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 불모지서 신화 일군 '오뚝이'
전병관, 이배영, 장미란으로 이어지는 전북 출신 역사들은 전국을 넘어 세계를 제패해 왔다.
하지만 이들보다 한 세대 전에 전북은 역도의 불모지였고, 맨땅에서 신화를 일궈내기 위해 피땀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1964년 동경 올림픽때 역도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양무신, 1968년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홍장수(56kg급), 김용훈(75kg급· 현 하이트감독)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어려운 집안 환경을 이겨내며 오뚝이 처럼 일어나 신화를 창조해냈던 홍장수씨(64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되돌아본다.
익산시 왕궁면 궁평리에서 태어난 홍장수는 단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훗날 중학교를 야간으로 졸업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한창 배워야 할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그는 전주시 '경동옥'이란 음식점에서, 그리고 '오복정'이란 요정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생활했다.
오복정은 60년대 중반 종업원이 무려 50여명이나 될 만큼 잘 나가는 곳이었다.
전주시 한옥마을 근처에서 생활하던 그는 바로 옆집에 살던 양무신 선수가 역도 국가대표로 동경 올림픽에 출전해(5위) 신문에 크게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운동선수의 꿈을 키우게 된다.
"스스로 생각해보니 먹고 자는것 외엔 아무런 꿈이 없이 산다는 걸 문득 깨닫고 뭔가 해보려고 돌파구룰 찾은게 역도였어요"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던 이사가 말단 공무원을 지낼때 화장실에 있는 쥐와 광에 있는 쥐를 보고 자신도 광에 있는 쥐가 되겠다며 큰 꿈을 꾸고 생활태도를 확 바꾼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바벨을 들기위해 전주시 고사동 종합체육관에 입문한 그는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졌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음식점에서 연탄불을 갈고 남부시장에 뛰어가 물건을 사오는 과정에서 그의 체력은 날로 향상됐고, 별을 보며 운동을 했다.
남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그는 목숨을 걸다시피하며 노력한 결과, 그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전국체전에 전북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당시 전국체전에 도 대표로 출전하는 것은 요즘 잣대로 보면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제코스를 밟지 않은 사회 최하층이었다.
요정에서 심부름하던 소년이 1968년 제49회 전국체전에서 꿈에도 그리던 금메달을 따내자
당시 전북일보 김철규·이종세 기자 등이 그의 감동적인 일화를 지면에 소개하면서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제대로 배우지 않고도 전국무대를 석권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오뎅을 팔아가며 가족을 꾸리고, 운동을 해야했던 그는 19세의 나이에 당돌하게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것이다.
국가대표가 돼야만 선수로서 제대로 꽃피울 수 있다는 심정에서였다.
잘못되면 선수 생활을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으나, 며칠 후 청와대 비서실에선 그를 올라오라고 해 서울종로에 있는 함흥냉면 사장과 결연을 맺어주며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한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채 낙향, 전주시청 운동부에 취직한다.
당시 김준성 역도사범과 유평수 사무처장의 배려로 전주시청에 들어간 그는 태극마크의 꿈이 좌절됐지만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그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전북대표 코치, 그리고 1992년부터 만 6년간 도 역도협회 전무이사를 지냈다.
현재도 그는 도 역도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순회코치를 할 때의 일이다.
1983년 진안마령중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전병관을 처음 접하고 한눈에 대성할 그릇임을 직감하고 정성을 다해 지도한다.
그는 "(전병관은) 어린 나이였으나, 제맘대로 하지 않고 코치의 지도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유연성이 뛰어났다"고 회고했다.
어찌보면 시골 소년 전병관으로선 제대로 된 역도 지도자를 만난게 큰 행운이었다.
훗날 전병관이 올림픽을 휩쓸며 많은 돈을 모으면서 진안과 김제 등에 많은 논을 사 자기 부모님에게 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때 그를 지도했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흡족했었다고 한다.
아시아 역도선수권대회나 세계주니어 역도선수권대회때 홍장수가 한국대표단 단장을 맡아 떠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작은 거인 전병관을 지도한 인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전무이사를 맡고 있을때 순창북중에 다니던 이배영과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그가 또다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을 지켜본 일화도 있다.
2001년말 공직을 퇴임한 그는 다음해 전주시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보기좋게 낙선한다.
공직에서의 조기 퇴직,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선거 실패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50대 후반의 나이에 부끄러움을 잊은채 보험 회사에 들어갔다.
영업사원으로 뛰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위해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또다시 편한길을 마다하고 부동산 중개 업무를 배웠다.
자신이 어렵게 살아왔기에 소리없이 선행을 베푸는 그의 행실이 알려지면서 전주시민의 장, 전북일보 주최 '전북대상' 등이 주어졌다.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나를 바라보고, 지원해준 가족을 생각했다"는 그는 "어렵게 살아오면서 많은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젠 역도 후배를 육성하면서 제대로 선배 노릇을 하고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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