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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뜨거운 감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10년간 끌어온 논쟁…기념재단 중심 기념일 결론 내야"

2004년부터 논의…지역 이해관계 깔려 무산·갈등 반복 / 고창 '무장기포일' 주장·정읍 '황토현전승일' 가장 첨예 / 결론 못내고 또 해넘길판…단체들 어떤 결과든 수용해야

▲ 지난달 27일 대전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서 김석태(오른쪽)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이 참석자들에게 기념일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은 이제 남북통일보다 어려운 일이 돼버렸네요.”

 

지난달 27일 대전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한 한 관계자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소모적인 논쟁에 종착점을 찾을 수 없다는 푸념이었지만,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말이기도 하다.

 

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주년)을 맞아 국가기념일 제정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끝내 무산됐다. 기념일 제정에 있어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합의는 쉽지 않다.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사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은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날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정말 창피하다. 동학농민혁명과 무관한 사람들이 이를 본다면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면서 “미완의 혁명을 완성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부족한 데 기념일 제정 문제만 나오면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이 지겹다”며 자조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날 기념일 제정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는 기념일 제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을 더욱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는 사실이다.

 

△소모적 논쟁만 10년 째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 제정 논의는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기념일 제정 토론회가 지난 2004년 6~11월까지 3차례 열렸지만, 결론을 맺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이듬해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심의위에서 기념일 제정을 위한 심의를 8차례 개최했지만, 격론 끝에 다시 무산됐다. 당시 관련 단체들은 표면적으로 기념일 제정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결정을 미뤘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각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가 깔려있어 무산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때부터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됐다.

 

이후 3년 동안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도 뜨거운 감자를 손대기 싫어했고, 총대를 메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전의 계기는 있었다. 지난 201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출범하면서다. 기념재단은 정읍 이전 등 당장 닥친 현안을 해결한 뒤 곧바로 기념일 제정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재단은 언론·문화·법조·학계 인사 등 23명으로 기념일 제정을 맡을 추진위원 선정해 2개월 동안 활동했지만 끝내 합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지역 간 갈등의 골만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기념재단은 지난 2012년 국민여론조사로 기념일을 제정하자고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고, 재단은 ‘기념일 제정 잠정 중단’ 결정을 내렸다.

 

이후 기념재단은 첨예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정읍과 고창의 관련단체 관계자들과 합의점을 찾으려 했지만, 동학 2주갑(120주년) 기념대회 이후 재논의키로 결정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들은 2주갑을 맞은 올해는 기념일 제정이 이뤄지길 기원했다. 지역 간 갈등을 풀고 대승적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란 반전 드라마를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제정 토론회’에서는 고성과 욕설이 오가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기념일 제정 주요 제안일

▲ 지난 10월 열린 동학농민혁명 2주갑 기념 학술대회.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기념일 후보군이 제안됐다. 현재 △고부봉기일(2월14일·정읍) △특별법공포일(3월5일·유족회) △무장기포일(4월25일·고창) △황토현전승일(5월11일·정읍) △전주성입성일(5월31일·전주) △2차 봉기일(10월11일) △우금치전투일(12월5일·공주) 등이 거론된다.

 

이 가운데 가장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곳은 정읍과 고창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흑역사(黑歷史)’는 무장기포일을 주장하는 고창과 황토현전승일을 주장하는 정읍의 해묵은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장기포일은 농민군이 정식으로 포고문(결의문)을 발표하고 전국 봉기를 선포했던 날이다. 고창지역 관련 단체들은 무장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표명했고 이를 통해 동학교도나 일부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혁명의 전국화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포고문 발표를 계기로 조직적 대오를 갖춰 혁명이 시작됐다. 학계는 고창 무장의 봉기를 계기로 국지적 농민항쟁에서 전국적 농민전쟁으로 전환했다고 본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역사성·상징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고창지역 단체들은 고부봉기를 최초의 봉기로 보는 시각에 대해 민란 수준이었으며 곧 실패했기 때문에 무장기포일의 상징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정읍지역 관련 단체들이 주장하는 황토현전승일은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날이다. 전라감영군 등 연합부대 2400명을 거의 전멸에 이르게 한 전과는 동학농민혁명기간 중 최대의 승전이었다. 이 승리에서 자신감을 얻은 동학군들은 호남의 전 지역으로 봉기를 확대시켰다. 황토현전투가 최초의 전쟁 양상을 띤 전투로서, 관군을 격파해 혁명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것이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삼아야 한다는 쪽의 주장이다. 정읍지역 단체들은 최초의 전투일이자 승전일로 역사적 상징성과 대표성은 물론, 무장기포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에서도 앞서기 때문에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념재단이 종지부 찍어야

 

지난달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서는 기념일 제정 절차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첫 번째 안으로 ‘기념재단, 유족회, 천도교령’ 3자 협의체가 결정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결론이 나지 않는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대표성을 가진 단체들이 결정을 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반대 의견에 부딪혀 끝내 채택되지 못했고 내년 2월에 관련 단체들이 모두 모여 결정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기념재단도 이에 맞춰 오는 2015년까지 공청회 등을 통해 다시 의견을 모은다는 계획을 내놨다. 10년 동안 이어졌던 논쟁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결정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기념일과 관련된 논쟁은 그동안 충분히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논의된 만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념재단이 있어야 하고, 관련 단체들은 어떤 결정이든지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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