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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저수지가 아니었다고요

▲ 김 병 하

김제향토사연구회장

벽골제는 김제시민의 자부심이며, 나아가 우리의 과학적인 영농을 고대로 넓힌 한국 농경역사의 자랑이다. 그런데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김제·만경평야가 오늘날처럼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지대로 바뀐 것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들과 수리조합의 개간사업 때문이었고, 19세기까지만 해도 수리시설이 전혀 없었으며, 갈대 무성한 황무지였던 곳이 곡창지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라고 주장했다.(전북일보 1월 4일자 보도)

 

과연 김 교수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맞는 말일까.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시대 흘해 이사금 21년(서기 330년)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을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못지(池)자를 써서 벽골지라고 적고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있는 비문을 보자.…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 95복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김제·만경평야는 백제 때부터 벽골제를 쌓고 도랑을 만들어 농업용수를 공급해서 비옥한 농토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도 이같은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태종 8년(1408년) 9월 17일자를 보자.전라도 병마 도절제사 강사덕이 편의 두어 조목을 올렸다."김제군의 벽골제는 둑 밑이 아득하게 넓고 비옥하며, 제언의 고기가 산 같이 견고하고 튼튼하니, 비옵건대, 예전과 같이 수축하고 혁파한 사사 노비로 둔전을 경작하게 하여 국용에 보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도 벽골제는 둑이고, 둑 밑이 아득하게 넓고 비옥하다고 적고 있다.

 

세종 3년(1421년) 1월 16일 기록에는, 박초가 글을 올려 "김제군의 벽골제는 신라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실로 우리 동방의 큰 못 이온데(중략)"라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도 벽골제가 저수지이고, 벽골제 아래에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가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고, 벽골제는 동방의 큰 못이라고 했다.

 

기록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또 바닷물이 수시로 들어왔고 갈대가 무성한 갯벌이었다면 사람이 살수가 없었을 터인데, 과연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 벽골제 둑 아래 서해 바다 쪽으로 많은 마을들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 모두 12대째에서 18대째 살고 있다.

 

벽골제 북쪽인 월촌면 일부와 성덕면, 백산면, 만경현 일부는 신평천의 물로 농사를 지었다.「일본서기」에도 기록이 있지만 신평천의 물도 서해바다로 흘러들어 갔는데, 만조 시에는 물이 서해바다로 흘러가지 못해 물이 불어나서 수면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 물로 농사를 지었다. 죽산면 해창의 수문이나 수교의 배수갑문이 가물 때는 그 수문을 잠그고 비가 많이 올 때는 그 수문을 열어놓는다. 이와 같이 김제는 천혜의 농경지였다.

 

이 교수가 곡창지대로 변한 것은 1910년 이후, 일본인 지주와 수리조합의 개간사업 때문이라고 주장 한 말이 고증되지 않은 주장이 아닌가? 또 이 교수는 서해안에서 6~7km 떨어진 벽골제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갯벌로, 갈대 무성한 황무지이고, 벽골제의 둑은 저수지의 둑이 아니라 바닷물의 침입을 막은 방조제였다고 주장도 맞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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