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기고] 섬진댐 수몰민들의 한숨소리 - 최기춘

최기춘(임실군 전 기획감사실장)

 

친구들이 나를 수몰이이라 놀려대지만 내 고향 운암은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섬진강 물줄기 따라 마을을 이루어 수리안전답인 농토는 비옥하고 자연 경관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먹고 살기가 넉넉하였다. 인심 또한 순박하고 자손들 교육도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인 1926년 남한에서는 최초로 수력발전과 농업용수 확보를 목적으로 운암제가 축조 되어 하운암 일부가 물에 잠겼다. 그 뒤 1930년대 2차 댐을 축조 하려고 강제적으로 헐값에 용지를 사들이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하던 중 일본의 패망으로 2차댐 공사가 중단되었다. 우리고장 운암사람들은 일본패망 과 더불어 댐 공사까지 중단되어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5.16혁명정부에서 댐을 축조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용지매수 한 것을 빌미로 용지보상도 하지 않고 부안군 계화도 와 경기도 시흥군 반월 폐 염전 간척지에 이주시킬 계획으로 이농 보상만 10여년 에 걸쳐 여덟 번에 나누어 지급하고 공사를 강행하였다. 1965년 댐을 준공하기에 이르렀으나 기술부족과 공사를 서둘면서 배수갑문을 설치하지 않아 장마기에 물이 계속 불어나도 수위를 조절 할 수 없었다. 운암사람들은 살던 집을 철거도 못한 채 가재도구만 대충 챙겨 불어나는 물에 쫓겨 전쟁 피난민처럼 35사단 장병들의 도움으로 마을 뒷산에 설치한 야전 천막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객지로 뿔뿔이 떠나고 형편이 다소 괜찮은 사람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현재의 운암소재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머지사람들은 살던 동네 뒷산에 임시 임시방편으로 움막처럼 집을 짓고 사아야 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수몰민들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보상을 여러 번 받은 걸로 알지만 한 번에 목돈으로 받아야할 보상금을 장기간에 나눠서 받으니 푼돈이 되어 버려 살림에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한 게 사실이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사 준비는커녕 이사 갈 곳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에 물을 채워 쫓겨난 수몰피해민들의 처참한 정경을 상상하면 도저히 이해 할 수없는 처사였다. 학교도 옮기지 못한 상태여서 학생들은 나무그늘이나 마을의 모정 또는 정자 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의 사회 상황에서 그러한 일들이 전개되었다면 아마 폭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의 시대상은 현재와는 많이 달랐다. 우선 댐 공사장도 국토건설단원들이 동원되어 일을 하다 보니 공사감독들이 총을 메고 공사감독을 한다는 소문이 날정도로 사회분위기가 일반 국민들을 주눅 들게 하여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에 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나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고향인 운암면사무소에서 근무 하면서 고향을 등지고 객지를 떠돌면서 살아가는 고달픈 실향민들과 오갈 데 없어 마을 뒷산에 움막처럼 집을 짓고 물에 잠긴 전답에 물이 빠질 때 보리나 수수농사를 지어 연명하는 수몰 피해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퍽 가슴 아팠다. 특히 추석 무렵이면 조상들의 묘소에서 잔디를 부여잡고 대성 통곡을 하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신세타령을 하는 사람들을 출장을 오가다 보면 나도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었다. 비록 공무원 생활은 하고 있지만 정부의 잘못된 행정을 많이 원망 했었다. 계화도 간척지 공사는 댐 준공 뒤 10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막상 계화도 간척지가 준공되었으나 10여 년 간 농사지을 땅도 없고 일자리도 없어 정부에서 받은 이농 보상금 은 그간의 생계비로 다 써버리고 이주증권도 대부분 헐값에 팔아 버린 상태였다. 계화도로 이사하여 정착하기가 쉽지 않아 2,000여세대중 300세대정도만 계화도에 이주하고 나머지 세대는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또 일부는 운암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그런데 나라의 물 사정이 어렵게 되자 섬진댐 주변을 재개발 하여 저수량을 늘리려고 수몰선내에서 거주하는 수몰피해민들을 다시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좋은 제목을 부쳐 재개발 운운하지만 사실은 댐을 막으면서 배수갑문을 설치하지 않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차오르는 물에 쫒기는 수몰민들의 집단 이주단지를 급하게 지정하다보니 현재의 운암 소재지 에 이주단지를 조성하여 면사무소를 비롯한 각종 정부기관을 이전하고 일부 주민들도 이전시켰다. 그러나 1969년 큰비가 내리자 정부에서 지정하여 이주시킨 운암면소재가 물에 잠겨버렸다. 그 뒤 다시 측량을 한 결과 정부의 실책으로 홍수위선 내에 이주단지를 지정한 사실이 밝혀져 댐의 정상수위는 196.5m 인데 5m를 낮추어 191.5m 까지만 물을 채워 운영했었다. 그러다가 섬진댐 주변을 재개발 한다는 미명아래 수몰민들을 다시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전력과 농업용수 확보라는 미명 아래 우리고향 운암면이 희생양이 되었다. 우리고향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용지를 매수한 진안용담댐은 나라가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댐을 축조하면서 일제강점기 에 매수한 토지를 무상으로 원소유자들에게 되돌려 준 뒤 정부에서 다시 매수하여 댐을 축조하면서 이주대책도 철저하게 수립하여 이주시키고 피해보상도 넉넉히 받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섬진댐 수몰민들은 과연 정부의 처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부의 관계자들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헤아려 봐야 할 일이다. 나는 임실군청에서 근무하면서 운암 수몰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 하기위해 군수님들을 모시고 정부의 관계부처를 자주 방문 하였었다. 그러나 현재 중앙부처에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들이 40여년이 지난 정부의 잘못과 시행착오를 바로잡기에는 어려운 일이어서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지난 추석 성묫길에 만난 고향 어른들은 불만과 시름에 밤잠을 못 이루고 앞날을 크게 걱정들을 하셨다. 정부의 실책으로 우리세대 잘못살고 고생한일도 억울하고 가난을 대물림 까지 해서 자손들 볼 면목도 없는데 또 고향을 떠나라하니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씀들이었다, 보상이나 넉넉히 주려는지 모르겠다. 보상을 많이 받으려면 떼법이 최고라는데 노인들만 살고 있어 떼를 쓸 힘도 없다고 한탄하는 말을 듣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정부 관계부처의 일개 실무자나 관계 공무원들의 의지만으로는 운암 수몰민들의 한을 풀어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정부에서는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철저한 이주대책과 완전하고 흡족한 보상으로 ·섬진댐 수몰민들의 40여년의 한을 봄눈 녹듯이 녹여 주었으면 한다.

 

/최기춘(임실군 전 기획감사실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문화일반[안성덕 시인의 ‘풍경’] 모닥불

사건·사고정읍서 외국인 근로자 폭행 신고⋯경찰 조사 중

금융·증권李대통령 “금융그룹, 돌아가면서 회장·은행장 10년·20년씩 해먹는 모양”

사건·사고고창서 방수 작업 감독하던 40대 추락해 부상

사람들한국 연극계의 거목, 배우 윤석화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