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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하늘이 준 선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쁨과 행복도 많았지만 고통과 불행도 많이 겪었다. 항상 행복만 있으면 좋으련만 가끔씩 찾아오는 고통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하늘이 준 소중한 선물이라 생각하자. 작년에는 70년 만의 일기 변화로 정든 집이 무너졌다. 공들여 가꾸었던 비닐하우스의 수박, 참외, 오이, 토마토, 멜론 등도 재해로 사라졌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땅을 쳤지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괴로운 나날들이 지나갔다. 때로는 고통으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주는 것일까? 하며 하늘을 성토하기도 하고 원망도 한다. 그러면서도 정든 집 보금자리에 상처로 수북이 쌓인 가구와 살림살이들을 새로 바꾸고, 막혀서 불편했던 자동차, 열차 길도 다시 열리며 우리네 인생살이를 추스렸다. 이제 우리들의 하늘에는 밝은 해가 열기를 품는다. 푸른 하늘이 보인다. 강과 계곡들은 푸른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내가 할 일 앞에서 오늘도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래야 오늘보다 편안한 내일을 맞을 수 있다. 이것이 인생살이다. 이 길목에서 우리는 교육문화 회관에서 시, 수필을 공부와 함께 만났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런 저런 인생이야기를 쓰며 지난날을 돌이켜 보고 새로운 내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불초 본인이 회장직을 맡아 <글 채움터>라는 문집을 내고 코로나 때문에 아직 개강은 하지 목했지만 새학기를 맞으니 감회가 새롭다. 요즈음 코로나19 여파로 우여곡절이 많다. 하지만 일단은 우리 건강이 먼저다.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펴고 어느새 봄을 맞으며 아름다운 꽃도 핀다. 진한 봄 향기가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세월 따라 다시 더위가 오고 긴 장마도 올 것이다. 그간의 인생 경험을 뒤돌아보면서 아쉬운 지난 일들이 뇌리에 추억으로 남아 우리들의 문학 수업에 족적으로 남아 좋은 글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간 심혈을 기울여 가꾸어 온 우리들의 인생 수업이 헛되지 않도록 금년에도 모든 힘을 기울이겠다. 시골 농부들은 극심한 가뭄과 기나긴 장마, 재해를 안기고 간 태풍도 슬기롭게 대처한 후에 들판에서 조각난 황금 물결을 바라보면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사는 동안 희로애락을 접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인생의 허무와 보람을 맞는다. 나도 이제 노력한 결실을 갈무리하기 위하여 수확을 할 나이다. 우리네 수확은 무엇일까? 우리의 정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다. 나의 진솔한 작품들이 많은 독자들로 부터 공감받고 격려의 박수를 받는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열매인가? 우리 모두 결실을 서로 격려하면서 인생의 열매 족적을 기리겠다. 삶의 고통과 시련은 인간에게 새로운 마음의 성숙과 영적인 도약을 이루어 가는데에 가장 큰 장애물로 보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고통의 순간들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고통도 우리 삶의 일부다.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의 시간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꼭 필요한 시간들이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코로나 병란을 잘 극복하고 다시 희망의 미래를 열어가며 살아가자. △ 박홍배는 전주 mbc에서 정년을 하고 사서삼경을 배우다가 <문학창작반>에 입문하여 시와 수핑을 공부하고 있는 만학도로서 현재 글채움터 회장을 맡으며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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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1 18:20

교단 유감(敎壇遺憾)

나는 사범대학을 나와 교편생활을 41년을 하고 얼마 전 정년퇴임을 했다. 우리나라 중등 교육계에서 나만큼 오랜 동안 교직 생활을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학교 다닐 때 학교를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고 재수는 필수라는 말이 있는데 재수도 안 해봤으며, 6.25세대라 호적이 2년이나 늦게 된 데다가 군대도 신체검사에서 징집면제를 받아 군인 생활도 본의 아니게 않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지금까지 교단에 서 왔으니 말이다. 그것도 오로지 평교사로만. 오래 해서 자랑이 아니고 평생 보람을 느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왔기 때문에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난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는 5,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영향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중등 교사가 되고 싶었으며 대학 때는 꿈이 점점 커지다 보니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다. 비록 교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교사인 것을 늘 자랑해 왔고 긍지를 지니며 살아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듯이 우리 교단의 현실도 너무 많이 변했다. 옛날에는 스승이라면 그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했는데, 요즘 학생들의 선생님에 대한 인식은 너무도 많이 변해버렸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라면 하늘처럼 여겼고 신성시까지 했었다. 하나 지금 학생들의 선생님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에 내가 직접 겪은 한 예를 들어본다. 늦은 봄이었다. 점심시간에 도교육청 장학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며칠 전 교실에서 수업 중에 학생이 물 마셨는데 못 마시게 한 적이 있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랬다고 했다. 왜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했더니 학생으로부터 민원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한 학생이 수업 중 하얀 커다란 페티병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에 야 이놈아! 물은 쉬는 시간에 마셔야지 왜 수업 중에 마시느냐? 얼른 치워!이렇게 주의를 주었었다. 교육이라는 게 뭔가. 학생들 비위나 맞추고 학생들 뜻만 받아주는 것이 교육인가? 학교에서 무었을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이런 지당한 교사의 행동을 가지고 민원을 한 학생도 잘못이고, 그런 학생들을 보고도 외면하는 교사들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 아니라고 애들이야 어떻게 하든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건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다. 또 그런 걸 민원으로 받아주는 교육청도 문제가 있다. 민원이 들어 왔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그러는데, 받아줄 걸 받아 줘야지 요즘 학생들의 학교에서 생활 태도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이 태반이다. 체벌은 언감생심이다. 민원뿐만이 아니고 곧바로 112에 신고해버린다. 복도에 종이컵이나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누구 하나 줍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수업 시간에 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일은 다반사인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모른 척 해 버린다. 옛날 같으면 체육대회나 소풍 때 학생들이 선생님 드시라고 음료수 같은 걸 사오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오히려 선생님이 안 사주면 나쁜 사람 취급을 한다. 체육대회 때면 담임은 당연히 학급 전체 학생들에게 빵이나 음료수를 대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하고 인심 사나운 선생님으로 전락한다. 실로 교단의 황폐화라 하겠다. △ 수필가 겸 시인인 이남규 씨는 전주여고와 상산고 국어교사를 역임했다. 문집 <송사청담>과 시집<갈대의 노래> <백제가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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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4 18:27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옛날 사진들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확대경을 가지고 밝은 곳에서 비춰 보아야 겨우 분별할 수가 있다. 나의 유년 시절의 사진을 보면 운동회 날에 어머니가 달리기를 하는 사진이 있는데 한복에 다가 고무신을 신고 맨 뒤에서 뒤뚱뒤뚱 달리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왠지 목이 메게도 한다. 어렸을 적 이야기라서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어머니는 한복을 만들어 딸들에게 입히셨는지 묵은 사진첩에는 온통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내가 어머니와 떨어져 서울에서 학교 다닐 무렵 어머니는 한 달이면 어김없이 상경하시어 내가 지내는 모습도 보시고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곤 했는데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동대문 시장이었다. 장날처럼 사람이 많아 구경거리도 좋다는 이유였다.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는 동안은 강의가 끝나면 고장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어머니는 서울에 오시면 빠르면 사나흘, 때로는 일주일은 족히 계시다 가시곤 했다. 그 기간에 외출은 생각지도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보내야 했는데 나는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집으로 내려가시길 은근히 기다리곤 하였다. 그런 딸 마음도 모른 채 어머니는 미도파백화점에 구경을 가서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며 예쁜 옷을 사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옷을 입은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왜 나는 어머니의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이 터질 듯 아프기만 하다. 다음 날, 어머니와 창경원에 벚꽃 구경을 갔는데 일요일이라서 사람들이 붐볐고 날씨마저 몹시 무더웠다. 어머니는 갈증이 나셨는지 사이다 두 병을 사오라고 하셨다. 그 시절 나는 친구들과 생맥주를 자주 마셨던 터라 사이다 두 병 값이면 맥주 한 병 값하고 같으니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그러자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시던 어머니의 그 슬픈 눈빛을 잊지 않고 있다. 어머니가 내려가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고쟁이에서 꺼낸 돈을 쥐어주시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으라는 당부도 하신다. 섭섭한 생각은 잠시뿐, 나는 새장 속에서 튕겨 나온 새처럼 훨휠 날개를 폈다. 이런 철없는 생활은 내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계속 되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주는 눈치도 모르고 그저 보따리 속에 자식 먹일 것만 챙겨 오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집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언짢게 일어나면 언제나 자기 탓이라고 가슴을 쓸어안고 사셨던 우리 어머니. 내가 어머니가 되고 딸을 출가시키고 난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가슴이 보이는 너무도 철이 더디 든 딸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려고 멋도 부려 보았지만 나 또한 어머니를 닮 서인지 맵시도 나지 않아 아예 편하게 지내편이 익숙하다.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멋 좀 부리라며 핀잔이던 남편도 이젠 포기했는지 무덤덤하다. 새삼스레 어머니가 더욱더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멋도 부리고 예쁘게 하고 다녀라. 라고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가 우리 딸들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 박지연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 월간잡지 기자, 교사로 퇴직하여 우석대평생교육원에서 문예창작강의를 했다. 전북여류문학회장 역임. 풍남문학상, 전라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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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18 17:18

황혼(黃昏)에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

의과대학 조교수 시절 해외 연수기회를 얻었다. 미국 동부에서 유명하다는 슬로안-캐터링 암센터에서 초청을 받은 것이다. 서울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출국을 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똑,똑,똑 연구실 문을 노크해서 나가보니 남루한 옷차림의 시골 아주머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다. 초등학생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는데 선생님은 꼭 고칠 수 있다고 해서 찾아왔으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 미국 연수를 가니 다른 해결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분은 선생님 만나기 위해 물어 물어서 찾아왔는데 제 아들을 살려주어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옷깃을 놓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니 사정이 너무 딱해 뿌리칠 수가 없었으며 측은지심까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내일 떠나기 전 서울에서 수술 가능성을 알아보자며 전주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만나 함께 서울로 올라가 학생시절 스승인 한양대병원 흉부외과 김근호 교수를 찾아 갔더니 그날 따라 일본학회에 가셨단다. 그래서 수련의와 상의를 했더니 최근 국립의료원에서 선천성 심장수술을 시작했다고 귀띔해 주어 곧바로 메디컬센터 흉부외과를 찾았다. 그곳의 과장도 해외 출장을 했다고 해서 망연자실하다 일단 우선 아이가 숨이 차서 전주에서 여기까지 겨우 왔으니 입원을 시켜 해결방법을 모색해 달라고 건의했다. 돌아온 답은 선천성 심장병 수술을 위해 이곳에 입원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라는 것이었다. 전국의 가난한 심장병 아이들이 모여들어 현재도 5명의 어린이가 수술을 위해 대기 입원 중이라고 했다. 오! 하느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기도를 한 다음, 수련의에게 입원시킬 묘책이 없겠냐고 사정했더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교수님이 쑈를 한번 시도해 보시지요 라고 했다. 그래서 환우아이를 응급실 앞에서 쓰러지도록 한 후, 황급히 그 아이를 안고 땀을 흘리며 응급실 안으로 뛰어들어 소리쳤다. 여기 어린 학생이 죽어갑니다, 간호사님 어디계십니까? 산소를 주세요. 산소를,하고 외치며 환자를 응급실 땅바닥에 눕혀으니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응급실 공무원이 화를 내며 다가와 다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세요. 여기서는 접수가 안 됩니다. 하며 화를 냈다. 나도 화를 내면서 여보시오! 국립기관 내 응급실 앞에서 환자가 쓰러져 죽어 가는데 응급조치도 않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쫓아내면 됩니까. 하고 항의를 했다. 직원들이 퇴근하여야 할 시간까지 겹쳐 직원 간에 접수해 달라, 안 된다, 옥신각신하다 자꾸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 끈질기게 달라붙은 나를 보고 그 직원은 에이, 나도 모르겠네. 내 후임 교대가 올 테니 알아서 하세요.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 이때가 절호의 기회다 생각하고 수간호사와 수련의 도움을 받아 환자를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등록이 이뤄져 입원이 허락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편지 한 장을 받았다. 박사님! 국립의료원에 입원시켜 준 환자입니다. 선생님이 떠나신 후 과장님이 외국에서 돌아오셔서 기적적으로 치료되어 퇴원을 앞두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순간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되뇌이며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 안득수는 전북대 병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성바오로병원 의무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천주교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회장, 10대 평신도 협의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시, 수상집 <일상을 넘어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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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4 16:58

어머니의 피눈물

정도연 씨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출생신고가 늦게 되어 입학도 못하고 집에서 가사를 돕고 있었다. 1943년으로 왜정 말기 늦은 어느 가을날이었다. 윗방에서는 어머니와 누나가 가마니를 짜고 나는 아랫방에서 새끼를 꼬았었다. 그런데 가난하여 점심때가 지났건만 점심 준비는 하지 않고 권태증으로 누워있다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와 친구 찾아 놀러를 갔다. 하지만 친구를 찾기도 전에 헛간에 그득한 고구마가 눈에 번쩍 띄어 욕심이 발동하고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저고리를 벗어 펴고 주섬주섬 몇 개 싸들고 나오는데 친구 엄마가 보시고 저고리까지 빼앗겼다. 그 때문에 겁도 나고 무안하여 집으로 줄행랑하여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새끼를 꼬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 친구 엄마가 저고리를 들고 찾아와서 훈계인지 비아냥인지 아들 단속 잘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가슴은 두근 두근 걷잡을 수 없어 뒤숭숭한데 꾹꾹 눌러 참으며 새끼를 꼬았다. 그 순간 어머니가 손에 회초리 한 주먹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대뜸 일어나서 종아리 올려 하시기에 떨리는 손으로 바지가랑이를 치켜 올렸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벼락치듯 종아리를 내리치시면서 도둑놈을 낳았으니 이일을 어찌 할꼬? 이찌할 꼬? 하며 정신없이 내려치셨다. 나는 매가 어찌나 아프던지 엉엉 울면서 야속하여 원망하는 마음과 반항심이 생겨 항의하려고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는 벌겋게 흘러내리는 피눈물이었다.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으며 아픔이 사라졌다. 그리고 과연 내가 도둑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는 아무리 굶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물건에 욕심내거나 손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그리고 엄마, 다시는 이런 일로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어머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어머니도 나를 보듬고 한 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봄이면 보리 서리, 가을이면 과일 서리를 하면서 즐기는 것을 보통으로 여겼는데 남의 하찮은 물건이라도 소중함을 깨달았으며 내 것처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의 매는 맞는 아픔보다 때리는 아픔이 더 컸으며, 오늘도 흘리신 엄마의 피눈물 그 피눈물의 매가 무척 그립다. 그래서 다시 맞고 싶은 생각에 어머니! 어머니! 하고 가슴으로 불러 본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친구 찾아 갔다가/헛간에 그득한 고구마/ 허기가 발동하여/저고리에 주섬주섬/싸들고 나오는데 친구 엄마 보시고/저고리 째 빼앗겼지요 겁도 나고 무안하여/집으로 줄행랑 벌떡거리는 가슴 꼬옥/새끼를 꼬려하지만 뛰는 가슴 두근 두근/벌떡 벌떡 벌떡 어머니 회초리에/종아리가 터지고 피는 흐르지만/터진 종아리 보다 때리는가슴이/더 아파서 흐르는 피눈물/어머니가 그리워/외쳐 봅니다. △ 정도연 씨는 그동안 독학으로 국문을 해득하고 한문을 익혀오다가 팔순이 가까워서 <시, 수필>에 입문하여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그는 동양윤리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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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28 17:02

시래기와 우거지 - 엄정옥

엄정옥 계절 탓인지 갑자기 고향의 맛이 생각난다.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는 그 기반을 농업에 두었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가을, 겨울 채소의 대표는 무와 배추다. 그리고 그 백미(白眉)는 무와 배추에서 나오는 시래기와 우거지다. 시래기는 푸른 무청을 새끼로 엮어 말린 것이며 우거지는 배추에서 뜯어낸 겉대이다. 시래기와 우거지는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식품들이다. 가을철이면 아버지께서는 시래기와 우거지를 엮으셨는데 이 때 식구들을 다 동원되었다. 나는 손재주도 없고 책 보기나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이런 내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눈치를 주는 아버지가 무착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노여워하셨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어려웠던 집안 형편으로써는 시래기와 우거지가 귀중한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가을이나 겨울에는 거의 매 끼니 마다 시래기국이나 우거지국이 식탁에 올랐다. 다행히 어머님의 손맛이 좋아서 된장을 넣어서 끓인 시래기 국이나 우거지 국이 맛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맛이 좋았다 하더라도 거의 매일 식탁에 등장을 하다 보니 그 것들에 신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일부 부유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서민들은 우리 집과 유사 했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에는 시래기와 우거지만큼 여건이 반전된 식품도 드물 것이다. 과거에 우거지나 시래기가 얼마나 천대를 받았느냐는 것은 잔뜩 찌푸린 얼굴 모양을 한 사람을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는 말로 표현한 것에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홀대를 당하던 우거지와 시래기가 현재는 건강식품의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반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래기로 만들어지는 음식들은 시래기 된장국을 비롯하여 고등어 시래기 조림, 시래기 무침, 시래기 나물볶음, 붕어찜 등 다양하며 우거지는 우거지 해장국, 우거지 찌개, 우거지 조림, 우거지 선지 등이 있다. 시래기에는 비타민 A, B1, B2, 칼슘, 철분 등이 있어서 빈혈 예방, 암 예방, 골다공증 예방 등에 좋고 우거지도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에 효과적이고 변비 예방이나 대장암 예방 등에 좋다고 하니 시래기와 우거지가 웰빙 식품의 대표가 되는 데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건강식품들인 시래기와 우거지를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도 좋고 자연 친화적인 웰빙이 되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될 터이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농가에도 도움을 줄 터이니 일석이조가 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요즘도 할머니 해장국 간판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도 술 해장국으로는 시래기와 우거지 만한 것이 없나 보다. 한 때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cf가 유행했듯이 시래기와 우거지는 전통의 우리 맛이며 이를 섭취하는 일이 생명의 길에 이르는 길이니 이제부터라도 옛날의 식탁을 더 가까이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엄정옥 엄정옥은 원광대 인문대학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로랜스학회 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전북지회장 등의 이력이 있다. 향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길>을 출간했다.

  • 오피니언
  • 백세종
  • 2021.01.21 15:34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아련함

진지영 씨 내 고향 남도 들녘엔 봄이면 보랏빛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넘실댄다. 그리고 황룡강물이 아침이면 물안개 사이로 은빛 날개 반짝이며 흐른다. 한없이 둑길을 걸어가면 초록 밀밭이 일렁이는 고랑 옆 원두막이 있는데 그 밭이 아버지가 정성스레 가꾸시는 참외 수박 밭이다.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여름이 되면 참외 수박만큼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한 낮엔 먼 동네 사람들이 참외 수박을 사 먹으러 오고 밤이 되면 서리를 해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는 한 계절을 원두막에서 주무셨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먼 둑길을 걸어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참외 수박밭으로 향했고 아버지께선 어서 오니라. 반겨주시며 진녹색 줄무늬 참외와 노란 참외 한소쿠리를 따다 주셨다. 나는 그 참외와 수박을 먹으며 원두막에서 숙제도 하고 아버지 심부름도 하다 해질 녘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읍내로 참외 수박을 팔러 가셨는데 땅거미가 지도록 오시지 않아 오빠와 나는 마중을 나갔다. 읍내까지 두어 시간이 족히 되는 신작로 길을 걸어도 걸어도 아버지 리어카는 보이지 않았고 매화동이라는 동네에 다달았을 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보다 훨씬 키가 큰 아저씨들 네댓 명이 아버지 참외 리어카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중 한 아저씨는 리어카 바퀴 위에 한 발을 올리고서 참외를 깎아 먹는 품새가 왠지 불량스런 아저씨들인 것만 같아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무서웠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의 행동을 속수무책인 채로 지켜만 보며 서 계셨는데 그 나쁜 아저씨들은 참외는 깎아먹고 수박은 쪼개어 놓고 하는 말 에이! 맛없어!라고 말하면서 과일 깎는 칼을 수박에 푹 꽂아 놓으며 돈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 그 나쁜 아저씨들이 떠난 후 아버지는 우리를 리어카에 태우고 집까지 오는 동안 집에 있지 뭐 하러 왔느냐고...오빠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그 사람들은 읍내 유명한 불량배들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고스란히 수모를 당하시면서 초조함으로 일그러진 아버지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나는 그 나쁜 사람들에게 뭐라 항변할 수 없는 작은 마음이 이내 너무 슬펐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참외 수박을 보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이 흐르고 그 날에 분노와 아픈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의 부모들은 자신의 삶은 잊은 채 오직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였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우리의 생애는 현재가 과거가 되면서, 현재의 모습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 나와 우리 부모들이 살아온 모습들을 되새기며 추억하는 것은 서로 간의 관계를 잇고,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의미가 될 것 같아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수천 년을 흐르는 황룡강 모래섬 강변에는 지금도 종달새 울고, 황룡이 올라간 전설이 강에 아른거린다. 거울 같은 물 위엔 조각구름 가득 담고 모난 돌 다듬어 만든 조약돌 깔려있는 황룡강, 멱 감던 나의 유년 시절이 뭉클한 반가움에 눈시울 뜨거워 온다. /진지영 진지영은 학창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책만 읽다가 이순(耳順) 가까이 전북교육문화관 <시, 수필>반에 입문하여 현재 글채움터 총무를 맡으며 창작수업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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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4 16:50

[금요수필] 구석

▲ 조윤수 콧물이 질금거리는 것이 수상쩍었다. 게다가 귀에 물이 차서 멍멍한 중상이 생겼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간단히 물을 빼내니 치료는 간단했다. 두어 달 뒤에 또 그런 증상이 발생하여 다시 병원을 갔다. 이번에는 코도 검사하고 엑스레이와 CT촬영까지 해야 했다. 드디어 부비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2년 전에 코에 이물질이 생겨서 수술한 것이 되살아났다. 바로 그 의사에게 넘겨져서 부비동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판정 되었다. 만성 축농증이라니, 생활에서는 별로 지장을 못 느꼈는데 그렇다고 들으니 그간 이상 중에가 조금씩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의 찌꺼기들이 부비동이라는 구석에 다 모인 것일까, 수술 시간은 짧지만 까다로운 수술이라서 전신마취를 했다. 다행이 전신마취를 하는데 걸림이 되는 증상은 없었다. 4일간 입원하고 수술도 잘 마치고 후유증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계속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제시간에 약을 챙겨 먹는 일도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평소 하루에 영양제 두 알만 먹는 나인데 끼니마다 약을 먹는 일이 성가셨다. 경과에 따라 점점 약은 줄어들고 드디어 석 달 만에 완치판정을 받았다. 사람은 각종 신체 장기 부속 마다 다른 병원을 다녀야 한다. 증상 따라 내과, 외과, 정형외과. 안과 치과 등으로 가야한다. 모든 기관이 연결되어 있건만, 참 편리한 것인지, 혼란스러운 일인지 인체의 장기마다 다른 병원 순례를 하는 것도 인생 순례의 한 코스인가 싶다. 일생을 살아도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인체의 구석구석은 다 알 수도 없는 것을. 그래도 최종 관리자는 본인 자신일 수밖에 없다. 각종 약은 입으로 먹지만 어떻게 그 증상의 구석을 찾아가서 치료 효과를 내는 것도 신기하기만 하다. 인체의 구조가 신비롭기도 하지만 그 치료 방법을 연구해낸 인간의 노력도 그만큼 대단한 일이다. 이놈의 집구석. 내 집을 못마땅하게 생각될 때 하는 말이다. 집구석을 치우다 말고 바깥바람 쐬고 와서 또 치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풍광 좋은 밖을 구경해도 돌아올 내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즐거운 내 집, 내 집뿐인데 우주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가장 편안하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내 구석, 내 삶의 보금자리 나의 요람이다. 구석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다. 구석에 끼워놓을 귀한 것도 없지만. 이제 나중에 다시 꺼내서 쓸 시간조차 없다. 홀가분하게 비우고 비우는 일밖에 없다. 내가 떠난 뒤 내 주위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싹 치워 없어질 것이다. 비록 내 집구석일망정 나에게 짐이 되지 않을 만큼만 마지막 순간까지 내 곁을 지켜줄 것인가. 비약할 수 있는 날개를 지닐 정도만. 날마다 구석부터 다시 잘 살펴볼 일이다. 구석구석 닦아서 빛내라던 선사의 말대로... △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바람의 커튼」,「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 「혼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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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7 17:24

[금요수필] 칠순에 드리는 기도

윤철 수필가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낍니다. 아직은 중년이라며 큰소리치는 자체가 허세임을 고백합니다. 영원 속에 숨을 놓아버릴 그 때가 언제 일지 모르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은 건 분명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실 당신 앞에 내 살아온 날들을 성찰하며 살아갈 날을 위해 기도합니다. 감사와 자족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 지금보다 더 갖고 싶은 욕망에 안달하지 않게 하시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혹시 부족함이 있을 지라도 이만하면 됐지라는 마음으로 자족하며 살게 하소서. 내가 아무리 좋아하고 필요한 것도 소요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거추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하소서. 짧아도 좋으니 매일 매일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거르지 않게 하소서. 감춤이나 꾸밈없는 나의 민낯을 돌아보며 허물을 뉘무치고 새로운 다짐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하소서. 양심을 속이지 않게 하소서. 말로써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잘못을 정죄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게 하소서. 너그러이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하소서. 단점을 지적받을 때 화내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누가 내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화내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짐을 믿으며 인내하게 하소서. 대우를 바라는 마음을 씻어주시고 먼저 대우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마음으로는 버려야지 생각하고, 입으로는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욕심은 커녕 소용이 덜한 물건 하나라도 제대로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솔직히 자백합니다. 앞으로는 하나하나 버리려는 것에만 마음 쓰며 살게 하소서. 마음속에 옹이진 아픔이나 원망과 미움을 버리고 나쁜 일은 빨리 잊게 하소서. 베푼 것을 기억하지 않게 하소서. 믿었던 사람이 돌아서도 너무나 섭섭해 하지 말게 하소서. 좋아하는 사람이 내 결을 떠났다고 슬픔에 빠져 살지 않게 하소서. 잡동사니로 가득한 창고를 주기적으로 털어내고 비우게 하서서. 일 년에 한 번도 쓰지 않는 물건을 필요할지 모른다는 미련으로 쌓아두지 않게 하소서. 내게 소용없는 물건을 남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아끼는 물건이라도 다른 이에게 더 긴요하게 쓰인다면 아까운 마음 없이 물려주게 하소서. 제발 꼰대로 살지 않게 하소소서. 나이를 무기삼지 않게 하소서. 어른의 위세와 아버지의 호령을 버리게 하소서. 인공지능시대에 나의 지식과 경험은 그리 큰 교훈이 되지 않는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젊위의 능력과 가능성을 우러르게 하소서. 나이 먹음을 슬퍼하거나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을 보며 비관하지 않게 하소서. 어른으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육안으로 보는 실체는 허상이고 심안으로 보는 본질이 실상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본질을 분별하는 안을 밝혀주소서. 지금까지 잘 나가는 의젓한 사람의 손만 잡으려 하고 이익이 될 만한 사람에게만 악수를 청했음을 회개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인연으로 보게 하소서. 앞뒤를 재고 계산하다가 좋은 인연을 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강산도 일곱 번이나 변한 세월인 칠순을 맞으며 간절히 기도 올립니다. △ 윤철 수필가는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을 하고 수필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현재 수필가로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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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7 17:54

[금요수필] 반성문 쓰는 아버지 - 김학

김학 수필가 나는 2남 1녀의 아버지다. 그 아이들의 나이는 어느새 40대에 접어들었다. 나는 자녀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방송국 프로듀서로서 직장 일에 바빠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을 내지 못했다. 또 문학을 한답시고 글 벗들과 어울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불평불만 없이 잘 자라주었다. 그러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뒤 성적이 상위그룹에서 머물렀으니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키우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사실 나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해야 되는 지를 몰랐다.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인 31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상여가 나갈 때 어머니는 큰아들인 나에게 삼베옷을 입히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려주며 상여 뒤를 따라가라고 하셨다. 나는 부끄럽다며 그 상복을 입지 않으려고 버둥거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것이 불효인 줄도 몰랐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나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배울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가 외아들이셨기 때문에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도 계시지 않았으니, 곁눈질로 배울 수도 없었다. 내 아들 형제가 아버지 노릇을 잘 하는 걸 보면서 나 스스로 반성하곤 한다. 내가 아버지 노릇을 잘못했기에, 두 아들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 많은 관심을 쏟는다. 며칠 전에는 백승종의『조선의 아버지들』이란 책을 세 권 사서 아이들에게 우송해 주기도 했다. 그 책에는 조선시대의 이름난 아버지 12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책을 읽고 나한테서 배우지 못한 성공적인 아버지 노릇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조선조 청백리 정갑손이란 대쪽영감이 있었다. 자신은 조상대대로 초가집에 살며, 무명 이불을 덮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함길도 감사로 근무하던 중 출장을 갔을 때 향시(鄕試)가 열려 그의 장남이 장원을 차지했단다. 출장에서 돌아온 정갑손은 향시 합격자 명단으르 확인하다 아들 이름을 발견하고 합격을 취소해 버렸다. 그러자 그 아들은 경상도 외가로 내려가 다시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고, 한양에서 치른 과거에서도 장원급제를 했다고 한다. 본 실력으로 장원을 했는데도 오해를 살까 봐 그렇게 경계으니, 얼마나 결백한 사람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란 말을 잊고 살았다. 그 호칭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부나 숙부가 계셨더라면 그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했을 텐데 그런 기회도 나에겐 없었고 그 아버지 대신 어머니란 호칭은 다른 사람보다 배 이상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전남 강진에서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은 아내가 보내 준 붉은 치마에 편지를 써서 책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다. 그것이 이른바 유명한 『하피첩』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비록 『하피첩』을 만들어 줄 수는 없어도 이렇게 수필로서 내 마음을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에게 밥상머리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밥상머리교육-유언(1~49)]을 시리즈로 써서 아이들에게 카톡으로 보내주고 있다. 나의 아이들이 나의 이 뜻을 마음에 깊이 새겨주면 좋겠다. 나는 팔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들딸에게 아버지로서 때늦은 반성문을 쓰고 있다. △김학 수필가는 1980년 월간문학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전북펜클럽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목정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손가락이 바쁜 시대> 등 수필집 17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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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3 18:24

[금요수필] 관계

이용미 바람이 몹시 불며 비까지 내리는 밤이었다. 몸살이 오려는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은 자연스럽게 장롱 문을 열어 두툼한 이불을 안아 한 덩어리가 되었다. 따뜻하고 안정된 몸과 마음은 그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못한들 어떠랴 싶을 정도로 편안했다. 사놓고 몇 달이 지나도록 관심조차 없던 이불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계절에 맞는 침구를 꼼꼼하게 고르는 동료 옆에서 딱히 필요도 없는 이불 한 채를 덩달아 샀었다. 그 가을 여름이 시작되는 그때는 그렇게 요긴하게 쓰이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연찮은 관계 맺음이 때로는 생각 밖의 행운을 가져오는 것과 같이 밤마다 느끼는 안온함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서 따라간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본다. 이 나이에 시험을 보는데 높은 점수까지 바라면 과욕이라 생각하면서도 중요 문장에 밑줄을 긋고 깨알 같은 글씨로 옮기는 앞뒤 동료들을 보면 셈이 나니 어쩌랴. 머릿속은 텅빈 듯. 꽉 찬 듯 더 집어넣을 수도, 꺼낼 수도 없는데. 연례행사 보수교육은 여전히 가슴과 머리를 비집고 나오려고 해서 억지로 누르고 달래며 그럭저럭 이론과 실기까지 마졌다. 이제부터 무장해제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수제 맥주 전문점으로 향했다. 이름부터 침을 꼴깍 삼키게 하는 000양조장이다. 지향점과 고민은 조금씩 다르지만, 긴장과 이완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뭉치니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담대해진다. 농담의 수위까지 높아져 엄연한 성별마저 애매해지면 어떡하느냐고 깔깔대며 술과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술과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내숭을 떨며 도리질을 하고 못이기는 척 홀짝 홀짝 맛보는 척 할 때도 있지만, 술이 술을 부르면 술술 넘겨도 얼굴색은 변함이 없다. 모계로부터 부여받은 DNA 때문이리라. 공교롭게도 다섯 동료가 같은 인자를 갖지는 않았으련만, 술 앞에서 즐거워하고 허물 없어함은 복이 아니고 무엇이라. 술과 친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어울릴 수 있을까? 고마운 나의 어머니, 아니, 나의 외가(外家)여.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은 앞뒤 잴 것 없이 발걸음을 전자상가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는 별 망설임도 없이 권하는 제품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결재를 해버렸다. 20여 년을 써온 김치냉장고가 기능은 멀쩡한데 맛있게 담근 김치 맛까지 변할 것 같이 지저분해진 김치 통이 문제였다. 통만 바꾸자니 그 값이 만만치 않아 일을 저지른 셈이다. 조금 높아진 냉장고 문을 볼 일도 없이 수시로 여닫는다. 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작년에 담았던 김치 한 통과 과일 몇 가지뿐이다. 허전한 공간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 김장철을 기다린다. 이렇게 또 다른 김치냉장고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필요해서 맺은 관계라도 흐트러짐 없이 이어진다면 축복일 수 있다. 사람과의 인연이 억지로 맺어지거나 쉽게 떼어내기 어려운 것 같이 의식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엇하고의 관계든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는 고마운 관계이기를 소망하는 나날이다. 만남은 때가 있고 헤어짐도 때가 있다 해도 그것은 인연만이 아니오, 관계의 영향도 있다. 하늘이 준 인연을 사람이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관계가 좋으면 인연이 잘 자라서 천명을 다하고 관계가 나쁘면 인연이 중도에 생명을 다하는 것이다. 인연이 씨앗이라면 자라서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은 관계다. 이용미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하여 현재 마이산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수필집 「그 사람」외 2권을 펴냈으며, 행촌수필문학상과 진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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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5 18:51

작은 내 서재 - 신팔복

신팔복 내 어린 시절은 책이 귀했다. 농사만 짓고 살던 두메산골이라 책이 귀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모여 길쌈하며 재담이 좋으신 분이 구전돼오던 이야기를 꺼내면 호기심이 발동하여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장화홍련전을 들으며 몸이 오싹했고, 콩쥐팥쥐 이야기를 들을 때는 몇 번씩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했던 숨을 후련하게 내쉬었다. 듣고 또 들어도 홍미 진진하고 감명 깊었던 이야기는 꼭 이웃 동네에서 일어났던 일 같아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학교에 입학해서 장끼전을 빌려다 읽으며 키득거렸다. 교과서도 물려받던 시절이라 동화책을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어 진안읍내 사거리 서점에 들러보니 책이 꽉 차 있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랜 기간 조금씩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타잔을 사서 읽었고, 다음엔 보물섬을 사서 읽었다. 그때부터 서재가 무척 부러웠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과학전문 서적을 비롯하여 단편소설, 문학 전집, 백과사전 등을 샀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살 때라서 여유 있는 방이 없었다, 아내와 힘께 쓰는 방은 세간 살림과 아이들 육아 용품으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많지 않은 책이었지만 툇마루에 보관해야 했다. 자녀들을 출가 시키고 빈 빙이 생겼다, 책장을 사고 책을 정리하여 자연스럽게 작은 내 서재가 만들어졌다. 컴퓨터로 인터넷도 즐기며 글도 쓰고 독서도 하는 장소로 오로지 내 전용 공간이 됐다.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공부를 하면서부터 많은 문우들도 생겼다. 그들이 발간한 책을 보내주면 책꽂이에 보관하여 그런대로 서재의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장소가 생겨서 매우 좋다. 나는 책을 모아 두었지 읽는 것에 등한했다. 글을 쓰려면 풍부한 식견이 있어야 하는데, 주제도 모르면서 글을 쓰려고 했으니 엉터리였다. 마치 맥도 짚지 못하면서 침부터 꽂는 돌팔이와 같았다. 몸살을 않는 것처럼 머릿속만 어지럽고 글은 한 자도 나가지 않았다. 책상에서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창작을 해보지만 지금도 글쓰기는 쉽지 않다. 요즘은 서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도서관과 복지관이 생겨서 이를 대신하고 있다. 전문 서적을 비롯해 문학, 철학, 종교, 과학, 경제, 사회, 복지 등 다양한 책들이 엄청 많다. 맘만 먹으면 구애받지 않고 독서를 할 수 있다. 가까운 인후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대출해 오고 또 너른 공간에서 읽기도 한다. 시설이 쾌적하고 조용해 책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여름엔 냉방 겨울에는 난방이 잘 되어 휴식 공간도 되는 일거양득이다. 책에는 인생의 길이 있고 정보가 있다. 험난한 인생 항로에 등댓불이 되어 밝혀준다. 좋은 책은 말이 없어도 서로 통하는 친구처럼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작가와 대화할 수 있다. 독자는 감명 깊은 문장이나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되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 진다. 은연중에 그의 고매한 인품을 닮고 싶어진다. 그게 독서의 매력일 거다. 내 서재는 보잘것없는 작은 공간이지만, 책을 읽을 때는 세상의 번거로움을 잊고 마음이 평화롭게 해주는 안식처다. 고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세상의 깊이를 깨닫게 해주는 마음의 양식인 주는 독서삼매경에 빠져 볼까 한다. 젊을 때 날밤을 새워 책을 읽지 못한 것이 눈도 침침해지는 지금에 와서야 때늦은 후회로 남는다. 신팔복 수필가는 중등교사로 퇴직해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 회원, 진안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마이산 메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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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9 19:04

시안(詩眼)으로 본 사계(四季) - 김계식

▲ 김계식 시인 허기진 새 몇 마리 어지럽게 지저귀는 소리 끝으로 밝아오는 여명 숨을 몰아쉬던 바람도 밤새 묻은 어둠을 떨쳐내고 있다. 화창한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도 채 다가서기 전 풍전세류로 비웃음 당하던 수양버들이 엄동 속 온기 휘어잡아 연녹색 푸름으로 춘산을 입짓하며 화해를 손을 내민다. 어찌 하늘의 드높음 만이랴. 생명 가진 것들의 짙은 소망 그 생기로 피어나는 숨결인 걸. 새로운 봄소식 먼저 맞이할 수 있는 언덕에 올라 발목 잡은 젖은 시간을 털어내며 꿈으로 봄기운으로 맑은 새벽을 맞는다. 봄을 맞는다. 아직도 허연 눈발을 뒤집어쓴 이른 봄 산자락의 게으른 봄 마중이다, 입춘에 어렵사리 불려나온 우수(雨水)의 살얼음 풀리는 소리 들린다. 어디서 그 소릴 들었는지 진흙 질컥한 짚신 바닥을 동구(洞口) 정자나무가 땅 위로 드러난 노근(露根)에 쓱쓱 닦고 있었다. 새벽 기침(起沈)을 어려이 참고 아랫목 뭉그적거리는 노인과 달리 터진 바짓가랑이 불알 내보이는 아이놈 벌써 이른 봄산에 안달한다. 언치가 부담스런 외양간 누렁이 논밭 갈던 두려움 까맣게 잊고 틈둑 보드라운 새 풀잎 냄새에 되새김질하는 아래턱이 더욱 바쁘다. 두어 장 넘어감을 인지한 지금에야 게으름에 젖은 무르팍에 힘을 모으는 늦깎이 봄 마중. 폭염(暴炎) 몸 사릴 때 붙박임보다 작은 부유(浮游)릍 감사하는 부레옥잠은 하늘 피어나는 흰 구름 빛깔을 굳히고 땡볕 줄곧 갈라대는 쓰르라미 소리를 점철하며 벌써 여리게 들어서는 살살이꽃 하늘거림을 꿈 그리듯 숙연하다. 익힌 인연으로 감지하는 나는 옥비녀에 서린 설움 닦아내는 한 줄기 바람 폭염 그늘로 파고들며 푸는 회오를 그냥 모르쇠 하고 있다. 상사화 피는 계절 허공을 향한 울부짖음, 메아리마저 내려앉을 곳을 잃었다. 더 붉게 타오르는 열정으로 소진을 까맣게 모르는 부단한 재연(再燃)이었다. 이윽고 또 이울고 찾을 길 없는 빛과 소리 어렴풋한 방향을 짚어 솟아나는 푸른 잎사귀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루어낼 해후(邂逅)이더냐. 같은 이름으로 불려도 끝내 등진 대답 언제 어디서 하나 될 것인가. 가림없이 내리쬐던 한여름의 열기, 밤 시간 점철하는 귀뚜라미의 호곡으로 한풀 껐여 양지로 뜨겁고 음지로 시원한 얼룩빼기가 된다싶더니 마당 한복판으로만 더 두터운 햇볕은 붉은 고추 닦달하고 콩 꼬투리 비집어 콩알을 세다가 물러감을 앙탈하는 뒷자락 가을은 그렇게 시나브로 다가왔다, 익어가는 벼이삭 따라 변해가는 토실한 메뚜기는 손 빠른 아이의 손에 붙잡혀 피 꽃대로 만든 꿰미에 어린 살과 등껍질 사이로 꿰이던 날이다. 내일도 모르는 놈 퇴화된 입에 생식기만 내세우는 놈이라고 비아냥거렸던 하루살이가 그냥 부러웠다. 세상 으스대던 벗어진 이마면 무엇 하며 튼실한 날개면 무엇 할 것인가? 생각에서 운명까지 시베리아 툰드라 동토(凍土)가 운해를 넘어 보료로 보이던 날, 사뿐히 내 려앉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뇌리를 채워진다. 하지만 다행히도 말로 바꾸지 않고 깊이 묻어둔 결과인지 우랄산맥을 넘을 때 덜커덩 기체 내려앉는 이상기류를 운명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며 오싹 오금 저린 순간을 맞았다. 생각-말-행동-습관-성격-운명 이런 절차로 생각이 끝내 운명이 되는 거라면 그날의 내 심신은 지금 영원히 녹지 않는 빙벽 속에 갇히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솔깃이 인다. /김계식 김계식은 정읍에서 출생해 전주교육청 교육장을 역임했다. 창조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돌부처의 푸념>외 24권을 출간했으며, PEN문학상, 전북문학상, 전북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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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2 15:50

한글날(즈음) 소회 - 곽창선

지난 9일 574회 한글날을 맞이했다.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말과 글의 탄생을 자축하며 역사적 의의를 되돌아보는 날이다. 우리말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열정으로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모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현대인에게 말과 글은 생명줄 같은 자산이다. 세계의 수많은 문자 중,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나 하는 영원과 뿌리가 명확한 문자는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세종은 백성의 우매함을 어여삐 여기사 누구나 읽기 쉽고 쓰기에 편리한 우리글을 세종 25년에 음운 문자 자음 17자와 모음 11자를 반포 하셨다. 훈민정음은 최초 28자였으나 초성(3자) 중성한자가 폐기 되고, 최종 24자(자음 모음)를, 창제 된지 3년 후 1446년에 세상에 빛을 보았다. 모음은 하늘과 땅 우주의 기본원리를 표본으로 삼았고, 자음은 사람의 발성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 중국의 눈치를 살피고 반대파들의 저항을 고려하여 발문(跋文)은 한문으로 쓰여 졌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 청강지곡을 쓰시고, 새로운 글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증명하였다. 한국은 국토의 크기로만 볼 때는 매우 작은 나라다. 그러나 인구수로 볼 때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남북한이 합치면 약 7000만으로 15위에 해당한다. 민족 언어를 중심으로 볼 때 한국은 더욱 크다. 한국어는 지구상에 쓰이고 있는 수천 가지 언어 중에서 중국어, 힌디어,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에 이어 사용 인구로 열세 번째를 차지하는 언어이다. 이러한 한국어에 대해 우리는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한글이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한글 창제와 발전 과정을 뒤 돌아 보면 수많은 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는 한글연구의 선각자 주시경 선생의 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의 강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조선어학회를 발족시키고, 맞춤법 통일안과 표기법등을 고안 우리 말 큰 사전의 기초를 닦아 나왔다. 우리 겨레는 반만 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 오면서 타고난 창의성과 뛰어난 기량, 피땀 어린 끈기로 독자적인 민족 문화를 창조,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글 창제는 우리 문화사상 으뜸가는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의 여러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독창성과 과학성을 지닌 뛰어난 문자라는 사실을 한 결 같이 인정하고 있다. 더구나 문자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는 겨레는 지구상에서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도 크나큰 민족적 긍지가 되어 왔다. 말과 글이 없다면 지금처럼 첨단 미디어 시대에 어떻게 즐기며 살 수 있을까? 생명 줄 같은 우리말과 글이 있어 쓰고 읽으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으니 행복하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말과 글을 잘 보존하고 지켜 나감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에 뒤지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세계화로 향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겠다 곽창선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을 역임했으며 <표현 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현재 표현문학회, 신아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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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5 17:43

[금요수필] 째보선창

김철규 군산 내항에는 째보선창과 빨간 등대 하나가 있다. 군산 금암동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에 다리를 놓고 사람들과 자동차도 다니고 있는데 금강의 수변이 언청이 모습을 했다고 하여 째보선창이라는 닉네임이 붙으면서 한 세기를 풍미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군산 하면 째보선창이라는 대명사 하나가 따라다닌다. 또한 째보선창 바로 앞에는 일본인들이 개항을 하면서 빨간 등대 하나를 세웠다. 이 빨간 등대는 군산항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금강 하구인 내항에 들어오는 모든 선박들에게 위험한 지역이니 조심하라는 신호의 표시로 빨간 등대를 세운 것이다. 이 째보선창은 군산항의 역사와 함께 숱한 사연을 담고 있다. 나는 군산유학의 첫 번째 하숙집이 째보선창가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친과 교분이 있는 고군산 하숙이라는 여인숙 뒤편 방에서 하숙을 했는데 학교를 오갈 때면 매일 째보선창을 거쳐야 했다. 곧 집 안마당 역할을 한 것이다. 째보선창가에는 군산수협의 수산물 공판장이 있어 조수가 낮은 조금이 되면 수많은 수산물로 뒤덮여 비린내가 진동을 했었다. 생선을 팔려는 사람들과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이침 해가 뜨면 길가에서 뱃사람들이 쓰러져 잠자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광경은 한 겨울을 빼고는 봄, 여름, 가을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군산항이었다. 이처럼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산항 선창가의 애환이 서린 째보선창이다. 태어나고 살고 죽고 생사고락을 같이한 째보선창은 군산이라는 항구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1990년대에 이르면서는 주인 잃은 헛간과 같이 적막만 흐를 뿐이다. 그토록 문전성시를 이룬 째보선창은 그 이름마저 시들어 가고 있어 그 흔적이라도 남는 기념물이 들어서 주기를 속없이 기대해 본다. 특히 필자의 사춘기시절을 보냈던 째보선창이기에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나있는 추억 이야기를 꺼내 그 시절을 더듬게 하고 싶다. 또한 칠흑 속의 어둠을 밝혀주는 빨간 등대도 군산항을 찾는 선박들만이 아니라 낭만에 젖은 청춘들에게는 더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금강 하구언에 유일한 이 빨간 등대는 사랑에 불타는 청춘남녀들에게 때로는 등댓불처럼, 때로는 빨간 정열의 불이 되어 인생의 활로를 가능케 해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낭만 속의 하염없는 사연을 지닌 채 불만 반짝일 뿐 휴업상태다.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수변도로에 공사가 한창이지만 누구에게도 멋진 친구가 되어 주고 추억을 한 아름 안아주며 희비쌍곡선을 그어준 째보선창과 빨간등대의 추억은 간데없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 물과 함께 화려했던 시절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그러나 째보선창과 빨간 등대는 아직 자신을 지켜내고 있다. 필자는 이곳을 맛과 멋과 낭만이 넘실거리는 옛 군산항의 이미지를 살리는 요지(要地)로 되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금강과 운명을 함께할 째보선창/그리고 빨간 등대/추억을 머금게 하는.../당신들은 우리 군산의 영원한 동무/꿈틀거리는 새싹으로 피어나야 할 사랑/나는 오늘도 당신들을 안고 싶소.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전라북도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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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4 16:12

[금요수필] call 인생

백봉기 결혼식장에서 <전국노래방 도우미 연합회장>이라는 생소한 직함의 화환을 보았다. 우리나라에 만개가 넘는 직업이 있다지만 노래방 도우미가 하나의 직업이 되어 전국적인 조직까지 있다는 것은 퍽 의외였다. 갑자기 오래전 KBS에서 방영한 이란 드라마가 생각난다. 7살 된 딸이 있는 이혼남 택시기사와 사랑에 배신당하고 자살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밑바닥 인생을 선택한 콜걸이 서로의 비슷한 처지에서 연민을 느껴 사랑하게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려가는 이야기다. 부르면 달려가는 콜택시기사와 콜걸의 만남이라 더욱 감동적이었다. 콜Call 인생은 부름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컨대 콜걸이나 콜택시기사, 파출부, 대리운전기사 등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예식장에서 낯설게 느꼈던 노래방 도우미도 그런 종류인 셈이다. 이들은 대부분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남이 불러주지 않으면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간다. 더구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동창회에 가서 한 때는 잘 나가던 친구를 만났다. 고급차에 골프가방을 싣고 다니던 친구였는데 조용히 내 곁으로 오더니 술 한 잔을 권하며 힘들었던 지난날들의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중소기업을 운영했는데, 중국의 덤핑상품들 때문에 견디지 못해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나고 자신은 시용불량자가 됐다고 했다. 사업이 잘될 때는 세상살이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부도로 생활고까지 겹치게 되자 어쩔 수없이 선택한 것이 대리운전기사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무척 힘들었지만 가족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밤거리로 나섰단다. 그런데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며 밀폐된 공간에서 취객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요금 때문에 다투고, 운전이 서툴다거나 길을 잘 찾지 못한다며 생트집이고 여성들의 성적인 모욕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부름을 받고 그들을 위해 사는 call 맨들, 전화 한통에 2-3분 내로 장소까지 달려가는 콜택시, 거친 행동도 감수하면서 억지웃음까지 줘야하는 콜걸과 노래방도우미, 취객들의 운전을 대신하는 대리운전기사, 힘들고 급할 때 달려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파출부, 기족들도 꺼리는 일을 마다 않는 간병인들 모두 진정으로 감사해야할 콜call 맨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차갑다. 인권까지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하고, 적은 소득에 사회적인 인식마저 낮아 3D업종이 되었다. 특히 노래방 도우미나 대리기사들은 밀폐공간에서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로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별별 수모들을 겪어야 한다.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우리다. 그러나 우리도 언제 어느 때에 대리운전을 시작한 친구처럼 생활고로 콜Cal 맨이 될지 누가 아는가? 이들을 따뜻이 격려하고 이웃처럼 도와줘야 할 사람들도 바로 우리다. 콜 인생 남이 불러줘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 사회에 이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분들만큼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힘들게 일하는 이들에게 질책 대신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하다. 당당한 직업인으로 인정받고, 일한 만큼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배려와 함께 어쩌면 나와 내 가족도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될 극한직업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공생 공존하는 것이 선진국민의식이다. △백봉기 수필가는 <한국산문>으로 등단하여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 팔짱녀 해도 되나요를 발간했다. 현재는 온글문학회장과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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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7 16:38

[금요수필] 가기 싫은 곳

최기춘 살다 보면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갈 곳이 있다.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가려면 마음이 심란하고 가기 싫다. 군대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제대 한지 50년이 되어가는 요즘도 가끔 군대 가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괜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나이 들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은 요양시설이라 한다.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요양병원에 문병을 다녀왔다. 병원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나고 실내 공기도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가 문병한 환자는 거동이 불편하여 일상생활을 요양사들에게 의지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병실에 여섯 명이 있었는데 거의가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어떤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분이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나라도 문병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내는 문병을 갈 때면 꼭 음식을 챙긴다. 집에서 끓인 도토리묵을 대접하려고 준비했는데 문 옆에 았는 성미 급한 할머니가 나도 좀 주세요.했다. 안 그래도 좀 넉넉하게 준비해 갔기에 나누어 드릴 참이었다. 입원 환자 중 스스로 앉지도 못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분들은 먹여드렸다. 어떤 할머니는 정신이 혼미하여 아내가 먹여드리는 데도 혼자서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횡설수설하는데 웃지 않으려 해도 웃음이 나왔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아 웃음이 나오지만 매일 간병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족들을 보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젊은 시절 술좌석에서 웃으며 농담삼아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이 먹으면 예쁘고 밉고,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 벼슬의 높낮이 즉 미모도 학력도 지위도 모두 평준화가 된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몸도 가누지 못하고 누워서 연명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실감이 난다. 우리는 불과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 안방에서 임종했다. 사랑채에서 거처하던 할아버지도 임종할 때면 안방으로 모셨다. 그래서 안방이 이승과 저승의 이별정거장이라는 우스갯말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정거장이 요양시설로 바뀌었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어른들은 그 정거장인 요양시설에 가지 않으려 한다. 장수(長壽)는 축복일까? 나이가 들어 늙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들까? 장수는 분명 축복이겠지만 노년에 건강을 잃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심리적, 경제적 부담 등으로 가족 간의 불화와 갈등, 고통을 겪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그러면 행복한 노후(老後)는 멀기만 한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요즘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웬만해서는 요양지설 가기를 꺼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요양시설을 갈 때마다 느낀 일이지만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 특히 근무환경이나 처우가 좋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서비스의 질도 좋지 않다. 노인들도 사회 환경이 바뀌어 노후에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면 요양시설에 갈 수밖에 없음을 잘 안다. 하지만 요양시설의 환경과 서비스가 나쁘니 가기 싫어하는 현실이다. 요양시설의 환경과 서비스 질을 높여 노후면 가장 가고 싶은 요양시설은 요원 한가? 법과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이 노인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100세 시대라 하지만 인류의 역사로 볼 때는 점 하나다. 점 하나의 순간을 맞는 노인들이 안락하고 품위 있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은발의 단상〉외 1권이 있다.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회원이며 전북수필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임실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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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0 16:46

[금요수필] 후발주자(後發走者)-

박순희 빛나는 문화와 역사는 선구자들이 견인해왔다. 그 어떤 사상이나 한 일이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이 선구자라면 개척자는 불모지를 일구기 위해서 비범한 개척정신과 노동력을 겸비해야만 가능하다. 즉 가시밭을 헤치는 피나는 노력과 멀리 바라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어떤 분야든 반드시 선구자나 개척자가 있었다. 그들이 피땀으로 닦아놓은 길이 있어 뒤에 가는 사람들은 보다 쉽게 따라 갈수 있었다. 분명 개척자나 선구자는 새로운 목적을 추구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환경적으로 닥쳐오는 모든 어려운 여건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다각으로 극복해 갔다. 또한 선구자와 선발대는 엄밀히 따진다면 차이가 있겠지만 선발대 역시 선구자와 공통점이 많다. 앞서 간다는 것은 책임감과 함께 모험도 따르고 개척해 나가야하는 과제를 해결해야하는 고통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슷한 개념의 선발주자가 있다면 비주류 후발주자가 있다. 2진, 방외인, 스페어, 대기조 등의 이름으로 환호 받지 못한 비주류의 비애에 대해 생각해본다. 주류와 1등만이 환영받는 우리나라 문화에선 후발주자는 언제나 찬밥 신세였던 건 부인할 수 없다. 그 나름의 형편과 처지가 있어 선발로 뛰지 못했지만 후발주자 역시 투지력은 누구 못지않은 승부 근성 즉 답습과 재생으로는 후발주자를 못 벗어난다는 각오를 끝까지 놓아서는 안 된다는 심리다. 선발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을 싸잡아 후발주자라는 안일의 표상처럼 취급한다면 곤란하다. 누구든 자기의 보폭과 성향에 따라 전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선발된 주류라고 모두가 완벽한건 아니다. 모든 상황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게 진리이기에 예수님께서도 2천 년 전에 이미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셨다. 오늘의 주류가 하루아침에 비주류가 될 수 있는 게 이 땅의 토양이고 보면 영원한 주류도 영원한 비주류도 없다. 주류라고 목에 힘주거나 비주류라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대기만성의 의지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가 냄비 근성을 이겨낸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경쟁 사회는 등수로 서열을 매기면서 치열해진 경쟁에 한걸음 더 나아가 살벌해졌다. 어떤 분야의 개발에 선구적 업적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이미 주도권을 선점한 이점이 기득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기를 쓰고 선발주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선발대라고 안심하고 머뭇거리다가 역전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우린 일찍이 학습되어있는 교훈이다. 비주류와 후발주자를 같은 등급으로 친다면 어떤 곳에나 나는 비주류에 속한다. 생각해보니 후발주자라는 말이 나한테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공부부터가 만학을 했으니 자연히 후발주자였고 꼭 무엇부터 있어야 한다는 철칙이 있었던 건 아닌데 문화생활에서 후발 주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이나 가전제품의 신 모델로 바꾼 것도 남들보다 한 발 늦다. 생각해보니 돈 문제 보다는 성향과 관계가 깊다. 후발주자가 한 가지 좋은 것이 있긴 하다. 후발로 신제품을 살 땐 모든 기능이 그동안 부족했던 기능을 보안해서 업그레이드된 상품으로 생산되니 최신기능의 모델을 구입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그런 점을 노린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후발성향이라는 걸 새삼 발견했다. 그러나 후발주자나 비주류가 싫지 않은 이유는 신중한 결과 최고 최선의 선택기회가 있다는 것에 위안 받는다. 후발주자에겐 겸양과 도발정신이 있고 선발로 향할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 △박순희 수필가는 <한국문인>으로 등단했다. 현 행촌수필문학회 부회장.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 <대체로 맑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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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3 17:17

[금요수필] 그믐달

정성수 1)왠지 쓸쓸한 달 그믐달은, 새벽녘에 걸터앉으면 더 쓸쓸하다. 나도향의 그믐달만 봐도 그렇다. 직유법과 은유법을 쓰고 있는 문장들은 그믐달을 가냘프고 애절한 느낌을 주는 달이라며 여성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작가는 서산 위에 잠깐 떠 있다가 지는 초승달은 독부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온갖 풍상을 겪고, 원한을 품은 채 애처롭게 통곡하는 원부와 같은 애절한 맛이 있다고 했다. 자정을 훨씬 넘어 귀가하는 술주정꾼이나, 노름을 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이나, 어떤 때는 도둑놈이 본다는 그믐달은 또한 정情 많은 사람이 바라보거나, 한 있는 사람이 바라보거나, 무정한 사람이 바라보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가하면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드는 사람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면 그믐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어 외로운 달이라는 것이다. 그믐달은 초승달의 반대 모양으로 크기가 작은 달이다. 왼쪽이 둥근 눈썹 모양의 달로 새벽녘이 되서야 나온다. 새벽 동쪽 하늘에서 잠시 볼 수 있어 일반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 나도향의 그믐달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달 중 그믐달을 독특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비유 대상을 끌어들여 애절함과 한스러움을 표현했다. 이 글은 앞부분은 느린 호흡으로 작가 자신이 그믐달을 사랑하는 이유를 열거하고 마지막 문장에 자신의 생각을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또한 단정적인 표현으로 글 전체의 통일성을 부각하고 있다. 작가 나도향은 외롭고, 쓸쓸하고, 애절하고, 한스럽고, 슬픈 정서를 느끼게 하는 그믐달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처지를 그믐달을 통해 드러낸 반면에 비수와 같은 싸늘함과 냉정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죽은 사람은 떠나기 전에 산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이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삶을 잠시 펼쳐보고 몇 잔의 술에 취기가 들면 자기들의 세상 속으로 사라진다. 밤하늘에는 망자가 못다 한 말들이 별이 되어 떠 있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김정수시인을 생각했다. 시인의 월남전이 떠오르고 그의 고엽제병이 밤하늘에서 지상을 덮쳐오는 동안 불현듯 떠난 그가 나를 읽고 있었다. 그 동안 시인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김정수시인은 입버릇처럼 말한 대로 대전현충원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 날 것이다. 김정수시인이 못 다한 시의 언어들이 밤하늘 별로 떠 있다가 지상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가 있는 시문들이 부드럽게 들린다. 그믐달이 떴다. 그와 먹었던 추어탕에서 미꾸라지들이 꼬리를 흔들면서 물속으로 사라진다. 미꾸라지들은 드디어 자유롭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그믐달은 나를 위해 새벽하늘을 지키고 있다. 시인이 떠나면서 한 그릇의 밥을 준 것처럼 나는 산사람들에게 먹이는 일을 해야 한다. 김정수시인의 시집을 천천히 읽으면서 자꾸만 아름다운 시인으로 부활하고 싶어진다. 김정수 시인이 그믐달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어 밤하늘에 그믐달이 되어 걸려 있었다. △정성수 시인은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주비전대학교 운영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향촌문학회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시집 <공든 탑>, 동시집 <첫꽃>, 동화 <폐암 걸린 호랑이>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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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7 16:21

[금요수필] 어느 조각상

윤재석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한국자생 식물원에 가면 나무의자 위에 앉은 위안부 앞에 정중히 엎드려 인사하는 신사복 차림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눈에 익은 듯 하면서도 약간은 낯설다. 조각상의 이름은 영원한 속죄로 조각가 왕관현의 창작 예술품이다. 예술은 창작이다. 개인의 사상을 상상을 통해 표현하는 작품이다. 작품 내면의 세계는 창작자만이 알 수 있다. 독자나 관람객들은 작가가 그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조각상을 두고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신경전으로 떠들썩하다. 위안부를 상징하는 여인상 앞에 엎드린 남자의 모습을 두고 나름의 해석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이 아베를 닮았다면서 외국의 정상을 이렇게 폄하 하느냐는 시비다. 한국은 개인이 조각한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반격이다. 하나의 예술품을 두고서 주관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며 두 나라 의견이 나누어졌다. 그런데 조각상 하나를 두고 두 나라가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기인하고 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젊은 여성을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기 위해 강제로 징용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은 위안부로 차출되어 다녀온 명확한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진정한 사과 한마디가 없다. 끌려간 당사자 본인을 통해서 밝혀지고 서류나 정황들이 면백히 밝혀졌음에도 오리발이다. 그러니 우리국민들이 통탄할 수밖에... 일본의 자세가 너무도 몰염치하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으로 일관하면서 발뺌을 한다. 일본과 같은 전범국 독일은 당시 피해국가와 피해를 입은 유태인을 비롯하여 전 인류에게 독일정부수상이 앞장서 수없이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일본은 사죄는커녕 되려 영토분쟁, 위안부문제, 대량학살, 그런 행위를 숨기려 갖은 술수를 자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자세도 미래 지향적인 명쾌한 답변이 아쉽다. 한 사람의 예술품을 가지고 국가적 관계로 이어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 여긴다. 처음에는 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했다가 국가 정상에 대한 예양이 아니다 면서 오히려 예술가 한 사람에 대해 질책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졸속하고 편협된 사고로 국민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다. 좀 더 당당하고 의연한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한일 관계는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말에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고 했다. 나의 기쁨이 남의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쁨도 고통도 함께 가지면서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고통을 많이 주었다. 그 아픔을 가진 자는 오래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잘못된 과거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죄해야 한다. 가까운 이웃 나라로 화해하면서 발전하는 길은 역사를 바로 알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리라. 한 예술가의 작품으로 두 나라가 떠들썩한 반응은 두 나라가 아직도 불편한 관계임을 말하고 있다. 일본이 과거사에 반성은 없으면서 조각상 하나에 과잉 반응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중압감에서 벗아 나고자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양심 있는 일본 지식층도 반성할 건 반성하고 용서받을 건 용서받아 선진국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윤재석 수필가는 대한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호남수필문학회 부회장과 은빛수필문학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진안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수필집 <삶은 기다림인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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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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