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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삼암 표영삼 선생 "진정한 동학정신은 끊임없이 삶의 틀 바꾸는 것"

농민군 유족 조사 중추 역할 참여자 명예회복 큰 공 세워 / 세상 떠나며 장기기증까지 천도교 인간사랑 몸소 실천

   
▲ 고 표영삼 선생(왼쪽)이 생전에 경북 김천을 찾아 마을 주민으로부터 동학 지도자의 활동상을 듣고 있다.
 

필자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심사담당관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등록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100년이 훨씬 지난 일이어서 그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임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매우 심도 있게 진행했다. 그러나 심의위원회 직원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았다. 다시 말해 전문가의 시선과 관점이 필요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삼암 표영삼 선생을 처음 뵙게 됐다. 신청서에 나와 있는 몇 줄 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표영삼 선생을 모시고 현지 사실조사를 실시했다. 유족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증언했다. 그러나 울분이 앞서 설명이 조리 있게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증언내용은 조각조각으로 구성됐다. 바로 이때 표 선생의 진가가 발휘된다. 그는 몇 개의 조각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듯이 증언을 기초삼아 증언의 앞뒤 관계를 명확하게 짚어준다. 당시 동학교단의 상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해준다. 표영삼 선생의 분석으로 묻혀있던 역사가 비로소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돼 국가적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에는 바로 표영삼선생의 공이 크다. 조사는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경기도 용인, 강원도 인제와 홍천, 경상도 청송과 영양, 경상도 상주와 예천, 충청도 태안과 서산 그리고 예산, 충청도 보은과 영동, 전라도 전주와 임실 그리고 남원, 전라도 정읍과 고창 그리고 부안과 김제, 전라도 곡성과 화순 그리고 보성, 전라도 장흥과 강진 그리고 무안, 이 모든 곳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족에 대한 조사에서 표 선생은 늘 함께 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표 선생과 조사를 함께 다니면서 이분의 인간적 면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교 교인으로서 그리고 동학연구가로서 생각과 행동,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이셨다. 동학과 천도교가 추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선생은 평소 부인과 아들에게 존대를 했다고 한다. 아침밥도 평생 선생이 담당했다고 한다. 물론 조사과정에서 거의 손자뻘에 해당하는 필자에게도 항상 존대해 주셨다. 그리고 가끔 ‘진정한 동학정신은 끊임없이 삶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필자는 표 선생과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조사를 같이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8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필자는 장례식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장기를 기증하고 공식적인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선생은 돌아가시면서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던 것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 [고 표영삼 선생 생애와 활동] 천도교 신자이자 연구가…'다시 개벽' 강조

   

표영삼선생은 1925년 12월 17일 평안북도 구성군 오봉면 봉덕동에서 부친 표원묵과 모친 김안화 사이에서 출생했다. 원래 이름은 ‘表應麟’이었으나 나중에 ‘표응삼’으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표영삼으로 개명했다. 천도교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부 표춘학 덕분이었다. 조부가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1900년이었다. 선생의 집안은 3대를 잇는 계대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가도 독실한 천도교인 집안이었다. 자연스럽게 천도교인으로 성장했다. 1950년 6월 25일 남과 북이 전쟁으로 소용돌이 칠 때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전쟁이 한창 중인 1951년 선생은 부안군 줄포면사무소에서 임시로 근무했다. 이곳에서 그는 배급을 담당했는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족 수를 확인하는 등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주인 없는 시신을 직접 묘를 만들어 주는 등 주민들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휴전에 앞서 1952년 12월경 부안에서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천도교청년회를 부활하는 데도 적극 노력했다. 1952년 12월 24일에 부활된 천도교청년회에서 문화부장 겸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된 것을 비롯해 휴전 이후 1953년 8월 개최된 제1차 확대위원회에서도 총무부장 겸 중앙위원으로 선임돼 청년회 활성화에 기여했다. 1961년 이후 10여년 동안 노동현장에 투신해 체신노조, YH노조 설립 등을 지도했다. 노동현장에서 물러난 뒤 1977년 다시 천도교로 돌아와 신인간사 주간, 교화관장, 상주선도사, 교서(교사)편찬위원 및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남은 일생을 천도교 연구에 매진했다. 저술활동으로는 주간으로 활동했던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에 많은 기고를 통해 이뤄졌다. 설교를 비롯해 사적지 답사기, 논문 등 130여 편이 실렸으며, 저서는 〈동학 1〉 〈동학 2〉가 있다. 〈동학 3〉은 유작이 됐다. 그가 천도교와 관련해 남긴 연구성과는 크게 교리연구, 교사연구, 동학유적지 조사 등 세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동학유적지의 조사와 정리는 표영삼선생이 독자적으로 구축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 성주현, 〈표영삼 선생의 생애와 동학유적지조사〉, 2009 참조)

 

이같은 공로로 표 선생은 정읍시가 제정한 올 ‘동학농민혁명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표영삼 선생은 동학조직과 사상등에 대한 연구자들과 동학의 연결고리가 됐으며 유적지와 후손들의 발굴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표영삼 선생이 남긴 교훈

 

표영삼 선생은 그의 저서 〈동학 1〉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중적인 세계관을 부정한다.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감성계와 초감성계로 나누어보는 이원적 관점 자체를 거부한다. 때문에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모든 시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동학의 꿈이 돼 버렸다. 동학의 발자취는 이제 겨우 100년이 좀 넘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신분제의 타파와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거, 잘못된 나라는 바로잡는데 30만이라는 귀중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삶의 틀을 바꾸자는 ‘다시 개벽’을 위한 희생이었다. 좁은 땅에서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냈다면, 보통의 신념집단이라면 자취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은 동학의 꿈이 모든 사람들의 지향하려는 꿈과 통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현실의 모순이 자각되는 한, 동학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표영삼 선생은 삶의 틀을 바꾸는 다시 개벽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삼았다. 선생이 제시한 이러한 가치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방향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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