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한지, 닥나무 재배 적합한 토양, 수질 등 자연환경 조건이 결합된 생활 기반 산업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행정·출판 수요, 농한기 노동력 구조서 전주를 중심으로 생산 확산 그러나 원료 수입 증가 등 문화 수요 확대와 산업 생태계 구축 지속가능성의 과제 제시
한지는 원료와 색채, 염색 방식, 후가공, 용도와 쓰임, 크기와 두께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세분된다. 이 가운데 생산지는 한지의 종류와 품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선자지(扇子紙), 간장지(簡壯紙), 유둔지(油芚紙), 태지(苔紙), 죽청지(竹靑紙), 화선(畵宣), 농선지(籠扇紙), 상화지(霜花紙) 등 도내에서 탄생한 한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종류가 월등히 다양하다. 왜 이처럼 다채로운 한지가 전북에서 꽃피울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짚어본다.
한지는 기술로만 만들어진 종이라기보다 자연 속에서 형성된 결과물에 가깝다. 종이를 뜨는 방법 이전에 종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먼저 여러 땅에 자리 잡았다. 그 중 물과 흙, 나무, 그리고 사람의 생활 구조가 맞물리며 전북은 오랜 시간 한지 생산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이처럼 전북의 한지는 공예품이기 이전에 지역 환경과 산업 구조가 함께 빚어낸 생활 기반 산업이었다.
전주와 완주를 둘러싼 노령산맥 줄기는 이러한 배경의 출발점이다. 이 일대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풍화된 토양이 넓게 분포해 배수가 원활하고 완만한 구릉 지형을 이룬다. 산지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모이며 수분 조건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닥나무는 과습과 건조에 모두 약하지만 배수가 좋고 일정한 습도를 유지하는 환경에서는 섬유가 길고 질기게 성장한다. 자연스럽게 양질의 원료를 지역 안에서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됐다.
윤지환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전주·완주 지역을 둘러싼 노령산맥 줄기는 배수가 잘되는 토양과 완만한 구릉지를 형성해 양질의 닥나무가 자라기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며 “철분이 적은 전주천과 만경강 수계 역시 한지의 밝은 색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주는 전라감영 소재지로 행정 수요가 많았고, 농한기 노동력이 결합되면서 한지 생산이 생활 산업 형태로 확산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북 지형의 또 다른 특징은 산지와 바다가 가까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이 산맥을 타고 이동하며 형성하는 적절한 습도와 남부 특유의 온화한 기후가 결합해 닥나무 생장에 유리한 환경을 만든다. 전주·완주·진안·장수 일대에 형성된 완만한 구릉과 침식 분지는 다양한 수계를 집중시키며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게 했다. 이러한 지형·기후 조건은 닥나무 재배에 필요한 요소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종이의 품질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핵심 요소는 물이었다. 종이는 물 위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닥섬유를 풀어 종이를 뜨는 과정에서 물의 성질은 색감과 내구성을 결정짓는다. 전주천과 만경강 수계는 노령산맥을 이루는 화강암 계열 암석을 거치며 철분 등 불필요한 미네랄 성분이 감소하는 특징을 보인다. 철분 함량이 낮은 물은 종이 변색을 줄이고 밝은 색을 유지하는 데 유리해 전주 한지가 오랫동안 ‘곱고 질긴 종이’로 평가받는 배경이 됐다.
그러나 자연 조건만으로 생산 중심지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전북, 특히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설치된 행정 중심지이자 경제·문화 거점이었다. 행정 문서와 기록, 출판에 필요한 종이 수요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국가는 필요한 종이를 확보하기 위해 전주 지역 생산을 관리했다. 전주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설치됐던 점, 왕실 부채 생산을 담당했던 선자청이 운영됐던 사실도 종이 수요를 꾸준히 유지한 배경으로 꼽힌다. 도시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권력과 문화가 집중된 생산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 같은 행정 수요는 농업 구조와 맞물리며 한지 생산을 생활 산업으로 확산시키는 요인이 됐다. 전북은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벼농사가 활발했고 겨울철 농한기에는 활용 가능한 노동력이 풍부했다. 농민들은 농사와 병행해 종이 생산에 참여했고 이는 특정 장인 집단 중심이 아닌 마을 단위 산업 형태로 발전했다. 원료 재배와 생산, 소비가 동일 공간 안에서 이어지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한지는 지역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기반은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값싼 수입 닥나무 유입으로 지역 재배가 위축되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수질 관리 비용이 증가하면서 생산 환경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 한 공간 안에서 이어지던 원료 재배와 생산, 소비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자연과 산업, 생활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던 구조가 점차 분리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윤 교수는 한지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원료 공급을 넘어 문화적 수요 기반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주시와 한국전통문화전당 한지산업지원센터가 닥나무 재배지를 확대하고 장인들에게 원료를 공급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며 “전주 장인들이 생산한 한지가 궁궐과 종묘 보수에 활용되는 것처럼 공공 수요 기반도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이어 “앞으로는 전주가 전통문화의 중심 도시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지 수요를 획기적으로 늘릴 문화생태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며 “전통 창호 개발, 출판·미술 창작 지원, 체험 관광과 이벤트 활성화 등이 한지 산업과 문화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조건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전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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