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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전남 장흥] 농민군 2000명 사망 '최후 격전지' 새롭게 기려

전투 훈련 역사 품은 푸조나무 수령 400살 / 국가사적지 석대들에 연말 기념공원 준공 / 패전 후 소년 뱃사공이 500여명 도피 도와

   
▲ 지난 18일 장흥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이정신 회장이 동학농민혁명 최후 격전이 벌어진 석대들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올 연초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매년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관으로 치르는 합동제례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농민군들이 모두 같은 날 처형됐기 때문이다.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분만 15명. 동학농민혁명에서 치열했던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일본군과 농민군 사이 최후 사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장흥이다. 그럼에도 장흥은 한동안 혁명연구사의 변방에 있었다. 최근 혁명 유족과 향토 사학계의 줄기찬 노력 덕분에 장흥지역 혁명의 발자취가 점차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3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들의 최후 전투지인 석대들이 국가사적지로 지정되고, 오는 12월에는 기념공원도 준공을 앞두고 있다.

 

장흥지역은 우금치 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안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농민군이 최후까지 항전한 곳이다. 당시 장흥지역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패배로 위축된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항전했다.

 

반외세 반봉건의 정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장흥 농민군의 시대 정신은 현재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낯설기만 하다.

 

△장흥지역 동학 유적

 

장흥지역 동학 지도자의 활동 반경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크게 용산면, 관산읍, 회진과 덕도, 대덕읍, 유치면 등에 집중돼 있다.

 

용산면 도르뫼 들판에는 이방언이 농민군을 집결해 훈련을 했던 곳이며, 부용사는 관군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긴 농민군의 은신처이다.

 

관산읍에 위치한 옥산전투지는 솔치재를 넘어오는 일본군과 농민군이 죽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남송마을 무연고 묘지는 옥산전투 중 죽은 이름 없는 수백기의 농민군이 묻혀 있는 곳이다.

 

회진과 덕도의 회령성은 이인환이 이끄는 농민군이 무혈입성, 화포와 조총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한 곳이다.

 

대덕읍과 유치면에는 월정전투지, 농민군 야전사령부가 있던 연지리가 있다.

 

또한 현재의 유치면 조양리와 신풍리 일대는 영암에서 넘어온 일본군에 맞서 농민군이 항전한 곳이다.

 

△이방언과 푸조나무

   
▲ 동학농민군이 전투를 위해 집결했던 푸조나무.

장흥읍 용산면 어산리에 위치한 푸조나무(천연기념물)는 느릅나무과로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 밑에 120년 전 농민군이 집결했다.

 

장흥의 동학지도자 이방언을 필두로 모인 농민군은 이곳에서 전투를 위해 집결하거나 훈련을 했다.

 

이방언은 당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로서 1888년에는 전라감사와 담판을 지어 무리한 조세를 시정하는 등 지역에서 높은 신망을 받았다.

 

이방언은 갑오년 전봉준의 무장기포 당시 이인환, 강봉수 등과 함께 장흥지역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 진영에 합류했다.

 

그는 장성 황룡전투를 지휘, 대승을 거두어 남도장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 석대들 전투 이후 체포되 장대(현 장흥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처형됐다.

 

옛 역사를 간직한 이 나무에서 예로부터 부락 주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국가의 안녕과 질병 없는 한 해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농민군도 더 나은 나라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전의를 불태웠을 것이다.

 

△석대들 전적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과 관군 간의 사투가 벌어진 전남 장흥군 ‘장흥석대들전적지’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제498호)으로 지정돼 있다.

 

석대들 전적지는 정읍황토현전적지(사적 제295호)와 공주우금치전적지(사적 제387호), 그리고 장성황룡전적지(사적 제406호)와 더불어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기 지정된 전적지와 비교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장흥읍 남외리에 위치한 석대들 전적지는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 3만명이 넘는 농민군이 참여해 항전을 계속하다 2000명 이상이 사망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다.

 

전투 현장인 석대들 벌판과 동학농민군이 깃발을 꽂았다고 전해지는 석대(石臺), 석대들 전투에서 사망한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영회당(사진)등 모두 3만5700㎡(52필지)가 국가사적이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동학농민 혁명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전투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다.

 

현재 남외리와 석대들판 사이 옛날 작은 석대가 있던 자리에는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소년 뱃사공 ‘농민군 살리다’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 강진과 석대들 인근 자울재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을 쫓아 한반도 최남단까지 내려왔다. 동학군은 몸을 숨겼고, 관군의 수색은 집요했다.

 

500명의 동학군이 좁은 섬 덕도에 숨었다. 관군의 수색망은 좁혀졌고, 농민군들은 생사의 기로에 섰다. 그때 소년 뱃사공이 돛배를 몰고 와 밤마다 조금씩 수를 나눠 동학군을 인근의 다른 섬으로 피신시켰다.

 

윤성도의 손자 윤병추씨(80)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목숨을 내걸고 쫓기던 동학군을 하루가 멀다하고 배에 태워 인근 섬으로 피신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윤병추씨는 “남도 끝까지 쫓긴 동학군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던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 중·고등학생용 교재 학교 보급, 자치단체 지원 조례 제정 추진

 

2004년 설립된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는 장흥지역 혁명 유적지 발굴 및 선양 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특히 직접 발로 뛰는 유적지 답사활동을 통해 ‘이야기 장흥동학농민혁명’이란 책자도 발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문충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여겨진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생생한 발자취를 찾아 헤맸다”며 “농민군 후손과 향토 사학계의 노력 덕에 석대들 전적지가 국가사적지로 인정 받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오는 12월이면 석대들 전적지 인근에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설립될 것이다”며 “이후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전남도와 장흥군 차원의 조례 제정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최근 중·고등학생용 교재를 일선 학교에 보급,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이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문충선 사무국장은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4.19의거,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정신적 뿌리”라며 “그 정신을 후대에 알릴 수 있도록 관련 교육 및 홍보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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