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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체육 비사] ⑪김만진 전 전주고 농구감독

오합지졸 갈고닦아 전북농구 기둥으로…전국우승 13번·27연승 '기염'

사람은 살아가면서 우연한 기회에 인생행로가 확 바뀌는 경우가 많다.

 

마치 나비 한마리가 베이징에서 한번 펄럭인 날갯짓이 언젠가 남미에 거대한 허리케인을 불러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김만진(56) 전 전주고 농구감독의 삶에서도 하나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돼 이미 떠났던 농구계에 되돌아오고, 결국 전북 농구가 전국무대를 호령하게 된다. <편집자 주>

 

91년 3월 서울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서 식품구매 직원으로 일하던 김만진 대리에게 평소 일면식도 없던 전주고 선배 한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전북일보에서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특히 체육관련 베테랑 기자였던 임기환씨(작고)였다.

 

"선배들이 후원을 할테니 전주고 농구를 살리고, 전북농구를 곧추세워달라"는 주문이었다.

 

농구를 그만둔지 7년이나 지났으나 후배의 능력을 높이 한 한 선배가 모교 감독으로 모시기(?) 위해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전주고 농구부는 당시 창단 70년이 다 됐으나, 전국대회에서 우승 한번 하지 못한 약체팀이었다.

 

전국대회는 커녕, 전북 선발팀으로 뽑히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김만진은 전주고 농구감독을 지냈던 부친(김용근·작고)의 영향으로 중학교때 농구를 시작, 전주고∼연세대∼현대에서 농구선수로 뛰다, 일반 사원으로 입사해 주로 식료품 구매 업무를 담당하던 때였다.

 

결심이 선 김만진은 선배의 손을 굳게잡고 "농구를 살리겠다"고 약속한 뒤 얼마안돼 전주고 농구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91년말 부임한 김 감독은 2006년까지 전주고에서 농구감독으로 뛰면서 전국대회에서 13번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2006년엔 전국 남고팀중 전무후무한 27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99년부터 2001년까지 전주고는 전국체전에서 3연패의 대위업도 달성한다.

 

60년대와 70년대 전국을 호령하던 전북농구가 김만진 감독으로 인해 바야흐로 부활한 것이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6년말 농구명문 연세대 감독으로 옮긴다.

 

"지방 농구를 살리려면 좋은 선수를 확보해야 한다"고 확신한 김 감독은 고향에 오자마자 도내 초중학교를 돌아다니며 선수 발굴에 나섰다.

 

용산고, 휘문고, 경복고 등 서울지역 농구 명문학교에서 우수한 중학생 선수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는 풍토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선수 유출을 막기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녔다.

 

운전하면서 김만진 감독은 자주 불법 주정차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키가 훌쩍 큰 학생을 보면 무작정 차를 세워놓고 인적사항과 연락처를 적어 바로 그날 학교나 집에 찾아가 "선수로 키우자"며 설득을 거듭했다.

 

방학때면 고창부터 무주까지 모두 더듬고 다녔다.

 

그렇게 발굴한 선수중 하나가 바로 현재 국가대표인 조성민이다.

 

조성민이 학교에서 축구하는 모습 하나만 보고 농구선수로 입문시켜 마침내 국가대표 선수로 만든 김 감독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그가 발굴해 길러낸 프로농구 선수가 10여명에 달한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일뿐 감독을 맡은지 3년동안 수십번의 경기를 했으나, 단 1승에 그치는 등 초반엔 어려움이 많았다.

 

중산층 삶이 보장된 서울의 버젓한 직장을 버리고, 아내를 설득해 고향인 전주에 내려왔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트에서 선수들과 함께 부대끼며 성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수한 자원을 확보하면서 그는 차츰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도 체육회 등 주위에선 그의 성실함에 깊은 신뢰를 보내줬다.

 

만 15년동안 전주고 농구 감독으로 있을때 주위의 질시로 세번이나 쫓겨날 뻔하고, 아내가 발레학원을 운영하면서 15년간 생활비를 댄 일화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김 감독은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 "다 지나간 일"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연세대 농구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선수들에게 오전엔 수업하고 방과후에만 훈련을 실시했다.

 

시험때마다 전국 어디에서든 선수들이 답안지에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고만 써놓고 나올 수 밖에 없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서다.

 

처음엔 저항이 거셌지만 결국 지금은 대학농구 선수들은 당연히 수업을 받는게 상식으로 됐다.

 

지도자를 은퇴하면 일본 동경에 있는 음식학원에서 정식으로 배워 국내에서 '일식집'을 하고 싶다는 김만진 감독의 또다른 꿈이 실현될지 궁금하다.

 

위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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