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지키던 영의정 이양원은 의주로 도망간 선조임금이 아예 요동 땅으로 떠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읊었다.
‘높으나 높은 나무에 날 권하여 올려두고/ 이 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았으면…’이른바 권상요목(勸上搖木), 즉 위로 오를 것을 권한 다음 나무를 흔들어 대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호남의 심정이 그와 다르지 않다.
1시간이면 서울에 간다는 말, 그 말은 오랜 세월 경기침체와 소외정책에 시달리던 우리 지역에 희망을 던져주는 꿈과 같은 말이었다. 그 꿈을 실현해주는 호남고속철도 1단계 사업이 올해 4월 마무리 되어 서울 용산역에서 익산역까지 운행시간이 49분이나 줄어들어 고작 66분 걸리게 된다.
2017년 완공예정인 2단계 사업까지 마무리되면, 목포까지는 1시간 45분이면 도착한다. 진정으로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에 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수도권중심정책과 일부 편향된 지역차별정책으로 인해 경제적·문화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되어 왔던 호남지역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그러나 이제 막 첫걸음을 떼려는 호남고속철도 사업에 잿물을 뿌리는 일이 벌어져 참으로 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 코레일이 지난 6일 난데없이 호남고속철의 22%를 서대전으로 경유토록 한다는 계획안을 내놓았고, 심지어 국토부에서는 확정단계라고 밝힌 것이다. 물론 대전 시민들의 바람과 코레일 측의 경제효과 기대를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호남고속철도를 어째서 추진하게 되었느냐이다.
애초 호남고속철도 건설은 국토균형 발전을 전제로 한 국민적 합의를 통해 도출한 결과물로서, 그간 끊임없는 논쟁과 토론을 통해 지금의 노선과 사업 단계를 확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서대전역의 경유라는 변수를 적용한다면, 서대전~계룡간 일반구간까지 겹치게 돼 용산에서 익산역까지 운행시간이 66분에서 111분으로 늘어나게 된다. 기존의 노선운행과 비교하면 고작 4분 앞당겨진 셈이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9조 여원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완공한 것이 고속철이 아니라 그야말로 ‘저속철’이라면 그 피 같은 세금은 무엇으로 보전할 것인가.
지난 2005년 호남고속철도 노선 확정당시에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천안~오송~익산 우회노선으로 확정이 됐다. 이제 또 다시, 550만 호남인들을 우롱하고 호남고속철도 건설의 본질을 뒤흔든다면, 누가 그 결정을 이해하고 따를 것인지 묻고 싶다. 정치는 신뢰가 기본이며, 국가정책은 일시적인 변덕이나 주장에 흔들리지 않고 그 뿌리가 단단해야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호남고속철도는 호남권의 발전과 미래를 담보한 하나의 디딤돌이다. 그 희망과 기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울러 한 번 세운 기본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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