도 무안 군수로 재임하였다. 보은집회 당시에는 선무사 어윤중과 함께 1893년 3월 26일과 4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집회에 모인 동학교도 및 일반 민중을 찾아가 효유하고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또 「백석서독」에는 동학농민혁명 시기 무안 현감으로 근무하던 아들 중익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무안 및 전라도 일대 농민군의 동향을 알려주는 내용이 일부 실려 있다. 「백석서독」의 내용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몇 개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보은집회 개최 직후 집회를 주최한 교도들이 보은 공형(公兄, 아전)에게 글을 보내 집회에 따른 보은 주민들의 불편에 대해 양해를 구한 사실이다. 동학교도들은 척왜양을 하려한다는 자신들의 뜻을 민간에 알려 놀라서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취어」에만 나오는데 그 내용에 조금 차이가 있다. 보은집회에서는 보은, 상주 등의 수령과 향리들에게 군량과 군기를 내놓을 것을 독촉하고, 인근의 토호와 부민들에게도 통문을 보내 군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백석서독」의 저자 이용목도 3월 22일 밤 동학교도들로부터 백미 30석을 3일 이내에 보내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문’을 받았다. 또 「백석서독」에는 3월 23일 무렵 “호남과 호서의 교도들이 합진(合陣)하여 그 위세가 늠름하다.”라고 하여 금구의 교도들이 보은으로 와서 합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다른 기록들에는 단지 이와 관련된 소문만 기록해두고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자료를 통해 보은집회의 민중들이 해산 후 서울이나 인천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백석서독」에는 3월 그믐 경에 해산하여 1대는 서울로 올라가고 1대는 동래로 내려가기로 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894년 3월 11일 무안 현감으로 재임 중이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읍촌간의 양반집들이 심하게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통하다.”라고 하였다. 또 3월 22일자 편지에서는 황간, 영동, 청산, 보은, 옥천 등지에서도 이미 3월 22일 무렵부터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원한을 갚고 돈을 빼앗는’ 일, 그리고 사대부들 가운데 구타를 당하는 일이 많다고 기록하였다. 4월 13일 편지에는 회덕과 진잠 2개 읍이 농민군에게 군기를 빼앗겼고, 농민군이 공주의 유성을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5월 2일 무안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삼종제인 이용태가 안핵사 일을 잘못한 죄로 유배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1895년 지인 이천 수령을 지낸 김준군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백석서독」의 저자 이용목은 자기가 살던 마을이 ‘동비의 소굴’이 되자 아내를 아들 중익이 현감으로 있는 무안으로 피신시켰으나, 1895년 봄에 이르러 오래된 병이 위중해져서 갑자기 사망하여 직접 영결(永訣)하지 못한 애달픈 마음을 표하고 있다. △『확재집(確齋集)』(경란록(經亂錄)」 『확재집(確齋集)』은 이범석(李範奭, 1862~?)의 문집이다. 저자의 자는 성백(成伯) 혹은 순좌(舜佐), 호는 확재이다. 아버지는 덕하(德夏)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의조(儀朝)의 딸이다. 저자는 충청도 아산 출신으로 16세 때 감영의 복시(覆試)에 뽑혀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이후 귀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개화파와 맥을 같이 하던 이범석은 이후 1901년 외부주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쳐 통상국(通商局) 과장, 양근 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이후에는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확재집 8권에 실린 「경란록」에 들어있다. 「경란록」은 1862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는 중요한 사건이 있던 해에만, 사건의 주요 내용과 그에 대한 논평을 남기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경란록」은 그가 ‘난시(亂時)에 나서 자라고 늙었다’고 말하듯이 자신이 살아있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평가해 놓은 일종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1862년 일어난 농민항쟁(임술민란)과 영해에서 일어난 이필제란(1871)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범석은 민란의 원인을 “수령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오로지 탐욕만을 부려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경복궁 중건(1864), 오페르트 도굴사건(1866), 개항(1876), 안기영‧이재선 역모사건(1881),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64) 등을 다루었고,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집회(1893) 등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에 대해서는 고부봉기 가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 탐관오리들을 벌하지 않고 헛되어 ‘난민’들만 다스렸으므로 민중이 모두 동학에 입도하였고, 전봉준이 그들을 모아 당을 만들어 호남 전 지역에서 창궐하였다고 지적했다. 또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을 때,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스스로 왕호를 칭했다[自建國號 自稱王號].”라고 한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는 저자가 아산의 향제로 돌아와서 겪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의 경험을 수록하고 있다. 아산 일대에서는 농민군에 의해 양반가의 분묘가 강제로 파헤쳐지는 일이 많았다. 이범석 본인의 집도 말과 돈을 뺐기는 등도 여러 번 ‘토색질’을 당하였고, 특히 마을 사람들이나 ‘상놈’들이 모두 농민군에 가담하고 노비들도 모두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를 모두 면천(免賤)해 주었으며, 직접 물을 길고 장작을 패서 밥을 지어 먹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글의 맨 마지막에 있는 「담평(談評)」에서 동학농민혁명[‘湖南民亂’]은 조선의 군대로 진압했어야 하는데, 조정에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웃 나라의 군대를 빌린 것이 결국 청일전쟁의 단서가 되었음을 지적한 부분도 눈에 띈다. 군데군데 오류도 적지 않으나,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나 의미를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대내외적 위기 상황과 연결하여 파악하고자 한 저자의 접근도 매우 흥미롭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5.14 16:14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