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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미륵사지 복원

삼국유사 무왕(武王· AD 600-641)조에는 미륵사지(사적 150호)의 창건설화가 전한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현재의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이 말을 듣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곧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런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이같은 설화가 깃든 익산 미륵사지는 미륵의 출현을 3탑 3금당식 가람 배치로 구체화한 호국사찰이다. 미륵신앙은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미륵사의 창건은 왕권 강화와 함께 백성들에게 희망을 심어줘 정신적 단결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미륵부처가 이승에서 3번 설법을 마친후 극락세계로 화한다 하여 3금당(金堂·대웅전이 3개)이 되었고 그 앞에 하나씩의 탑을 세워 3탑이 되었다. 대개의 사찰이 1탑 1금당이지만 미륵사는 3개의 절이 하나가 된 경우여서 3원(院) 1가람 양식이다.

 

원래 이곳은 가운데 대규모의 목조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의 석탑을 세웠다. 중앙 목탑은 사라지고 동탑은 1993년 복원됐다. 자세히 보면 색깔이 다른 돌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동탑에 쓰였던 실제 돌이다.

 

서탑(국보 11호)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탑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1997년 해체 복원작업에 들어가기 전, 6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었고 한쪽 면은 일제때 시멘트를 발라 놓아 흉한 모습이었다. 원래는 9층이었으며 백제 초기 목조탑을 돌로 정교하게 깎아 놓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을 보여준다. 국내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는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폐사되고 절터와 석탑, 당간지주만 남았다.

 

그런데 복원 10년이 되어가나 아직도 사각의 감옥에 갇힌 모습이다. 더우기 복원작업이 지지부진해 복원 마무리가 2008년에서 2015년으로 늘어지고, 예산도 80억원에 70억원이 더해졌다. 마침 문화재 발굴과 관련, 비리가 드러난 후여서 개운치 않은 느낌이다.

 

전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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