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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중국 태평천국운동 역사현장을 가다-②기념시설] 1951년 박물관 개관…봉기부터 난징 함락까지 '한눈에'

명·청시대 왕 머물던 곳 개조 유물 2800여점 소장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교류, 올 국내 첫 전시 / 집주인 40번 바뀐 총통부, 근대 역사박물관으로

▲ 난징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중국 난징=권혁일기자

장쑤성(江蘇省)의 성도 난징은 풍요로운 양쯔강 하류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이 도읍으로 삼았던 도시이고,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이 중화민국의 임시정부를 설치했던 도시다. 이 외에도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던 도시답게 고색창연한 멋이 가득하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금릉읍(金陵邑)이라 불렸으나 삼국시대 들어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건업(建業)이라고 개칭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초기에는 응천부(應天府)라 부르다가 후에 난징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때의 도시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난징은 그러나 화려한 이력 이면에 난징조약, 난징대학살과 같은 역사의 큰 아픔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새겨진 역사의 다양한 흔적들은 난징 곳곳에 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

 

태평천국운동 당시 태평천국의 수도가 바로 난징이었고, 이를 기념해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동학혁명 통해 만난 ‘태평천국’

 

중국 난징(南京)의 부자묘 서쪽에 있는 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는 1850년 태평천국 봉기부터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료가 전시돼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곳은 원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 전해 사용했던 오왕부(吳王府)였다. 이후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徐達)에게 주어져 정원으로 바뀌었다.

 

또 청대에는 건륭제가 이곳을 첨원이라 이름 짓고, 남행 때 머물었다. 태평천국 시대에는 동왕 양수청(楊秀淸)이 왕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주인이 수차례 바뀐 이 곳은 1951년, 태평천국 100주년을 맞아 중국 유일의 태평천국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박물관에는 당시 태평천국군이 사용하던 무기·의복, 주요 지도자의 행적, 태평천국군의 세력도를 그린 지도 등 2800여점에 달하는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특히 태평천국 관료 관복인 ‘단룡마괘(團龍馬掛)’, 태평천국이 인쇄한 ‘흠정사계조례(欽定士階條例)’ 등 희귀 원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은 2012년 교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두 민중운동의 학술 연구의 성과와 간행물·자료의 상호 교환, 학술대회 공동 추진 등을 추진해 왔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한 해인 올해 8월에는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를 통해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의 자료·유물이 국내에 처음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태평천국군이 함락한 난징

▲ 태평천국 당시 천왕 홍수전이 정사를 보던 집무실. 중국 난징=권혁일기자

난징시내에는 근대사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청나라 시대 양강 총독서, 태평천국의 천조궁전, 중화민국 임시정부 쑨원(孫文) 임시 대총통부, 국민정부 총통부 등으로 사용됐다. 그동안 집주인이 바뀐 것을 다 따지면 40번에 가깝다. 그만큼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곳이다.

 

총통부는 현재 근대사 역사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총통부는 건물과 정원으로 구분되고 앞쪽의 건물들은 청 때부터 있던 전통 건축들과 20세기에 지은 양식건축들로 이뤄져 있다.

 

건물로 들어서면 우측은 태평천국 당시 궁전으로 쓰였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천왕 홍수전의 집무실, 태평천국 100주년를 기린 기념비 등이 이곳이 옛 태평천국의 궁전 자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1851년 3월 홍수전이 이끄는 수십만의 태평천국군은 난징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열흘 후 훙수전은 천왕(天王)의 복장을 갖추고 정식으로 입성했다. 이후 11년간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홍수전이 1851년 1월 청조 타도와 평등한 지상천국 건설을 내걸고 1만여명의 추종자와 봉기한 이후 그의 사망과 함께 태평천국이 멸망하기까지 13년간, 무려 2000만명 이상이 전투와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

 

총통부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주인이 여럿 바뀌면서 태평천국의 화려했던 시대를 보여줄 유물이 다소 아쉬웠다. 1982년 총통부는 전국 중점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됐고, 2004년 국가 4A급 풍경구로 선정됐다.

 

● 장티에바오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 "중국 학계, 반청 기치 높게 평가, 1990년대 후반 연구 폭 넓어져"

“동학농민혁명에는 태평천국운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의식이 깊게 자리했습니다. 불합리한 사회체제 개혁에 앞서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이 동학농민군의 면면에 흘렀다고 봅니다.”

 

이달 14일 중국 현지에서 만난 장티에바오(張鐵寶·60)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은 중국의 대표적인 태평천국운동 전문가이다.

 

그는 낯선 이방인들의 질문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의 차가 식는 줄도 모른 채 성심껏 답변했다.

 

-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는 많은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동감합니다. 두 사건 모두 농민·소지주 등 피지배층이 주도가 된 민중운동입니다. 또한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당시 청나라와 조선이 이후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태평천국이 바꾸려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천왕 홍수전은 ‘반만흥한’의 기치를 내거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청나라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그는 또 봉건적 토지제도를 혁파하려 했고,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를 견지했습니다. 남녀평등 사상을 내세우는 등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 다른 길을 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지.

 

“태평천국은 시종일관 청나라에 반대했습니다. 청나라 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센 탓에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구 열강세력에 대해 정부와 함께 대응하려는 노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에 대한 변혁 보다 탐관오리 등 당시 지배층에 칼 끝을 겨눴습니다. 또한 외세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당시 정부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등 국가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일에 선을 그었습니다. 동학농민군에 깊게 자리한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태평천국이 몰락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지도부의 갈등과 반목이 심해지는 등 수면 아래 잠자던 내부모순이 태평천국을 결국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또 주요 구성원이 농민, 소지식인으로만 제한되면서 구현하려는 사상의 폭도 좁았습니다. 게다가 청 정부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애초 적게 걷던 세금이 많아지면서, 주 지지층인 농민들의 이탈이 가속화한 것도 몰락의 주요 원인입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싶습니까.

 

“시대별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습니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청나라 정부에 저항한 점이 높이 평가되면서 학계·정치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100주년인 1951년을 기점으로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학계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다만 문화대혁명기를 거치면서 태평천국의 역사적 의미·사상이 저평가됐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연구의 폭이 크게 넓어졌습니다. 이때부터 태평천국군과 반대편에 선 당시 청나라 정부의 입장, 대응전략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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